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手來 金手去
난산(難産)으로 진통이 심할 때 "뱃속의 아이도 돈 소리를 들으면 빨리 나온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얼마나 돈을 좋아하는가를 풍자한 말이지만 사실 사람은 꽤 일찍부터 돈맛을 아는 것 같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나는 아마 대여섯 살 무렵의 어린나이에 벌써 돈에 맛을 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린놈이 어머니의 옷장에서 10전짜리 백동화 한 닢을 꺼내다가 과자를 사잡수신 것이다. 어른들이 사다주시는 거나 받아먹을 나이에 스스로 과자를 사 먹었으니 요샛말로 꽤 일찍부터 셀프 서비스를 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 아이의 사주를 받았는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보다 두 살 위인 집안 아저씨뻘 되는 아이와 함께 가게에 갔었고 얼마 뒤에 두 문제아는 햇볕 바른 담 밑에 숨어서 과자의 맛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도 맛있던 과자를 별로 맛을 즐긴 것 같지 않은 것은 어린 소견에도 아마 뒷감당이 겁이 난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먹다 남은 과자가 꼬투리가 되어서 결국은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은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철모르고 한 것이라고 어린 아들을 감싸주셨지만, 손버릇이 나쁜 첫 아들에게 얼마나 낙심하셨을까 생각하니 어머니에게 두고두고 불효한 것 같아서 가슴 아프다.
친구인 P교수와 함께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지가 멀쩡한 중년 남자가 껌 통을 들고 와서 우리 앞에 내밀었다. 백 원쯤 주면 흐뭇해할 표정이다. P교수가 10원짜리 동전 한 닢을 꺼내서 껌 통 위에 올려놔 주었다. 껌은 필요 없으니 돈만 그대로 가져가라는 뜻이다. 10원짜리는 그동안 이런 때의 선심의 단위로 쓰여 왔었다. 그러면 대개는 고맙게(?) 생각하고 돈을 받아간다. 흔하게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 중년 남자는 말없이 그 동전을 탁자 위에다 튕겨놓고 나가버렸다. 사람 무시했다는 뜻일 것이다.
옛날 장사꾼은 '오 리(里)를 보고 십 리(里)를 간다.'고 했는데 오늘 이 껌 장수는 오 리는 고사하고 그 자리에서도 10원을 튕겨버린 것이다. 이제 속담도 많이 수정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돈에 관한 한은.
'돈은 땅에다 묻으라' 는 것은 우리 조상님들 때부터 전해오는 치부의 교훈이었다. 실상 전에는 돈을 벌면 누구나 논을 사고 발을 사는 것이 안전한 치부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근년에는 논이나 밭보다 도시의 건물이나 터에 투자를 해서 큰돈을 번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역시 '땅에다 묻으라'는 교훈은 반은 살아있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반쪽 교훈도 끝까지 고수할 것은 못되는 성싶다. 이제는 건물이나 토지가 투기억제의 대상이 되자 돈은 증권이나 보석, 가구 등에 쏠리고 그보다는 그림이 만만치 않은 투자의 대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골동 가치가 있는 고화(古畵)가 더한 모양이다. 그림 한 폭에 몇 백 만원씩 거래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인데 사만 놓으면 오른다고 일부 부유층에서는 그림 수집에 열을 올리는 것 같다. 땅을 사기 위해서 복덕방(福德房)을 출입하는 부인을 복부인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골동품 가게에 드나드는 부인은 골부인(骨夫人)이라고 하는 것 같다. 옹졸한 남자에게 붙는 골생원(骨生員)하고는 그 뜻이 아주 딴판이다.
이제 '돈은 그림 속에 묻으라'는 속담이 나오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화중지병(畵中之餠)'은 헛배만 불리는데 그림 속에 묻은 돈 화중지전(畵中之錢)은 그림도 보고 돈도 벌고 일거양득이 되는 모양이다. 지금 세상에는 '그림' 처럼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인기 투자가 그리 흔하지는 않을 성싶다.
한때 백환(百圜)짜리 지폐를 '대통령빽' 이라고 불렀다. 빽 중에서 가장 큰 빽은 돈인데 지폐에 당시의 '리승만 대통령의 초상화가 들어 있대서 하는 말이었다. 가끔 이권이 붙는 청탁에는 돈이 붙어 다니고 민원서류에도 급행료가 붙어야 일이 빠르게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이런 때에 돈을 받는 것을 먹는다', '삼킨다' 고 하는데 물건을 부당하게 착복했을 때에도 함께 쓰이는 말이다. 아직 '돈을 마신다'는 말까지는 나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다.
어떤 외국 사람에게 뇌물을 to eat money(돈을 먹는다)' 라고 직역을 했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dangerous(위험하다)'를 연발하더란 말이 있다. 그 외국 사람이 '먹는다'는 뜻을 잘 알고 한말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적절한 표현같이도 느껴진다. 가끔 부모의 부주의로 어린 아기들이 동전을 삼키고 고생하는 일이 있는데 돈 먹는 일은 어른이나 아이나 다 같이 위험한 일이니까……. 벌기도 어렵고 쓰기도 어려운 것이 돈이 아닌가 생각된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속담은 개처럼 천하게 일하고 벌어서 빛이 나게 쓴다는 뜻이라고 한다.
언젠가 대전 목척교 밑 모래톱에서는 경견대회(競犬大會)가 벌어지고 있었다. 등에다 번호판을 붙인 개들이 열심히 달리는 모습은 흡사 미니 경마대회를 방불케 했었다. '개처럼'이 아니라 아주'개와 함께' 돈을 버는 방법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개가 아니라 고양이나 여우처럼 교활하게 돈을 모으려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과대선전이나 바가지요금은 그래도 질이 나은 편이고 유해식품, 가짜 약품, 부실공사, 불량제품 등 사람의 생명에 위협을 주면서까지 톡톡히 재미를 보는 업자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돈독이 오른 사람들에게 빛나게 쓰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우처럼 벌어서 개처럼 먹는 것이 고작 일터이니 말이다. '돈'과 '독'은 겨우 받침 하나 차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지내기가 일쑤다.
언젠가 외국의 토막소식이 전하는 것을 보면 어떤 부인은 수백만불의 돈을 벌어놓고도 굶어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람은 아마 그 돈을 저 세상의 지참금(持參金)으로 오해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유형의 치부군은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공수래공수거' 의 담담한 인생을 다들 '금수래(金手來) 금수거(金手去)'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테마에세이 '돈', 19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