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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이란 무엇인가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이 구절은 예레미야와 동시대에 살던 하박국 선지자가 자기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을 내다 보고 한 말이다. 머지않아 자기 나라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는 하박국 선지자의 심적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번민 속에서 하박국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여호와여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
하박국의 이말은 마치 이런 것과 같았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이 완전히 파멸되지는 않게 하옵소서. 이와 같은 두려움의 날들 중에 주의 심판을 목격하고 우리들 가운데 참된 믿음이 되살아나게 하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기억하옵소서.”
참된 기독교는 사람의 일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하는 어떤 일이다. 참된 기독교는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물론 우리는 큰 죄인이요 순종하길 몹시 꺼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감화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시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감화하실 필요가 없으시다면-하나님게 순종하려는 바람이 본래부터 우리에게 있다면-“여호와여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필요도 전혀 없다.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순종하기를 전적으로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간섭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참된 기독교의 부흥”이란 영적 침체 또는 영적 타락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 동안 역사 속에서 참된 기독교의 부흥이 있게 된 것은 거의 전부 신앙 부흥 운동을 통해서였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순종의 길로 인도하시기에 앞서 그들 가운데 큰 능력이 나타나는 각성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사람의 흥분성(excitability)을 이용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나태해 있다. 많은 일들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게 되며, 또한 그런 일들이 복음의 영향력을 방해하므로, 흥분의 파도가 아주 높아져서 영적 장애물들을 전부 휩쓸어 버릴 수 있을 정도가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흥분을 불러 일으키셔야 한다. 영적 나태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우선 철저하게 각성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그들은 순종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억누룰 수 있을 것이다.
흥분된 느낌이 영적인 것은 아니다. 그 자체는 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를 방해하는 것은 세상적으로 흥분되어 있는 욕망, 욕구, 감정들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의 의지는 어떤 의미에서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구들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각성시켜서 죄의식과 위기의식을 갖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감정과 욕구에 맞서는 흥분을 일으키셔야만 한다. 반대-감정이 강력하게 생길 때 세상적 욕망의 세력은 무너지게 되고, 마침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순종하기에 자유로운 의지 상태에 있게 된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회고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온 대각성의 시기라는 특별한 시기를 통해서 그들 가운데 신앙을 유지시키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부흥을 체험한 뒤 얼마 안 있어 또다시 방해를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이 되기 전까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또 한차례의 각성 운동을 일으키시고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또다시 성령을 부어 주시는 사건들을 일으키시기 전까지 그들의 신앙은 계속 퇴보했다. 방해가 새로이 시작됐을 때 신앙은 타락했고, 그 백성은 다시금 사치, 우상, 교만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같은 면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는 안정성이 매우 적다. 만일 영적 감정들이 일깨워지고, 또 일깨워진 그 흥분 상태를 유지하면서 세상적인 감정들에 맞서고, 그래서 영적 흥분으로 가득하게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영적 지식이 매우 빈곤하고 또 영적 원칙들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희박하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면에서 각성하지 않는 한 마땅히 행할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도모하는 일을 조금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 부흥의 일은 지금도 그런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아마도 천년 왕국이 올 때까지 계속 그럴 것이며- 참된 기독교는 주로 이런 영적 각성 운동들을 통해서 도모 될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주기적인 영적 각성 운동들 없이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건실하게 행하게 하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또 자주 노력해 왔는가! 많은 건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를 부흥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적 흥분을 일으키는 일 없이 점진적으로 세속적인 사람들을 모아들이면서 한결같이 전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이론적으로는 훌륭해 보일지라도, 현실은 그 이론의 무익함을 입증한다. 교회가 깨어 있기에 충분한 지식과 불변의
원칙들을 소유하고 있다면 느리지만 평탄한 행로를 서서히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진리의 빛을 받는 일은 매우 적고 또한
방해 세력은 심히 큰 상황에 놓여 있다면 무슨 특별한 각성 없이는 꾸준히 전진하지 못할 것이다.
