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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살로 가는 길--황룡사 원문보기 글쓴이: 일미심
제1장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연기의 가르침
쌍윳따 니까야:12 니다나 쌍윳따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와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에 대하여 설하리라. 연기란 무엇인가?
①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형성이 있으며,
② 형성이 있기 때문에 의식이 있으며,
③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이름과 모양이 있으며,
④ 이름과 모양이 있기 때문에 여섯 감각기관이 있으며,
⑤ 여섯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접촉이 있으며,
⑥ 접촉이 있기 때문에 느낌이 있으며,
⑦ 느낌이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있으며,
⑧ 갈애가 있기 때문에 집착이 있으며,
⑨ 집착이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으며,
10.존재가 있기 때문에 태어남이 있으며,
11.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12.늙음, 죽음, 슬픔, 한탄, 고통, 불쾌, 절망이 있다.
이와 같이 해서 괴로움의 전체 덩어리가 일어난다. 이것을 연기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음이 없으면 형성이 없으며,
형성이 없으면 의식이 없으며,
의식이 없으면 이름과 모양이 없으며,
이름과 모양이 없으면 여섯 감각기관이 없으며,
여섯 감각기관이 없으면 접촉이 없으며,
접촉이 없으면 느낌이 없으며,
느낌이 없으면 갈애가 없으며,
갈애가 없으면 집착이 없으며.
집착이 없으면 존재가 없으며,
존재가 없으면 태어남이 없으며.
태어남이 없으면
늙고 죽음,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없다.
이와 같이 해서 괴로움의 전체 덩어리가 소멸한다.”
12연기의 자세한 설명
쌍윳따 니까야:12 니다나 쌍윳따 2
사와티에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대들에게 연기의 가르침을 자세하게 분석해 보이겠다.
① 늙음과 죽음 : 무엇이 늙음과 죽음인가? 여러 가지 존재하는 것들이 노쇠하고 이가 빠지고 머리는 백발이 되고 피부는 주름지고 원기가 줄어들고 감각기관이 퇴화한다. 이것은 늙음이라 한다. 여러 가지 존재하는 것들이 사망하고 죽고 오온이 흩어지고 버려지고 흩어지고 그리고 사라진다. 이것이 죽음이라 한다.
② 태어남 : 무엇이 태어남인가? 여러 가지 존재하는 것들이 잉태하여 태어나서 오온이 나타나고 감각기관들이 생기는 것을 태어남이라 한다.
③ 존재 : 무엇이 존재인가? 세 가지 종류의 존재가 있다. 감각의 존재, 형상의 존재, 무형상의 존재가 있다. 이것을 존재라 한다.
④ 집착 : 무엇이 집착인가? 네 가지 종류의 집착이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규율이나 제식. 관례. 의식에 대한 집착,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을 집착이라 한다.
⑤ 갈애 : 무엇이 갈애인가? 여섯 가지 그룹의 갈애가 있다. 보이는 형상에 대한 길애, 들리는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촉감에 대한 갈애, 마음이 바깥 현상을 접촉했을 때의 갈애가 있다. 이것이 갈애이다.
⑥ 느낌 : 무엇이 느낌인가? 여섯 가지 그룹의 느낌이 있다. 눈에 보이는 느낌, 귀에 들리는 느낌, 코에 의한 냄새의 느낌, 혀에 의한 맛의 느낌, 몸에 의한 만져지는 느낌, 마음에 의한 의식하는 느낌이다. 이것을 느낌이라 한다.
⑦ 접촉 : 무엇이 접촉인가? 여섯 가지 그룹의 접촉이 있다. 눈의 접촉, 귀의 접촉, 코의 접촉, 혀의 접촉, 몸의 접촉, 마음의 접촉이 있다. 이것을 접촉이라 한다.
⑧ 여섯 감각기관 : 무엇이 여섯 감각기관인가? 눈의 감각, 귀의 감각, 코의 감각, 혀의 감각, 몸의 감각, 마음의 감각이다. 이것이 여섯 감각기관이다.
⑨ 이름과 모양 : 무엇이 이름과 모양인가?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주의집중을 이름이라 한다. 네 가지 큰 요소[지수화풍]와 이 네 가지 큰 요소에서 온 모양, 이것을 모양이야 한다. 이것이 이름과 모양이다.
10. 의식 : 무엇이 의식인가? 여섯 가지 그룹의 의식이 있다. 눈으로 보고 의식이 일어남, 귀로 듣고 의식이 일어남, 몸으로 닿아 의식이 일어남, 마음으로 느끼어 의식이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이라 한다.
11. 형성 : 무엇이 형성인가? 세 가지 종류의 형성이 있다. 행동의 형성, 말의 형성, 생각의 형성이다. 이것을 형성이라 한다.
12.어리석음 : 무엇이 어리석음인가?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리석음이라 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쌍윳따 :12 니다나 쌍윳따 41
아나타삔다까 장자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지혜로써 철저하게 꿰뚫어 보고 선명하게 보는 훌륭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장자여, 나의 거룩한 제자들은 연기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이와 같이 살핍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이 연기의 도리가 바로 나의 거룩한 제자가 진리를 철저하게 꿰뚫어 보고 선명하게 보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중도(中道)와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쌍윳따 니까야:56 삿짜 쌍윳따11(1편3장62쪽에 있음)
여덟 가지 바른길(八正道:가장 중요한 한 불교윤리의 가르침)
쌍윳따 니까야:45 막가 쌍윳따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게 계셨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가르치셨다.
“그대들에게 ‘여덟 가지 거룩한 길’에 대하여 그것을 분석해 보이겠다. 무엇이 여덟 가지의 거룩한 길인가?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①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근원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
② 무엇이 바른 생각인가? 악을 행하지 않으려는 생각, 남을 해치지 않으려는 생각을 말한다.
③ 무엇이 바른 말인가? 거짓말하지 않고 이간질하지 않고, 악담하지 않고 잡담(쓸데없는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④ 무엇이 바른 행동인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⑤무엇이 바른 생활 수단인가? 잘못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고 바른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⑥ 무엇이 자른 정진인가? 악한 생각이 장차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악한 생각을 버리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선한 생각을 일으키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선한 생각을 더욱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는 것이다.
⑦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인가? 열성적으로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세상에 대한 탐욕과 낙담을 버리고, [무상하고, 불완전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몸을 몸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느낌을 느낌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마음을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담마를 담마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머문다.
⑧ 무엇이 바른 집중인가? 감각적 쾌락과 바람직하지 못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사유와 숙고가 있으며 홀로 명상함에서 오는 환희와 기쁨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머문다, 사유와 숙고를 멈추고 안으로의 평온함과 기쁨이 있는 두 번째 성정에 머문다.
환희가 사라진 후 평정한 마음과 분명한 알아차림과 육신의 행복을 느끼며 머문다,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평정과 마음챙김에 머무는 사람은 행복하게 머문다.’고 하는 세 번째 선정에 머문다. 고통도 쾌락도 버리고 전에 있던 행복도 불행도 버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에 의하여 도달한 마음 챙김의 순수함이 있는 네 번째 선정에 머문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
쌍윳따 니까야:14 다뚜 쌍윳따:12
어느 때 부처님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감각적 욕망, 악한 생각, 해치려는 생각은 원인이 있지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것들이 일어나는가? 악한 생각에 의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잘못된 행동을 한다. 감각적 욕망과 해치려는 생각에 의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잘못된 행동을 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활활 타는 횃불을 마른풀의 정글에 떨어뜨렸다고 할 때, 만일 재빨리 손발로 불을 끄지 않으면 풀에 살고 있는 생물들과 나무들은 재난을 만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옳지 않은 생각을 재 빨리 내버리지 않고 흔적조차 없애지 않고 완전히 말살시키지 않으면, 그는 이 세상을 괴로움과 절망을 가지고 고통 속에서 살게 된다. 또한 죽은 후에도 나쁜 곳에 가게 된다.
자비로운 생각, 친절한 생각도 또한 원인이 있지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것들이 일어나는가? 자비로운 생각에 의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바르게 행한다. 친절한 생각에 의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바른 행동을 한다.
마치 어떤 사람은 활활 타는 횃불을 마른풀의 정글에 떨어뜨렸다고 할 때, 만일 재빨리 손발로 불을 끄면 풀에 살고 잇는 생물들과 나무들은 재난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옳지 않은 생각을 재빨리 내버리고, 흔적초차 없애고, 완전히 말살시키면, 괴로움과 절망이 없으며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게 된다.”
오온의 무상
쌍윳따 니까야:18 라훌라 쌍윳따 1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라훌라야,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부처님.”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행복한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 자신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가?”
“옳지 않습니다.”
“느낌은, 지각은, 형성은,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행복한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들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 자신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옳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무상한 줄 알기 때문에 잘 배운 거룩한 제자들은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느낌에 집착하지 않고, 지각, 형성, 의식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욕망에서 벗어난다. 욕망에서 벗어남을 통하여 해탈을 얻는다.
해탈을 얻는 길
쌍윳따 니까야:18 라훌라 쌍윳따 22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라훌라 존자는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부처님,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 육신과 모든 바깥 대상에서 ‘나’ 라든가 ‘나의 라든가 ’헛된 자만심‘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롭고 훌륭한 해탈에 이릅니까?”
“라훌라야, 어떤 종류의 물질이든, 즉 과거.현재.미래 중 어디에 속하든, 밖에 있든 안에 있든,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열등하거나 우수하거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모든 물질들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면,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 자신이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보는 사람은 집착 없는 해탈에 이른다.
어떤 종류의 느낌이든, 어떤 종류의 지각이든, 어떤 종류의 형성이든, 어떤 종류의 의식이든 모두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며,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 자신이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자신을 절제하라
쌍윳따 니까야“20 오빰마 쌍윳따 10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그때 어떤 비구가 지나치게 오랜 시간을 재가의 집에서 보냈다. 그래서 다른 비구들이 그런 사귐을 위해서 너무 오랫동안 머물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래서 비구들은 이 일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여기에 어떤 비구가 마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탁발하러 마을에 간다.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절제하지 않고, 마음챙김에 머물지 않고 감각기관을 절제하지 않을 때,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친 여인을 보게 되면 욕정의 마음이 그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치명적인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훌륭한 제자의 계율에서 죽음이다. 즉 그는 수행을 거부하고 저급한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치명적인 고통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자신을 단련하여야 한다.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절제하고, 마음챙김에 머물고, 감각기관을 절제하고, 마을에 탁발하러 갈 것이다.’라고 다짐하여야 한다.”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 된다.
쌍윳따 니까야:22 칸다 쌍윳따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박가 사람들이 사는 곳인 숭수마라기리의 베사깔라 숲의 사슴동산에 계셨다. 그때 나꿀라삐따장자가 부처님께 와서 인사를 드리고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 저는 노령이고 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늙은이입니다. 육신의 병은 항상 저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시는 부처님이나 비구들을 거의 친견할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 제가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저에게 활기와 안락함을 주십시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장자여, 정말 그렇습니다. 그대의 육신은 쇠약하고 그대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육신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 잠깐 동안의 건강을 건강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나의 몸이 병들어도 나의 마음은 병들지 않으리라.’고 이왕 같이 자신을 단련하여야 합니다,”
나굴라삐따 장자는 기쁘게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사리뿟따 존자에게 갔다. 사리뿟따 존자는 말하였다.
“장자여, 그대의 감관은 고요합니다. 그대의 안색은 깨끗하고 밝습니다. 오늘 부처님 앞에서 가르침을 들었습니까?”
