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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갔다온 보은과 대전 나들이...~~
(보은 삼년산성,
대전 동춘당, 송애당, 법동 석장승)
◈ 1. 삼년산성을 찾아가다.
2003년 11월 9일 일요일, 필자는 보은 땅에 있는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찾아 길을 떠났다.
체성(體城)이 비교적 잘남아있는 삼년산성의 자태를 직접 보고 싶었고, 충북 내륙지역의 늦가을 농촌풍경도 보고
싶고 해서 그렇게 떠난 것이다.
서울남부터미널(서초동)에서 20~40분 간격으로 있는 보은,상주 행 새서울고속 직행버스(9:00발)를 타고 2시간 40분을
달려 속리산(俗離山)의 입구이자 보은군(報恩郡)의 중심인 보은읍(報恩邑)에 도착했다. (11:40분)
충북 내륙지역에 자리잡은 조용한 고을 보은(報恩).. 그러나 이곳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리듯 비슷한 내용의
현수막이 읍내 곳곳에 걸려있었다. 그 현수막은 모회사의 화학공장 유치를 반대하는 군민(郡民)들의 민심이 담겨
있는데 어떤 현수막에는 '화학공장을 설치하면 보은이 북한의 공격대상 1호가 된다'는
의미심장한 내용도 쓰여있었다.
그만큼 화학공장 유치에 대한 군민들의 반감(反感)이 거세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구(文句)가 아닐까 싶다.
최근 경북 울진(蔚珍)과 전북 부안(扶安)이 핵폐기물처리장 유치 때문에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었는데, 보은 땅도
그런 분위기에
휩싸이는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이럴 때는 진짜 우리나라의 좁고 좁은 강토가 한스러울 뿐이다.
보은읍내에서 동쪽(속리산,상주방면)을 바라보면 산자락에 하얀 피부를 가진 잘생긴 성(城)이 눈에 띄는데 그 성이
바로 그
유명한 삼년산성(三年山城)이다. 내가 오기 하루 전에 삼년산성에서 축제를 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말해주듯
시내
곳곳에 삼년산성 축제 관련 안내문이 붙여 있었다. 쩝 하루 일찍 올껄..
읍내에서 속리산 방면 25번 국도를 따라 1.5km정도 가면 삼년산성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이정표를 따라
보은상고(商高)를 지나면 평범한 시골마을이 하나 나오는데, 마을의 분위기는 대체로 조용하다. 간혹 낙엽을 태우고
있는
노공(老公)들을 볼 수 있었는데 낙엽 태우는 냄새는 은근히 향기가 있다. 늦가을 농촌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
마을을 지나면 산성으로 올라가는 1차선 크기의 오솔길이 나온다. 산을 의지하여 살고 있는 나무들은 거추장스러운
잎들을 모두
땅바닥에 떨구고, 슬슬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고, 낙엽들은 1년여에 인생을 마감하고 조용히 흙과 동화
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몇 십년 후에는 저렇게 되겠구나 싶은 처량한 생각이 문득 난다.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쩝..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면 삼년산성의 서문터가 나를 맞이한다. 현재 서문(西門)은
없으며, 대신 통로가
뚫려있다. 서문터 남쪽에는 근래에 복원된 체성(體城)이, 북쪽에는 복원되지 않은 옛 모습을 간직한 체성이 길게
늘어서 있다.
여기서 잠깐 삼년산성의 대해 살펴본다면..
♣ 2.
삼년산성에 대하여..
① 16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산성 - 삼년산성
삼년산성(三年山城)은 보은읍에서 동쪽(속리산,상주방면)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오정산(烏頂山, 해발 325m)자락에
자리잡은 오래된 산성(山城)이다. (* 삼년산성의 별칭으로는 오정산성,오항산성등이 있음)
이 성(城)은 신라 제20대 자비왕(慈悲王) 13년(470년)에 축성(築城)했는데, 축성(築城)한지 3년 만에 완성했다고
해서 삼년산성(三年山城)이라 부르게 되었다.
성을 쌓는데 소요된 인원과 축성경비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성의 웅장한 규모나 축성기간이 3년이나 걸렸다는
내용으로 짐작해 볼 때 아마도 연인원 수만명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축성경비는 신라정부와 지방토착세력들이 적당히
나눠서
처리했을 것이다.
