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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렐류드(Prelude) (하)
전화위복의 촉매, 카스트로헤리스
지각변동이 없는한 광장한(廣長) 메세타가 달라질리 없지만 파란 밀보리 떡잎들이 불과
40일에 찬란한 황금벌로 변했다.
어찌 자연의 힘을 찬탄하지 않을 것이며 그 신비를 어찌 찬미하지 않을 수 있는가.
20km에 근사한 끝 없는 지평선 메세타 길이 좀 지겨운 느낌이었던 전번과 달리 자연의
신비를 노래하며 걷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의 짜증의 근원은 길이 아니고 길을 걷는 사람들에 있는 것 아닌가.
세계의 대중이 몰려오므로서 진주는 묻히고 지저분한 자갈만 보이기 때문에.
카스트로헤리스는 전번에 프랑스 길에서 최초로 40km를 돌파하도록 자극한 마을이다.
긴 메세타와 아쩔한 모스텔라레스 고개를 넘는 42km를 걷게 했으니까(카미노프랑세스
13번글 참조)
5개의 알베르게가 모두 문을 열었으나 굳이 산 에스테반(San Esteban/지자체운영)을
찾아간 것은 프랑스 길에서 유일하게 만원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유일하게 문을 연 집이라 조기만원으로 그리 되었다 해도 인정미 없는 관리인
이라는 인상이었는데 여전히 고약한 성품이라는 느낌이었다.
너른 숙소의 하층 침대는 이미 찼고 남은 것은 상층과 매트리스(mattress) 뿐이었다.
나는 평소에도 침대보다 맨바닥을 선호한다.
더구나 내게는 오르내리기 거북한 벙크 상층에 비해 매트리스가 보료에 다름 아닌데도
관리인은 한사코 상층에 오르기를 강요했다.
"매정한 놈, 너는 부모도 없느냐"
혼잣말을 하며 상층에 자리를 폈다.
(대부분의 경우 늦게 도착하는 내게 하층 침대가 차지될 리 없지만 매번 하층 젊은이의
선뜻한 양보로 상층에 올라본 적이 없었던 전번과 달리 아무도 나서지 않았으니까)
선하심 후하심(先何心後何心)인가.
매트리스로 옮기라는 관리인.
이 관리인에 비해 나을 것 없이 고약한 늙은이인가.
시설은 매트리스와 화장실 외에는 아무것도 이용하지 않았으며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유일하게 도나티보 함(box)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먼동 트기 전에 나왔으니까.
내게는 도나티보(donativo/기부금제)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대부분의 경우 정한 금액을 지불하는 것보다 늘 더 많이 박스에 넣게 되기 때문인데 이
집에는 단 1센트도 내놓고 싶지 않았다.
새벽같이 모스텔라레스 고개를 넘어 이테로 데 라 베가를 지날 때는 감회가 새로웠다.
카스트로헤리스의 해프닝이 없었다면 아마 일속(日速) 40km~50km의 주행과 1주간의
단축이 없었을 것이고 그럼 아라곤 길도 없고 지금 이 길을 걷고 있지도 못할 것이니까.
새옹지마(塞翁之馬)로 풀어볼 일인가?
너무 소극적이고 운명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기독교 신약 데살러니카 전서) 는 사도 바울의 권고에는
운명론을 경계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스스로 해결사가 되라는 주문이 내포되어 있다.
시르가와 레디고스
오테로 라르고 ~ 보아디야 델 카미노 ~ 프로미스타 를 지나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에서
전번과 다른 루트를 택했다.
우시에사(rio Ucieza) 강과 오른쪽 왼쪽을 번갈으며 비요비에코(Villovieco, 비르헨 델
리오 예배당(Ermita de la Virgen del Rio) 까지 나란히 간 후 시르가로 가는 길이다.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Villalcazar de Surga)는 전통적인 순례자 마을이다.
전번에 맘에 들었으면서도 아직 이른데다 알베르게가 5월부터 문을 연다해서 그냥 지나
쳤던 인구 200명쯤 되는 자그마한 마을이다.
이번에는 이 양지 바른 곳에 묵으리라 작심하고 갔다.
내 사정을 들은 관리인 안스(Hans)는 마드리드 길 팸플릿을 꺼내어 함께 궁리를 했다.
마드리드 길에 관한 자료와 정보가 전혀 없는 내게 이 팸를릿은 한밤의 플래시(flash)에
다름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에게도 단 하나뿐이라 내게 줄 형편이 아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자기 디카에 내용을 일일이 담은 후 그 자료를 흔쾌히 내게 주었다.
마드리드 길을 걷는 동안 많은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음에도 길 내내 그에게 감사했으며
카미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의 호의를 기억할 것이다.
이렇듯 좋은 기분을 망쳐놓은 청년이 몹시 얄미웠다.