천년 왕국 기간에는 아마도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이런 흥분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밝은 계시의 빛으로 비추임을 받게 될 것이고, 순종을 방해하는 세력들은 제거될 것이며, 온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몸에
배인 꾸준한 순종의 행보를 걸을 것이다. 온 교회는 굳게 서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품을 것이요, 또한 그 마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도야할 것이다. 어린 자녀들은 그들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 행하도록 훈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흥의 열기가 식을
때도 교회의 경건을 빼앗아 가는 세속적인 것, 유행, 탐욕 등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교회가 이런 흥분을 필요로 하지 않고 꾸준하게 순종의 길로 향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의무를 이행하기에 적절치 못할 수 있다. 기독교가 세상에서 항상 영향력을 널리 끼쳐야 한다면, 이 흥분만으론 그렇게 될 수 없다. 즉 이와 같은 주기적인 흥분은 극복되어야 한다.
또 천년 왕국에서는 이처럼 잠에서 깨어나고 잠에 빠지는 일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많은 시간을 잠을 자지
않을 것이다. 즉 이따금씩 깨어나 눈을 비비고, 펄쩍펄쩍 뛰며, 잠시동안 고함을 치다가 다시 잠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목사들도 교회를 향해서 도전해 오는 세상 세력의 물결에 저항하기 위해서 자신들 주위에 모래 주머니로 방어벽을 쌓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계에서 각성 운동 없이 기독교를 더 발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의 커다란 정치적 불안을 비롯한 그 밖의 불안들은 영혼의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게 하는 기독교의 대적들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러한 사태들은 영적 충격 요법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이 기독교의 원칙들을 수용하고 더 이상 반 기독교적인 흥분들이 없을 때까지, 충격을 무력화시키는 새로운 충격, 즉 영적 각성을 통하지 않고 참된 기독교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은 헛수고일 따름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참되다.
게다가 개종하지 않은 나라에서 참기독교는 부흥 운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선교사들은 교육이나 그 밖의 다른 주의 깊고 점진적인 개선들을 통해서 기독교를 보급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평소대로 움직이는 한, 참 기독교는 이런 방법으로 보급되지 않을 것이다. 잠재적 도덕 능력들을 일깨우며 홍수처럼 밀려드는 죄의 세력을 물리치기에 충분한 각성 운동들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런 방식으로 일해 오셨다. 하나님은 한 가지 이유에서 우리를 자극하기로 작정하신다. 그 한 가지 이유란,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길 꺼린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감동을 받기 전까지는 좀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신앙적”이 되면, 친구들이 자기를 비웃을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많은 사람들은 여러 우상들을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정된 생활에 이르기까지 또는 어떤 탐욕적인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회개를 연기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제하지 못할 정도로 자극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거짓 신들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으며, 또는 자신들의 야망에 찬 계획들을 결코 단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들은 우리가 이 장에서 논의하게 될 것들의 서론에 해당할 뿐이다. 이제 나는 다음 세 가지 부분을 살필 것이다.
1. 참된 기독교 부흥이 아닌 것.
2. 참된 기독교 부흥인 것.
3. 부흥을 가져다 주는 요인들.
참된 기독교 부흥은 이적이 아니다.
1. 이적이란 항상 하나님의 간섭, 곧 하나님에 의한 자연법칙의 일시적 정지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흥이란 이적이 아니다. 사물의 법칙들과 사람들의 마음의 정상적인 기능은 여전히 작용한다. 부흥은 그러한 것들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2. “이적”의 두 번째 정의, 곧 자연의 세력보다 위에 있는 어떤 것이란 의미에서 부흥은 이적이 아니다. 참된 기독교 안에는 자연의 일반적인 세력들을 초월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부흥은 오로지 자연의 세력의 올바른 행사 안에 존재할 뿐, 그 밖의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 순종하게 될 때, 사람들은 이전에는 할 수 없던 면들에서 열심히 노력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이 이전에 갖고 있었던 능력들을 다른 방면에 쏟을 뿐이다. 즉 그것들을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3. 부흥은 어떤 의미에서든 이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부흥이란, 도구들과 방편들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다른 어떤 결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방도들을 올바르게 사용하는데서 논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한 가지 결과이다. 이적이 부흥에 앞서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도들은 참으로 자신들의 메시지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해서 그리고 그 메시지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이적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 이적이 부흥은 아니었다. 이적과 그것에 뒤따라온 부흥은 완전히 별개였다. 사도 시대의 부흥들은 이적과 연관이 있었지만, 부흥 자체가 이적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신 방도들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일으키도록 주신 방도들은 당연히 부흥을 낳는 경향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지정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도구가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부흥을 가져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뿌려진 씨앗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하나님은 부흥을 일으키실 때, 씨앗으로 열매를 맺도록 하시기까지 직접적인 영향력과 섭리를 행사하시는 것같이 일을 행하신다. 씨앗이 열매를 내는 것은 자연의 어떤 법칙들에 의해서일까? 그것은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활동일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씨에 비유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은 씨를 뿌리는 일에, 그리고 말씀 전파의 결과들은 그 씨가 싹을 내고 자라는 것에 비유한다. 여기서 결과들은 반드시 원인과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열매를 정해진 방도들을 사용해서 얻게 되는 것처럼 부흥도 당연히 정해진 방도들을 사용한 결과로 얻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는 인과 법칙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반응이 방도들에 의해서 비롯된 것은 아니더라도 방도들이 계기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다. 열매가 제 원인에서 비롯되듯이 부흥은 당연히 그리고 확실히 어떤 계기를 통해 생기는 것이다.