“그렇구말구요, 존자님, 바로 방금 부처님의 감로와 같은 훌륭하신 가르침으로 축성되었습니다.”
“어떤 훌륭한 말씀으로 부처님은 축성하셨습니까?”
이에 장자는 부처님과의 대화내용을 말하니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장자여, 무엇이 몸과 마음이 병드는 것이고, 무엇이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는 것인지 부처님께 여쭈어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로부터 그 뜻을 들으려고 이렇게 멀리서 왔습니다. 존자님이 그 뜻을 선명하게 해 준신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장자여, 무엇이 몸도 병들고 마음도 병드는 것입니까? 가르침을 모르는 범부들은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물질이 항상하지 않고 변하는 본성 때문에 물질이 변하고 바꾸어지면, 그때 슬픔과, 괴로움, 한탄, 절망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몸도 마음도 병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는 것입니까? 가르침을 잘 배운 훌륭한 제자들은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는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물질이 항상하지 않고 변하는 본성 때문에 물질이 변하고 바뀌어져도, 슬픔과 괴로움, 한탄, 절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는 것입니다.”
무상하고 무아인 것은 괴로운 것
쌍윳따 니까야:22 칸다 쌍윳따45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물질[육신]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번뇌에 집착하지 않고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느낌은 무상하다. 지각은 무상하다. 형성은 무상하다. 의식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그의 마음은 번뇌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오온은 무아이므로 집착하지 말라
쌍윳따 니까야:22 칸다 쌍윳따95
[물질의 무더기는 실체가 없다.]
어느 때 부처님은 갠지스 강둑에 있는 아욧자에 계셨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갠지스 강물이 흐름에 따라 거대한 가품 덩어리를 실어 내린다고 하자. 그런데 시력이 좋은 사람은 이것을 관찰해 보고 주의 깊게 조사한다고 하면, 그것은 비어 있고, 실속이 없고, 실체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거품 덩어리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물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잘 관찰해 보고 주의 깊게 조사해 본다면, 물질은 비어 있고, 실속이 없고, 실체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물질의 실체는 무엇인가?
[느낌의 무더기는 실체가 없다.]
가을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 물거품이 일어났다가 물의 표면에서 사라진다고 하자. 그런데 만일 예리한 시력으로 물거품을 잘 관찰해 보고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그것은 비어 있고, 실속이 없고, 실체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물거품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느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잘 관찰해 보고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느낌은 비어 있고, 실속이 없고, 실체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느낌의 실체는 무엇인가?
[지각의 무더기는 실체가 없다.]
늦여름 한낮에 어른거리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고 하자, 그런데 만일 예리한 시력으로 아지랑이를 잘 관찰해 보고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그것은 비어 있고, 실속이 없고 실체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지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잘 관찰해 보고 주의 깊게 조사해 본다면, 지각은 비어 있고, 실속이 없고, 실체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지각의 실체는 무엇인가?
[형성의 무더기는 실체가 없다]
어떤 사람이 단단한 나무심을 찾아서 날카로운 도끼를 가지고 숲으로 갔다고 하자, 그는 꼿꼿하고 새로 자라고 높이 솟은 큰 파초 둥치를 보고는 뿌리를 배어서 대궁을 자르고 한 꺼풀씩 껍질을 벗겨내었다. 그러나 그는 속 안에 부드러운 나무줄기도 발견하지 못하는데 어찌 단단한 나무심을 발견하겠는가
그런데 만일 예리한 시력으로 파초를 잘 관찰해 보고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그것은 비어 있고, 실속이 없고, 실체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파초 둥치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형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잘 관찰해 보고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형성은 비어 있고, 실속이 없고, 실체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형성의 실체는 무엇인가?
[의식의 무더기는 실체가 없다.]
마술사가 큰길 가에서 속임수의 마술을 보여 준다고 하자. 그런데 만일 예리한 시력으로 마술을 잘 관찰해 보고 주의 깊게 조사해보면, 그것은 비어 있고, 실속이 없고, 실체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마술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의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잘 관찰 해 보고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의식은 비어 있고, 실속이 없고, 실체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의식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가르침을 잘 배운 거룩한 제자들은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느낌에 집착하지 않고, 지각에 집착하지 않고, 형성에 집착하지 않고, 의식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부처님은 이어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물질은 거품 덩어리 같고
느낌은 물거품 같고
지각은 아지랑이 같고
형성은 파초 둥치 같고
의식은 마술과 같다.
이와 같이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그러나 찬찬히 관찰하고
주의 깊게 조사하여 보면
그것은 비어 있고 실속이 없는 것이네.
부지런히 정진력으로
이와 같이 오온을 관찰하여야 한다.
낮이든 밤이든 마음챙김으로 알아차려라.
모든 속박을 끊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
불멸의 길을 열망하면서
머리에 불이 붙는 것처럼 수행하여라.
여섯 감각기관(六根)은 무상한 것
쌍윳따 니까야:35 사라야따나 쌍윳따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눈.귀.코.혀.몸.마음은 수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무아다. 마아인 것은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헤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보기 때문에 가르침을 잘 받는 훌륭한 한 제자는 여섯 감각기관인 눈.귀.코.혀.몸.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여섯 경계(六境)는 무상한 것
쌍윳따 니까야:35 사라야따나 쌍윳따4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마음의 대상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보기 때문에 가르침을 잘 받은 훌륭한 제자는 물질의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여섯 감각기관을 절제하지 않으면
쌍윳따 니까야:35 사라야따나 쌍윳따 94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접촉의 여섯 감각기관이 있는데 이것들을 잘 길들이지 않고 지키지 않고, 절제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무엇이 여섯인가? 눈을 잘 길들이지 않고 지키지 않고 절제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마찬가지로 귀. 코. 혀, 몸. 마음도 잘 길들이지 않고 지키지 않고 절제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가져온다. 그러나 만일 여섯 감각기관을 잘 길들이고, 지키고, 절제하면 행복을 가져온다. 마찬가지로 귀. 코, 혀, 몸, 마음도 잘 길들이고, 지키고, 절제하면 행복을 가져온다.”
이어서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길들이지 않으면 괴로움을 겪는다.
이것들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은 믿음을 벗삼아 탁락함 없이 머문다.
[눈으로 대상을 볼때]
즐거움을 주거나 즐거움을 주지 않는 어떤 대상을 보았을 때.
즐거움을 주는 대상에 대한 욕망을 버려라.
‘후자는 내게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라고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타락하게 하지 말라.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유쾌한 소리를 듣거나 불쾌한 소리를 들었을 때
유쾌한 소리에 매혹되지 말라.
불쾌한 소리에 대한 싫어함을 버려라.
‘후자는 나를 불쾌하게 한다.’ 라고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타락하게 하지 말라.
[코로 냄새 맡을 때]
향기롭고 기분 좋은 냄새를 맡거나
또 썩은 악취 냄새를 맡았을 때
썩은 악취 냄새에 대한 싫어함을 버려라.
또한 좋은 냄새에 대한 욕망을 버려라.
[혀로 맛볼 때]
달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거나 쓴맛을 맛볼 때.
달콤한 맛을 욕심스럽게 즐기지 말며
쓴맛을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
기분 좋은 감촉에 매혹되지 말고
괴로운 감촉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유쾌하거나 괴롭거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니
좋다고 취하고 싫다고 내치지 않는다.
[마음이 현상을 대할 때]
집착에 묶인 범부들이 집착된 줄 알면
모든 세속의 저열한 묶임을 벗어버리고
벗어남의 길을 간다.
이와 같이 마음이 여섯 감각기관에 잘 수행이 되어 있으면.
더 이상 그 마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대들은 욕망과 증오를 모두 극복하여
태어남과 죽음을 넘어 저 언덕으로 가라!
열반에 이르는 길
쌍윳따 니까야: 38 잠부카다까 쌍윳따 1.2
어느 때 사리뿟따 존자는 마가다의 날라까 마을에 있었다. 그때 방랑 수행자 잠부카다까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벗이여, 사리뿟따여, ‘열반 열반’하는데 열반이란 무엇입니까?”
“열반이란 탐욕을 소멸하고, 성냄을 소멸하고, 어리석음을 소멸한 경지입니다.”
“그러면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까?”
“벗이여,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길은 무엇입니까. 여반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벗이여,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 [팔정도]’ 이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즉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입니다.”
“벗이여, 팔정도는 훌륭합니다. 팔정도는 열반에 이르는 훌륭한 길입니다. 팔정도 정진하기에 합당합니다.”
“벗이여, 사리뿟따여, ‘아라한과 아라한과’하는데 무엇이 ‘아라한과’입니까?”
“아라한과란 탐욕을 소멸하고, 성냄을 소멸하고, 어리석음을 소멸한 경지입니다.”
“아라한과를 얻는 길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길은 무엇입니까. 아라한과를 얻는 길입니다. 즉 바른 견해, 바른생각, 바른 말,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입니다.”
“벗이여, 팔정도는 훌륭합니다. 팔정도는 아라한과를 얻는 훌륭한 길입니다. 팔정도는 정진하기에 합당합니다.”
자아이론에 침묵하신 이유
쌍윳따 니까야:44 아뱌까따 쌍윳따 10
그때 방랑 수행자 왓차곳따가 부처님께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고따마여, 자아가 있습니까?”
이에 부처님은 아무 대답 없이 침묵하고 계셨다.
“그러면 자아가 없습니까?”
두 번째도 역시 부처님은 침묵하고 계셨다. 그러자 왓차곳따는 일어나 떠나갔다. 이에 아난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왓차곳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안다, 왓차곳따가 ‘자아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내가 만일 ‘자아가 있다’대답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자인 수행자들이나 브라흐민들의 이론에 찬동하는 격이다. 또한 만일 ‘자아가 없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단멸주의자인 수행자들이나 브라흐민들의 이론에 찬동하는 격이다. 왓차곳따가 ‘자아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만일 ‘자아가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은 무아[자아가 없다]다’라는 나의 이론과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왓차곳따가 ‘자아가 없습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만일‘자아가 없다.’고 대답한다면 그는 ‘전에 나는 자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더 이상 자아가 없다.’고 이미 혼란에 빠진 왓차곳따는 더욱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청정한 삶의 목표
쌍윳따 니까야:45 막가 쌍윳따 6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에 계셨다. 그때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청정한 삶이란 어떤 것이며, 그 목표는 무엇입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청정한 삶이란 바로 이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팔정도]이다.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집중이다. 탐욕을 쳐부수고‘ 성냄을 쳐 부수고, 어리석음을 쳐부수는 것이 청정한 삶의 목표이다,”
마음의 받침대
쌍윳따 니까야:45 막가 쌍윳따 27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에 계셨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아와 같이 가르치셨다.
“마치 항아리가 받침대가 없으면 쉽게 넘어지고 받침대가 있으면 넘어지기 어려운 것처럼, 마찬가지로 마음도 받침대가 없으면 쉽게 넘어지고 받침대가 있으면 넘어지기 어렵다.
“마치 항아리가 받침대가 없으면 쉽게 넘어지고 받침대가 있으면 넘어지기 어려운 것처럼, 마찬가지로 마음도 받침대가 없으면 쉽게 넘어지고 받침대가 있으면 넘어지기 어렵다.
무엇이 마음의 받침대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다. 즉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수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쌍윳따 니까야:45 막가 쌍윳따 36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타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그대들에게 사문의 삶과 그 목표에 대하여 설할 것이다. 무엇이 사문의 삶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다.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무엇이 사문의 삶의 목표인가? 탐욕의 쳐부수고, 성냄을 쳐부수고, 어리석음을 쳐부수는 것이 사문의 삶의 목표이다.”