대뜸 재퍼니스(Japanese)냐고 묻는 교양 없는 놈.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질문을 한 그에게 우리말로 "내가 왜 대답해야 하니 이 무식한 놈아"
그가 알아들었을 리 없으나 화난 듯한 내 표정에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비록 수다쟁이지만 어느 나라 사람이냐(from where?)고 물은 독일녀는 정중한 대답을
받았는데 이 놈이 그 차이를 깨달았으면 다행이겠는데.
한데, 마을 규모에 비해 큰 교회에 대대적인 보수가 진행중인데 입장료를 받는다.
교회에는 별무관심인 내가 안에 깊이 들어갈 리는 없지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있는가.
(메뉴 '카미노 이야기 14번글 참조)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와 산 소일로를 지난 후 칼사다 로마나, 칼사디야 데 라 케사까지
16km가 넘는 긴 직선로 비아 아끼타나를 지나 레디고스에서 멈췄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비가 오락가락 한데다 마드리드 길 분기점인 사아군이 한나절 쯤
의 거리 16km 남짓 남았을 뿐이라 안배 차원에서.
주민수 70여명인 작은 마을 레디고스(Ledicos)는 전번 지날 때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바르와 구멍가게까지 운영하고 있는 사설 알베르게는 안뜰도 있고 무난한 편이다.
6유로 벙크(bunk/2단침대)는 이미 만원이고 7유로 짜리 2층으로 안내되었다.
너른 홀에 침구를 갖춘 단층 침대가 거의 공치고 있어서 아주 편한 분위기다.
1유로 차이라면 당연히 2층으로 몰려들 듯 한데 1유로를 아끼는 서양 순례자들을 이해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인과 달리 참으로 힘겹게 온 순례자들이다.
헝가리의 양손녀(養孫女) 에디나의 말대로 돈과 시간 모두 여유롭지 못한 서민들이다.
한국인들처럼 최고가의 장비는 꿈도 꿀 수 없고 외식은 여간한 부담이 아니다.
갖가지 발병이 나서 보는 사람도 가엾고 안쓰럽지만 싸메고 걷기를 강행한다.
하루라도 차질이 있어서는 안되고 일부 구간이라도 차량을 이용하는 것은 순례 정신과
경제가 공히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숙소 안에서 3명의 한국인을 만났다.
2(자매?) +1인데 도중에 일행이 되었다는 그네는 60전후의 여인들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후 독일 함부르그의 딸집에 가려 한다는 여인도 내가 한국 영감으로
보이지 않아서 모른체 했단다.
수첩에 기록하는 글씨가 한글인 것을 보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는데 대다수에게 그렇게
비췬다면 그들이 틀린 것이 아니고 내게 이상이 있다는 건데 내가 왜 그리 되었을까.
그녀 역시 '고향 가마귀 론'을 들지 않더라도 한국 늙은이를 만나 반가운데다 내 카미노
행적에 압도되어 내게서 많은 것을 들으려 했다.
자매와 달리 그녀의 이미지는 적극적으로 솔선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한국 죽을 끓여 넷이 한 탁자에 앉게 했다.
김치는 없지만 실로 56일 만의 한국식 식탁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캔맥주를 즐겨 마시고 있는데 안주 없이 마시는 것을 자제하라고 권
할 때는 초면이지만 누이동생 같다는 느낌을 갖기도 했다.
사도 야고보의 길도 걷기 위해 왔음을 강조하는 여인이다.
토말 길 네그레이라에서 만난 두 50대 여인의 견강부회와 전혀 다르다.
프랑스 길 말미에 만난 이 여인이야 말로 한국인들로부터 받아온 내 절망감을 불식시켜
주고 있는 고마운 한국안아다.
아디오스 프랑스 길이어, 사아군이어
작은 마을 레디고스의 밤은 예상 외로 편안했다.
1유로의 차이 치고는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넓고 깨끗한 방과 샤워실에서 수염과 손톱
발톱을 다듬을 만큼 여유로웠으니까.
내게 일어나는 신체적 특이사항은 5월 1일 아내에게 보낸 엽서에도 밝혔다.
머리와 수염은 물론 손.발톱까지 자라는 속도가 국내의 5분의1쯤으로 줄어든 것 같다고.
집 떠나오기 전날(4월 2일) 빠짐 없이 단속한 후 5월 1일 수염과 손, 발톱을 다듬었는데
5월 29일 밤에 레디고스에서 그 일을 했으니까.
원인이 무엇일까.
달라진 것이란 밥 대신 빵을 먹고 있는 것 뿐인데.
그러나, 마드리드 길의 역(逆)시점인 사아군을 목전에 두고 깊은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그 상념은 5월 30일 6시 50분 레디코스를 떠나 사아군으로 가는 길에서도 계속되었다.
나바라대학교의 페르난데스 박사, 부르고스의 마리에, 시르가의 안스 등 모두의 염려가
현실처럼 중압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조금은 동의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국내에서도 대간과 9정맥, 10대로의 시작은 늘 그랬으니까.
심지어 4번이나 반복한 대간까지도 첫 출발은 그랬으니까.
아침나절인 10시쯤에 사아군 들머리에 도착했다.
전번과 달리 직선로를 택해 가다가 사아군 거주 중년남과 동행하게 되었다.
