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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번연의 회심
(심한 모독적 삶→경건한 도덕적 삶→참된 회심으로)
짖궂은 개구장이 번연
번연은 1628년 영국의 엘스토우 마을에서 태어났다. 번연의 부모는 하류 계층의 가난한 서민으로 땜장이였다. 부친이 그에게 준 영향은 거친 입에서 나오는 상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번연의 부모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번연을 초등학교에는 보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가 번연이 받은 교육 혜택의 전부였지만 그 덕택으로 번연은 쓰고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번연이 남긴 수많은 저작들을 볼 때 참으로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번연은 어렸을 때부터 짖궂은 일을 많이 했다. 남의 집 정원에서 과일을 훔쳐 먹는가 하면 들판에서 독사를 막대기로 때려 기절시킨 다음 입을 벌리고 혀를 뽑아내는 아주 위험스러운 장난도 곧잘 했다. 그러나 9-10살이 되었을 때에는 심판의 날을 생각하고 밤낮없이 고민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자기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면 ‘차라리 지옥이 없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종교적 감명을 받고도 갈수록 악해져
그러나 결혼하기 전까지 번연은 악덕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에 있어서 동료 젊은이들 중에서 제일 가는 왕초였다. 지옥이나 지옥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내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타락한 본성은 참으로 악해서 좀처럼 거룩한 길로 들어서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망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다르게 종교적인 인상을 깊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존 번연의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었다. 종교는 생각하기도 끔찍스럽게 여겼고 다른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 말하는 것조차 혐오했다. 그러다가도 다른 사람이 못된 짓을 하면 두려운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하나님을 반항하며 살았고 구원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형식적인 종교 생활로 시작하다
그러다가 20세경에 번연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천만다행으로 경건한 아내를 얻었다. 번연의 아내는 시집올 때 가져온 두 권의 책(보통 사람 천국가는 길, 경건의 실천)을 남편에게 읽어주었는데, 존 번연은 경건하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고 교회에 출석하였다. 처음 교회에 나간 것이지만 존 번연은 아주 열심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대단한 열심을 보였고 교회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지 소중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 세상에서 목사와 집사가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주일날 제일 앞자리에 앉아 박수를 힘차게 치며 찬송을 불렀다. 그러나 번연의 영적 상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낙뢰처럼 떨어진 책망
그러다가 어느 날 주일성수에 관한 설교를 듣고 마음에 큰 찔림을 받았다. 번연 자신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나면 오락을 하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였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번연은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자마자 그 두려움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고 다시 옛날 생활대로 오락을 하며 나머지 주일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마음을 일깨우실 때 이렇게 어떤 구체적인 죄 하나를 지목하여 그 사람의 악함을 깨닫게 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존 번연과 같이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집에 돌아가 애써 그것을 기피하고 잊어버린다.
그 날 주일 오후에 번연은 자치기를 하였다. 그런데 존 번연의 마음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다. “너는 죄를 버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느냐? 아니면 죄를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느냐?” 존 번연은 게임을 하다가 깊은 충격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이미 오랫동안 죄를 지어 왔으므로 구제책이 없다고 핑계하면서 계속적으로 범죄하는 삶을 살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본성의 부패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 번 우리를 흔들어 깨우셔도 우리는 여러 가지 핑계와 구실을 만들어 대며 피한다. 복음과 우리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에 대해서 직면하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계속되는 자비, 윤리적인 신앙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 그런 존 번연에게 하나님은 어떤 가난한 신도와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 번연은 그 사람처럼 성경을 읽는 것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 초보였던 만큼 번연이 좋아했던 것은 읽기 쉽고 흥미로운 역사서였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읽기 어려웠고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존 번연은 ‘훈계를 따라 철저히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 넘어지는 일이 있으면 회개하고 … .
이런 생활이 1년 이상 계속되자 주변 사람들은 존 번연을 보고 놀랐다. 이제 존 번연은 누가 보아도 어엿한 신자가 되었는데, 동네에서 제일가는 폭언가였던 존 번연이 이제는 경건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존 번연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몰랐다고 고백하였다. 전혀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알지 못했으며 양심에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
여기에 큰 함정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넘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영혼을 인도할 때는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반드시 알려 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서 만족하고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격하시켜 영혼으로 하여금 복음을 만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아서는 절대 안 된다.