청정한 삶을 사는 이유
쌍윳따 니까야:45 막가 쌍윳따 41-48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만약 다른 종파의 방랑 수행자들이 그대들에게 ‘수행자 고따마 아래에서 청정한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여야 한다.
그것은 탐욕을 제거하기 위함이며, 속박을 끊기 위함이며, 잠재적[나쁜]성향을 뿌리째 뽑기 위함이며, 번뇌를 끊기 위함이며, 참된 지혜의 해탈을 얻기 위함이며, 바른 지혜와 식견을 얻기 위함이며, 집착 없는 완전한 열반에 이르기 위함이다.
그러면 그들이 다시 ‘이것들을 얻는 길이 무엇인가? 이것들로 이끄는 수행은 무엇인가?’라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여야 한다.
벗이여, 길이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들은 이끄는 수행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 길인가? 무엇이 이것들로 이끄는 수행인가? 그것은 바로 거룩한 여덟 가지 길이다. 즉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7각지)
쌍윳따 니까댜:46 봇장가 쌍윳따3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라도 ‘계행[계]를 갖추고, 선정[정]을 갖추고, 지혜[혜]를 갖추고, 해탈을 갖추고, 해탈지견’을 갖추었다면, 그런 수행자를 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많은 이득을 가져온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 분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나, 친견하는 것이나, 가까이하는 것이나, 그분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나, 그런 분을 따라 출가를 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고 나는 말한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런 훌륭한 수행자로부터 가르침을 들으면 두 가지의 초연함에 머문다. 하나는 육신의 초연함이며, 또 하나는 마음의 초연함이다. 이런 초연함에 머물 때 그는 가르침을 기억하고 곰곰이 생각해 본다.
① 이때에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며 이것을 잘 연마하면 그 성취에 이른다. 이와 같이 마음챙김에 머물면서 지혜로 가르침을 탐구하고, 관찰한다.
② 이때에 ‘탐구의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며 이것을 잘 연마하면 그 성취에 이른다. 이와 같이 지혜로 가르침을 탐구하고 관찰할 때 해이함 없는 에너지가 솟아오른다.
③ 이때에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 가 일어나며 이것을 잘 연마하면 그 성취에 이른다. 이와 같이 에너지가 일어날 때 영적인 환희가 일어난다.
④ 이때에 ‘환의의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이것을 잘 연마하면 그 성취에 이른다. 이와 같이 환희로 가득 차서 그의 몸과 마음은 평온해진다.
⑤ 이때에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 가 일어나며 이것을 잘 연마하면 그 성취에 이른다. 몸과 마음이 평온하고 행복하면 그의 마음은 집중하게 된다.
⑥ 이때에 ‘집중의 깨달음의 요소’ 가 일어나며 이것을 잘 연마하면 그 성취에 이른다. 이와 같이 집중된 마음으로 면밀한 관찰자가 될 때 평정이 생긴다. 집중된 마음에 평정의 마음을 가지고 면밀하게 관찰하면,
⑦ 이때에 ‘평정의 깨달음의 요소’ 가 일어나며 이것을 잘 연마하면 그 성취를 얻는다.
일곱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닦으면
쌍윳따 니까야:46 봇장가 쌍윳따 5, 29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에 계셨다. 그때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깨달음의 요소, 깨달음의 요소’하는 데 어떤 의미에서 깨달음의 요소라고 불립니까?”
“그것들은 깨달음의로 인도한다. 그래서 깨달음의 요소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수행하고 연마하였을 때, 이것만큼 번뇌를 효과적으로 끊게 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무엇이 일곱인가? 마음챙김의 요소, 탐구의 깨달음의 요소,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 환의의 깨달음의 요소,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 집중의 깨달음의 요소, 평정의 깨달음의 요소이다,”
마음을 타락시키는 다섯 가지 장애
쌍윳따 니까야:46 봇장가 쌍윳따 33
금의 순수함을 잃게 하는 것에 다섯 가지가 있다. 금이 순수하지 않을 때 이것은 유연하지 않고, 부드럽지 않고, 빛나지 않고, 부러지기 쉽고, 가공하기에 접합치 않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철이나, 구리, 주석, 납, 은 등은 금의 순수함을 잃게 하며, 이러한 것들이 섞인 금은 유연하지 않고, 부드럽지 않고, 빛나지 않고, 부러지기 쉽고, 가공하기에 적합지 않다.
이와 같이 마음을 타락시키는 데에도 다섯 가지가 있다. 마음이 타락되면 마음은 유역하지 않고, 부드럽지 않고, 빛나지 않고, 부러지기 쉽고, 번뇌를 부수기 위해 바르게 집중을 하지 못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 마음을 타락시키는 것인가? 감각적 욕망, 악한 마음, 게으름과 무기력, 흥분과 회한, 의심이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로 마음이 타락되면 마음은 유연하지 않고, 부드럽지 않고, 빛나지 않고, 부러지기 쉽고, 번뇌를 부수기 위해 바르게 집중을 하지 못한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다섯 가지 능력(五力)
쌍윳따 니까야:48 인드리야 쌍윳따 10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다섯 가지 능력이 있다. 그것은 믿음의 능력, 정진의 능력, 마음챙김의 능력, 집중의 능력, 지혜의 능력이다.
① 믿음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거룩한 제자는 여래의 깨달음에 대한 이와 같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은 아라한이시며, 온전히 깨달으신 분, 지혜와 덕행을 갖춘 분, 바른 길로 잘 가신 분, 세상을 잘 아는 분, 견줄 바가 없는 분, 사람을 길들이는 분, 신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이시다. 이것을 믿음의 능력이라고 한다.
② 정진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거룩한 제자는 좋지 못한 성향은 버리고 좋은 성향은 얻으려는 굳건한 정진력을 가지고 머문다. 그는 좋은 성향을 연마하려는 책임감을 기피하지 않으며 노력에 있어 확고부동하고 견고하다. 그는 악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악한 생각을 버리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선한 생각을 일으키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선한 생각이 더욱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한다. 이것이 정진의 능력이라고 한다.
③ 마음 챙김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거룩한 제자는 열성과 선명한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가지고, 세상에 대한 탐욕과 걱정을 버리고, [무상하고, 불안전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몸을 몸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느낌을 느낌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마음을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현상을 현상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머문다. 이것을 마음챙김의 능력이라 한다.
④ 집중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거룩한 제자는 마음의 대상을 놓아버리고 집중을 얻고 마음의 하나 됨을 얻는다. 감각적 쾌락과 바람직하지 못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사유와 숙고가 있으며, 홀로 명상함에서 오는 환희와 기쁨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머문다. 사유와 숙고를 멈추고 안으로의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됨이 있으며, 사유와 숙고가 없이 삼매에서 오는 환희와 기쁨이 있는 두 번째 선정에 머문다. 환희가 사라진 후 평정한 마음과 분명한 알아차림과 육신의 행복을 느끼며 머문다.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평정과 마음챙김에 머무는 사람은 행복하게 머문다’고 하는 세 번째 선정에 머문다. 고통도 쾌락도 버리고 전에 있던 행복도 불행도 버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에 의하여 도달한 마음챙김의 순수함이 있는 네 번째 선정에 머문다. 이것을 집중의 능력이라고 한다.
⑤ 지혜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거룩한 제자는 이와 같이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는 사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를 갖추었으며 그 지혜는 성스럽고 꿰뚫어 보는 지혜이며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이끄는 지혜이다. 그는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근원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을 지혜의 능력이라고 한다.”
무상, 무아의 가르침
맛지마 니까야:1 물라빠리야야 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욱까타의 수바가 숲의 황제 사라나무 아래 계셨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그대들에게 ‘모든 형상의 뿌리’ 에 관하여 설할 것이다. 여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익숙하지 않은 가르침을 듣지 못한 범부들이 있다.
이들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이루어진 이 육신에 집착하여 육신을 영원한 ‘자아’라고 생각하고, ‘나의 것’이라고 애착하고, 육신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사람들은 [그 현상을]깊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각각의 현상에 집착하여 찰라 생멸변화하는 본성을 보지 못하고 그것들을 영원한 ‘자아’라고 생각하고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사람들은 [그 현상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직[수행의] 목표에는 도달하지 않았지만 속박에서 벗어나 최상의 평온을 구하려고 최선의 정진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지. 수. 화. 풍으로 이루어진 이 육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육신을 육신으로 있는 그대로 알며, 육신을 영원한 ‘자아’라고 생각지 않으며, ‘나의 것’이라고 애착하지 않으며, 육신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사람들은 [ 그 형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또한 각각의 현상의 생멸변화하는 현상을 보며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영원한 ‘자아’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으며,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사람들은 [그 현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라한이 있다. 그는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살고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최상의 목표를 성취하고, 존재의 속박을 부수어 버리고, 완전하고도 심오한 지혜에 의하여 해탈한 사람이다. 그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이루어진 이 육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알며, 육신을 영원한 ‘자아’라고 생각지 않으며, ‘나의 것’이라고 애착하지 않으며, 육신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런 현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때문이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쳐부수어 이것들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여래가 있다. 그는 온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이루어진 이 육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육신을 육신으로 있는 그대로 알며, 육신을 영원한 ‘자아’라고 생각지 않으며, ‘나의 것’이라고 애착하지 않으며, 육신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이런 현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즐거움이란 괴로움의 뿌리임을 알며, 존재에서 태어남이 있으며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늙고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갈애를 완전히 부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하고, 버림으로써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진정한 가르침에 이르는 길
맛지마 니까야:9 삼마딧티 경 1-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그때 존자 사리뿟따는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설법하였다.
“벗들이여, ‘바른 견해, 바른 견해’ 하고 말하는데, 거룩한 제자가 어떻게 하면 바른 견해를 갖게 됩니까? 어떻게 하면 견해가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가르침에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며, 진정한 가르침에 도달합니까? 벗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불건전하고 건전한 것의 양쪽을 다 알고 그것의 뿌리를 다 알 때,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지며, 견해가 바른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가르침에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며, 진정한 가르침에 도달합니다.
[3독(毒)과 10악(惡)]
그러면 불건전한 것은 무엇이며, 불건전한 것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존재를 죽이는 것, 주지 않는 것을 훔치는 것, 감각적 쾌락을 쫓아 잘못된 음행을 하는 것이 불건전한 것입니다. [몸으로 짖는 세 가지 악]
거짓말하는 것, 이간질하는 것, 악담하는 것, 잡담하는 것이 불건전한 것입니다.[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불건전한 것입니다.[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악].
이것들을 불건전한 것이라 부릅니다. 이와 같이 불건전한 것의 뿌리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면 건전한 것은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존재를 죽이지 않는 것,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않는 것, 감각적 쾌락을 쫓아 잘못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말하지 않는 것, 이간질하지 않는 것, 악담하지 않는 것, 잡담하지 않는 것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것들을 건전한 것이라 부릅니다. 건전한 것의 뿌리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뗏목의 비유 : 집착을 버림
맛지마 니까야:22 알라갓두빠마 경 13,14
“비구들이여, 소유하여 가질 목적이 아닌 강을 건너기 위한 목적인 뗏목에 비유한 가르침을 그대들에게 설하겠다. 어떤 사람이 긴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크고 깊고 넓은 강물을 만났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있는 쪽은 두렵고 위험한 반면 건너편 언덕은 안전하고 위험이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저 쪽으로 건너는 다리도 배도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편 언덕은 안전하다. 그런데 건널 다리도 배도 없다. 그러니 갈대, 나무 막대기, 나뭇가지, 나뭇잎들을 모아 뗏목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뗏목에 의지하여 손과 발의 힘으로 저쪽 언덕으로 안전하게 건너가면 어떨까?’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하여 강을 건널 것이다. 강을 건너 저쪽 언덕에 도착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하여 손과 발의 힘으로 저쪽 언덕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러니 이제 나는 이 뗏목을 머리에 이든지 어깨에 짊어지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어떨까?’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뗏목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그가 취하여야 할 뗏목에 대한 바른 태도인가?”