<* 이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제3권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자비왕)조에 나와있다>
② 신라의 대백제전선(對百濟戰線) - 삼년산성
신라(新羅)가 이곳에 삼년산성을 축성한 이유는 이곳이 신라의 최서방전선으로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아주 적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4년), 신라의 일방적인 나제동맹(羅濟同盟) 파기에 격분한
백제 성왕(聖王)이 신라의 관산성
(管山城, 충북 옥천의 구진벼루)를 공격했는데, 이때 삼년산성에 주둔하던
신라군이 백제군의 뒤를 기습(奇襲)하여
성왕(聖王)을 살해하고 백제의 3만대군을 붕괴시켰으며, 660년(신라 무열왕 6년)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무열왕이
이곳에서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맞이하였다. 이때 왕문도가
무열왕께 당나라 왕 이치(고종)가 보낸
선물과 국서
(國書)를 바치려고 하는 찰라 갑자기 심장마비로 보이는 병에 걸려 급사(急死)했다고 한다.
③ 고려와 후백제의 격전지 그러나 그 이후 잊혀진 존재가 된 삼년산성
고려와 후백제가 치열하게 맞짱을 뜨던 920년대 후반,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삼년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삼년산성을 공격했으나 견훤(甄萱)의 후백제군에게 패배하였다.
고려의 삼국통일 이후부터 삼년산성은 역사기록에 거의 나오지 않는 무명(無名)의 존재로 전락하여 지금에 이른다. 그 덕분인지 성(城)은
1600년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다.
④ 삼년산성의 규모와 현재 상태
이 성의 둘레는 1.68km, 높이는 3m ~ 13m까지 다양하며, 폭은 5~8m이다.
성벽의 축성방법을 보면 안팎을 모두 돌로 쌓아 수직에 가까운 벽을 이루고 있으며 전형적인 협축(夾築)의 공법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성벽의 내부까지도 토사(土砂)를 사용하지 않고 돌로만 쌓아 견고하게 만들었다.
삼국시대에 쌓여진 성(城)중에서 제일 보존상태가 좋으며 문루와 기타 시설 등은 오래전에 없어졌지만 성의 몸뚱이인
체성(體城)은 오래된 성임에도 불구하고 잘 남아있어 신라인들의 우수한 축성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서문과 북문, 동문, 남문에는 문터의 흔적이 있으며, 체성 곳곳에 치성(雉城)으로 보이는 돌출된 부분이 있으며,
성내(城內)에는 현재(2003년 11월현재)
우물터와 아미지라 불리는 연못유적을 발굴하고 있다.
그리고 성내(城內)에서 삼국,고려,조선시대등 다양한 시대(時代)의 토기파편이 출토되어 이 성이 조선시대 때 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삼년산성은 현재 사적 235호로 지정되었다.
⑤ 삼년산성 찾아가기
1. 승용차 : (경부고속도로, 청주시내 기준)
① 경부고속도로 → 옥천나들목 → 보은방면 37번국도 → 보은읍내 → 속리산,상주 방면 5,37번국도 →
삼년산성입구 표시판을 따라 우회전 → 삼년산성
② 청주시내
→ 남일,가덕,보은
방면 25번국도
→ 남일,가덕,회북 → 보은읍내
→ 속리산,상주 방면 5,37번국도 →
삼년산성입구 표시판을 따라 우회전 → 삼년산성
2. 대중교통 : (* 서울,청주,대전,상주 기준이며 2003년 12월
기준)
① 서울남부터미널,청주가경동 → 보은,상주 방면 직행버스 이용(20~40분간격, 9900원), 보은터미널에서 삼년산성
아래까지 택시 이용, 5분 소요, 또는 도보 20분.
② 대전동부터미널이나 옥천,상주에서 보은방면 직행버스 이용(20~40분 간격), 보은터미널에서 삼년산성 아래까지
택시 이용, 5분 소요, 또는 도보 20분.
▲ 삼년산성의 모습 - 서문터 남쪽의 성벽으로 근래에 복원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거의 대부분 5~10m에 이르므로
추락에 주의할 것.
♣ 3. 삼년산성 둘러보기
서문터를 지나 성내(城內)로 들어서니 삼년산성을 알리는 안내문이
니를 맞이한다. 안내문에 쓰인 내용은 위에 다
나와있으므로 생략...