오늘날 이와 같은 존 번연의 상태에서 멈추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들은 한 번도 죄를 확신한 적도 없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은 적도 없이 단지 성경을 읽고, 그 교훈에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추구하고... 존 번연의 경우처럼 외적으로 볼 때 정말 큰 변화를 겪은 것 같아 보이고...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결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 속에 머무르는 것이다. 정말 우리 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정말 우리 시대에는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신앙의 본질을 찾게 되다
베드포드에 출장 갔다가 처마 밑에 햇빛을 쐬며 앉아 있던 동네 여인들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번연은 큰 충격에 사로잡힌다. 존 번연은 이 날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나는 때마침 볼 일이 있어 베드포드로 갔다. 그 때 어느 길목에서 서너 명의 여인들이 집문가에서 햇볕을 쬐며 하나님에 대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즈음 나도 신앙에 대한 말을 곧잘 참견하던 터이라 그 앞을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 여인들 틈에 끼어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여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여인들의 대화는 내가 도무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수준 높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듭남이라든가, 그녀들의 마음에 미치는 하나님의 섭리라든가, 또 그녀들의 본연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자각 등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여인들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혼에 사랑으로 찾아오시게 하신 일과 마귀의 갖은 유혹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고 자신을 지켰는지를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여인들은 사탄의 온갖 꾀임이나 유혹에 관해 논했다. 어떤 유혹에 의해 고통을 받아도, 사탄의 습격을 받았을 때 어떻게 이겨냈는가를 말했다. 그 여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얼마나 천박한 신앙인지 말했고 자기의 의를 더럽고 무익한 것으로 낮추며 꺼리고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가슴이 뛰어 내 신앙의 상태는 전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혹에 사로잡혔다. 왜냐하면 신앙과 구원에 관해 골똘히 생각할 때도 나는 중생은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또 말씀과 약속이 주는 위로도 알지 못했거니와 내 자신의 악한 마음과 기만과 배신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가슴 깊이 숨겨진 여러 생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했고, 사탄의 유혹이 어떤 것인가도, 어떻게 이를 저항하는가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여인들은 신앙에 관한 대화를 하였는데 번연 자신은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였다. 거듭남, 본성의 비참함에 대한 자각, 자기 의의 덧없음, 사탄의 유혹에 대해서 말했지만 존 번연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이었고, 그 마음에는 더욱 생소한 것이었다. 존 번연은 거기에서 자신이 참된 신앙 안에 들어와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존 번연은 죄에 대해서 민감해지게 되고 골몰히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고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안 가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과 교제하면 교제할수록 나의 현실 상황이 초조하고 하염없이 생각되었다. … 지금에야 나는 새로운 눈으로 성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태 없었던 진지한 태도로 읽게 되었다.
힘겨운 영적 고뇌, 그러나 성실함으로 임함
이런 상태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고 그것을 탐구하면서 번연은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갔다. 이 때 존 번연은 참으로 신중하게 성경을 살폈고 그런 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살폈다. 자기가 정말로 구원에 이른 사람인지 그는 신중하게 살폈다. 때로 우리가 보기에 정말 지나치다 싶을 정도까지 그는 자기 자신을 의심해 보았다. 그런 까닭에 존 번연의 영혼은 쉽게 위로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존 번연은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확실히 해 두기 위해 성경과 씨름했고, 깊이 묵상했으며 진지하게 기도하였다.
우리는 이 점을 참으로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읽거나 기도할 때 자기들의 마음에 위로나 즐거움이나 감정적인 즐거움이 오지 않으면 그것을 따분해 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쉽게 내팽개쳐 버린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절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존 번연의 집념과 성실함을 배워야 한다.
가까스로 얻은 위로
번연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지내던 어느 날, 주일에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아 4:1)라는 설교를 듣게 된다. 설교를 들을 때는 그것이 자기와 무관한 것 같았고 별 감동도 얻지 못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말씀이 마음에 다시 살아나고 이 말씀으로부터 큰 위로를 받게 된다.
그러나 40일 후에 다시 큰 유혹에 부닥친다. 지금까지 성경 안에서 발견한 모든 것을 부인하고 싶은 내적 유혹 속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거의 미칠 지경까지 이르러 자기가 사울의 경우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영적인 고투 속에서도 번연은 성경을 놓지 않고 진리와 씨름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들의 십자가 피로써 화평을 이룩하셨다’(골 1:20)라는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되찾고 차츰 복음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츰 복음의 진리와 능력을 경험하도록 그를 이끌어 주셨던 것이다. 그 후로도 위로와 죄책이 혼합되어 반복되었지만 나중에는 '당신의 의는 하늘에 있다'는 음성을 듣고 오랜 쇠사슬을 벗게 된다. 그러나 존 번연은 그 음성 때문이 아니라 그 음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 마음에 위로와 확신을 얻게 된다.