“아닙니다. 부처님”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뗏목에 대한 바른 태도인가? 강을 건너 저쪽 언덕에 도착한 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하여 손과 발의 힘으로 저쪽 언덕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제 이 뗏목을 마른 땅으로 끌어 올려 두든지 아니면 물속에 침수시키고 내 갈 길을 가면 어떨까?’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이 해야 할 뗏목에 대한 바른 태도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에게 소유하여 가질 목적이 아닌 강을 건너기 위한 목적인 뗏목에 비유한 가르침을 설하였다. 가르침이 뗏목과 비슷함을 안다면, 좋은 것이 집착하는 것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나쁜 것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
맛지마 니까야:22 알라갓두빠마 경 22.23
“비구들이여, 만일 영원하고 영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영원토록 지속될 어떤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대들은 그런 것들을 소유물로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영원하고 영속하고 번하지 않는 소유물을 본 적이 있는가?”
“본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
“나도 또한 그와 같이 영원하고 영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영원토록 지속되는 어떤 것도 본 적이 없다. 그대들은 만일 ‘자아리론’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슬픔, 한탄, 고통, 절망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자아이론’이 있다면 그것에 집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 한탄, 고통, 절망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자아이론’을 본적이 있는가?”
“본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
“나도 또한 ‘자아이론’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슬픔, 고통, 한탄, 절망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자아이론’을 본적이 없다.”
아라한
맛지마 니까마:22 알라갓두빠마 경 28-36
“비구들이여, 잘 배운 훌륭한 제자는 5온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꿈에서 깨어나 눈뜨게 되며, 이런 깨달음에 의하여 평온을 얻으며, 평온을 통하여 해탈한다. 해탈하면‘해탈했다’라는 지혜가 생기며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는 일이 없다’라고 안다.
그는 어리석음을 버린 사람이며, 다시 태어나지 않는 생사의 윤회를 벗어난 사람이며, 그래서 이런 어리석음, 생사윤회, 갈애, ‘나’라는 아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완전히 뿌리째 뽑아버린 사람이다.”
여래는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
맛지마 니까야:22 알라갓두빠마 경 37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거짓되게, 쓸데없이, 진실이 아닌 것으로 나를 잘못 말하는 사문이나 브라흐민들이 있다.
‘사문 고따마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한다. 그는 존재하는 것들의 단멸과 파괴와 박멸을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잘못 말하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가르치는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여래를 욕하고 비난하고 집요하게 공격한다 해도, 여래는 그것 때문에 분개하거나 불쾌해 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또한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여래를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경한다 해도 여래는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으며 우쭐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대들을 욕하고 비난하고 집요하게 공격한다 해도, 그로 인하여 분개하거나 불쾌해 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또한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대들을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경한다 해도 그로 인하여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말며 우쭐대지 말아야 한다.”
수행의 단계
맛지마 니까야:27 쭐라핫티빠도빠마 경 12-27
[브라흐민 자눗소니는 방랑 수행자 삘로띠까와의 대화를 통하여 부처님에 대한 큰 신뢰심이 일어나 부처님을 방문하였는데 부처님은 그에게 사문의 수행 단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브라흐민이여, 장자나 장자의 아들 또 다른 가문의 사람들이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 가르침을 듣고 여래에 대한 확신을 갖습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가정생활을 하는 것은 제한된 삶이고 티끌의 삶이며 출가생활은 광활한 공간의 삶이다. 윤이 나는 조개껍질처럼 온전히 완전하고 온전히 청정한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집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가사를 입고 출가생활을 하는 것이 어떨까?’ 그래서 그 후 그의 크고 작은 재물을 버리고 가족과 친척을 떠나 머리와 수염을 까고 노란 가사를 입고 출가 합니다.
[열 가지 계율]
이와 같이 출가한 후에 수행자의 삶에 대한 수련이 주어집니다.
① 그는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 죽이는 것을 삼가 합니다. 몽둥이나 칼을 치워버리고 모든 살이 있는 것들에게 친절하고 우호적이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합니다.
② 그는 주지 않는 것을 훔치는 것을 버리고 훔치는 것을 삼가 합니다. 다만 주는 것만을 가지며 훔치지 않은 것으로 청정하게 살아갑니다.
③ 그는 독신생활이 아닌 것을 버리고 독신생활을 준수하며 음행을 하지 않습니다.
④ 그는 거짓말을 버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고 진실에 뿌리 내리고 신뢰가 있으며 믿을 만합니다.
이간질을 버리고 이간질을 하지 않습니다. 하여 여기서 들은 말을 저게에 옮기지 않습니다. 그는 갈라진 사람들을 화해시키며 우정을 돈독히 하며 일치를 기뻐하며 일치를 가져오는 말을 합니다.
악담을 버리고 악담을 하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말, 듣기 좋은 말, 마음에 와 닿는 사랑스러운 말을 하며 예절바르고 많은 사람들이 환영할 만한 말을 합니다.
잡담[쓸데없는 말]을 버리고 잡담을 하지 않습니다. 말해야 할 적당한 때에 말하며 사실을 말하며 목표와 가르침과 계율에 따라서 말합니다. 그는 새길만한 가치가 있는 말, 타당한 말, 유익한 말을 적절한 때에 말합니다.
⑤ 그는 술을 마시거나 취하게 하는 물질을 금합니다.
⑥ 그는 오전에만 식사하고 때 아닌 때나 밤에 먹지 않습니다.
⑦ 그는 춤, 노래, 음악, 연극 등을 멀리 합니다.
⑧ 그는 화환을 걸거나 향수를 바르거나 화장하지 않습니다.
⑨ 그는 높고 큰 침상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10.그는 금이나 은을 받지 않습니다.
[청빈]
그는 육신을 보호하기 위한 법복으로 만족하며, 장을 유지하기 위한 탁발음식으로 만족하며, 어디로 가든지 그는 가사와 발우만을 가지고 갑니다. 마치 새가 어디로 가든지 짐이라고는 날개만 가지고 날아가듯이, 이처럼 비구도 육신을 보호하기 위한 법복으로 만족하며, 장을 유지하기 위한 탁발음식으로 만족하며, 어디로 가든지 그는 가사와 발우만을 가지고 갑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훌륭한 계율을 갖추고 그는 안으로 티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여섯 감각기관을 다스림]
눈으로 물질의 모양을 보고서 그 외형에 도취되지 않습니다. 그는 눈으로 형태를 볼 때 그 모양과 특성을 집착하지 않습니다. 만일 눈을 다스리지 않으면 탐욕과 낙담과 악하고 좋지 못한 것들이 침입하기 때문에 눈을 절제하고 다스립니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를 맏을 때, 혀로 맛볼 때, 몸으로 촉감을 느낄 때, 마음으로 대상을 지각할 때에 만일 귀를, 코를, 혀를, 몸을,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탐욕과 낙담의 악하고 좋지 못한 것들이 침입하기 때문에 그는 이것들을 절제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이와 같은 감각기관을 훌륭하게 절제함으로써 그는 티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마음챙김 수행]
그는 앞으로 갈 때에도, 뒤로 돌 때에도, 앞을 볼 때에도, 뒤돌아 볼 때에도, 팔 다리를 굽힐 때에도 펼 때에도, 가사를 입을 때에도, 가사와 발우를 들고 갈 때에도, 먹을 때에도, 마실 때에도, 음식을 씹을 때에도, 대소변을 볼 때에도, 걸을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앉아 있을 때에도, 잠들 때에도, 깨어날 때에도, 말할 때에도, 침묵할 때에도, 온전히 깨어있는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훌륭한 계행을 갖추고 여섯 감각기관을 절제하고, 훌륭한 마음챙김과 온전히 깨어있는 마음을 가지고 숲이나, 나무 아래, 산, 계곡, 언덕의 동굴, 묘지, 울창한 삼림, 확 트인 곳 등과 같은 한적한 수행 장소로 갑니다. 그는 탁발에서 돌아와 식사를 마친 후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등을 곧게 세우고 마음챙김을 앞에 세웁니다.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림]
① 그는 세상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탐욕에서 벗어나고 탐욕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②그는 악의를 버리고 악의에서 벗어나 인자함에 머물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이익을 위하여 자비로움을 머뭅니다. 그리고 악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③그는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버리고 게으름과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고 온전히 깨어있고 게으름과 무기력함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④그는 흥분과 회한을 버리고 안으로 평화로움으로 고요함에 머물고 흥분과 회한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⑤ 그는 의심을 버리고 의심을 초월하고 바람직한 것에 대하여 의혹이 없으며 마음을 의심으로부터 정화 합니다.
[네 가지 선정을 닦음]
① 이와 같이 그는 지혜를 둔하게 만드는 마음의 번뇌인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그리고 불건전한 것들로부터 멀리 떠나서 감각적 쾌락과 바람직하지 못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사유와 숙고가 있으며, 홀로 명상함에서 오는 환희와 기쁨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머뭅니다.
② 사유와 숙고를 멈추고 안으로의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됨이 있으며, 사유와 숙고가 없이 삼매에서 오는 환희와 기쁨이 있는 두 번째 선정에 머뭅니다.
③ 환희가 사라진 후 평정한 마음과 분명한 알아차림과 육신의 행복을 느끼며 머뭅니다.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평정과 마음챙김에 머무는 사람은 행복하게 머문다.’고 하는 세 번째 선정에 머뭅니다.
④ 고통도 쾌락도 버리고, 전에 있던 행복도 불행도 버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에 의하여 도달한 마음챙김의 순수함이 있는 네 번째 선정에 머뭅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그의 마음은 감각적 쾌락의 번뇌로부터 벗어나며, 존재의 번뇌로부터 벗어나며, 어리석음의 번뇌로부터 벗어나 해탈합니다. 해탈하면 해탈하였다는 것을 압니다.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는 일은 없다.’고 분명히 압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자 브라흐민 자눗소니는 부처님의 말씀을 찬탄하며 부처님게 귀의하여 재가신도가 되었다.
몸, 입, 마음으로 짓는 열 가지 악과 선
맛지마 니까야: 41 살레야까 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많은 비구들과 함께 꼬살라국을 유행하여 브라흐민 마을인 살라에 도착하셨다.
살라 마을의 브라흐민 장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사꺄족에서 출가한 사문 고따마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꼬살라국을 유행하여 마침내 살라에 도착하셨다. 그에 대한 좋은 평판이 자자하게 퍼져 있다.
즉 부처님은 아라한이시며, 온전히 깨달으신 분, 지혜와 덕행을 갖춘분, 바른 길로 가신분, 세상을 잘 아는 분, 견줄 바가 없는 분, 사람의 길들이는 분, 신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이시다. 그의 가르침은 처음도 끝도 휼륭하고 바른 뜻과 문장을 갖추고, 참으로 청정하고 완전한 성스러운 삶을 보여준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아라한을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하면서 부처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아라한을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하면서 부처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이와 같이 말하였다.