안내판 오른쪽 바위에는 峨嵋地(아미지, 한자 틀릴 수 있음)라고 쓰인 각자가 희미하게 보이는데
그 글씨는 신라후기
명필(名筆)인 김생(金生)이 쓴 것이라고 한다. 물론 100% 사실은 아니겠지만 보은이 충주 땅과 가까운 위치로 볼 때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서문터 남쪽에는 근래에 복원된 성벽(체성)이 하얀 피부를 뽐내고 있는데, 서문터 남쪽 성벽 몇백m를 제외한 나머지
성벽(체성)은 1600년의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필자는 1.7km의 성곽을 한바퀴 둘러보기로 하고 북문터로
향했다. 북문터로 향하는 성곽은 서문터 남쪽 성곽처럼
복원이 안된 상태이나 체성(體城)의 보존상태는 그런데로 좋은편이다. 그렇지만 경사가 가파른지라 올라가는데
좀 고생을 하였다.
가파른 성곽을 5분 정도 올라가니 평평한 부분이 나타난다. 여기에 이르니 가까이에
보은읍부터 멀리 속리산까지
한눈에 보인다. 산성을 중심으로 사방(四方)이 훤히 트여 전망도 좋고, 이런 곳에 산성(山城)을 쌓아두면 수비하기도
좋고, 적의 동태도 쉽게 살펴볼 수 있고, 과연 군사적 요충지로써 손색이 없다. 게다가 성곽의 높이도 엄청나니
이런 곳이야 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평평한 부분을 지나면 약간 경사가 있는 내리막길이 나오는데, 전날 비가 온 관계로 성곽이 좀 미끄럽다.
이런데서 잘못 미끄러지면 성 밖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여 북문터로
내려왔다.
(성곽의 높이가 엄청난데다가 성밖 산의 경사도 장난 아님)
북문터 역시 홍예와 문루는 없고 그냥 터만 남아있으며, 북문터 양쪽으로 오래된 성곽이 이어져 있을 뿐이다.
북문터에서 성내(城內)를 바라보니 울창한 산림(山林)속에 집이 한 채 보이는군. 그 주변으로는 발굴작업이 열심히
진행 중인지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북문터를 지나니 성곽의 보존을 위해 성곽길을 통제하니 아랫길을 이용할 것을 권하는 안내판이
필자를 가로막는다.
그래서 성아랫길로 방향을 돌려서 동문터로 이동하였다.
성아랫길은 나무에서 떨어진 알록달록한 낙엽(落葉)들로 뒤덮여 있는데 간만에 낙엽을 이리저리 밟아보면서 걸으니
가을분위기가 나는군.. 물론 10월25일 서울 성북동에서도 가을의 정취를 즐겼으나 여기만은 못하다.
그런데 낙엽이 모두 물을 먹은지라 촉감이 별로 좋지 못하군.. 마치 세탁중인 이불을 밟는 기분일까..
북문터에서 동문터로 가는 길은 제법 평탄하다. 그냥 산책한다는 기분이 들 정도인데, 동문터 역시 서문터와
마찬가지로 문이 있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더 이상도 없었다,
동문터를 지나 성곽 총길이의 1/4를 더 가면 남문의 흔적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다시 성곽길로 방향을 돌렸다.
남문터와 서문터 중간 부분에는 옛 성곽과 근래에 복원된 성곽이 만나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1600년의
오랜 성벽 대신 근래에 복원된 하얀 성벽이 시작된다.
아직 삼년산성의 복원사업은 이정도 밖에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복원사업이 끝나면 지금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아직 성의 복원작업이 서문에서 남문방향 일부로 제한되어 있고, 겨우 체성(體城)과
약간 튀어나온 치성(雉城) 몇 개만 복원되었을 뿐이다.
새 성벽을 따라 5분 정도 내려가면 아까전 서문터가 나온다. 이로써 1시간여에 걸친 삼년산성 성밟기는 끝이
난 것 같다.
앞으로 삼년산성이 있었던 1600년의 시간만큼의 이상으로 지금의 웅장한 모습을 고이 간직해주길 바란다.
♣ 4. 보은 → 대전
산성(山城)을
벗어나 어암리 마을로 내려가는 도중 읍내로 빠지는 지름길을 발견, 그 길을 통해 보은읍내로 들어섰다.
읍내로 향하는 도중 어암리에 있다는 천연기념물 104호로 지정된
백송(白松)을 보고자 했으나,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고, 마을주민들도 거의 보이질 않아서 그냥 읍내로 와버렸다.
아까전 삼년산성으로 갔을 때 코스는 '보은터미널→속리산방면 25번국도→보은상고입구→보은상고→마을→삼년산성,
25분 소요' 이었지만 읍내로 나올 때는 '삼년산성→마을(아까 마을과는
다름)→우회국도공사현장 굴다리→보은초교(?)