존 번연에게서 얻는 교훈 / 존 번연의 회심은 루터의 회심과 다른 양상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역시 그 안에서 공통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죄에 대한 깊은 인식, 자신의 부패함에 대한 인식,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복음의 중심적인 진리를 깨닫고 확신하는 일이 두 사람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죠지 휫필드의 구원간증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죤 웨슬리(John Wesley) 등과 함께 18세기 영국의 부흥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말씀의 불꽃으로 한 시대를 불태운 당대 최고의 설교자였다. 휫필드의 사역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에 영향을 미쳤고, 미국의 대각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714년 12월 16일 영국 중부지방에 위치한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상당히 불행한 편이었다. 그의 나이 두 살 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그 결과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잘 받지 못하다가 12살이 되어서야 교회 부설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5살 때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머니를 돕기 위해 약 1년 반 정도 학업을 중단하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여인숙 급사로 일하기도 했다. 더구나 그의 나이 4살 때에 홍역을 앓다가 간호사의 실수로 인해 생긴 흉 때문에 사팔뜨기처럼 보여서 별명이 ‘사팔뜨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18세에는 식비와 수업료를 면제받는 대신에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는 조건으로 옥스퍼드의 펨브로크 대학(Pembroke College)에 입학하였다(1732년). 당시 근로 장학생은 부유층 자제들의 방청소와 심부름 등 시중을 들면서 공부하는 조건이었으므로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이 옥스퍼드 시절이야말로 바로 그가 거듭남을 경험한 소중한 때였다.
그는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는 여인숙에서 일을 마친 후에는 늘 성경을 읽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하나님은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주셨다. 그가 어린 시절 영적인 부분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성경 외에도 ‘켄의 윈체스터 학자들에 대한 안내서(Ken's Manual for Wincester Scholars)’라는 책과 윌리엄 로(William Law)가 쓴 ‘경건한 삶에로의 진지한 부르심(Serious Call to Devout Life)’이었다. 그 외에 그는 많은 청교도들의 책을 포함해서 고전들과 전기들을 많이 읽었다. 이러한 책들은 그가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갖는데 큰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휫필드는 청소년기에 죄에 대해 심각한 갈등을 경험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어렸을 때 종종 어머니의 돈을 훔치면서도 그것을 하찮게 여겼고, 거짓말이나 욕설, 저주의 말, 어리석은 농담 등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곤 했다. 그러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휫필드는 ‘어린 시절의 범죄와 죄악들은 셀 수 없어서 그것들은 내 머리털보다 더 많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나는 죄악 가운데서 태어났고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내 마음 속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강했지만 동시에 죄를 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죄에 대한 심각한 갈등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기도와 금식으로 수많은 날들을 보냈다.
이러한 갈등은 그가 옥스퍼드로 진학한 후에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그가 거듭남을 경험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 가운데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고민 없이 죄사함의 경험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옥스퍼드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면서 온갖 굴욕적인 상황을 견뎌내야 했지만 그는 근면한 자세를 가지고 성실하게 대학시절을 보냈고 글로스터에서처럼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다가 그는 죤 웨슬리, 챨스 웨슬리 등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던 ‘홀리 클럽(Holy Club)’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철저한 자기훈련으로 경건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모두 많은 선행과 경건생활이 자신들의 구원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휫필드 자신도 이러한 경건의 훈련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는 수단이 될 줄로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의 생애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하였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거듭남’이라고 되어 있는 바로 그 경험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죄 문제와 갈등하면서 참 자유를 추구해 온 그에게 마침내 진리의 빛이 임한 것이다.
어느 날 챨스 웨슬리가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이란 책을 그에게 주었다. 그 책은 휫필드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생각들을 허물고 거듭남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해 주었다.
그는 책을 접하고 난 뒤의 갈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듭나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나는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고 성찬에 참여할지라도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이 책을 태워버릴까? 던져 버릴까? 아니면 그것을 한번 추구해 볼까? 나는 그 책을 계속 읽었고, 그 책을 손에 들고 하늘과 땅의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하나님,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제가 마지막에 멸망당하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제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보여주소서!.....
나는 금식을 해왔고 철야도 했으며, 기도와 성례참여 등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것들을 해 보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원히 잊지 못할 나의 친구를 통해서 그토록 귀한 책을 나에게 보내 주시기 전까지 나는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몇 줄 더 읽어나가는 동안에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그 순간부터 거룩한 광선이 내 영혼 위에 비쳤고, 그때야 비로소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자신의 종교적인 경건과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깨뜨리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책을 통해 그로 하여금 기독교 내에서의 종교생활과 경건, 선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며 이러한 삶을 철저히 할 때 구원을 받는다는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거듭남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휫필드는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수많은 날들을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몸부림쳤다. 그때까지 그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은 자기 부인과 불타는 경건을 통해 오는 줄로 생각했다. 이 같은 노력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자 그는 홀리 클럽과의 관계를 끊고 간단한 빵과 차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겠다는 각오로 간절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육체의 쇠잔함과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열정으로 계속해서 기도하였다.
