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68
집단지성이 구현되길 바란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올해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다. 4월 10일에 치르는 22대 총선의 결과에 따라 대한민국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대외적으론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주된 관심사다. 트럼프의 재등장이 현실화한다면 우리 경제는 물론 안보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외부충격이 어떻든 우리가 선택하는 총선만이라도 집단지성이 모아지 길 바란다.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은 그가 현대사에 끼친 영향보다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가계 혈통을 조사하여 오래전부터 관념적으로 가정해 온 우생(優生) 담론을 이론으로 체계화하려 했다. 인간의 신체는 물론 지적능력도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학설이었다. 골턴의 우생학은 불행히 나치의 인종청소 도구로 이용되었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장애인들까지 홀로코스트 대상이 되었다.
골턴의 관찰력은 그의 외사촌인 찰스 다윈 못지않았다. 생물학의 울타리를 넘어 다양한 학문의 창을 들여다본 골턴의 지적 호기심이야말로 혈통의 영향인 듯하다. 오늘날 사회과학에서 통계작성에 가장 많이 활용하는 회귀분석의 근거도 골턴이 제시했다. 부모와 자식들 간에 키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사람의 신장은 평균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중심극한정리)이 있다고 본 것이 기초가 되었다.
골턴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집단지성이다.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집단지성은 영국의 시장통에서 증명되었다. 1907년 골턴은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발견했다. 매여있는 황소 한 마리 무게를 가장 정확히 알아맞히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가축 품평회 행사였다. 787명이 적어낸 황소 무게의 평균은 1,198파운드로 실제 무게와 단 1파운드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기록지를 넘겨받은 골턴은 똑똑한 개인보다 집단의 지성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축전문가들의 추정치보다 정확했기 때문이다. 일별할 광경조차 눈여겨 관찰한 그의 지성이 매섭다.
집단사고(group think)에 대한 통찰이 있다.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Irving Janis)는 집단사고를, 구성원의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생각과 다양한 의견을 억압하는 일련의 집단 심리적 현상이라고 규정했다. 응집력이 높고 폐쇄적일수록 이러한 집단사고에 매몰되기 쉽다. 물론 집단사고에 빠지면 그룹 내의 다른 의견이나 건전한 비판을 불만으로 치부한다. 그러한 집단에서는 비이성적이며 즉흥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소수의 강경론자가 득세하고 그 전체를 지배하는 것도 집단이 갖는 특성이다. 따라서 집단사고의 지력은 기껏해야 평균에 수렴되고 상위의 지성은 반동의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어빙 제니스는 집단사고에 대한 증상들을 제시했다. 자신들은 잘못될 리 없다는 무오류의 환상에 빠진다. 무오류가 성역화되면 집단의 우두머리는 가랑잎을 타고 강을 건넌다. 이른바 ‘빠’가 만들어진다. ‘빠’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착각하거나 정의를 강변한다. 다른 집단은 복속의 대상일 뿐 동반자일 수 없다. 의사결정에는 만장일치가 좋다고 생각하며 집단이 싫어하는 말은 스스로 검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또 하나는 집단의 결속에 위협이 되거나 부정적인 정보는 철저히 차단하려는 태도다.
집단사고는 전체주의의 속성을 갖는다. 개체의 이성이 집단에 종속되면 다수의 위압 앞에 가녀린 신념의 유리 막대는 쉽게 부서져 버린다. 독립적 개인에게는 따뜻한 심장이 존재하나 집단에는 가슴이 없다. 악인에게도 그의 영혼 어딘가에는 희미한 양심이 떡잎을 드러내고 있지만, 지성이 실종된 집단은 고결한 양심의 맹아에 고엽제를 뿌린다. 집단이나 국가에 도덕과 양심을 기대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집단사고에 휘둘리는 떼거리 문화가 고착화하고 있다. 소위 팬덤 정치가 그렇고 패를 가른 언론과 노동 현장과 수많은 이익집단에서도 냉철한 지성을 찾기 어렵다. 광화문의 촛불은 성스러운 혁명으로까지 승화되었다. 하지만 광장의 열광은 중우정치의 민낯을 보여준 역사로 기록될 처지가 되었고, 대중의 승리라고 자축했던 축배의 술잔엔 내로남불이란 촛농만 흥건하게 고여있다.
분별없이 떼로 몰려다니는 사람들은 집단사고에 자신의 이성을 저당 잡힌다. 그들은 무리 속에서 소속감과 동질감을 느끼며 안위를 구걸한다. 다른 집단은 적이어야만 하고 적과 대결하기 위해 우두머리를 세운다. 우두머리는 같은 패들에게 노획물을 나눠준다는 미끼로 권력을 향유한다. 내 편이기만, 하면 어떤 잘못도 눈을 감고 상대의 잘못은 티끌 하나라도 돋보기를 들이댄다. 위선과 증오의 언어를 배설하는 정치만이 아니다. 각종 집단의 이기적 행동과 억지는 막무가내다.
우리는 골턴이 발견했던 집단지성의 도출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축 품평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누구의 조언이나 간섭을 받지 않았고 각자 독립적인 상태에서 황소 무게를 추정했다. 옆 사람이 친분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같은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각자는 6펜스의 참가 티켓을 구매한 경쟁자였다. 같은 집단, 같은 목적, 같은 안목을 가진 구성원들이 만장일치로 손뼉 친다면, 집단으로 망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대한민국이란 배가 대양의 항해를 시작할지, 낡은 이념의 모래톱에 좌초해 있을지 분기점에 와있다. 집단지성을 기대하지만, 여의도 시장통엔 6펜스의 티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광기의 ‘빠’들 무리로 북적인다. 총선이 어스름에 달하면 석양에 몰려든 가창오리떼가 따로 없을 것이다. 자연에서 떼를 짓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천적을 피하거나 먹이를 찾거나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서다. 그들의 적은 누구인가, 아니면 어떤 먹이를 찾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