→보은터미널(20분소요)' 코스로 나왔는데 후자가 전자보다 더 직선이고 소요시간도 5분 이상 절약된다.
보은터미널에 도착하여 어디로 갈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보은에 왔으니 오랜만에 법주사(法住寺)나
구경할까.
아니면 상주와 가까우니 상주(尙州)로 넘어갈까, 아니면 청주(淸州)로 넘어갈까. 등등.. 버스시간표를
보면서 어디가
좋을까? 이리저리 최선의 답을 찾아보았으나 쉽게 결론이 나오질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곳이 있으니 바로 우리나라의 6번째 대도시인 대전(大田)이다. 갑자기 대전 송촌동에 있는
동춘당(同春堂)이 보고싶은지라 대전으로 결정을 보고 대전행 버스표를 구입(중고생
3100원, 일반요금 4300원)
15시 20분에 옥천 경유 대전동부터미널로 가는 충북교통 직행버스를 탔다. 타는 사람은 3명도 안되던데..
버스는 15:20분에 보은을 출발 금강상류에 장계국민관광지, 옥천터미널을 지나 16:20분에 대전동부터미널에
도착했다. 1년만에 와보는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별로 변한게 없는 듯 하다..
대전동부터미널 건너편에서 송촌동 가는 대전시내버스 850번(혜천대학↔읍내동,대한통운마트)을
타고 비래동을 지나
동춘당 4거리에서 하차하여 공원으로 꾸며진 동춘당공원으로 들어갔다.
♣ 5. 대전도심 속에 자리잡은 옛 선비의 유적 동춘당(同春堂)
① 대전에도 이런
곳이?
대전(大田)은 한밭이란 지명이 한자화 되면서 생긴 이름으로 지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학의 도시, 엑스포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 6번째 대도시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대전의 역사는 별로 오래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그냥 한밭이라 불리는 벌판이었다. 이런 곳에 무슨 문화유적이
있겠는가'등으로 말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대전지역에는 조선시대 때 회덕현(懷德縣,
지금의 회덕지역)과 진잠현(鎭岑, 지금의
진잠,
가수원 지역)이란 두 개의 고을이 있었다.
그리고 대전 송촌동,비래동,가양동,탄방동 지역에는 조선시대 유명 관리들과 선비들(송시열,송준길,박팽년,권득기,김경여,
송규렴,김상헌...)의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대전지역의 역사가 결코 짧지
않음을 보여준다. 거기다가 계족산성,
보문산성,보문산 마애불,비래동 고인돌,둔산신도시에 있는 선사유적들을 보면 대전의 깊고 깊은 역사를 헤아릴 수가
있다.
아무래도 대전이 과학의 도시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대전의 유구한 역사와 그 흔적들이 빛을 못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② 동춘당(同春堂)을 세운 동춘당 송준길..
동춘당은 조선 효종(孝宗) 때 대사헌(大司憲),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
선생의 별당(別堂)으로 집 이름을 자신의 호(號)를 따서 '동춘당'이라 하였다.
송준길 선생은 본관은 은진(恩津, 논산).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며, 사망한 이후에 내려진 시호
(諡號)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24년(인조 1년)에
진사(進仕)로서 세마(洗馬, 정9품)
에 임명된 적이 있으나 이를 사양했으며, 1649년(효종 원년)에 집의(執義, 사헌부에 소속된 종3품)로 기용되었다.
그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이완(李浣) 등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畵, 병자호란에 수치를 갚고 여진족의 청나라를
때려잡자는 대청(對淸) 정벌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나, 북벌에 반대한 김자점(金自點)등이 청나라에 이를 알리자
관직에서 물러나 회덕(대전의 회덕)으로 낙향하여 별당인 동춘당을 세웠다.
그 이후 다시 컴백하여 대사헌(大司憲),병조판서(兵曹判書),우참찬(右參贊)등을 지냈으며 사망한 이후 영의정(領議政)
이 추증(追增)되고 문묘(文廟, 서울 성균관 내에 유명 유학자의 위패를 모신 건물)에 배향되었다.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서인(西人)세력에서 활동했으며, 현종 때 자의대비(慈懿大妃, 인조의 계비인
장열왕후)의
복상문제(服喪問題, 인종의 계비인 장열왕후의 상(喪)을 1년으로 할것인가? 3년으로 할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인
사건) 때 3년상을 주장한 남인(南人)세력의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제(朞年制: 만 1년)를 관철시켰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예학(禮學)에 밝고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학설을 지지했으며,
그의 저서로는 문집(文集) '동춘당집(同春堂集)'과 '어록해(語錄解)'가 있고, 글씨로는 부산 안락동 충렬사에 있는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등이 있다.