마침내 휫필드는 1735년 어느 날 로마서 8:15-16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다.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휫필드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양자의 영(롬8:15)’을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체험했다. 그 날 비추어주시는 은혜의 빛을 통해 휫필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이 구원의 길인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겼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그는 당시의 체험을 이렇게 간증하였다.
어느 날 나는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면서(은혜를 갈망하면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잠시 후 곧바로 나는 나를 매우 심하게 억압하고 있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탄식하는 영께서 나를 취하셨고 나는 내 구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가는 곳마다 시편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내 기쁨은 점점 나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따라서 나의 탄식하던 날이 종결되었다.
휫필드의 거듭남의 체험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가 체험한 거듭남은 그의 영적생활과 사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거듭남’은 평생 동안 그의 수많은 설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잊을 수 없는 이 거듭남의 체험에 대하여 평생 동안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던 그 날을 회고하면서 휫필드는 ‘그 기쁨은 마치 강둑에서 범람하는 홍수와 같아서 말로 형언할 수 없었으며, 그 날은 영원히 기억될 날이었다.’라고 고백했다. 휫필드는 거듭남을 체험하고 그 놀라운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며 ‘나는 내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사실을 알렸고 내 방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도 그 일을 말했다’고 했다(윗 글의 대부분의 자료는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송삼용 저, 생명의 말씀사, 1998)’에서 발췌한 것임).
위에서 보았듯이 휫필드는 어느 누구보다 경건한 삶을 훈련하며 살았지만, 이러한 경건한 삶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거듭남을 경험해야한다는 도전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영혼의 괴로움 가운데 기도하며 간절히 거듭남을 갈망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그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절망감을 느끼게 하셨고, 그가 모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로마서 8:15-16을 통해 거듭남의 선물을 은혜로 베푸셨다.
▶ 이 거듭남은 휫필드처럼 나중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경험한 것이다. 즉,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가 아무리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떠한지? 여러분의 삶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지? 이러한 자신의 경건함이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하고 연약한 죄인인지 올바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해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휫필드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절망감을 느끼게 하시고, 자신을 구원하시는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셨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는지?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였는지?
여러분은 분명한 거듭남을 경험하였는지?
조나단 에드워즈의 거듭남 체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미국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한 목회자였고 청교도 신학의 완성자이다. 윙키 프래트니는 에드워즈는 ‘오늘날 모든 시대의 미국 사람들 중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미국인 중의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에드워즈 평전을 출간한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은 ‘여러 면에서 평가할 때, 그는 초기 미국 철학자 가운데 가장 예리한 자였으며, 모든 미국 신학자 중에서도 가장 명석한 자였다. 그의 많은 책 중에 적어도 세 권의 그의 저서 『신앙 감정론』, 『의지의 자유』, 『참된 미덕의 본질』는 기독교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저로 꼽힌다.’라고 하였다.
마즈던은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드워즈는 단연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 그는 아직도 세계적인 개혁주의 운동뿐만 아니라 더 넓은 복음주의 세계에서 숭배받고 있는 탁월한 인물이다.’
지금 미국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미국 역사상 최고의 신학자로 인정하고 있다.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청교도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진수(essence)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청교도주의의 정수(quintessence)다.’라고 했다.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들을 알프스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뱅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시험을 받곤 한다. 나에게 있어서 그는 언제나 사도 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인 것 같다.’라고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가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상태에서 나타났다. 에드워즈가 출생할 무렵 뉴잉글랜드는 제1세대 청교도 개척자들이 죽은 후 활기찬 신앙이 쇠퇴해졌다. 리처드 웹스터(Richard Webster)는 18세기 초 뉴잉글랜드의 영적인 퇴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엄청난 변화가 뉴잉글랜드 교회에서 눈에 띄었다. 권징은 해이해지고, 교리는 희미해졌으며, 설교는 줏대가 없고 영감이 없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적은 설교 원고가 설교 노트를 대신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눈과 손가락을 원고에 고정시키고 원고를 읽는 데 몰두함으로 청년들은 두려워함이 없어졌고 장년들은 졸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농장과 거리, 그리고 가정의 난롯가와 들판에 대한 공상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내셨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 이스트 윈저(East Windsor)에서 태어났다. 에드워즈의 친할아버지 리처드 에드워즈는 코네티컷 주의 주도(州都)인 하트퍼드(Hartford)의 부유한 상인이었다. 아버지 티머시 에드워즈(Timothy Edwards)는 이스트 윈저에 있는 교회의 목사였는데 하버드를 졸업한 엘리트 청교도 목회자였으며 지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탁월한 부흥사였다. 어머니 에스더 에드워즈는 당시 ‘코네티컷 계곡의 교황’이라고 불릴 정도의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매사추세츠 노샘프턴의 유명한 목사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의 딸로 그녀는 키가 크고 상냥하고 온유했으며, 이해력에 있어서는 남편을 능가할 정도였다. 결혼한 지 2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에 대한 회심 체험을 고백하고 성찬 참여자가 되었다. 당시 청교도 사회에서 진정한 회심 체험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에드워즈는 친가와 외가 모두가 훌륭한 청교도 목사의 가문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다.
