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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국화
프랑스의 조르주 라 투르 (Georges de la Tour /1593~1652)의 그림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예전 ‘그림 속의
촛불’ 이야기를 할 때 잠깐 만나고는 그 동안 잊고 살았는데, 서성거리는 마음 때문에 애를 먹다가 갑자기
그의 작품이 떠 올랐습니다. 답답하고 심란한 마음을 잠재우는 ‘진정제’로 더 없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세금 납부 The Payment of Dues / 99cm x 152cm / 1630~1635
촛불을 받아 가장 빛나고 있는 것은 책상 위에 놓인 장부입니다. 세금 징수원은 한 눈으로는 장부를 보고 있고
다른 손으로는 동전을 세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전문인 그의 표정은 따분해 보입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의 눈은 가라 앉았습니다. 얼마가 되었든 간에 세금은 사람의 감정을 흔들어 놓습니다. 특히 저
시대에는 더 그랬겠지요. 오른쪽 영수증을 받은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가느다란 한숨 소리가 들립니다.
라 투르는 17세기 가장 흥미로운 화가였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1915년, 독일의 미술사가였던
헤르만 보스 (Hermann Voss)에 의해 소개될 때까지 300년 가까이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화가였습니다.
때문에 그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땅에서 유물을 발견하는 고고학자처럼 미술사의 밭에서
주옥 같은 화가를 찾아 내는 미술사가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싸우는 음악가들 Quarrelling Musicians / 94cm x 140cm / 1625~1630
야단났습니다. 왜 이 난리가 난 걸까요? 연습을 하다가 자꾸 ‘삑사리’ 내는 것 때문에 커진 말다툼이 이 지경에
이르렀나 봅니다. 왼쪽 남자가 작은 칼을 빼 들었습니다. 눈도 감았군요.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죠.
그 남자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남자도 오른손에 뭔가를 쥐었습니다. 말려야 할 사람들은 내 알 바가 아니라는
듯 즐겁습니다. 못된 동료들이군요.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왼쪽에 있는 여인입니다. ‘그만해’라고 간절하게 말하고
있지만 들리겠습니까? 저럴 때는 프라이 팬으로 싸우는 사람들 머리를 한 번씩 두드리면 됩니다. 사람 사는 것이
모두 저렇습니다.
라 투르는 로렌 지방의 낭시에서 30km정도 떨어진 빅 수르 세이유 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석공이었지만 아버지는 빵 굽는 사람이었고 라 투르는 7명의 아이 중 둘째였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빵 굽는
일을 했는데, 라 투르의 아버지가 장인의 직업을 따른 것을 보면 석공 일보다는 빵집 일의 수입이 더 좋았기
때문이겠지요? 라 투르의 성장 환경은 풍요로웠다고 합니다. 저도 빵집 아들이 소원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독서하는 성 제롬 Saint Jerome Reading / 62.2cm x 55cm / 1621~1623
영어 이름이 제롬인 히에로니무스는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공로로 기억되는 성인입니다.
평생을 성경 번역에 몸을 바친 그는 동굴에서 책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묘사됩니다. 특히 발에 박힌 가시를
뽑아 준 인연으로 항상 그의 옆에서 그를 지켰던 사자와 함께 등장하는데, 이 작품에는 사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카라바조도 아니고 렘브란트도 아닌 라 투르만의 빛을 주무른 솜씨가 보입니다. 그런데 사자는 어디에 ---.
라 투르가 어려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다만 그가 화가로 성장한 것을 보면 혹시
낭시나 이탈리아를 여행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할 정도입니다. 요즘에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질과 노력,
그 중에 제일은 돈’이라는 자조의 말도 있지만 뭐, 누구한테 무엇을 배웠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1617년, 24세의 나이에 라 투르는 자신보다 두 살 연상인 다이안느와 결혼합니다.