“고따마 존자님, 왜 어떤 사람은 죽은 후에 행복하지 않은 곳, 심하면 지옥에 태어납니까? 또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은 후에 행복한 곳, 더욱이 가장 좋은 곳인 천상에 태어납니까?”
“장자들이여, 그것은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고 바르게 행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후에 행복하지 않은 곳 심하면 지옥에 태어납니다. 또한 가르침에 따라서 행하고 바르게 행한다면 죽은 후에 행복한 곳 천상에 태어납니다.”
“고따마 존자님, 너무 간략히 말씀하셔서 그 상세한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상세한 뜻을 저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장자들이여, 가르침에 어긋나고 옳지 않은 행으로 몸으로 짓는 세가지, 입으로 짓는 네가지,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열 가지 악(10악)]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악]
가르침에 어긋나고 옳지 않은 행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가 있습니다.
첫째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입니다. 그는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자비심이 없이 잔인하고 살생하고 해치는 일에 열중합니다.
둘째는 주지 않는 것을 갖습니다. 마을이나 숲에서 도둑질하여 다른 사람의 부와 재산을 갖습니다.
셋째는 삿된 음행을 합니다. 부모, 형제, 자매, 친척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남편이 있거나 심지어 약혼의 표시로 화환을 건 여인과 성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
가르침에 어긋나고 옳지 않은 것으로 입으로 짓는 네 가지 행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말을 합니다. 법정이나 회합에 증인으로 소환되었을 때, 친척이나 조합이나 귀족의 앞에서 증인으로 이와 같이 질문을 받았을 때, ‘○○○씨’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 보시오. 라고 물었을 때,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고 알면서 알지 못한다고 하고, 보지 못하고서 보았다고 하고, 보고서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그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또는 물질적인 이득을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둘째는 이간질을 합니다. 여기서 들은 말을 저기서 하여 이들을 갈라놓고, 저기서 들은 말을 여기서 하여 이들을 갈라놓습니다. 일치된 사람들을 갈라놓고 분열을 만들고, 남의 불화를 즐기고 불화를 기뻐하고 불화를 일으키는 말을 합니다.
셋째는 악담을 합니다. 거친 말, 심한 말, 상처를 주는 말, 모욕적인 말, 화나게 하는말, 정신집중을 깨뜨리는 말을 합니다.
넷째는 쓸데없는 잡담을 합니다. 적합지 않은 때에 말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 가르침과 계율에 어긋난 말을 합니다. 적절치 않은 때에 하는 말은 가치기 없고 조리에 맞지 않고 절제가 없고 이익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악]
가르침에 어긋나고 옳지 않은 것으로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행이 있습니다.
첫째는 탐욕을 부립니다. 다른 사람의 부유함과 재산을 보고는 ‘저것들이 내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탐욕을 부립니다.
둘째는 악의를 품습니다. 증오심을 가지고 생각하기를 ‘이것들이 살해되기를, 씨도 안 남고 파괴되기를!’하고 악의를 품습니다.
셋째는 잘못된 견해를 갖습니다.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생각하기를 ‘보시의 공덕도 없고, 공양의 공덕도 없고, 제사의 공덕도 없고, 선행이나 악행의 결과도 없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고, 윤회도 없고, 자신의 뛰어난 지혜로 깨달아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말하는 훌륭하고 바르게 수행하는 사문이나 브라흐민도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합니다.
장자들이여, 이와 같이 가르침대로 따르지 않고 바르게 행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후에 행복하지 않는 곳, 심하면 지공에 태어납니다.
[열 가지 바른 행]
장자들이여, 가르침에 합당하고 옳은 행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입으로 짓는 네 가지,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행이 있습니다.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바른 행]
가르침에 합당하고 옳은 행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행이 있습니다.
첫째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습니다. 몽둥이나 무기를 치워버리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자비로 대합니다.
둘째는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습니다. 마을이나 숲에서 다른 사람의 부와 재산을 도둑질하여 갖지 않습니다.
셋째는 삿된 음행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 형제, 자매, 친척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남편이 있거나 약혼의 표시로 화환을 건 여인과 성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바른 행]
가르침에 합당하고 옳은 것으로 입으로 짓는 네 가지 행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법정이나 회합에 증인으로 소환되었을 때, 친척이나 조합이나 귀족의 앞에서 증인으로 이와 같이 질문을 받았을 때, ‘○○○씨,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 보시오,’라고 물었을 때,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하고, 알면 안다고 하고, 보지 못하였으면, 보지 못하였다고 하고, 보았으면 보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그 자신을 위해, 또 물질적인 이득을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이간질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갈라놓기 위하여 여기서 들은 말을 저기서 하지 않으며, 거기서 들은 말을 여기서 하지 않습니다.
그는 갈라진 사람들을 화합시키며, 우정을 증진시키며, 화합을 즐기며, 화합을 기뻐하며, 화합을 도모하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악담을 하지 않습니다. 부드럽고 귀에 듣기 좋은 말, 사랑스럽고 마음에 와 닿는 말, 예절바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 유쾌한 말을 합니다.
넷째는 쓸데없는 잡담을 하지 않습니다. 적절한 때에 말하며, 사실을 말하며, 좋은 말을 하며, 가르침과 계율에 합당한 말을 합니다. 적절한 때에 하는 말은 가치가 있고, 조리에 맞고, 절제가 있고, 이익이 되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짖는 세 가지 바른 행]
가르침에 합당하고 옳은 것으로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행이 있습니다.
첫째는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유함과 재산을 보고 ‘저것들이 내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둘째는 악의를 품지 않습니다. 증오심에서 벗어나 생각하기를 ‘이 존재들이 악의에서 고통에서 근심에서 벗어나기를, 그리고 그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하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바른 견해를 갖습니다. ‘보시의 공덕도 있고, 공양의 공덕도 있고, 제사의 공덕도 있고, 선행이나 악행의 결과도 있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있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있고, 윤회도 있고, 자신의 뛰어 난 지혜로 깨달아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말하는 훌륭하고 바르게 수행하는 사문이나 브라흐민이 이 세상에는 있다.’고 말합니다.
장자들이여, 이와 같이 가르침대로 따르고 바르게 행하기 때문에 죽은 후에 행복한 곳 더욱이 천상에 태어납니다.”
비구니 담마딘나의 가르침
맛지마 니까야:44 쭐라웨달라 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셨다.
그때 재가신도 위사카는 비구니 담마딘나에게로 가서 인사를 드리고 이렇게 질문하였다.
“존경스런 자매여, ‘삭까야, 삭까야’라고 하는데 이것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위사카여, 집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가 삭까야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집착의 대상이 되는 물질의 무더기, 집착의 대상이 되는 느낌의 무더기, 집착의 대상의 되는 지각의 무더기, 집착의 대상이 되는 형성의 무더기, 집착의 대상이 되는 의식의 무더기를 말합니다.
위사카여, 부처님은 집착의 대상이 되는 이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를 삭까야라고 하셨습니다.”
재가신도 위사카는 이어서 더 많은 질문을 하고 만족한 대답을 듣고 기뻐하였다.
여섯 감각기관의 절제
맛지마 니까야:75 마간디야 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꾸루국의 깜맛사담마라는 꾸루족의 마을에 계셨는데. 바라드와자 가문 브라흐민의 불을 예배하는 예배소에서 풀로 된 깔개 위에 계셨다. 부처님은 이른 아침 깜맛사담마로 탁발하러 가셨다. 탁발에서 돌아오신 후 공양을 드시고 낮 동안의 명상을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가셔서 돌아오신 후 공양을 드시고 낮 동안의 명상을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가셔서 어떤 나무 아래 앉으셨다.
그때 방랑 수행자 마간디야는 그 주변을 거닐다가 브르흐민의 불의 예배소로 갔다. 그는 풀 자리가 펴진 것을 보고 브라흐민에게 물었다.
“바라드와자님의 불의 예배소에 누구를 위한 풀 자리가 깔려 있습니까? 사문의 잠자리 같이 보입니다.”
“마간디야 존자님, 사꺄족에서 출가한 사꺄족의 아들인 사문 고따마가 있습니다. 고따마 존자님은 깨달은 분이라는 훌륭한 평판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 잠자리는 그 고따마 존자님을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바라드와자님,‘성장의 파괴자’고따마 존자님의 잠자리를 본 것은 기분 나쁜일입니다.”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마간디야 존자님, 그런 말씀을 삼가십시오, 많은 학식이 높은 왕족들, 브라흐민들, 장자들, 그리고 사문들이 고따마 존자님께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있고 훌륭한 바른 가르침인 진리의 길을 그로부터 수행하고 있습니다.”
“바라드와자님, 제가 고따마 존자님을 직접 대면하다 하더라도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문 고따마는 정장의 파괴자’라고요. 왜 그러냐고요? 우리의 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저녁 무럽 명상에서 일어나 브르흐민의 불의 예배소로 가서 준비된 풀 자리에 앉으셨다.
그때 바라드와자 가문의 브라흐민은 부처님께 와서 인사를 드리고 한쪽에 앉았다. 그런데 부처님과 브라흐민과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마간디야가 불의 예배소로 부처님을 뵈려고 들어왔다. 그는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에 앉았다. 부처님은 마간디야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간디야, 눈은 보이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고 기뻐합니다. 눈은 여래에 의하여 길들여졌고, 단속되었고, 보호되었고, 절제되었습니다.
그의 눈의 절제를 위한 담마를 가르칩니다. 마간디야, 그대는 이것 때문에 ‘사문 고따마는 성장의 파괴자’라고 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 이유는 우리의 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간디야, 귀는 들리는 소리에서 즐거워하며 기뻐합니다. 코는 풍기는 냄새에서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혀는 입속의 맛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육신은 만져지는 감촉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마음은 마음이 움직이는 대상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여래는 이 여섯 감각기관을 길들였고, 단속하였고, 보고하였고, 절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들의 절제를 가르칩니다. 이것과 연관해서 그대는 ‘사문 고따마는 성장의 파괴자’라고 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왜냐하면 우리의 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간디야, 어떤 사람이 전에는 눈에 의하여 인식되는 그가 원하고, 갈망하고, 기분 좋고, 좋아하는 감각적 쾌락이나 욕망을 일으키는 형상들을 즐겼다고 합시다. 그러나 나중에 이런 눈에 보이는 형상들의 생성, 소멸, 만족, 위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형상에 대한 갈애를 버리고, 열광을 제거하고, 안으로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갈증 없이 머물게 됩니다. 이 사람에게 당신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마간디야?”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마간디야, 내가 궁성에서 살 때에 나는 나에게 주어진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라R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나에게는 세 개의 궁전이 있었습니다. 우기를 위한 것, 겨울을 위한 것, 그리고 여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우기 4개월 동안 여인들 악사들의 음악에 빠져서 아래 궁전에는 내려가지 않았고 우기의 궁전에서 살았습니다. 그 후에 나는 감각적 쾌락의 생성, 소멸, 만족, 위험,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았기 때문에 나는 감각적 쾌락의 갈애 열광을 버리고 내면의 평화를 가지고 갈증 없이 머물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른 이들이 감각적 쾌락의 갈애에 휘말리고 열정에 불타 감각적 쾌락에 빠져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나는 이들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그 안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상의 더 없는 기쁨을 능가하는 감각적 쾌락에서 떠난 즐거움과 불건전한 것에서 떠난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기쁨을 누리기 때문에 이것보다 못한 것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은 다른 여러 가지 가르침을 마간디야에게 주셨다. 가르침을 다 듣고 그는 말하였다.]