에드워즈는 다섯 번째 자녀이자 열한 명의 남매 가운데 외아들로서 태어났다. 그는 청교도적인 경건함, 사랑,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1716년 9월 13살의 나이에 지금의 예일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는 청교도적 정신을 살리기 위해 코네티컷의 지도적 목회자들이 1701년에 막 설립한 대학으로 에드워즈가 입학할 당시에는 학교 이름도 제대로 확정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캠퍼스의 위치도 고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에드워즈는 1720년 9월, 반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 학사 학위(B.A.)를 받았다. 대학원에서 2년(1720. 9-1722. 9) 더 신학 공부를 하였는데, 18살 되던 1721년 5월(혹은 6월)에 자기 영혼의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고심하던 에드워즈에게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난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에드워즈의 거듭남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자. 에드워즈는 모태 신앙으로 자랐지만 1721년 대학원 2학년이 되어서야 거듭남을 경험했다. 그가 자기의 회심을 돌아보며 기록한 『개인적 이야기』(Personal Narrative)는 가장 사랑받는 에드워즈의 책 중 하나인데, 거기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신적인 것들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그에게 주신 변화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영혼에 관해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또한 자기 영혼의 유익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에드워즈는 회심 전에도 두 번의 주목할 만한 신앙 각성의 시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그가 아홉 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에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그때 그는 몇 달 동안이나 매우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신앙과 그의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는 하루에 다섯 번씩이나 개인기도 시간을 가졌으며, 친구들과 함께 많은 시간 신앙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보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그는 숲 속에다 자기만의 특별한 비밀장소를 만들어 두고 혼자서 기도하곤 했는데 때로 많은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확신과 감정들은 점점 사라져갔고 그 모든 감정들과 기쁨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개인기도 시간을 점점 더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처럼 옛날의 그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죄를 습관적으로 짓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두 번째 각성은 그가 늑막염에 걸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었던 대학 4학년 때 있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런 병에 걸리도록 하신 것 같다고 후일에 회고담에서 고백했다. 그는 병 때문에 거의 죽게 되어 지옥 구덩이에 떨어지기 직전까지 갔다. 죽음의 가장자리를 경험한 에드워즈는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했으며,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믿는 기쁨이 얼마 동안 지속되었다. 그런데도 병이 나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옛날 죄의 습관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평안하게 지내도록 허용하지 않으셨다. 에드워즈는 크고도 강력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 이것은 청교도들의 용어로 말하면 각성(conviction)하게 하시는 은혜였다. 에드워즈는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지으려고 하는 사악한 본성과 씨름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심했다가 어기고 또 다시 결심하는 일들을 반복했다. 때로는 하나님께 맹세를 해서라도 죄를 짓지 않도록 그 자신을 속박해 보기도 했다. 이런 노력들을 한 후에 그는 이전의 죄스러운 삶과 그가 알고 있는 온갖 죄를 완전히 끊어 버렸다.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많은 신앙적인 의무들을 준수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았다. 이 무렵에 기록한 글이다. ‘정말 나는 전에 없던 태도로 구원 얻기를 간구하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익을 얻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할 마음이 있음을 느꼈다. 내 마음은 많은 감동적인 사상과 영적 투쟁으로 계속해서 가득 찼다.’