③ 유학자의 검소함이 반영된
동춘당(同春堂, 보물 209호), 그 뒤에 있는 동춘고택..
동춘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별당으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선비답게 집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규모는 작고
아담한 편이며 건물 주위에는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건물의 오른쪽 4칸이 대청이 되고 왼쪽 2칸이 온돌방인데
앞에는 쪽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의 벽 아래 부분에는 머름을 대었다. 건물을 받치는 주춧돌은 사각형의 귀가 큰
초석을 사용했는데, 이런 양식은 조선 후기 가옥(家屋)에서 많이 나타난다.
동춘당 전면에 걸려있는 현판은 그의 벗이라 할 수 있는 송시열(宋時烈)선생이 써 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송시열
선생도 김자점의 꼬락서니를 보기 싫어서 대전으로 낙향, 지금의 대전역 부근인 소제동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벗인
송준길이
소제동에서 10리 이내 거리인 송촌동에 별당을 지어 은거하니 같은 동네에 사는 정치적,개인적
벗으로써
현판을
써주었을 것이다.
동춘당을 보면 대개 아담하고 어떻게 보면 좀 초라하다. 물론 건물 뒤에 그의 후손들의 집이 있지만.
집이 조그만 이유는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서 몸소 검소함과 절약정신을 실천하던 버릇 때문으로 선비들의 이런 정신은
오늘날 과소비를 일삼는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비들의 이런 짠돌이 정신으로 인해 조선시대 상업(商業)
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으며, 16세기 이후 천천히 상업이 발전하면서 화폐경제체제로 발전,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
맹아론(萌芽論)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동춘당으로 들어서는 문은 2개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1개는 앞에 나머지 1개는 뒤에 있는데 뒷문은 그의 고택(古宅)
으로 통하며, 앞문은 공원쪽으로 통한다. 특히 앞문으로 통하는 길은 양쪽으로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데,
마치 옛 시골길을 걷는 듯한 오묘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담장사이에 길을 통해 앞문으로 들어서면 아담한 동춘당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당(堂) 내(內)에는 아무것도 없다.
동춘당을 우회하여 뒷문으로 나가면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공터 뒤에 송준길 선생의 고택(古宅)이
자리잡고 있다.
동춘당은 그 고택에 속한 별당(別堂)으로 보면 될 것이다. 송준길 선생의 전용 서재(書齋)정도로 보면 될듯 싶군..
고택 앞 공터에는 야외 식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잔치국수가 주메뉴인지 '잔치국수'만 팔고 있었다. 그런데
손님은 하나도 없고, 몇몇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잡담을 하고 있었다. 이 야외식당은 아마 고택에 사는 동춘당의
후손들이 운영하는 식당인 듯 싶다.
공터 뒤에 자리잡은 동춘고택은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거쳐하던 곳으로
고택 내에는 사랑채
(남자들의 공간), 안채(여자들의 공간), 가묘(家廟,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사당)와 별묘(別廟)등이 들어서 있다.
현재 동춘 고택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어 관람은 어렵다. 필자 역시 고택에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 외부만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동춘선생고택은 대전지방유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중기 전형적인 양반가(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동춘당(보물 209호) - 동춘선생의 별당(別堂)으로 집의 규모는
작고 아담하다. 동춘당 뒤에 동춘선생의 고택이 있으며, 그 뒤에
현대화의 상징인 아파트단지(송촌동 선비마을단지)가 들어서 있다.
◀ 동춘선생고택(대전지방유형문화재 3호) - 동춘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거쳐하던 집으로 가묘,별묘,안채,사랑채들을 갖추고 있는 조선중기 전형적인
양반가(家)이다. 현재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④ 동춘선생의 2째 손자가 분가하여 세운 송용억씨 가옥..
동춘고택 뒤에는 나무로 우거진 조그만 야산이 자리잡고 있다. 예전에는 성재산과 계족산(鷄足山)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송촌동 선비마을 아파트단지가 그 중간에 들어섬에 따라 산줄기가 중간에 막혀버렸다.