포리지 먹는 사람들 The Porridge Eaters / c.1622~1625
포리지는 야채나 고기 같은 것이 들어간 잡탕 죽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림 속 두 노인이 먹고 있는 것을 보면
국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입을 벌린 노파의 목에는 힘든 세월을 지내는 흔적이 굵게 드러나 있습니다. 지팡이를
든 남자의 손 등에도 간단치 않은 세월이 내려 앉았습니다. 모든 배경을 지워버리고 빛에 의한 명암을 강조하자
두 사람의 생생한 표정이 드러났습니다. 지금이라고 저런 사람들이 없을까 ----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아내 다이안느는 작은 귀족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로렌 지방를 다스리던 영주의 재정
출납을 맡고 있었습니다. 3년 뒤 아내의 고향이었던 르네빌에 화실을 장만할 때까지 라 투르는 부모님과 함께
생활합니다. 르네빌로 분가 하기 전 해에 라 투르는 첫 아이를 얻습니다.
눈 먼 음악가 Blind Musician / 84cm x 61cm
차라리 아무 것도 들리지 않으면 머리 속 상상은 나의 것이 될 수 있지만, 눈이 안 보인다고 마음까지 닫히는
것은 아니니까 삶이 더 큰 무게로 느껴지겠지요. 눈먼 음악가에게 품에 안고 있는 악기는 세상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입니다. 악기를 안고 있는 손등의 푸른 핏줄과 굳게 쥔 주먹,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날까지는 결코
지지 않겠다는 그의 결심이 보입니다. 아무 생각 없는 지금의 위정자들보다 100배는 훌륭한 분입니다. 아무럼요.
라 투르 부부의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라 투르는 평생 5남 5녀를 낳습니다. 아이들을 낳은 해를
보다가 한참 웃었습니다. 거의 2년 터울이었거든요. 잠시 지저분하지만 아이를 낳은 해를 나열해 보겠습니다.
1619(아들), 1621(아들), 1623(딸), 1625(딸), 1627(딸), 1628(아들–1년 터울입니다^^), 1630(아들), 1632(아들)
1634(딸), 1636(딸) – 마지막 아이를 낳을 때 다이안느의 나이가 45세였으니까 17년간 아이를 낳은 셈입니다.
혹시 라 투르 부부가 이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까요?
‘아이 돌이 지났지? 그럼 다음 아기를 만들어 볼까 ---‘
허디거디 연주자 The Hurdy-Gurdy Player / 162cm x 105cm / 1631~1636
허디거디는 손풍금의 일종인데 예전에는 ‘악마의 악기’라고도 했답니다. 유럽의 중세를 보면 권력자들이나 귀족
계급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대개 ‘악마의 ~’라는 이름을 붙였죠. 듣는 악마가 기분 나쁘지
않았을까요? 악기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천사들의 몫 아니던가요? 부르는 노래를 알 수 없지만 얼굴을 보면
요즘 노래 중 ‘가는 세월’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연주자의 얼굴에서 흐르는,
세월에 대한 회한의 느낌을 보셨는지요?
1620년, 르네빌로 분가한 라 투르는 클로드 바카라 (Claude Baccart) 밑에서 도제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도제와는 다른 듯 합니다. 왜냐하면 도제는 보통 몇 년씩 스승 밑에서 그림을 배우는데,
다음 해 로렌의 영주가 라 투르의 작품 두 점을 구입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당시의 길드 같은 조직에 가입하기
위한 사전 코스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욥을 비웃는 그의 아내 Job Mocked by his Wife /145cm x 97cm / c.1630~1639
앉아 있는 사내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이고 서 있는 여인은 그의 아내입니다. 얼마 전 욥은 사탄의 공격을 받아
가지고 있는 모든 소와 양 그리고 열 명이나 되는 자식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변하지 않는
그에게 이 번에는 온 몸에 부스럼 이는 병이 덮쳤습니다. 지금 욥은 재 가운데 앉아서 그릇 조각으로 부스럼을
긁고 있는 중입니다. 보다 못한 아내가 ‘몸이 그 지경인데 아직도 하느님을 믿느냐, 차라리 하느님 욕을 하고
죽으라’라고 말하는 중입니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는 늘 인간의 마음이 흔를리는 곳입니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놔둔다면 솔직히 저는 키 큰 여인 편입니다. 고해성사를 봐야 할 일이 또 있군요.
