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년전에 글쓴이가 출입하던 사정(대구 팔공정) 카페에 올렸던 것이다.
국궁신문 카페에 가입하면서 우선 함께 올려둔다.
말미에 적은 바처럼 가벼운 상념의 조각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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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손에 대해 근래 온깍지와 반깍지 등의 구분과 성격을 두고 여러 말이 있는 듯하다.
온깍지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각지 내는 손을 뒤로 크게 내침을 전통 사법의 정도(正道)로 보는 듯하며 요즘 일반적인 사법인 짧고 흔들림을 최소화한 가벼운 발시(發矢)는 반깍지 또는 이에 준하는 사법(射法)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글쓴이는 30여년 전에 처음 집궁(執弓)했는데 그때는 사실 팔을 뒤로 뿌리쳐 내는 궁도인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고 개성에 따라 다양한 사법이 있겠으나 오늘날처럼 이른바 반깍지 일색은 아니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글쓴이의 단순 추측으로는 근래의 사법 - 화살을 뺨에 대다싶이 붙이고 줌손은 발시 후에도 흔들림을 최소화하며 각지를 살짝 놓는 스타일은 양궁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양궁은 주지하듯 화살 놓는 곳이 고정되고 발시도 가운데 손가락을 셋으로 가볍게 쥐며 활줄은 입술 언저리에 붙여 짧게 당기고 발시는 가볍게 놓아 흔들림을 최소화해 관중율을 높이는 터이다.
사실 각지손을 뒤로 맹열히 낼 경우 활이 흔들리고 적중율이 떨어질 가능성은 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온깍지도 나름의 의미가 깊은 듯하니 궁도계의 고전 ‘조선의 궁술’에 각지손 부분을 살피면 아래 사진1, 2와 같다.
원래 엄지손구락으로 활을 귓가까지 길게 당기는 사법은 주지하듯 몽골리안 계열의 북방 유목민족 전통으로 서양 활의 가운데 손가락 중심의 지중해식 사법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광활한 대륙을 기마(騎馬)족으로 말 달리며 사용하기에는 활체는 짧되 활줄은 최대한 길게 당겨 사거리를 멀리 함이 유용했을 것이다. 동이(東夷)족이라 할 때 夷자는 활궁(弓)자에 클대(大)자의 합성어로 활이 큼을 나타낸다고 하거니와 이때 크다는 것은 활체의 크기를 말함이 아니라 사거리의 장대함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유력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처럼 사거리를 멀리하기 위해서는 발시의 깍지손도 맹열히 뒤로 후리쳐 뽑을 필요가 있었을 터이므로 이른바 온깍지의 전통은 이런 곳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닐까? 위의 ‘조선의 궁술’ 책에서도 ‘방전을 맹열히’ 하라는 것도 이와 연관된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실제 조선 전기에는 과녁 거리가 145미터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장거리도 있었고 멀리 보내는 능력 자체를 채점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니 전래 사법의 전승적 측면에서 두루 음미할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근래 사거리가 조선 후기 이래의 관용(慣用)적 145미터로 고정되고 관중율(貫中率) 위주로 채점되면서 양궁과 같이 정확성을 우선시하는 사법으로 기울어지지 않았을까?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온깍지나 반깍지는 그 자체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할 성질은 아니며 시대 환경과 경기 방식의 차이에서 유래된 사법 적응 갈레로 봄이 타당할 듯하다.
아울러 현하의 활터 환경 하에서 이른바 반깍지 사법이 주류가 됨은 어쩔 수 없겠으나 전래의 온깍지적인 사법 또한 존중되고 그 나름의 장점을 살린 또다른 경기 방식 등도 연구해볼 소지는 있지 않을까 한다.
집궁은 일렀으나 수십년 활을 놓고 지내다 늘그막에 활터에 나와 시위를 당기니 만감이 교차한다.
각지를 만지며 노(老)-신(新) 궁사의 스쳐가는 상념 한조각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