에드워즈의 아버지 티머시 에드워즈 목사는 청교도 선배들을 본받아 참된 회심으로 나아가는 세 가지 주요 단계를 강조했다. 첫 번째 단계는 죄에 대한 ‘깨달음’ 또는 ‘영원과 관련하여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각성된 인식’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겸비함’이었다. 진정한 회심을 위해서는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 만일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다면 ― 세 번째 단계에 이르게 된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하나님의 중생케 하시는 빛 또는 자신들 속에 창조된 새 영’을 받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진심으로 회개하게 되고, 죄가 다시는 그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그 대신 ‘자신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구원의 소망으로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고, ‘영광스러운 변화’를 체험함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청교도 저자들은 이 과정을 제시할 때 매우 복잡한 단계를 제시했지만, 티머시는 유연성을 발휘하여 비교적 단순하게 3단계만을 강조했다. 티머시는 청교도들의 엄격한 관행에 따라, 성찬에 참여하는 완전한 교회 회원 자격을 얻고자 하는 지원자에게 이 기본적인 3단계의 경험을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도록 요구했다. 에드워즈의 분명한 회심에는 이러한 그의 아버지의 가르침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교육의 영향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강력한 구원의 체험이 주어지기 전 일 년은 에드워즈에게 몹시 고통스러운 영적 싸움의 기간이었다. 훗날 그는 자신의 노력에 대해 ‘고통스런 추구’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그렇게 큰 고통 중에 있던 어느 날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은혜를 부어 주시는 체험을 하게 된다(1721년 5-6월경).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해 보기로 하겠다. 다음의 글은 그를 이해하고 그의 신학, 특히 중생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해서 내적인 달콤한 즐거움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디모데전서 1:17을 읽었을 때였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내가 그 말씀을 읽고 있었을 때, 내 영혼 속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느낌이, 내가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른 새로운 느낌이 내 영혼으로 들어왔다. 아니 영혼 속에 부어졌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성경의 다른 어떤 구절도 그와 같이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신가. 그리고 만일 내가 천국에서 그러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즐거이 교제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만 온통 빠져 있을 수 있다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영원토록 그분 안에 삼키어진다면 그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를 혼자 생각했다.”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성경을 읽는 중에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체험하였다. 이것이 에드워즈의 돌연한 중생 체험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그해 봄 내내 점점 깊어 갔다. 그때부터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생각을 갖기 시작했고, 그의 구속의 사역과 그분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의 영광스러운 방식에 대해 새로운 이해와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것에 대한 내적인 달콤한 느낌이 때때로 가슴 속에 와 닿곤 했다. 그의 영혼은 그것들에 대한 즐거운 생각과 명상에 잠기곤 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의 아름다움과 탁월함, 그리고 그 안에서 주어지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방식의 아름다움 등을 읽고 묵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것들을 처음 경험하기 시작한 지 얼마 있지 않아서, 방학을 맞아 집에 머무는 동안 에드워즈는 아버지께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말씀을 드렸다. 에드워즈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대화를 통하여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대화가 끝났을 때, 에드워즈는 명상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목장에 있는 조용한 장소를 찾아 혼자 거닐었다.
“거기서 거닐며 눈을 들어 하늘과 구름들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엄위와 은혜’에 대한 너무나도 달콤한 느낌이 내 마음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나는 달콤한 결합 속에서 엄위하심과 부드러우심을 동시에 보는 것 같았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거룩한 엄위하심과 엄위하신 온유함, 두려운 달콤함, 높고 위대하고 거룩한 부드러움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하나님께 대한 에드워즈의 인식은 점점 증가되고 더욱 더 생생하게 되었고, 내적인 달콤함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사물의 모습이 모두 달라 보였다. 모든 사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의 고요함과 달콤함이 나타나 보이는 듯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지혜와 순결과 사랑이 만물 안에 나타나 보이는 듯했다. 해와 달과 별들 안에, 구름과 푸른 하늘 안에, 풀포기와 꽃들과 나무 안에, 그리고 물들과 모든 자연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나타나 보이는 듯했다. … 자연의 모든 작품 중에 천둥이나 번개만큼 나에게 달콤함을 주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전에는 그것만큼 나에게 두려움을 준 것은 없었다. 나는 천둥에 대해서 비정상적으로 무서워했었다. 천둥을 동반한 폭풍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공포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습이 나를 기쁘게 했다. 이제는 천둥을 동반한 폭풍이 막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럴 때면 구름을 관찰하고, 번개가 치는 것을 유심히 보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천둥의 장엄하고 두려움을 자아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기회로 삼는다.
리처드 백스터의 거듭남 체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에 대해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은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리처드 백스터는 영국 성직자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하나이며, 딘 스탠리는 그를 ‘영국 개신교 신학 교사 중 최고’라고 칭한 사람이다.” 『명사록』(Who's Who)에서도 백스터는 청교도주의가 제시하는 가장 뛰어난 목사로 나온다. 토머스 맨튼(Thomas Manton)은 백스터를 ‘사도 시대 이후 기독교회가 배출한 가장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백스터는 탁월한 목회자이자 가장 대중적인 책을 저술한 청교도 작가이자 학자였다.