1624년, 로렌의 영주는 작품 한 점을 더 구입하고 교회 장식 업무도 그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그를 후원하던
영주가 죽고 말았습니다. 로렌은 자치 영토였고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인 비어 있는 지역을 유럽
제후들이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로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났고 최후의 승자는 프랑스였습니다.
라 투르가 프랑스 화가로 기록되는 순간이죠.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숨긴 사기꾼 Cheater with the Ace of Diamonds / 106cm x 146cm / 1620~1640
‘전문 도박단’에 걸린 ‘멍청한’ 사내가 안타깝습니다. 허리 춤에 다이아몬드 에이스 카드를 숨긴 사내는 ‘타짜’
입니다. 빛의 반대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어서 어둡게 처리되었습니다. 나쁜 사람이죠. 그 옆에 병을 든 하녀
역시 같은 패거리입니다. 술 잔에 무슨 짓을 한 걸까요? 가운데 여인은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눈은
‘작전’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 금화가 수북한 젊은이는 자기 카드만 보고 있어서 세 사람의 행동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착해서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도박을 해서 손해 보는 것이라는 것을 젊은이는 언제쯤
깨닫게 될까요? 라 투르의 아내가 가운데 여인의 모델이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림이라고 해도 도박하는 모습의
아내를 ---?
전쟁은 라 투르의 집안도 비켜가지는 않았습니다. 라 투르 아내의 언니 남편, 쉬운 말로 하면 동서가 전쟁 중에
사망하는 바람에 라 투르는 동서의 아이 두 명의 후원자가 됩니다. 참 많은 아이를 돌보게 된 것이죠. 어쨌든
1634년부터 시작된 로렌 지방의 프랑스의 지배는 잠시나마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라 투르가 어떻게 처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서류에는 ‘귀족 조르주 라 투르’로 되어 있다니까 아마 새로운 지배 세력에 잘 적응
했던 모양입니다.
점쟁이 The Fortune Teller /101.9cm x 123.5cm / 1632~1635
정신 나간 젊은이가 여기 또 있군요. 노파에게 점괘를 듣고 있는 동안 왼쪽 여인은 남자의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고 있습니다. 가운데 여인은 한층 더 대담합니다. 어깨에 두른 메달을 가위 같은 것으로 자르고 있습니다.
아무 감정 없는 여인의 눈은 남자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프로군요. 점괘가 뭐라고 나왔을까요?
‘오늘 손재수가 있어, 특히 여자들을 조심해야 해’
젊은이들은 바보로, 여인들은 사기꾼이나 소매치기로 묘사한 라 투르의 말을 들어 보고 싶습니다.
1636년부터 라 투르도 견습생을 두게 됩니다. 화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해 심각하게
로렌 지방에 영향을 준 역병이 라 투르가 살고 있는 르네빌에도 닥쳐 들었습니다. 이 일로 라 투르의 조카가
죽는 일이 일어 납니다. 2년 뒤 르네빌은 거대한 화염에 휩싸이게 됩니다. 아마 역병에 대한 소독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집과 라 투르의 화실 그리고 수 많은 그림이 불에 탔습니다. 가족 모두는 낭시에 있는
피난처로 자리를 옮긴 뒤였습니다.
벼룩 잡는 여인 Woman Catching Fleas / c.1630~1639
고요하게 촛불이 켜 있는 장면에는 깊은 사색이나 독서하는 장면이 어울릴 것 같은데 벼룩을 잡는 모습이라니요?
벼룩 잡기에 열심인 여인은 앞 섶이 모두 열린 것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림을 보고 낄낄거리고 있었더니 아내가
힐끗 그림을 보고 한 마디 했습니다.
‘저 여자, 아이 가졌네’
저는 벼룩 잡는 것만 보았는데 아내는 여인의 뱃속 아기를 본 모양입니다. 관심이 다르면 보는 것도 다릅니다.