“고따마 존자님, 훌륭하십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드러내 보이듯이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보여주듯이, 어둠 속에서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등불을 들어올리듯이, 어둠 속에서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등불을 들어올리듯이, 고따마 존자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합니다. 저는 고따마 존자님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기를 원합니다.”
“마간디야, 전에 다른 교단에 있던 사람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 출가하기를 원하면 4개월 동안의 관찰 기간이 있습니다. 4개월이 끝날 때 만약 대중들이 괜찮다고 하면 그때 구족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별 차이는 인정합니다.”
“저는 관찰기간으로 4개월이 아니라 4년 동안 살겠습니다. 그때 받아 주신다면 구족계를 받겠습니다.”
그 후 방랑 수행자 마간디야는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열심히 정진하고 수행하여 생사윤회를 끊는 아라한이 되었다.
진리를 깨닫는 길
맛지마 니까야:95 짱끼경11-34
[‘이것만이 진리’ 라는 말은 오류]
머리는 삭발하고 나이는 16세인 까빠티까라는 브라흐민 청년이 있었다. 그는 세 가지 베다에 통달하였고 그것의 어휘, 예식, 음운록, 어원론, 전승과 또한 문헌학과 문법에 숙달하였고, 세간의 철학과 훌륭한 사람의 특지에 능통하였다. 그는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고따마 존자님, 구전으로 내려온 고대 베다의 찬가와 경전에 대하여 브라흐민들은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를 ‘오직 이것만이 진리이다. 다른 것들은 다 가짜다.’라고 합니다. 고따마 존자님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그런데 바라드와자 브라흐민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라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러면 브라흐민의 스승 가운데서 7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스승의 스승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러면 고대 브라흐민 성자들, [베다]찬가의 창작자, [베다]찬가의 작성자, 이들의 고대[베다] 찬가는 예전에 암송되었고, 설해지고, 편집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브라흐미들은 아직도 설해진 것을 암송하고, 암송된 것을 암송한다. 이들 [베다] 찬가의 작성자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업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이와 같이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 브라흐민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근거가 없음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고따마 존자님, 브라흐민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존경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구전으로써 존경합니다.”
“바라드와자, 어떤 것은 믿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비고, 공허하고, 거짓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잘 믿어지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고, 바른 것이기도 하지, 또한 어떤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것이 비고, 공허하고, 거짓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고, 바른 것이기도 하지. 그러므로 진리를 지키는 [보호하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오직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라고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진리의 보호하는 길]
“그러면 고따마 존자님, 어떻게 진리를 보호합니까? 우리는 고따마 존자님께 진리의 보호에 대하여 여쭙니다.”
“바라드와자, 예를 들면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나의 믿음은 이와 같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는 못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전적으로 내려오는 전승을 받아들일 때 ‘나는 구전을 받아들인다.’라고 말할 뿐 ‘구전만이 진짜이고 다른 것은 엉터리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는 못하였다.
만일 어떤 견해를 찬성할 때 ‘나는 그 견해를 찬성한다.’라고 말할 뿐 ‘그 견해만이 진리이고 다른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승을 받아들일 때 ‘나는 구전을 받아들인다.’라고 말할 뿐 ‘구전만이 진짜이고 다른 것은 엉터리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다.
만일 어떤 견해를 찬성할 때 ‘나는 그 견해를 찬성한다.’라고 말할 뿐 ‘그 견해만이 진리이고 다른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다.
[진리를 깨닫는 길]
“고따마 존자님, 그렇게 해서 진리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진리를 깨닫습니까?”
“바라드와자, 어떤 비구가 한 마을에 의지하여 머물고 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장자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관점에서 비구를 살핀다. 탐욕에 사로잡혀, 성냄에 사로잡혀,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하고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과장하지 않는가?”
또는 ‘사람들을 해롭고 괴로움을 가져오는 길로 잘못 인도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살핀다. 얼마 후 장자는 이 비구에게서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이나 말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존자가 가르치는 법은 심오하고 평화롭고 탁월하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다.
그리고 이 존자가 탐, 진, 치에서 벗어났음을 보고 그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을 갖는다.
존경심에 가득 차서 가르침을 듣는다.
가르침을 듣고서는 기억하여 그 뜻을 새긴다.
뜻을 새기고는 그 뜻을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아 받아들인다.
이렇게 받아들였을 때 열성이 샘솟는다.
열성이 샘솟으면 마음을 쏟아 매진한다.
마음을 쏟아 매진하면 면밀한 관찰과 숙고가 생긴다.
면밀히 관찰하고 숙고하면 분발력이 생긴다.
굳건한 분발력으로 그는 최상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지혜로 최상의 진리를 꿰뚫어 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진리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진리에 도달하는 길]
“그렇게 해서, 고따마 존자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침내 진리에 도달합니까?”
“바라드 와자, 진리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길은 똑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꾸준히 계속할 때 이루어지며, 그것을 발천시키고 연마할 때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고따마 존자님, 진리에 마침내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면 진리에 도달하는 데데 가장 도움이 된다. 만약 이런 분투노력이 없다면 그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고따마 존자님, 그러면 분투노력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면밀한 관찰과 숙고가 가장 도움이 된다, 만약 면밀한 관찰과 숙고가 없다면 그는 분투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고따마 존자님은 저희들에게 진리를 보호하는 길, 진리를 깨닫는 길, 진리에 도달하는 길에 대하여 훌륭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존자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수용하고 만족합니다. 고따마 존자님은 사문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존경을 저에게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부처님께 귀의하여 재가신도가 되었다.
논쟁의 뿌리
맛자마 니까야:104 사마가마 경 1-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꺄족의 사마가마에 계셨다. 그때 자이나 교단의 나간타 나따뿟따가 얼마 전에 빠와에서 죽었다. 그가 죽자 제자들은 둘로 분열되어 싸우고 격심하게 논쟁하고 서로 [가시돋친]말로 이렇게 찔러댔다.
‘너는 이 가르침과 계율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이해한다. 네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너의 길은 틀렸고 나의 길이 옳다. 나는 한결같고 너는 그렇지 못하다. 너는 먼저 말해야 할 것을 나중에 말하고 나중에 말해야 할 것을 먼저 말한다. 네가 그렇게 심사숙고하는 것도 거꾸로 된 것이다. 너의 말은 논파되었다. 가서 좀더 배우든지 아니면 할 수 있다면 해명해 보시지.’
마치 니간타 나따뿟따의 제자 가운데는 오직 살인자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희옷을 입은 재가 제자들은 그들의 소행에 협오감을 느꼈고 낙담하고 실망하였다.
그때 사미 쭌다는 빠와에서 우기를 보낸 후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가서 아난다 존자에게 니간타 나따뿟따의 이야기를 하였다. 아난다 존자는 쭌다와 함께 부처님께 가서 그런 이야기를 한 후 이어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면[우리]승가에는 논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논쟁은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고 해악을 주고 고통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난다. 내가 깨달아 그대들에게 가르친 것들 4념처나 4정근, 5력, 칠각지, 팔정도 등에 대하여 두 비구라도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을 보았는가?”
“보지 못하였습니다. 부처님,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하시면 승가생활과 빠디목차[계본]에 대하여 논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논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고통과 불행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난다, 승가생활과 빠띠목차에 대한 논쟁이 있다면 그것은 사소한 것이다. 그러나 승가에서 팔정도라든지 깨달음과 같은 바른 수행의 길에 연관된 가르침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주고 고통을 주고 불행을 줄 것이다.
논쟁의 여섯 가지 뿌리가 있다. 무엇이 여섯인가?
분노와 원한을 가지고 있다.
혹독하고 자비가 없다.
시기심이 많고 인색하다.
교활하고 남을 속인다.
악의가 있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완고하고 집요하다.
이런 사람은 스승과[불]. 가르침과 [법] 승가[승]에 대하여 존경이나 공경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행을 충실히 마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승가에 논쟁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을 해롭게 하고 불행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만일 그대가 그런 논쟁의 뿌리를 자신의 안에서 또는 밖에서 보게 되면 논쟁의 악한 뿌리를 잘라버리도록 분투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안팎에서 그런 논쟁의 뿌리를 발견치 못하였다면 미래에 그런 논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수행 정진하여야 한다.
사랑, 존경, 화합으로 이끄는 자질
맛지마 니까야:104 사마가마 경 21.22
“아닌다, 여기에 사랑과 존경심을 일으키고, 협조와, 화합과, 일치로 이끄는 기억하여야 할 여섯 가지가 있다.
동료들에게 자애로운 행동으로 대한다.
동료들에게 자애로운 말로 대한다.
동료들에게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한다.
청정한 삶의 계행을 지니는 그의 동료와 법답게 얻은 것은 무엇이든지, 심지어 탁발하여 얻은 것까지도 함께 나누는 것을 기뻐한다,
청정한 삶의 동료들과 깨지지 않고 손상됨 없는, 현자가 찬탄하고 집중으로 이끄는 계행에 일치하여 머문다.
청정한 삶의 동료들과 거룩하고 해탈로 이끄는 견해, 이런 견해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을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이끄는 견해에 일치하여 머문다.
이것들은 여섯 가지 기억하여야 할 자질로서 사랑과 존경심을 일으키고 협조와 화합과 일치로 이끈다.
아난다, 그대들이 이것을 실천하면서 사소하거나 크건 간에 참아내지 못할 어떤 말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부처님.”
“그러므로 아난다. 이 여섯 가지 중요한 자질을 기억하고 실천하여라. 그러면 그것은 그대들을 오랜 세월 동안 행복과 안락함으로 이끌것이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의 자세한 설명 1
맛지마 니까야:141 삿짜위방가 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 계셨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을 때 사리뿟따 존자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벗들이여, 여래이시며 아라한이시며 온전히 깨달으신 분은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인간이든 신이든 이 세상 그 어는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멈추어질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그것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의 선언이며, 가르침이며, 설정이며, 설립이며, 열어 보임이며, 해설이었습니다.
[무엇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입니까?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입니다.]
① 무엇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입니까?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음도 괴로움이고, 죽음도 괴로움이고, 슬픔. 한탄. 고통. 비탄. 절망도 괴로움입니다.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간단히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가 괴로움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입니다.
② 무엇이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입니까?
그것은 갈애로서 윤회를 가져오며, 쾌락과 욕망을 동반하며, 여기 저기서 쾌락을 추구합니다. 갈애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입니다.
③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입니까?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갈애를 놓아 버리고, 갈애를 내 버리고, 갈애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입니다.
④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바른 길입니다.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입니다.
1. 무엇이 바른 견해입니까?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근원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아는 것입니다.
2. 무엇이 바른 생각입니까? 욕망을 떠난 생각, 사악함을 떠난 생각, 해침을 떠난 생각을 말합니다.
3. 무엇이 바른 말입니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악담을 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4. 무엇이 바른 행동입니까?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않고, 감각적 쾌락을 위하여 그릇된 행실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5. 무엇이 바른 생활수단입니까? 잘못된 생활수단을 버리고 다른 생활수단에 의하여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6. 무엇이 바른 정진입니까? 나쁜 성향은 일어나지 않도록 애써 노력하며, 나쁜 성향은 버리려고 애써 노력하며, 좋은 성향은 일어나게 애써 노력하며, 좋은 성향은 발전시키고 유지하려고 애써 노력하는 것입니다.
