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화요일 성탄절, 맑았으나 춥다. 북한산 공원 어귀에 다시 가보다.
어제 눈길을 좀 걸어 다녀서 그런지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니 허리가 조금 아파서 파스를 부치고 지냈더니, 그 덕인지 모르겠으나 허리는 별 지장이 없이 지냈으나, 귀는 아직 그대로 라서 낮에는 두어 시간 동안 껌을 계속하여 씹고 저녁에는 가글까지 사가지고 와서 목을 가시었다.
오후에 북한산국립공원 입구까지 눈길을 걸어가서 안내판을 보고서 이 산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입구에서 백운대까지 4km이며, 큰집이 있는 평창동까지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았는데, 4,5 시간이면 가능할 것 같이 생각된다. 진관사에서 북한산의 서쪽 편에 있는 비봉(진흥왕순수비가 있는 곳)을 지나서 동남쪽 방향으로 고개를 두어 개 넘어가면 될 것 같이 생각된다. 어제 큰집의 황기사에게 물었을 때도 젊은 사람 같으면 큰 힘이 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번 걸어서 큰 집에 가보고 싶어진다.
이제부터 북한산은 나의 운동장이 될 것이다. 눈 덮인 얼음 사이로 흐르는 골짜기 물이 얼마나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지! 돌아올 때는 큰길가의 눈빛과 오후의 해 볕에 눈이 부시어 버스를 탔는데, 2시간 가까이 걸었던 것 같다.
저녁을 먹은 뒤에도 구파발역 근처에 있는 슈퍼까지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지고 혼자 걸어갔다가, 돌아올 때는 무릎이 아파서 또 버스를 탔는데, 왕복 1시간쯤 걸렸다. 달이 밝고 공기가 맑고 싸늘하여 귀가 좀 뚫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자못 좋아졌다. 계란과 사과, 국거리 소고기, A4용지 등을 조금씩 샀다. 내자는 몇일 째 살림 정리한다고 문밖에 나온 일이 없다. 아직도 모든 짐을 다시 풀어 제자리를 찾아 넣자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고, 방마다 커튼 같은 것도 맞추어 달자면 한참은 걸릴 것 같다.
12월 26일 수요일 맑다. 오전에 삼천사에 다녀오다.
오늘은 기온이 영하17도라고 한다. 극기 훈련하는 셈치고 오전에 삼천사三川寺라는 절까지 걸어갔다가 왔다. 진관사보다 조금 북쪽 골짜기에 있는 절인데, 북한산 순환 올레 길에서 800미터 산속으로 들어가 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지만, 혹한에 눈길을 혼자 걸어가니 자못 멀게 생각되었다. 집에서 나서서 돌아올 때까지 3시간이 걸렸다.
신라 때부터 있었던 절이라고 하는데, 한 때 “스님 많이 살았다”하여 삼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올라가는 길은 세멘트 포장이 잘 되어 있고, 6,25때에 소실되었다가 중수하였다고 하는데, 골짜기가 꽉 차게 여러 건물이 들어섰다. 뒤편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 입상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뒤나 곁에 모두 돌 산 뿐이니, “오직 이 산에 들어와 있음을 알뿐이나 구름이 깊어 어디 쯤인지도 알지 못하겠구나[只在此山中,雲深不知處]”라고 할만하다.
12월 27일 목요일 맑다. 시내 나들이를 하다.
처음으로 시내에 나가서, 오전에 명륜동의 퇴계학연구원, 조계사 곁에 있는 을유문화사에 들렸다가 점심은 인사동의 선천집에서 있는 “괴테를 사랑하는 모임”에 가서 먹었다. “괴사모”는 주로 독일에 유학한 지식인들의 모임이지만, 이 모임의 목표가 동서양의 풍류를 함께 연구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도 낄 자리를 하나 내어준 것이다. 대부분 전직교수들이지만 의학, 법학, 음악, 미술, 문학 등 전공은 다양하다. 전공과 다른 사람들을 만나니 자못 흥미도 있으나, 또 긴장도 된다.
오후에는 낙원동의 전통문화연구회에 들렸다가 돌아왔다. 바쁜 “서울 살이”가 시작 된 것이다. 나갈 때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탔고, 돌아올 때는 버스와 전철을 바꾸어 타 보았는데 전철을 이용하는 편이 좀 빠른 것 같다. 밤에는 북한산 온천까지 걸어가 보았다. 집에서 왕복 5리는 훨씬 넘었다.
12월 28일 금요일 맑다. 퇴계학연구원에 책상을 마련하다.
어제 연구원에 들려 평소 비어 있는 방에 책상을 하나 얻기로 하고 왔는데, 오늘 노트북을 들고 가서 설치하고서 작업을 좀 시작하여 보려고 하였으나, 비어 있던 방이라 난방이 시원치 않고, 오늘 점심때에 또 연구원의 연말 회식이 있다고 하여 찾아온 사람들도 있어, 어영부영하다가 점심을 함께 먹으러 갔다.
지금 상근하는 직원도 몇 명 되고, 행사도 더러 하며, 둘러보니 책도 많으나, 여기 와서 그것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으니 아쉽다. 어디서라도 생각만 나면 들어가서 앉아있을 수 있는 곳이 하나 생겼으니 다행이기는 하나, 내왕에 1시간은 걸리고, 또 들려가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 것 같으니, 앞으로 어떻게 적응을 하여 나갈지가 걱정이다.
첫댓글 선생님께 점심대접을 하고 싶었는데 못하였습니다. 안가시는 것이 가장 좋았으나 이미 가셨으니 그 곳에서도 즐거운 일이 많으셨으면 좋갰습니다. 모쪼록 건강하십시오.
선생님의 서울 생활이 더 화려하게 펼쳐질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더 활기차고 행복한 나날 되시길 빕니다.
미국서도 알찬 생활을 하셨으니 우리나라에선 어디서나 즐겁게 보내시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