1639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라 투르는 파리에 있었고 왕으로부터 수고비로 1,000프랑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행간을 더듬어보면 이제 라 투르는 프랑스 전역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1645년, 르네빌에는 새로운 영주가 파견됩니다. 예술을 사랑했던 영주는 르네빌에 도착하자마자 라 투르와 좋은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많이 구입하는 든든한 후원자가 됩니다. 지역의 부유한 사람들이 중요한 고객이
되면서 부유한 생활을 누립니다.
성 요셉의 꿈 The Dream of St. Joseph / 93cm x 81cm / c.1640
예수의 아버지 성 요셉입니다. 약혼을 한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고 조용히 파혼을 결심합니다. 그 때 그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죠. 지금 책을 보다 잠이 든 요셉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천사입니다. 촛불이 주는 고요함 속에서 저는 ‘의로운’ 인간, 요셉의 고뇌를 보고 있습니다.
그의 고뇌 때문일까요, 성경 속에서 성 요셉의 흔적은 아주 미미합니다.
잠시 라 투르의 작품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그의 작품 장르는 크게 종교화와 풍속화로 나눌
수 있습니다. 종교화의 경우 성경 속 이야기를 옮긴 것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한 주제에 대해 여러 번 제작을 한
특징이 있습니다. 음악으로 말하면 변주곡이 많은 것이지요. 그의 작품은 카라바조의 화풍을 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는데 카라바조의 화풍은 이미 그 당시 북유럽 화가들 사이에
추종자가 꽤 있었죠.
목공소의 예수 Christ in the Carpenters Shop / 137cm x 101cm / 1645
라 투르의 작품 중에서 저는 이 작품이 제일 좋습니다. 그림 속에는 어린 예수와 아버지 성 요셉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나이 든 아버지를 위해 촛불을 들고 있는 천사 같은 아이의 모습이
늘 먼저 다가 옵니다. 일을 하다가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길,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표정에는 세상의 모든 평화와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거기에 촛불이 주는 고요함까지 더 해졌습니다. 뭐가 더
필요한가요?
라 투르의 초기 작품은 카라바조의 작품보다 역동적인 면이 떨어지지만 1640년 대부터 극단적인 명암대비와
단순한 인물 형태 그리고 세심한 기하학적인 구성을 적용하면서 자신 만의 세계를 구축합니다. 또한 40년 정도
뒤에 태어난 또 다른 빛의 마술사 얀 베르메르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수 세기 동안
이름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가 현대 미술사가들에 의헤 태양처럼 나타난 화가입니다. 또 다른 화가들에 비해 남아
있는 작품의 숫자가 적습니다. 가장 큰 공통점은 빛의 효과에 집중했던 것인데 베르메르는 햇빛에 의한 효과를,
라 투르는 명암대비와 인공 빛의 확산에 의한 것에 중점을 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새로운 탄생 The New born / 76cm x 91cm / c.1640~1649
살짝 치켜든 손 뒤로 촛불이 숨는 바람에 막 태어난 아이에게 모든 빛이 모이고 있습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두 여인의 눈에는 조심스러움과 안도감 그리고 경건함이 보입니다. 아, 정말 맑고 깊군요 ----. 촛불을 화면으로
끌어 당긴 화가들은 라 투르 이전에도 있었지만 라 투르의 묘사가 가장 뛰어 났다고 합니다.
라 투르의 아이들 중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제자가 됩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아들의 작품도 아버지의 것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닮았다고 하는데 라 투르가 세상을 떠난 후 1660년, 아들은 지역의 장교가 되면서 화가라는
직업을 던져버립니다.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림보다 칼이 더 매력적이다?
램프를 부는 소년 Boy Blowing at Lamp / 1640
라 투르에 대한 악평도 있습니다.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며 이기적이고 불손한, 본질적으로 나쁜 사람이었다는
평도 있고 악덕 지주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평가로 인해 예술가는 선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제 생각을 돌아보게 됩니다.
1652년 1월 15일 아내 다이안느가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 때문에 극도로 괴로워
하던 라 투르는 보름 뒤인 1월 30일,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보름의 시차는 있지만 이 정도라면 세상이
뭐라고 해도 둘의 사랑은 또 다른 세상에서도 계속 되었을 것입니다. 착한 사람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