그래서 아파트 단지에 둘러쌓인 조그만 뒷동산 신세가 되어버렸으며, 야산 곳곳에 산책로가 깔려져 있어, 부근
아파트 주민들의 산책,나들이 코스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아무리 소중한 문화유적이라도 현대인들에 입맛에 맞게
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공원화 하여 많은 시민들이 찾아오는 휴식처로 만드는 것. 주변을 어느정도
손을 봐서 국내,국제적인 관광지로 만드는 것도 그 예일 것이다.
동춘당은 그 전자에 속하는 예라 볼 수 있는데. 물론 공원화,개발이란 미명아래 문화유적을 파괴하는 것은 당연
안된다.
동춘고택에서 송용억 가옥(家屋)으로 가다보면 제법 큰 연못이 하나 나온다. 연못 내에는 조그만 인공(人工)섬이
자리잡고 있으며, 연못 속에는 물고기 몇 마리가 유유히 헤엄 치고 있었다. 물 위에는 연꽃으로 보이는 식물들이
있는데, 여름에 오면 화사한 연꽃(蓮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연못을 지나면 오래된 한옥(韓屋)이 하나 나오니 이 집이 바로 송용억 가옥(家屋)이다.
송용억은 현재 가옥의 주인으로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후손이 되는 사람이다.
이 집은 송준길의 2째 손자인 송병하(宋炳夏)가 분가하면서 만들었으며, 현재 그의 11대손이 살고 있다.
집의 구조를 보면 큰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안채, 가묘(家廟)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손들이 살고 있는 관계로
관람은 어렵다. 물론 집주인의 허가를 받으면 관람 할 수는 있다.
현재 송용억 가옥은 대전지방민속자료 2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용억 가옥 앞에는 배드민턴장과 잔디밭 등이 잘 가꾸어져 있는데 마침 휴일인지라 찾아온 시민들로 북적거린다.
이들은 한가로운 휴일 오후를 보내면서 늦가을과의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로써 동춘당 공원 내(內)에 있는 동춘당과 동춘고택, 송용억 가옥을 그런데로 다 둘러보았다.
⑤ 동춘당 공원 찾아가기..
대전역에서 대전시내버스 310,310-1,813,850번 이용. 선비마을4,5단지나 송촌소방서에서 하차.
대전고속터미널, 동부터미널에서 대전시내버스 850번 이용.
◀ 송용억씨 가옥(대전지방민속자료 2호) - 동춘 선생의 2째 손자인
송병하가 분가하면서 만든 조선 중기 가옥으로 동춘고택에서 동쪽으로
100m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가옥 뒤에는 조그만 야산이 있으며, 가옥
앞에는 공원(公園)이 자리잡고 있어 많은 시민들이 찾아온다.
♣ 6. 송애당과 송애당 김경여
동춘당을 둘러보고 동춘당 4거리에서 송촌소방서를 지나 법동 쪽으로 걷다보면 '쌍청당길'이라는 골목길이 나온다.
그 골목길로 좀 들어가다 보면 주택가 사이에 공원이 하나 있고, 그 가운데에 동춘당과 비슷하게 생긴 한옥(韓屋)이
한 채 나오는데 그 건물이 바로 송애당(松崖堂)이다. 송애당 부근에는 조선초기 유학자
송유(1389∼1446) 선생이
지은 쌍청당(雙淸堂)도 있어 같이 겻드려서 보면 좋을 것이다.
(* 참고로 송유 선생의 호가 '쌍청당'이다. 이 동네 별당들은
하나같이 호를 따라 당호(堂號)를 정한 것이 큰 특징이며 쌍청당을
시작으로 대전 지역의 유학자들이 세운 별당,고택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게 됨)
송애당(松崖堂)은 조선 중기 유학자인 송애당 김경여(松崖堂 金慶餘,
경주김씨
1597∼1653) 선생이 지은 별당(別堂)
으로 '송애(松崖)'라는 이름은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않는 소나무의 곧은 절개와 천길로 높이
우뚝 솟은 절벽의 굳센
기상을 마음에 간직하겠다'는 뜻으로, 김경여 선생의 높은 기개와 충성심을 잘 표현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김경여는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송시열과 송준길을 공격한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고,
송시열과 함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송애당의 구조를 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서 왼쪽 2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이다. 온돌방의 뒷편은
반침(半寢)을 만들었으며, 그 아래는 함실아궁이로 사용하였다. 네모기둥의 민도리집인 송애당 건물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고종 26년(1889)에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송애당 주변으로 높지 않은 담이 설치되어 있고, 집 뒤에는 약간의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김경여 선생의 곧은
절개를 보여주는 듯 하다.