기독교를 발전시키는 일은 인과 법칙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신앙, 즉 방도와 그 결과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하는 신앙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사람들이 있다. 그 방도들 가운데 효과를 낳게 하는 요소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교리는 없다. 또한 이보다 더 모순되는 것도 없다. 가령 어떤 사람이 그 교리를 농부들에게 가르친다고 가정해 보자. 설교자는 농부들에게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에만 그들에게 열매 맺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한다. 마치 자기들이 열매들을 맺게 할 것처럼 밭을 일구고 심고 또한 애써서 일을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권을 가지고 간섭하시며, 또한 농부들의 힘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사역을 필요로 한다. 그 설교자는 그들에게 그들의 도구들, 지식, 수단들과 그 결과 사이에 신뢰할 만한 연관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 농부들이 그런 교리를 믿는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이와 똑같은 결과들이, 진정한 기독교를 발전시키는 일은 아주 신비스럽게도 수단과 목표사이의 자연적인 연관성이란 전혀 없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라고 교회를 가르치는 데서 나타난다. 그런 가르침으로 인해 오는 결과는 무엇인가?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길 기다리며 꿈꾸고 있는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무수한 영혼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 이 교리야말로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기 위해서 마귀가 가장 성공적으로 사용하는 도구가 되어 왔다. 그러나 실은 수단들과 결과 사이의 연관성은 농부가 씨를 뿌릴 때만큼이나, 영적인 문제에서도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한 가지 사실을 유의하고 명심해야 한다. 즉 가장 필수적인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은 삶의 필수적인 것들을 아주 확실하게 가져다 준다. 사치품들을 얻기가 좀더 어렵고, 그러한 것들을 획득하는 수단들도 좀더 복잡하며 그 수단들을 사용한 결과도 덜 확실하다. 또한 아주 해로운 것들-술 같은 것들-은 종종 지독히 혐오스러운 일종의 악마적인 마술을 부리거나 자연을 괴롭혀야 얻어진다.
이 원리는 도덕적 다스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복들은 무한히 중요한 것이므로, 그것들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수단들을 사용하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단순히 이론에서뿐 아니라 실제에서도 발견한다.
부흥이란 무엇인가
부흥이란 그리스도인들의 처음 사랑의 회복이요, 그 결과로 하나님에 대한 죄인들의 자각과 회개가 나타나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의 부흥은 타락한 교회를 일깨우고, 소생시키며, 또한 교화시켜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에 확실하게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다. 부흥이란 교회가 타락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1. 부흥은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각하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타락했는데도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신자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깊이 살피는 일이 없이는 그 상태에서 깨어날 수도 없고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길로 나아갈 수도 없다. 죄의 원천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참된 부흥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죄를 자각하게 되는데, 어느 때는 종종 너무 큰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의 용납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낙망에 빠지고 만다. 감정이 항상 그런 정도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참된 부흥에는 항상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이 있기 마련이다.
2.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는 일이다. 부흥이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새 출발하는 것 외에 다른 무슨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새로이 믿게 된 죄인들처럼,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회개의 첫발을 내디딘다. 마음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겸손히 회개하며 죄를 다 버린다.