7.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입니까? 열성을 가지고 온전한 깨어 있음과 마음챙김으로 세상에 대한 탐욕과 낙담을 던져버리고, 몸을 몸으로, 느낌을 느낌으로, 마음을 마음으로, 담마를 담마로 관찰하며 머무는 것입니다.
8. 무엇이 바른 집중입니까?
감각적 쾌락과 바람직하지 못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사유와 숙고가 있으며, 홀로 명상함에서 오는 환희와 기쁨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머뭅니다.
사유와 숙고를 멈추고 안으로의 평온함과 마음의 집중됨이 있으며, 사유와 숙고가 없이 삼매에서 오는 환희와 기쁨이 있는 두 번째 선정에 머뭅니다.
화의가 사라진 후 평정한 마음과 분명한 알아차림과 육신의 행복을 느끼며 머뭅니다.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평정과 마음챙김에 머무는 사람은 행복하게 마문다.’고 하는 세 번째 선정에 머뭅니다.
고통도 쾌락도 버리고 전에 있던 행복도 불행도 버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에 의하여 도달한 마음챙김의 순수함이 있는 네 번째 선정에 머뭅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입니다.”
비구들은 사리뿟따의 설법에 기뻐하였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의 자세한 설명 2
다가 니까야:22 마하사띠빳타나 18-2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꾸루국의 도시인 깜마사 담마라는 꾸루 사람들이 사는 곳에 계셨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1)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무엇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인가?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늙음은 괴로움이다.
[병듦은 괴로움이다.]
죽음은 괴로움이다.
슬픔, 한탄, 고통, 고뇌, 절망은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것들과 만나야 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져야 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간단히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가 괴로움이다.
이것을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고 부른다.
① 태어남이란 무엇인가? 이런 저런 존재의 무리들에서 다양한 존재들의 탄생, 존재하게 됨, 새로운 형태의 생김,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의 나타남,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얻음[육근]이 있다. 이것을 태어남이라 한다.
② 늙음이란 무엇인가? 시듦, 노쇠, 부서짐, 백발, 주름살, 목숨이 줄어듦, 감각기관의 붕괴, 이것이 늙음이라 한다.
③ 죽음이란 무엇인가?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감, 붕괴, 사라짐, 생명의 끝, 생명의 마침, 오온의 부서짐, 육신의 버려짐, 이것을 죽음이라 한다.
④ 슬픔. 한탄. 고통. 고뇌. 절망은 무엇인가? 슬픔이란 내면의 깊은 비애, 마음은 아픔, 불행으로 괴로움을 겪는 사람의 내면의 비참함을 말하며, 한탄이란 울고, 탄식을 하고, 울부짖고, 불행으로부터 괴로움을 겪는 사람의 탄식을 말하며, 고통이란 육체적인 고통, 육신의 불편함, 육신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불편함을 말하며, 고뇌란 정신적 고통, 정신적인 불편함, 정신적인 접촉에서 생기는 불편함을 말하며, 절망이란 낙담의 상태, 풀죽음, 불행으로부터 고통을 겪는 사람의 가망없는 상태를 말한다.
⑤ 무엇이 싫어하는 것들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인가? 원하지 않고 달갑지 않은 불쾌한 눈에 보이는 대상, 들리는 소리, 냄새, 맛, 촉감, 마음의 대상을 만나야 하고, 악의를 가진 사람, 해치려는 사람, 불쾌감을 주는 사람, 정신적 번뇌의 해로운 묶임을 주는 사람들과 합류하고, 교제하고, 연대를 갖고, 합치하고 만나야 한다. 이것이 싫어하는 것들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이다.
⑥ 무엇이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유쾌한 눈에 보이는 대상, 들리는 소리, 냄새, 맛, 촉감, 마음의 대상과 헤어져야 하고 선의를 가진 사람, 이익을 주는 사람, 유쾌함을 주는 사람, 정신적 번뇌의 해방을 주는 사람들과 헤어져야하고,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 친척, 친구, 동료들과 합류하고, 교제하고, 연대를 갖고, 합치하고 만나는 것이 박탈된다. 이것이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이다.
⑦ 무엇이 원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는 괴로움인가? 태어남의 대상인 존재들에게 이런 염원이 일어난다. ‘오, 우리는 태어남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태어남이 없기를! 그러나 이것은 염원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원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는것이다. 늙고 병들고, 죽고, 슬픔, 한탄, 고통, 고뇌, 절망의 대상인 존재들에게 이런 열망이 일어난다. ’오, 우리들은 늙음의 대상이 아니기를! 병듦의 대상이 아니기를! 슬픔. 한탄. 고통. 고뇌. 절망의 대상이 아니기를! 늙음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 병듦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 슬픔, 한탄, 고통, 고뇌. 절망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하고 원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원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⑧무엇이 간단히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의 괴로움인가?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집착의 대상이 되는 물질의 무더기, 집착의 대상이 되는 느낌의 무더기, 집착의 대상이 되는 지각의 무더기, 집착의 대상이 되는 형성의 무더기, 집착의 대상이 되는 의식의 무더기이다. 이것이 ‘간단히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의 괴로움’이다.
이것을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고 부른다.
(2)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
무엇이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인가? 괴로움의 근원은 갈애이다. 갈애는 윤회를 가져오며 쾌락과 욕망을 수반하며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찾는다. 예를 들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어디서 갈애가 일어나는가? 어디에 갈애가 자리 잡는가?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에서 갈애는 일어나 자리 잡는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인가?
(6근에서 갈애가 일어남)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일어나 자리 잡는다.
(6경에서 갈애가 일어남)
눈에 보이는 광경, 귀에 들리는 소리, 코에 맡아지는 냄새, 혀로 느껴지는 맛, 피부에 닿는 감촉, 마음에 오는 느낌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일어나 자리 잡는다.
(6식에서 갈애가 일어남)
눈으로 보는 의식 작용, 귀로 듣는 의식 작용, 코로 냄새 맡는 의식 작용, 혀로 맛보는 의식 작용, 몸에 닿는 의식 작용, 마음에 오는 의식 작용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일어나 자리 잡는다.
(6근의 접촉에서 갈애가 일어남)
눈과 대상과의 접촉, 귀와 소리의 접촉, 코와 냄새의 접촉, 혀와 맛의 접촉, 몸과 닿음의 접촉, 마음과 형상과 접촉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일어나 자리 잡는다.
(6근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남)
눈으로 대상을 본 느낌, 귀로 소리를 들은 느낌, 코로 냄새를 맡은 느낌, 혀로 맛본 느낌, 몸에 닿는 느낌, 마음에 온 형상의 느낌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일어나 자리 잡는다.
(6근의 지각에서 갈애가 일어남)
눈으로 보이는 대상을 지각함, 귀로 들리는 소리를 지각함, 코로 맡은 냄새를 지각함, 혀로 느낀 맛을 지각함, 몸에 닿은 감촉을 지각함, 마음의 현상을 지각함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일어나 자리 잡는다.
(6경에 대한 의지 작용으로 갈애가 일어남)
눈으로 본 대상에 대한 의지 작용, 귀로 들은 소리에 대한 의지 작용, 코로 맡은 냄새에 대한 의지 작용, 혀로 맛본 맛에 대한 의지 작용, 몸에 닿은 느낌에 대한 의지 작용, 마음의 현상에 대한 의지 작용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일어나 자리 잡는다.
(6경에 대하여 갈애가 일어남)
눈으로 본 대상에 대한 갈애, 귀로 들은 소리에 대한 갈애, 코로 맡은 냄새에 대한 갈애, 혀로 맛본 맛에 대한 갈애, 몸에 닿은 감촉에 대한 갈애, 마음에 온 느낌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일어나 자리 잡는다.
(6경에 대한 생각이 생겨 갈애가 일어남)
눈으로 본 대상에 대한 생각, 귀로 들은 소리에 대한 생각, 코로 맡은 냄새에 대한 생각, 혀로 맛본 맛에 대한 생각, 몸에 닿은 감촉에 대한 생각, 마음에 온 느낌에 대한 생각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일어나 자리 잡는다.
(6경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갈애가 일어남)
눈으로 본 대상을 곰곰이 생각하고, 귀로 들은 소리를 곰곰이 생각하고, 코로 맡은 냄새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고, 혀로 맛본 맛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고, 몸에 닿은 느낌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고, 마음의 느낌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일어나 자리 잡는다.
이것을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라고 부른다.
(3)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인가?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하고, 버리고, 벗어나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어디에서 갈애가 버려지는가? 어디에서 갈애가 소멸하는가?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에서 갈애는 버려지고 갈애는 소멸된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인가?
(6근에서 갈애는 버려진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된다.
(6경에서 갈애는 버려진다.)
눈으로 보는 광경, 귀로 듣는 소리, 코로 냄새 맡는 향기, 혀로 맛봄, 몸의 피부에 닿는 감촉, 마음의 현상에 오는 느낌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된다.
(6식에서 갈애는 버려진다.)
눈으로 본 대상에 대한 갈애, 귀로 들은 소리에 대한 갈애, 코로 맡은 냄새에 대한 갈애, 혀로 맛본 맛에 대한 갈애, 몸에 닿은 감촉에 대한 갈애, 마음에 온 느낌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된다.
(6경에 대한 생각이 생기는 곳에서 갈애가 버려진다.)
눈으로 본 대상에 대한 생각, 귀로 들은 소리에 대한 생각, 코로 맡은 냄새에 대한 생각, 혀로 맛본 맛에 대한 생각, 몸에 닿은 감촉에 대한 생각, 마음에 온 느낌에 대한 생각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된다.
(6경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곳에서 갈애가 버려진다.)
눈으로 본 대상은 곰곰이 생각하고, 귀로 들은 소리를 곰곰이 생각하고, 코로 맡은 냄새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고, 혀로 맛본 맛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고, 몸에 닿은 느낌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고, 마음의 느낌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며, 여기에서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된다.
이것을‘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라고 부른다.
(4)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인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바로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다. 그것들은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①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근원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② 무엇이 바란 생각인가?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난 생각, 악의에서 벗어난 생각, 해침에서 벗어난 생각을 말한다.
③ 무엇이 바른 말인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악담을 하지 않고, 잡담을 하지 않는 것이다.
④ 무엇이 바른 행동인가? 살생하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으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⑤ 무엇이 바른 생활수단인가? 잘못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고 바른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⑥ 무엇이 바른 정진인가? 악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지여 분투노력하며, 악한 생각은 버리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선한 생각은 일으키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선한 생각은 더욱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는 것이다.
⑦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인가? 열성을 가지고 온전한 깨어 있음과 마음챙김으로 세상에 대한 탐욕과 낙담을 버리고 몸을 몸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머문다 온전한 깨어 있음과 마음챙김으로 세상에 대한 탐욕과 낙담을 버리고 느낌을 느낌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머문다. 온전한 깨어 있음과 마음챙김으로 세상에 대한 탐욕과 낙담을 버고 현상을 현상으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머문다.
⑧ 무엇이 바른 집중인가?
감각적 쾌락과 바람직하지 못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사유와 숙고가 있으며, 홀로 명상함에서 오는 환희와 기쁨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머문다.
환희가 사라진 후 평정한 마음과 분명한 알아차림과 육신의 행복을 느끼며 머문다.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평정과 마음챙김에 머무는 마음은 행복하게 머문다.’고 하는 세 번째 선정에 머문다.
고통도 쾌락도 버리고 전에 있던 행복도 불행도 버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평정에 의하여 도달한 마음챙김의 순수함이 있는 네 번째 선정에 머문다.
이것을‘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라고 부른다.
