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살펴보면,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이해하시고 인정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게 됩니다.
1. 연약한 시몬 베드로를 인정하신 예수님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이 직접 이름도 지어 주셨고 칭찬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도 사랑도 다 잃어버린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죽음이나 감옥이나 어디든지 주님과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는 멀찍이 따라가다가 도망을 쳤습니다.
주님이 심문을 당하고 재판을 받으시는 바로 그 시각에 주님을 변호하기는커녕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닭이 울 때... 그제서야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 이후로 베드로는 나름대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를 했지만 주님을 부인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충성도 믿음도 사랑도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두 세 번 만나 뵈었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다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주님의 제자 될 자격이 없는 놈이야! 내가 주님의 제자로 다시 나선다면 주님을 더욱 크게 망신이나 시키고 말 놈이야! 나는 별수 없이 어부 노릇이나 해야 맞아!" 베드로는 이렇게 실패와 좌절로 자포자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서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하는 일도 안되는 법입니다. 한 마리도 고기를 못잡았습니다.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모두 상실한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배반자, 실패자 베드로를 주님은 넓은 사랑의 마음으로 안아 주셨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고 그물을 걷어 올리는 새벽녘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찾아 오셨을까요?...
주님은 언제나 실패자, 절망에 빠져 낙담에 빠진 자, 슬픔과 괴로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자를 찾아오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픔과 슬픔..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5절 말씀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체휼’이라는 말은 주님이 다 공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긍휼하신 사랑으로 자비의 손길을 내미시고 계신 것을 체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온갖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얼굴에 침을 뱉았고 뺨을 때렸고 채찍으로 내려쳤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채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셨고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가 쓰러져 있을 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손을 보이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손은 모든 인간의 고통을 감내하신 손... 체휼하신 주님이시기에.... 이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연약한 자... 고통 당하는 자... 자신의 한계로 인하여 심적인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사람에게… 주님은 자비의 손을 보이시며 우리를 보듬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의 손을 붙들려 할 때.. 주님은 우리를 강하게 붙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손을 붙들 때 그 손길은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힘을 발하는 손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5:6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자비의 손을 내어 미실 때... 그 손길을 의지하므로 주의 능력을 경험하는 복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상실한 도마를 찾아 오셨고... 실의에 빠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찾아 오셨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상실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시간에도 주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믿음의 회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회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회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주님이 찾아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를 찾아 오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베드로의 본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시몬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은 베드로의 원래 이름이었습니다. 시몬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갈대’라는 뜻입니다. 갈대는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이리 저리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베드로’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비 바람이 불어도 폭풍이 몰아쳐도 바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큰 바위, 반석의 베드로가 되었지만 여전히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큰소리를 쳤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리는 갈대... 시몬이었습니다.
실패자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왜 나를 부인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네가 왜 나를 버리고, 고기 잡으러 여기를 왔느냐?"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실수와 잘못을 지적하시는 책망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실패자 베드로에게 주님이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책망이 아니라 사랑의 확인이었습니다. 사랑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시몬아, 지금도 나를 사랑하지?..." 이런 애타는 사랑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질문 가운데서 자기를 향하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고 그의 실패를 회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자주 확인하고 싶어하는 말이 뭡니까?... “자기 나 사랑해?" 그런 말입니다. 사랑의 확인입니다.
주님도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사랑은 원어를 보니까 ‘아가파스’란 말이었습니다. ‘아가파스 메’ 라는 말은 “너는 나를 세상에서 최고로 사랑하지? 나를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지?" 그런 말입니다.
흔들리는 갈대 시몬... 실패자요 배반자였지만 주님은 그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런 주님의 질문 속에서.... 베드로는 자기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 주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아직도 나를 인정해 주시는구나!”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의 모습을 새롭게 회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가까운 사람, 더 친한 사람일수록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몰라줘도.... 내 남편, 내 아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인정하고, 사랑할 때... 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도가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좌절이나 절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어린 연인들도 피차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다짐할 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사랑을 확인할 때... 지옥의 권세도 우리를 좌절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을 받을 때 사랑이 회복되는 법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가슴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뜨겁게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느 한편에서만 받거나 어느 한편에서만 주는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쌍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서로 주고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사랑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뜨거웁게 일어났습니다. 자기의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사랑이 밖으로 표출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떨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옛날처럼 자신만만하게... “죽을지언정 제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큰소리를 친 것이 아니라....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렇습니다.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베드로의 믿음과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믿음과 사랑을 소유하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믿음과 사랑을 새롭게 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는 분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부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불순종한 요나의 연약함을 인정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포기하고 다시스로 향하던 요나는 사실 쓰레기와 같이 전혀 쓸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쳐서 같은 배에 타고 가던 사람들을 하마터면 죽도록 하는 그 배에서 사라지는 것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에서 요나를 집어 던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쓰레기통에 던져진 요나를 큰 물고기라는 신학교에 다시 입학시키시고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 뱃속이라는 신학교에서 요나를 훈련을 시키신 후에, 훈련이 마쳐지자 요나를 졸업시키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요나서 2:10절에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그랬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라고 기록했습니다.
요나는 여기서도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찮은 물고기도 하나님이 명령을 내리시니까, 삼켰던 먹이를 내 놓는 일에 순복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명령을 거부하고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나의 물고기 뱃속 훈련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역을 인정하도록 하는 좋은 훈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의 백성으로 살도록 삶과 사역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아서 호흡하고 있지만... 우리가 정말 그 정도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만한 존재들입니까?...
실패자요, 배반자요, 불순종만 하던 나를... 그런데도 우리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는 새 백성으로 삶과 사역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요나서 3: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두 번째... 재차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을 뜻합니다. 다시 부르신 하나님, 다시 기회를 주신 하나님, 다시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 1:12절에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역을 맡기시는 것은... 나를 인정하고 믿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자기에게 큰 해를 끼쳤거나, 혹은 어떤 일에 대해서 크게 망친 사람에게 같은 일을 선뜻 맡기지 않습니다.
“아 그 사람... 지난번에도 그 일을 맡겼다가 완전히 낭패를 보았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그 사람의 과거를 보고 모든 것을 평가해 버립니다.
‘난지도’ 가는 길이 얼마 전까지는 질퍽거리는 길이었지만, 이제 개발이 되면서 전부 아스팔트가 깔렸는데도 “그 길은 질퍽거려!...” 그러면서 인정을 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혹은 신앙의 초기 단계, 혹은 사역의 초기 단계에... 잘 몰라서 실수한 것을 가지고... 끝까지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형편없어!” 그러면서 물고 늘어지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시 믿어 주시는 분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줄행랑 친 요나를 다시 불러 주셨고, 그의 마음을 이해하시고, 그의 실패, 그의 아픔을 다 안아주시고 인정해 주신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이상 기대를 가지시지 않아도, 그리고 어떤 사명을 다시 주시지 않아도 우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요나를 다시 믿어 주시고 인정해 주셨듯이... 오늘 우리도 사랑의 손으로 붙잡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들 다 믿어주고 삶과 사역을 맡겨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는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호흡을 연장시켜 주시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며 나를 믿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주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믿어 주시며 기회를 주시는 것이 없었다면 그는 고기밥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어떤 고기의 밥으로 끝났을지 모르는 인생들이지만 다시금 우리를 믿어주시고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불러주신 하나님은 요나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요나서 3:2절에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그랬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이해하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요나가 사명을 감당하자, 왕을 비롯하여 모든 니느웨 성의 백성들이 회개했습니다.
베드로가 사명을 감당하자 한번에 5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베드로는 충성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