다른 대화는 금방 끊기지만 사도 야고보의 길 이야기는 어느 정도 이어갈 수 있다.
반복 효과일 것이다.
이 사람도 내 행적에 대해 믿으려 하지 않았다.
몇살이냐기에 세텐타 이 시에테(setenta y siete/77)라 했더니 피에(pie/foot), 안단도
(andando/walking), 레알멘테(realmente/really)만 반복했다.
모두 발로 걸은 게 사실이냐는 물음이겠다.
단어만 모아서 "이르 안단도 아 마드리드 데 사아군 마냐나"(ir andando a Madrid de
Sahagun manana/내일 사아군에서 마드리드로 걸어간다 )에는 고개만 절레절레했다.
사아군에서 우선 할 일은 우체국 방문이었다.
아라곤 길을 떠날 때 산티아고 우체국에서 사아군 우체국으로 탁송한 짐을 최종 종착지
마드리드로 재탁송해야 하므로.
우체국 일을 마친 후 '산타 크루스의 성 베네딕트 수녀원'(Monasterio Benedictino de
la Santa Cruz)을 찾아나섰다.
디스쿨페(disculpe/excuse)를 거듭 조아리며 간신히 찾아갔으나 문을 닫았다.
전번에 묵었던 클루니(Cluny)가 하도 북적대어 조용히 쉬려 했는데.
클루니로 가다가 레디고스의 1 여인을 만났다.
수퍼를 찾고 있는 그녀를 안내하면서 묵시아에서 에디나랑 한 것 처럼 준비는 내 몫이고
조리는 그녀가 하기를 제의했으나 자존심이 강한 여인인가.
흡사한 분위기였는데도 묵시아의 재현은 아뤄지지 않았다.
클루니는 역시 북적거렸다.
게다가 정원 64명인 2층 홀 안에 한국인은 20%에 육박하는 12명.
마치 한국인 단합대회라도 벌이는 분위기였다.
비시클레타(bicicleta/bicycle) 순례자들을 제외하면 한국인이 국가 단위 1위일 것이다.
한국인들은 밥을 너무 많이 지었는가.
남으니까 먹으란다.
이 무슨 해괴한 초대인가.
사아군은 좋다가 만, 씁쓸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눈 후 비맞으며 아침나절을 함께 걸었던 S씨!
거북이처럼 뚜벅뚜벅 걸어가더라도 차량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는 60된 S를 전번에 만나
대화했던 그 탁자에 다시 앉아 지난 일을 반추해 보았다.
그 밤, 나는 드디어 진지한 순례자를 만난 기쁨에 들떠서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한국인들이 지혜로운 순례 패턴(pattern)으로 삼는 챠량 이용을 결코 하지 않을 것임을
결연히 표명했던 그를 2주도 못되어 산티아고의 오브라도이로 광장에서 다시 만나다니.
그 때의 내 기분은 실망 보다 더한 절망적이었던 기억이다.
나와 동행할 체력이 되지 못하므로 천천히, 그러나 기어이 산티아고 까지 걸어서 가겠다
던 그가 나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레디고스의 3여인은 끝까지 걸어갈까.
이 밤이 가면 함께 밤을 보내는 클루니의 64명이 63대 1로 갈라서게 된다.
본래, 파장에는 좋은 일보다 궂은 일이 떠오르기 마련인가.
잠은 오지 않고 언짢았던 일들이 한밤도 아랑곳 없이 맴돌아 아예 끄집어 냈다.
용서를 빌어야 한다면 밤새워 빌려고.
그래야 마드리드 길이 홀가분할 것 같으니까.
사도 야고보의 길을 모두 걷지는 못했으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프랑스 길에만 유난한
것은 워낙 많은 인파가 이 길로 집중하기 때문일까.
첫번째는 오 세브레이로의 술취한 여인이다.(메뉴 카미노이야기 23번글 참조)
두번째는 어제 낮에 비아 아키타나를 걷는 중에 만난 남자다.
요즘의 고상한 표현으로는 지적 장애인이다.
어떤 연유로 혼자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스페인인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RESPETEN "EL CAMINO" POR FAVOR NO TIRAR BASURAS>
(카미노를 소중히 합시다. 제발 쓰레기를 버리지 마십시오)
간판이 붙은 휴게소에서 지나가는 비를 만났다.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이 왜 걸려있을까.
내게 필요한 사람의 친구가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친구가 되어야 하는데.
그저께 시르가 알베르게에서 만났으며 오늘 또 클루니에서 만난 젊은 한국여인이 맘에
걸리는데 아무래도 프랑스 길에서 털고 가지지 않을 것 같다.
나와 인연이 있는 중도시 IS가 고향이라는 그녀가 만일 내 손녀라면 나는 어찌 했을까.
그녀가 사도 야고보의 프랑스 길을 걷고 있는 까닭을 내가 알 리 없지만 세심한 관심과
관찰이 요망되는 여인인데 아디오스 프랑스 길, 아디오스 사아군 해야 한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