백스터는 1615년 11월 12일 슈롭셔(Shropshire)의 로턴(Rowton)에서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지주 계급의 상류층 자작농이었다. 아버지는 자기 소유로 살기에 필요한 만큼의 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여 어린 시절 백스터는 할아버지 집에서 살아야 했다. 백스터와 가족들은 자격 있는 설교자로부터 설교라고 할 만한 설교를 거의 듣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백스터의 아버지를 직접 가르치시고 변화시키셨는데, 그것은 어떤 설교나 경건한 동료가 있어서가 아니고 오직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는 중에 영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하셨다. 백스터의 고향인 로턴에는 예배를 인도하는 4명의 낭독자(reader)가 있었는데, 그 중 어느 누구도 성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 중 2명은 부도덕으로 인해 지탄의 대상이었다. 당시의 교회 상황을 보아서 백스터의 아버지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온 것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아버지가 신앙적인 각성을 하고 생활이 변화되자 집안 형편도 차츰 나아져서, 백스터는 다시 부모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백스터는 이제 경건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백스터가 매우 어렸을 때,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아버지의 심각한 설교는 그로 하여금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또 아버지는 백스터에게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거짓말을 한다든지, 먹는 것을 탐낸다든지, 다른 사람의 과수원에 가서 과일을 훔치는 등 죄를 저질렀으며, 그럴 때마다 양심의 고통을 느꼈다.
백스터는 록서터(Wroxeter)의 도닝턴 자유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지식에 대한 그의 갈망은 대단했다. 처음부터 그는 종교와 관련된 철학 공부에 강한 흥미를 가졌다.
백스터의 거듭남 체험을 살펴보자. 백스터는 강렬한 한 번의 회심 체험을 한 것이 아니라, 몇 번에 걸치면서 겉보기에는 조용하지만 영혼 깊은 곳에서는 강력한 회심 체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15세쯤 되었을 때 학교를 다닐 무렵 백스터는 첫 번째 종교적 각성을 체험하게 된다.
“그 무렵 하나님께서는 내 눈을 열어 내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분명히 볼 수 있는 통찰을 주셨다. 그리고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그 이전 어떤 때보다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갖도록 하셨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편을 통해서, 그리고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버릇없는 아이들과 과수원 서리를 한 후 그 어떤 때보다 내 양심이 아주 찔렸었다. 이것은 내 죄에 대한 보다 강한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마을에 사는 가난한 노동자가 ‘버니의 결심’(Bunny's Resolution)이라는 제목의 오래되고 해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아버지가 빌렸었다. …… 이 책을 읽는 중에 (그때 내 나이가 약 15세였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깨어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16세에 자유 학교를 졸업한 백스터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로 진학하려다가 그의 스승의 권면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인근 루들로(Ludlow) 성의 목사로 있던 윅스테드(Richard Wickstead) 목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에게 개인 수업을 받으며 독학했다. 일 년 반 후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 자기가 다녔던 록서터에 있는 시골 학교의 교장 선생이 폐병으로 아프게 되자, 뉴포트 경의 부탁을 받고 그 학교에서 3개월 남짓 가르쳤다.
그 후 백스터는 개인수업을 받으며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에 그는 또 다시 강한 영적인 각성을 체험하게 된다.
“2년 동안 계속된 심한 기침과 각혈로 죽음이 가까웠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 증상으로 보아 심각한 단계의 폐병이었다. 이것으로 인해 나는 더욱 각성되어 내 영혼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염려하며 생각하게 되었다. … 나는 이런 식으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매우 현명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내 영혼에 그러한 유익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 이 일은 나로 하여금 무엇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도록 만들었으며, 필요한 한 가지 일에 온 마음을 집중하도록 하였으며, 무엇보다 먼저 궁극적인 종말을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모든 공부는 그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하였다. 그리고 신학 공부가 항상 나의 최우선적 공부가 되도록 했다.”
그러면 백스터의 회심은 정확히 어느 때에 일어난 것인가? 백스터는 자서전에서 자기의 회심이 볼턴이나, 후커, 로저스 등이 말하는 것처럼 청교도의 정형처럼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스스로 분석하다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동일하게 깨뜨리시는 것이 아님을 결국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그가 정확한 회심의 정형대로 회심한 것은 아니나 회심의 내용만큼은 분명하였음은 다음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여러분은 자신이 회심했다는 사실을 자각합니까? 또한 여러분은 이러한 놀라운 변화를 여러분의 영혼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와 같이 거듭났으며 새롭게 되었습니까? … 여러분이 변화된 날짜나 주간, 또는 여러분을 회심케 했던 바로 그 설교를 말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회심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일어났으며, 참된 변화가 생겼으며, 새로워진 마음이 주어졌음을 자각할 수는 있습니까?”