송애당은 현재 대전지방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되어 법동 주민들의 휴식처 노릇을
하고 있으며, 송애당 내(內)에는 현재 아무도 살지 않는다. 이는 동춘당과 비슷하다.
◀ 송애당(대전지방유형문화재 8호) - 송애당 김경여 선생이 세운 별당
(別堂)으로, 송애당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건물의 구조는 작고
아담하여 유학자들의 검소함이 반영되어 있는 듯 하다.
* 송애당 찾아가기..
동춘당 공원에서 법동, 계족로 방면으로 가다가 '쌍청당길'이라 쓰인 골목길로 들어서면 나온다. 부근 주민들에게
문의할 것.
♣ 7. 법동의 오랜 수호신 법동 석장승 (대전지방민속자료 1호)
① 법동 석장승,선돌 세트에 대하여...
송애당을 둘러보고 서쪽으로 가면 계족로(鷄足路)라 불리는 넓은 간선도로가 나온다. 이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대전시내, 북쪽으로 회덕역,신탄진 방면으로 통한다.
계족로를 따라 북쪽으로 좀 걸어가면 법2동사무소(법동우체국)가 나오는데 그 4거리 길가에
돌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석물(石物) 4기가 4차선 도로(동춘당,송촌동 방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면서 서 있는데, 그 석물은 바로
법동을 오랫동안 지켜온 석장승이다. 석장승 옆에 세트(set)로 서 있는 것은
선돌(立石)..
이 석장승,선돌 세트는 원래 법동 법천골 마을 주변을 흐르는 하천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천하대장군, 왼쪽에
지하대장군이 서 있었다고 하며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목(木)장승이었는데 17세기 경에 석장승으로 교체했다고 한다.
이들 석장승과 선돌은 현대화의 물결로 법동 지역이 도시화되자 대덕구청(大德區廳)으로 옮겼다가 몇년 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며, 매년 음력 정월 14일 밤에 산신제(山神祭)를 지내고 바로 장승제를 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지내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법동 동네 축제로 지내지 않을까 싶은데...
② 법동 석장승,선돌의 모습...
석장승과 선돌 세트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마치 견우와 직녀가 서로를 그리워하며 마주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 가운데 도로를 건너가는 사람들은 까치인가?
먼저 길 건너편에 서 있는 석장승을 살펴보면, 이 장승의 성별(性別)은 남자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진짜 남자처럼
생긴 것 같군. 얼굴도 무섭게 생겼고. ㅋㅋㅋ
장승의
얼굴을 보면 눈이 크게 양각되어 있는데, 거의 타원형 모습을 하고 있다.
어두운 밤에 보면 진짜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눈썰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법동의 수호신으로써 악귀(惡鬼)들을 물리치고자 하는 마을 주민들의 소망이
담겨져 있다고 보면 좋을 듯 싶다. 무섭게 만들어야 악귀들이 겁을 먹고 도망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장승의 코는 삼각형이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머리에는 모자같은 것을
쓰고 있다고 나와있는데, 그 모자의 정체는 아직 확실하지가 않다.
◀ 남자 석장승 - 길 건너에 서 있는 여자 석장승을 바라보고 있다.
장승의 몸에는 '天下大將軍(천하대장군)'이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남자 석장승 옆에 우람하게 생긴 길쭉한 돌이 세워져 있는데, 이 돌은 바로 선돌(立石)이다.
선돌은 남성의 성기를 본따서 만든 남근석(男根石)으로
여근석(女根石)과 함께 성기신앙(性器信仰)의 대상이 되어온
원초적인 신앙물이다.
남근석은 다산(多産)을 기원하고 후손들의 번영을 바라는 현세인들의 소망이 담겨져 있으며, 보통 여인네들이
찾아와서 기도를 드리며, 이런 남근석은 우리나라와 전세계 곳곳에 산재하고 있어, 전인류의 공통적인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떄나 지금이나 자손을 쑥쑥 낳고,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같기 때문이다.
남근석은 돌로 만드는 것이 정석(定石)이나 조선시대 들어와서 돌 대신 나무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남근석(선돌)이 장승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우람한 남근석(선돌)을 흐뭇하게 바라보니 삼성산(三聖山, 서울 관악구,금천구와
경기도 안양에 걸쳐있는 산) 삼막사(三幕寺)에 있는 남근석이 생각이 난다. 그
남근석도 엄청 우람했는데, ㅋㅋㅋ
◀ 남자 석장승 옆에 서 있는 입석(남근석) - 남성을 상징하는 우람한
돌로
다산을 기원하는 성기신앙의 대상물이다.