3.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새롭게 되는 일이다. 그들은 타락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들의 죄인 된 상태를 보지 못한다. 그들의 마음은 돌과 같이 굳어 있고, 성경의 진리들은 한갓 꿈 같은 이야기로 보인다. 그들은 성경 말씀들이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들의 믿음으로는 가장 중요한 영원의 실재들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각성을 하게 되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점화시켜 현실을 밝히 보게 한다. 그들은 이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슬퍼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에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도록 설득하기로 작정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새롭게 사랑하게 된다. 영혼에 대한 부드럽고 강렬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온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되길 열망하며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을 위해 걱정한다. 친구들, 친척들은 물론 원수들에 대해서까지 걱정하게 된다. 그들은 죄인들에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라고 재촉하며, 또한 믿음의 팔로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한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의 영혼을 끝없이 불타오르는 지옥불에서 구원하시길 뜨거운 기도와 눈물로 구한다.
4. 부흥은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는 세상과 죄의 세력을 깨뜨린다. 그들은 새로운 이상을 갖게 되며, 하늘 나라를 미리 맛보며 하나님과 연합을 바라는 새로운 욕구를 갖게 된다. 세상의 매력이 이젠 효력을 잃게 되며, 죄의 권세는 정복된다.
5. 교회들이 이런 식으로 각성을 하고 개혁을 하게 될 때, 뉘우쳐, 회개, 개혁의 과정을 통해 죄인들의 구원이 뒤따르게 된다. 죄인들의 굳은 마음이 무너지고 변화한다. 극도로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매춘부들, 알코올 중독자들, 회의론자들이 각성하여 회개한다. 사회에서 가장 형편없는 사람들이 부드러워지고, 거듭나며, 거룩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된다.
부흥을 발전시키는 요인들
회개에는 네가지 요인들이 작용하는데, 능동적인 행위자 셋과 수동적인 도구 하나가 있다. 행위자는 하나님, 설교자, 죄인이며, 도구는 진리이다. 참회개에는 최소한 두 행위자-하나님 죄인-가 항상 관련되어 있다.
1. 행위자로서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즉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와 성령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섭리와 질서 있는 다스림을 통해서 일상 생활의 사건들을 죄인들의 마음이 진리를 접할 수 있게 되는 쪽으로 조성하신다. 하나님은 죄인을, 눈으로 진리를 보거나 귀로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장소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이따금 만사를 부흥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도록 만드신다. 기후, 건강, 그리고 그 밖의 다른 환경들이 더해져서 진리가 최대한 효과적으로 전파되도록 하신다. 하나님이 이따금 목회자를 적절한 시간에 보내시는 것이나, 어떤 특정한 진리를 그것을 들어야 할 사람이 있는 그 시간에 강조하시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의 섭리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역사하신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직접 접근하시며 또한 각 죄인의 인생 내력과 상태를 아주 잘 아시므로, 신자 개개인에게 꼭 적합한 진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람의 급소를 찌르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지에 생생함과 권세와 능력을 더하시므로, 죄인은 위축되어 반역의 무기들을 던져 버리며 주께로 돌이킨다.
하나님의 감화력 아래에서 진리는 불처럼 길을 낸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나타내심으로써 자랑하던 자들은 위에서 산이 눌러내리는 듯한 중압감을 느끼게 만드신다.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할 의향이 있다면, 그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은 설교와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런 순종할 의향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를 분명하게 밝히시며, 또한 그들의 영혼에 저항할 수 없는 확신을 주는 강렬한 불빛을 집중적으로 비추시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에 굴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래서 구원을 받게 된다.
2. 종종 다른 사람이 능동적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다른 도구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도구에 해당하는 것은 진리이고 그 일에서 설교자는 도덕적 행위자이다. 즉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능동적으로 행한다. 남자든 여자든 단지 수동적인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케 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역할을 수행한다.
3. 죄인 자신도 부흥회에서 한 도덕적 행위자에 해당된다. 회개는 행위 없이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회개란 자신의 행위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며,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삶들이 그 죄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의 말, 태도, 눈물, 행동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믿는 아내를 둔 믿지 않는 남자를 생각해 보라. 부드러워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 아내의 표정, 친절함, 진지함, 동정심등은 남편에게 계속적인 설교가 된다. 그러한 것이 그를 질책하고 그의 귓전에 설교가 하루종일 끊이지 않으므로 그는 마음을 돌이키게 된다.