1638년 12월 강림절에 백스터는 영국 국교 워세스터의 감독에 의해 부제로 안수를 받았으며(23세), 1639년에 더들리(Dudley)에 있는 신설된 자유 문법학교에 부임하여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영국 국교 성직자로 안수를 받을 때 그 당시에는 서명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조급하고 경솔하여서 자기가 서명해야 할 서품 책(the Book of Ordination)을 한 번도 읽지 않았으며, 영국 국교 39개 조항 중 논란이 되는 내용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해와 확신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백스터는 스스로 여기에 대해 공부하고, 더들리 근처에 있는 몇몇 비국교도들과 친해지면서 그의 국교도적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법조항이나 예배 의식과 관련된 어떤 것에도 함부로 서명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이런 양심상의 확신 때문에 1639-40년까지는 슈롭셔의 브릿지노스(Bridgnorth)에 있는 윌리엄 매드스터드(William Madstard) 목사의 부목사가 되었다. 매드스터드 목사는 매우 정직하고 양심적이고 탁월한 설교자였다. 그곳은 대주교가 3년마다 방문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감독의 관할권에서 자유로운 곳이었다. 이곳에서 백스터는 양심에 꺼림칙했던 것이나 불법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의무들에 대해서 설교했다.
1641년에 키더민스터(Kidderminster)에서 목회를 시작하였고, 1642-47년에는 의회군 군목을 지냈다. 1647-61년에는 키더민스터의 교구 목사로 있으면서 백스터는 그 읍의 주민 거의 전부를 회심시켰다. 그는 목회 상담을 설교만큼이나 중요시하여 교인들에게 교리 문답을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을 회심시켰다. 이와 같이 백스터는 목회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키더민스터 교구에는 약 8백 가정과 2천 명의 성인들이 있었다. 그는 나중에 키더민스터 교회의 부흥을 회상하면서 ‘내가 처음으로 그곳에 갔을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한 거리에 한 가정 정도 있을까 말까 했다. 그러나 떠날 때에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거나 진지하게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가족은 하나도 없었다.’라고 했다. 이러한 일은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1650년대 후기에 백스터는 영국 전체의 청교도 목회자들에게 널리 인정받는 귀감이 되었다. 약 한 세기 후인 1743년 12월 31일, 조지 윗필드가 키더민스터를 방문했을 때, 그는 그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보냈다. ‘나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백스터의 가르침과 사역 그리고 권징의 달콤한 향기들을 발견하고는 내 자신이 크게 원기를 회복하게 되었다.’
백스터는 1660년에 찰스 2세(1660-1685 재위)가 왕정복고를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찰스 2세는 국교회 내에서 장로교인들을 포용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래서 찰스 2세는 장로교측의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인, 경건한 리처드 백스터에게 헤리퍼드(Hereford) 주교의 직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백스터는 감독제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국왕에게 편지를 써서 정중하게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교회의 직분을 갖는 것과 키더민스터로 되돌아가는 것 모두 금지당했다. 몰리 주교는 심지어 그가 워세스터의 주교 관구에서 설교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1662년 통일령에 의한 추방에서 시작하여 1689년 관용령이 선포될 때까지 백스터의 삶은 끊임없는 박해의 연속이었다. 1662년 통일령으로 비국교도들이 축출될 때 그의 영국 국교회에서의 사역도 끝이 났다. 그 후부터 그는 찰스 2세의 치하 동안에 많은 박해를 받았다. 백스터는 양심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음으로 20년 이상 많은 핍박과 투옥을 견뎌야 했다. 교회에서 추방당한 그는 설교와 저술로 찰스 2세에 저항하였다. 그는 총 168권의 책과 논문을 써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표명했다.
1685년 2월 찰스 2세가 죽고 제임스 2세(1685-1688)가 왕위에 올라 영국을 로마 카톨릭화하려고 했다. 이에 백스터는 강력하게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약의 의역』(Paraphrase of New Testament)이라는 저서에서 국교회를 모욕하였다는 혐의로 투옥되어 그해 5월에 악명 높은 제프리스(Jeffreys) 판사에게 치욕스런 재판을 받았다. 재판의 광경은 영국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사법의 남용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백스터는 이제 70세의 노인으로 1685-86년에 걸쳐서 약 2년간 사우스와크(Southwark)에서 투옥되었다. 1686년 11월 24일에 석방되어 그는 계속해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설교하고 저술했다. 1689년 관용령이 제정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백스터는 자신의 견해 때문에 받았던 제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1691년 12월 8일 런던에서 76세를 일기로 그가 사모하던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믿어야 할 것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진리의 길 /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알려주고, 그것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보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줄 분을 찾게 된다. 또한 성경은 구원자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구원자는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다 된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것에 감사해서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이 싫어하실 일은 피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방법을 더욱 구하게 된다.
■ 그러면 그런 방법은 어디에 있는가? / 그것도 모두 성경에 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고 그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성경읽기 시편 119:9, 11 / 실천할 말씀 마 7:24-27
이 말씀에서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각각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과 같은 소망을 품고자 한다. 그런데 그분의 소망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 역시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의 뜻은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읽기 디모데후서 3: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