다섯가지 장애의 원인과 버림
앙굿따라 니까야 1부 2: 1-10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고,
감각적 욕망이 더욱 증가하고,
감각적 욕망이 강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이 원인보다 더 강력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대상’ 때문이다.
아름다운 대상에 부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고, 증가하고, 더욱 강해진다.
악의를 일으키고,
악의가 증가하고,
악의가 더욱 강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이 원인보다 더 강력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불쾌한 대상’ 때문이다.
불쾌한 대상에 부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악의가 일어나고, 증가하고, 더욱 강해진다.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일으키고,
게으름과 무기력함이 증가하고,
게으름과 무기력함이 더욱 강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이 원인보다 더 강력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권태로움, 졸음, 하품, 식곤증, 그리고 정신적인 나태함, 때문이다.
이런 나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게으름과 무기력함이 일어나고, 증가하고, 더욱 강해진다.
흥분과 혼란을 일으키고,
흥분과 혼란이 증가하고,
흥분과 혼란이 더욱 강해지는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안주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다.
마음이 안주하지 못하고 들떠있는 사람에게
흥분과 혼란이 일어나고, 증가하고, 더욱 강해진다.
의심을 일으키고,
의심이 증가하고, 의심이 더욱 강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이 원인보다 더 강력한 원일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부적절한 주의 집중’ 때문이다.
어떤 것에 부적절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의심이 일어나고, 증가하고, 더욱 강해진다.
그러면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욕망을 버리고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이 원인보다 더 강력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추하고 더러운 대상[에 대한 관찰]’이다.
이런 추고 더러운 대상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욕망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욕망은 사라진다.
악의를 일으키지 않고,
나는 이 원인보다 더 강력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자애에 의한 마음의 해탈‘이다.
자애의 의한 마음의 해탈에 적절하게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에게 악의가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악의는 사라진다.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버리는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이 원인보다 더 강력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노력, 끈기, 분투노력함의 요소’의 세 단계이다.
이렇게 노력을 일으킨 사람에게
게으름과 무기력함은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게으름과 무기력함은 버려진다.
흥분과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흥분과 혼란을 버리고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이 원인보다 더 강력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고요한 마음’이다.
이렇게 마음이 고요한 사람에게
흥분과 혼란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흥분과 혼란은 버려진다.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일어난 의심을 버리는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이 원인보다 더 강력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의심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의심은 버려진다.
무아 개념의 확립
앙굿따라 니까야 6부 104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여섯 가지의 이익을 보면 예외 없이 모든 현상에서 무아의 개념을 세우는 데 충분하다. 무엇이 여섯인가?
-나는 이 세상으로부터 초연하게 지내겠다.
- ‘나’에 대한 개념을 버리겠다.
- ‘나의 것’에 대한 개념을 버리겠다.
- 나는 특별한 지혜를 구족할 것이다.
- 나는 원인을 선명하게 이해할 것이다.
- 원에서 생긴 현상을 분명하게 이해할 것이다.
삼독을 제거하기 위하여
앙굿따라 니까야 6부 107
세 가지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이다. 이 세 가지를 제거하기 위하여 다른 세 가지를 닦아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 인가?
- 탐욕을 제거하기 위하여 더러움에 대한 마음을 닦아야 한다.
- 성냄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통찰력을 닦아야 한다.
진정으로 비구들이여, 이 세 가지를 제거하기 위하여 세 가지 좋은 것을 닦아야 한다.
악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앙굿따라 니까야 6부 108
세 가지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악한 생각, 악한 말, 악한 행동이다.
이 세 가지를 제거하기 위해서 다른 세 가지를 닦아야 한다. 무엇이 세가지인가?
- 악한 생각을 제거하기 위하여 좋은 생각을 닦아야 한다.
- 악한 말을 제거하기 위하여 좋은 마을 닦아야 한다.
- 악한 행동을 제거하기 위하여 좋은 행동을 닦아야 한다.
진정으로 비구들이여, 이 세 가지를 제거하기 위하여 세 가지 좋은 것을 닦아야 한다.
청정한 독신 생활의 의미
앙굿따라 니까야 7부 47
어느 때 브라흐민 자눗소니가 부처님께 와서 인사를 드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고따마 존자님은 청정한 독신생활의 삶을 산다고 천명하십니까?”
“브라흐민이여, 어떤 사람에 대하여 말하기를‘그는 깨지지 않고 얼룩지지 않은 온전하고도 청정한 독신생활의 삶을 산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마사지와 안마를 받음]
“그러면 고따마 존자님, 어떤 것이 청정한 독신생활의 삶에서 깨지고 얼룩진 삶입니까?”
“여기에 브라흐민이여, 어떤 사문이나 브라흐민은 온전히 청정한 독신생활의 삶을 산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여인과 성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인으로 하여금 기름 바르게 하고 목욕하게 하고, 여인의 마사지와 안마를 받습니다. 그는 이것을 즐기고 기다리고 만족을 느낍니다. 이것은 청정한 독신생활의 삶에서 깨지고 얼룩진 삶입니다. 그는 청정하지 못한 독신의 삶을 사는 사람 병.사.슬픔, 고통. 정말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놀이를 하고 즐김]
어떤 사문이나 브라흐민은 완전하게 독신생활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여인과 성행위를 하지 않고, 여인으로 하여금 기름 바르게 하거나, 목욕하게 하거나. 여인의 마사지와 안마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인과 놈담을 주고 받으며 놀이를 하고 즐깁니다. 그는 이것을 즐기고 기다리고 만족을 느낍니다. 이것도 또한 청정한 독신생활의 삶을 사는 사람이고 성적인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생로병사.슬픔, 고통, 절말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여인들을 응시함]
브라흐민이여, 어떤 사문이나 브라흐민은 완전하게 독신생활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샐제로 여인과 성행위를 하지 않고, 여인의 마사지와 안마도 받지 않고, 여인과 농담도 주고 받지 않으며, 놀이로 즐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인들을 응시하고 그들의 눈을 응시합니다. 그는 이것을 즐기고 기다리고 만족을 느낍니다. 이것도 또한 청정한 독신생활의 삶에서 깨지고 얼룩진 삶입니다. 그는 청정하지 못한 독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고 성적인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 라고 불립니다. 그는 생로병사. 슬픔. 고통,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여인들의 웃음소리에 귀 기울림]
브라흐민이여, 어떤 사문이나 브라흐민은 완전하게 독신생활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여인과 성행위를 하지 않고, 여인의 마사지와 안마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인과 농담도 주고 받지 안흥며, 놀이로 즐기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눈을 응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벽 뒤에서 아니면 울타리를 통하여 여인들의 웃음소리, 말소리, 노랫소리, 우는소리를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는 이것을 즐기고 기다리고 만족을 느낍니다. 이것도 또한 청정한 독신생활의 삶에서 깨지고 얼룩진 삶입니다. 그는 청정하지 못한 독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고 성적인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생로병사, 슬픔, 고통,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여인과의 과거를 회상함]
브라흐민이여, 어떤 사문이나 브라흐민은 완전하게 독신생활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여인과 성행위를 하지 않고 여인의 마사지와 안마도 받지 않고 여인과 농담도 주고받지 않으며, 놀이로 즐기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눈을 응시하지도 않으며, 벽 뒤에서 아니면 울타리르 통하여 여인들의 웃음소리, 말솔, 노랫소리들을 귀 기울여 듣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여인과 웃도 떠들고 놀던 때를 회상합니다. 그는 이것을 즐기고 기다리고 만족을 느낌니다. 이것도 또한 청정한 독신생활의 삶에서 깨지고 얼룩진 삶입니다. 그는 청정하지 못한 독신의 삶을 사람이고 성적인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생로병사, 슬픔. 고통,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브라흐민이여, 나는 이 중에 내 안에 버려지지 않은 성적인 속박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천명하였습니다.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브라흐민 자눗소니는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무상에 대한 선인의 가르침
앙굿따라 니까야 7부 70
“비구들이여, 옛날에 아라까라는 고단의 지도자인 스승이 살았는데 그는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수백 명의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인생은 짧다. 오! 브라흐민들이여, 우리의 살은 제한되 있고 보잘것 없고 괴로움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진리를 깨달아라! 선을 행하라! 청정한 삶을 살아라! 태어난 것들에게 불명이란 없다.
마치 풀잎 끝의 이슬방울이 해가 뜨면 재빨리 말라버려 잠시도 가지 않듯이, 우리의 삶도 또한 이슬방울 같다.
마치 큰 빗방울이 물에 떨어져 물거품이 생겼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잠시도 가지 않듯이, 우리의 삶도 또한 물거품 같다.
마치 물 위에 막대기로 그은 선이 긋자마자 사라져 잠시도 가지 않듯이, 우리의 삶도 또한 물 위에 그런 선과 같다.
마치 산의 계곡 물이 재빨리 흘러 모든 것을 휩쓸어 가면 잠시도 순간도, 일초도, 머물지 않고 돌진하며 소용돌이치며 흐르듯이. 우리의 삶도 또한 산의 계곡 물과 같다.
이와 같이 사람의 삶은 이슬과 같고, 물거품 같고, 물 위에 그은 선과 같고, 산의 계곡 물과 같다. 인생은 짧고, 제한되 있고 보잘것없고, 괴로움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진리를 깨달아라! 선을 행하고, 청정한 삶을 살아라! 태어난 것들에게 불멸이란 없다.‘
그러므로 비구들여, 장차 후회하지 않도록 고요한 곳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
앙굿따라 니끼야 8부 53
어느 때 부처님은 웨살리 큰 숲의 중각강당에 계셨다. 그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마 비구니가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면 그 가르침을 듣고 홀로 떨어져서 부지런히 굳건히 열성을 다하여 정진하겠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고따마여, 어떤 것을 알 때에 그것이
탐욕으로 이끌지 탐욕을 버림으로 이끌지 않으며,
묶임으로 이끌지 묶임에서 벗어남으로 이끌지 않으며,
윤회의 축적을 이끌지 윤회의 줄임으로 이끌지 않으며,
많은 욕심으로 이끌지 욕심이 적음으로 이끌지 않으며,
불만족으로 이끌지 만족으로 이끌지 않으며,
얽힘으로 이끌지 떨어져 있음으로 이끌지 않으며,
게으름으로 이끌지 정진으로 이끌지 않으며,
사치스러움으로 이끌지 검소함으로 이끌지 않을때,
고따마여, 이와 같은 것들은 ‘담마가 아니고 계율이 아니고 스승의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어떤 것을 알 때에 그것이
탐욕을 버림으로 이끌며, 묶임에서 벗어남으로 이끌며, 윤회의 줄임을 이끌며, 적은 욕심으로 이끌며, 만족으로 이끌며, 떨어져 있음으로 이끌며, 정진으로 이끌며, 검소함으로 이끌 때, 고따미여, 이와 같은 것들은 ‘담마이고, 계율이고, 스승의 가르침이다.’라고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업의 사슬
앙굿따라 니까야 10부 174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살생하는 데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탐욕 때문이며 성냄 때문이여 어리석음 때문이다.
도둑질하며 삿된 음행을 하는 데에도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탐욕 때문이며 성냄 때문이며, 어리석음 때문이다.
거짓말하며, 이간질하며, 악담하며, 잡다마는 데에도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탐욕 때문이며 성냄 때문이며 어리석음 때문이다.
탐욕과 악의와, 잘못된 견해가 일어나게 되는 데에도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탐욕 때문이며 성냄 때문이며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업의 사슬을 만든다. 그러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부수어 버리면 업의 사슬은 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