우리 모두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죄인들은 종종 눈빛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마음 상태를 읽는다. 그의 눈빛이 염려, 또는 약삭빠름으로 가득차 있다면 죄인들은 그것을 읽고, 또 그리스도인들의 얼굴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종종 죄를 깨닫게 된다.
한번은 내가 기계 시설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한 모직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을 방문하기 전에 부흥회에 참석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은 상당히 경건해져 있었다. 그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아보았고, 또 한 여자 직공은 나를 보자 동료에게 농담을 소곤소곤하며 비웃었다. 나는 슬픈 기색으로 그 여자를 주목해 보았다. 그 순간 그 여자는 하던 일을 갑자기 멈췄고, 직조용 실은 끊어 졌다.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몇번이고 노력을 거듭했다. 잠시 후, 그녀는 주저앉았고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그 순간 그녀는 죄를 깊이 뉘우쳤고, 그 감정은 불길 번지듯이 그 공장 전체에 번졌다.
몇 시간 안되어 거의 모든 직공들이 죄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었고, 공장 소유주들은 그 사실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들은 불신자들이었지만 조업을 중단시키고 기도 모임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공장을 계속 가동하는 것보다 이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며칠 안 되어 공장 소유주들과 거의 모든 직공들이 회개하고 믿게 되었다.
나의 눈빛, 경건하고 진지한 표정, 그리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서, 농담을 하며 비웃던 그 젊은 여직공은 마음속에 커다란 자책을
받았고, 마침내는 죄를 깊이 깨닫고 뉘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뒤이어 일어난 전체의 부흥은 이 작은 사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나는 죄를 크게 깨닫고 있는 한 여자를 알았다. 어느 날 나는 그 여자의 근심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이 몹시 슬펐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물었다. 그녀는 오후에 몇몇 미온적인 신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노라고 대답했다. 물론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할 뿐 미온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과 오후 시간을 보낸 것이 자신의 죄에 대한 의식들을 사라지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하찮은 사람들이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죄에 대한 자각들을 잃고 말았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리석음으로 인해 한 영혼을 멸망케 한다. 그녀의 결심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았다.
요약
1. 교회는 부흥이 하나의 이적, 곧 자신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하나님의 능력의 개입이라고 오랫동안 믿어 왔다. 교회는 천둥, 우박, 지진을 일으키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듯이 부흥을 일으키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겨우 최근에 와서 그리스도인들은,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해 놓으신 도구들을 사용해서 부흥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뉴잉글랜드 사람들도 부흥이 마치 소나기가 오듯이 임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땐 한 마을, 또 다른 땐 또 다른 마을에 소나기가 오듯이, 그래서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비가 다른 지역에 내리고 있는 동안 자기들 마을에 비를 오게 할 수 없듯이 그러한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흥이 15년에 한 번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신 사람은 모두 회개할 것이고, 그 다음에 모든 사람들은 또 한 차례의 부흥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5년에 한 번 정도 부흥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5년에 한 번 부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어떤 목사가 자기 교회에서 부흥회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다음해 이웃 도시에 부흥회가 있었고, 그 목사는 그곳으로 설교를 하러 갔다. 그는 전심으로 그 일에 몰두하면서 그곳에서 몇날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 주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토요일에 집으로 왔는데 그는 고뇌에 빠졌다. 자기 교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생각했다. 즉 자기 교인들 가운데 여전히 회개치 않은 사람과 또 해마다 그냥 죽어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했다.
그는 5년 동안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많은 가장들이 지옥에 갈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그 수를 계산해 보기까지 했고 그 다음날의 설교에 그것을 포함시켰다. 그는 끔찍한 장면을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몹시 괴로워했다. 그는 내가 이해한 것처럼 이 예상되는 부흥을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교인들에게 마음을 쏟아부었다. 그 설교는 40명이나 되는 가장들을 일깨웠고, 또한 강력한 부흥이 뒤따랐다.
우리는 부흥이 5년에 한번 이상 자주 올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다. 또 이 실례를 통해서 부흥이 기적이라는 인식, 즉 부흥은 우리가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사건들이라는 이론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뒤집어 놓으셨는지 보게 된다.