이제 반대편에 있는 장승을 살펴보자.
방금 살펴본 장승이 남자라면 이번 장승은 여자이다. 이는 자연의 이치가 반영된 것으로 어쩌면 당연하다.
여자 석장승은 진짜 여성처럼 생긴 것 같다. 눈 모양은 동그란데 그냥 음각으로 처리했으며, 코는 삼각형이고,
입은 남자 석장승과 마찬가지로 굳게 다물고 있다. 머리에는 모자로 보이는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것은 확실하지가 않다. 얼굴표정은 남자와 달리 대체로 포근해 보인다. 역시 여자 석장승이라서 그런가..
여자
석장승의 몸은 거의 일직선으로 남자 석장승의 몸매보다 단조로우며 몸
가운데에는 '地下大將軍(지하대장군)'이라 쓰인 문신이 새겨져 있다.
◀ 여자 석장승 - 남성 석장승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석장승으로
남자 석장승과 달리 몸매와 얼굴표정이 단조롭다.
여자 석장승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돌은 선돌(立石)이라고
하는데, 아까전 선돌과 달리 이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남근성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여근석도 아니고. ㅋㅋㅋ
안내문에 의하면 이 선돌이 여성을 상징한다고 하며, 또는 여자 석장승을 도와주는 비서라고 하는데, 역시 확실치
는 않다. 내가 봐도 이 선돌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들 석장승, 선돌 세트는 법동을 지켜오던 수호신이자, 다산을 기원하던 대상물로써 옛 조상들의 민속 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적이다. 지금은 길거리에 수석(水石)처럼 놓여져 있고, 차량들이 뿜어대는 매연을
마셔대는 신세가 되었지만 자신을 세워준 법동 주민들을 위해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들 세트는 대전지방민속자료 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여자 석장승 옆에 서 있는 선돌(立石) - 모습이 특이하다,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여자 석장승의 비서용인가 아니면 은근슬쩍 여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가?
③ 법동 석장승 찾아가기..
대전역에서 대전시내버스 724,813번, 대전좌석버스 102,501,702,703번 이용.
대전고속터미널, 동부터미널에서 대전시내버스 724번, 대전좌석버스 102,501,702,703번 이용.
신탄진역에서 대전시내버스 724번, 대전좌석버스 702,703번 이용. 법동(법2동사무소)에서 하차.
♣ 8. 대전→천안→서울
법동 석장승을 둘러보고 부근 정류장에서
대전시내버스 813번(송촌동↔산성동,동물원)을 타고 대전역으로 나왔다.
이제 어느덧 집에 갈 시간이 온 것이다.
삼년산성에서 대전까지 열심히 뛰어다닌지라 무척 시장하군. 게다가 점심도 못먹었으니, 마침 대전역 부근 시장에
유명한 설렁탕집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으나 식당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군. 원래부터 몰랐던 것 같다.
어쨌든 시장으로 들어가보면 나오겠지 싶어서 그냥 무작정 시장으로 들어갔다.
시장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닌 끝에 설렁탕집이 몰려있는 시장 골목을 발견, 그중 괜찮아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서
설렁탕을 먹었는데, 고기도 많고, 그런데로 먹을만하다. 가격은 4000원. (18:20분)
저녁을 먹은 이후 이동 경로.. (간략하게)
① 대전역→천안역
- 대전역을 18:40분에 출발하여 천안으로 가는 통근형 통일호 열차
이용, 운임은 달랑 1800원.
다행히 시간이 맞아서 푹신푹신한 좌석에 다리 쭉 뻗고 잤음. 천안역에는 20시에 도착.
② 천안역에 도착하자 무궁화호 입석으로 서울로 가고자 했으나, 입석요금(4400원)보다
훨씬 저렴한 고속버스를
타기로 하고 도보 15분 거리에 천안터미널까지 걸어갔음.
③ 천안터미널→서울강남고속터미널
- 천안을 20:45분에 출발하는 동양고속
일반고속버스(3800원)를
타고 서울로
갔는데, 차가 막히는지라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그래서 22:20분에 서울강남에 도착했고, 집에는 23시에 도착..
-> 이로써 보은,대전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상편은 2003년 12월 24일에
완성
* 하편은 2003년 12월 30일에
완성
Copyright (C) 2003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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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륵리석불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