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학기 “철학산책” 과제물(1)
「새말 새몸짓」을 읽고
진짜 ‘공부’로의 복귀
서강대 인문계 1학년 신지수
흔히 하는 말 중에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학생과 학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곤 한다. 공부가 우리 삶과 멀어진 것은 왜인가? ‘공부’의 본래 의미를 매개로 하여, ‘학습’과 ‘연구’를 연결하고 공부와 삶을 다시 연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학문이나 기술 ‘공부’라는 단어의 사전적 뜻을 찾아보면 “학문이나 기술 등을 닦는 일”이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이 정의는 자칫하면 공부의 개념을 ‘~학’이라고 쓰인 책을 열심히 읽고, ‘~의 기술’을 손으로 열심히 익히는 것 정도로 제한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공자와 소크라테스 등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공부’의 전통은 사실 흔히 말하는 ‘인생 공부’에 가깝다.
특히 공자의 공부는 내적 열망(好學)에 의한 평생 학습론으로 정의하곤 하는데, 삶을 사는 것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동일선상에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주석). 공부하는 것을 인생을 잘 사는 법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원래 공부’의 의미는 분명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학, 법학, 공학 이론을 열심히 익히는 공부’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공부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우리네 삶과 공부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인식하고 이러한 방향으로 ‘공부’의 뜻을 다시 이해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원래 ‘공부’의 의미가 변질된 것은, 다시 말해 공부와 일상이 분리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공부가 수단화·기능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부가 인간으로서의 성장에 기여하기보다는 세속적인 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기 수양을 위한 공부는 ‘공부’의 축에 끼지 못하고, 대학에서 학생과 학자들이 하는 논문 연구 활동과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하는 학습만이 공부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비단 현대 사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고려 시대의 과거(科擧) 수험생들이 지공거 출신 선생이 만든 사학에 다니며 그들의 경전 해석을 달달 암기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정답이 있는 시험의 고질병이다.
시험을 치르기 위한 기능적인 목적의 공부는 정답(혹은 선생님, 교과서, 성인(聖人))에 대한 절대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하고, 이는 결국 F. 베이컨이 말한 극장의 우상처럼 아무도 정답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만든다.
내적 열망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공부는 불안과 소외, 타자성에 의한 무기력과 우울감이 문제되는 현대인의 삶에 하나의 대안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본래적 공부’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공부가 인간의 내면적 풍요에 기여하는 메커니즘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라고 생각합니다’에 두려움을 버리고, 이러한 발언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5지선다형 시험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대학의 경우 더 그렇다. 교수의 지식에, 거장의 연구에 의문을 가지는 분위기가 자연스러워져야만 한다.
공자가 말했듯, 개인의 공부를 이어나가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동력은 호학(好學)과 앎에 대한 갈구라는 내면적 동기이다. 설사 그것이 기존의 생각에 반기(反旗)를 드는 것이라 해도, 이러한 내면적 동기에서 출발한 질문을 막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유롭게 풀려난 개인의 지적 동기는 ‘알아 나감’을 실천하는 삶으로써 개인을 성장시키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꾸준한 사유와 의문제기로써 학문세계 전체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성 지식에 질문하고 반발하는 생각은 모더니즘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낳았던 것처럼 인류에 공헌할 것이고, 기존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한데 모으는 생각은 공자의 유학이나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인간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이상으로 공부와 삶이 분리된 현실과 공부와 삶이 재결합하는 것의 필요성, 그리고 그 결합이 낼 시너지에 대해서 약술하였다. 물론, 기능을 배우고 익혀 터득하는 방식의 학습 또한 무의미하다고는 할 수 없다.
피아노를 배울 때 건반을 누르는 법, 손가락을 움직이는 법, 화성을 분석하는 법을 먼저 외우고 익힌 다음에야 곡에 자신의 해석을 더하고 자신만의 곡을 만들어 연주할 수 있는 것처럼, 진정한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기존의 지식들을 먼저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다만 ‘학습’과 ‘연구’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외부적 동기에 의해 수단화된 공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앎에 대한 갈증과 일상을 함께 두었던 본래의 ‘공부’ 개념으로 돌아가, 내면적 동기에서 시작하여 평생 이어지는 공부의 의미를 되찾고 공부에 연구와 탐색의 영역을 돌려줄 때이다.
* 주석: 신정근, <공자의 공부론: 내적 열망에 이끌린 평생학습론>, 《동양철학연구》76집,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