2.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잘못된 사상들이 부흥에 장애가 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실상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변덕스럽게 명령하시는 것-특히 성령을 주시는 일-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부흥을 일으키는 데 합리적으로 생각되는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을 불가능한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주권을 그와 같이 행사하신다고 보여 주는 곳은 없다. 오히려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다스리는 모든 영역에서, 자연에서든 은혜에서든 수단과 결과를 연결해 놓으셨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시는 자연 사건이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시되 마치 한번 만들어 놓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아도 저절로 계속해서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처럼 창조해 놓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주가 저절로 작동하도록 해 놓으시고 우주에서 물러나지 않으셨다. 그렇게 보는 견해는 무신론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감독자이시며 관리자이시다. 그런데도 모든 자연 사건은 이해 할 수 있는 수단을 통해서 발생한다. 하나님은 수단 없이 행하시는 주권을 가지고, 사건들을 섭리하지도 은혜를 주지도 않으신다. 또한 자연 은총보다 특별 은총에 더 많은 주권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부흥을 일으키려는 어떤 직접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서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여러분은 부흥을 당신의 힘으로 일으키려고 하고 있다. 주의하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권을 방해하고 있다. 우리가 항상 하는 대로 일을 하는 편이 낫다.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시는 때에 부흥을 가져다 주시도록 기다려라.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따라서, 여러분이 나서서 단지 부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부흥을 일으켜 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가르침이 바로 사탄이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흥을 위해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이유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용하는 것보다 더 사탄의 역사가 효과를 내도록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3. 여러분은 부흥 운동 없이도 참된 기독교 부흥이 아주 잘 도모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신앙 각성을 일으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본다. 흥분을 자아내는 각성 운동 가운데 이따금 부작용이 따른다는 이유에서, 그들은 감정을 돋구는 일체의 집회는 없애야 한다고 결론을 짓는다. 이것은 있을 수 없다. 그 방법을 남용할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규모의 영적 각성 운동들(어떤 흥분의 열기를 수반한)에는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감정을 돋구는 것 자체를 일절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좋은 것들은 언제나 남용하기 쉬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큼지막한 악들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연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에서 다스리는 가운데 생겨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들을 미리 내다 보셨을 지라도, 그러한 악들이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는 이익들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통치는 궁극적으로 최대한의 행복을 낳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상태에서 예기치 않은 악들을 조금이라도 수반하는 일이 없이 참된 기독교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필요악들은 부흥이 가져다 주는 유익과 비교할 때 별로 대단치 않은 것이다. 교회는 부흥을 없애려는 소원을 잠시라도 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관심사와는 온통 거리가 먼 것들만 쏟아내는 그런 소원을 교회가 잠시라도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소원은 선교와 관련해서는 죽음이요, 또한 죽음과 함께 세상에 저주를 가져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나는 부흥에 대한 강의들을 이 주제에 대한 나의 어떤 이론을 나타내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에게 단순히 몇 가지 조언을 하고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서, 그리고 논할 거리를 제공해 주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해온 것은 아니다. 부흥에 대해서 논쟁을 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은 아니다. 결국에 가서 여러분 모두 “우리는 이제 부흥에 대해서 이해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나의 계획은 아니다. 다만 나는 한 가지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부흥을 공부하길 바라는가? 당신은 부흥을 일으키는 데 당신이 해야 할 의무를 깨닫는다면 언제든지 당신이 들은 것을 행하고 실시할 의향이 있는가?
당신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주는 교훈을 따르며, 또한 그 교훈들을 마음에서부터 실천에 옮기겠는가? 그 교훈들을 가족들, 친지들, 이웃 사람들, 도시 전체에 전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부흥에 대해서 배우는 데 시간은 보내지만, 부흥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는가?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당신이 부흥에 대해서 어떤 것을 배우는 것만큼 빨리-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또 노력해서 당신이 여기 있는 죄인들 가운데서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 그 사실을 알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정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당신이 이를 행할 것인지 지금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죄인들에게 복음에 순종할 것인지 즉석에서 결정할 것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지 숙고할 많은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할 수 없는 것은 죄인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권한다. 여러분 모두가 지금 당장 하나님과의 엄숙한 약속에 화합하여 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 배우는대로 빠르게 실천에 옮길 것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와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할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길 기도할 것을 권한다.
- 마지막 외침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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