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나의 문학 (불교문예 2016 겨울호)
園丁 | 조회 39 |추천 0 | 2016.12.25. 19:54
불교와 나의 문학 (불교문예 2016 겨울호)
나비는 떠나며 꽃잎에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홍성란
# 모두가 ‘말’이지만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불교와 나의 문학’이라는 코너에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옆 사람이 부처’라는 말씀이 있다. 옆 사람이 왜 부처인가. 옆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 기쁨에 나도 감염될 테니 나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 부처 아닌가. 기쁜 옆 사람이 또 옆 사람을 감염시키고 온 나라 사람이 기쁜 보살들 아니겠나. 모두가 ‘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옆 사람이 부처라는 말은 옆 사람을 부처님 모시듯 공경하듯 잘 대하라는 말씀 아닌가. 공감하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문을 연다.
세상 산다는 건
비위를 맞추는 일
미안해
고마워
두 어깨 토닥이며
나도 그 간격을 버리고
네 눈빛 보는 일
-「우리 사이」 전문
그렇다. 세상 산다는 건 옆 사람 비위를 맞추며 사는 일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열이라면,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열쯤은 될 거다. 좋아하고 싫어한다는 것은 무언가. 제 비위에 맞는다는 말 아니면 제 비위에 안 맞는다는 말일 거다. 가족의 비위를 맞추고 스승과 제자의 비위를 맞추고 부하와 상사와 동료의 비위를 맞추고.
비위를 맞춘다는 말이 마땅치 않으면 기분을 맞춘다고 해보자. 정말 그렇게 남의 기분을 맞추며 살아온 것 같기도 하다. 타인의 기분을 맞추며 살았으되 순전히 타인만을 위했던 것인가. 내가 싫으면 안 하면 될 것인데 싫어도 했다면 그것은 내가 버티고 살기 위해서 한 일 아닌가.
몸부림치던 나날 그 마음 굽이 보는
아침
목숨 도모였다 이 눈물도
결국은
백일홍 꽃잎을 뜨는 표범나비 한 마리
-「탱화」 전문
인생고해라는 말이 없었다면 세상은 마음은 고요담적일 것인가. ‘너’ 때문에 괴로운 나를 들여다보면 결국 나 때문에 괴로운 것이었다. 너를 버리지 못한 나 때문에 괴로운 것. 고해는 누가 만드는 것인가. 욕망 집착. 고요담적 평온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내 마음이 만드는 것. 일체유심조라는 말씀을 이렇게 함부로 쓴다.
# 약속은 허물기 위해 짓는 집
너라는 것이 사람이거나 도리이거나 명예이거나 물질이거나 그를 얻지 못하여 번민하던 나날을 돌아보면 호수에 뜬 백조처럼 끊임없는 수면 아래 노역이 보인다. 백일홍 꽃잎에 와 앉았다가 떠나는 표범나비 한 마리. 나비도 꿀을 얻고 꽃가루를 얻고 저 살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나비는 떠나며 꽃잎에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이제 와서
알게 된 건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것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
거짓말
사랑한다는 그 불쌍한
거짓말
-「이제 와서」 전문
제행무상이라는 진리를 세상 사람이 다 안다고 해도 나는 모르고 사는 것이다. 가슴을 치지 않아도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것이 물질이거나 명예이거나 사랑이거나 일평생 내 곁에 있으리라 믿었던 그것이 나를 떠나기 전까지는. 저를 위한 불쌍한 거짓말들. 그러니 약속은 가끔 허물기 위해 짓는 집이다. 지키지 못한 약속은 내가 허물어버린 집 아닌가(「집」).
# 지주도 없는 허공을 감아 올라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전신 ‘오늘의시조학회’의 시조학술세미나가 무산 큰스님 초대로 백담사에서 열렸다. 그때 큰스님을 처음 뵈었고 큰스님을 가운데 모시고 시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우리시대현대시조100인선으로 나온 『겨울약속』에 실려 있다. 큰스님께서 만해마을을 지으시며 유심작품상을 제정하셨다. 이근배 선생님께서 유심작품상 시조부문 제1회 수상자로 추천 심사하셨고 단시조 「애기메꽃」과 사설시조 「11월의 붓자국」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한 때 세상은
날 위해 도는 줄 알았지
날 위해 돌돌 감아 오르는 줄 알았지
들길에
쪼그려 앉은 분홍치마 계집애
-「애기메꽃」 전문
누구나 그렇듯 엄마 젖 떨어지고 기저귀 버리고나서, 울면 달래주고 배고프면 젖 물려주던 시절은 갔다. 지주支柱도 없는 허공을 감아 올라가야 하는 시절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눈 뜨면, 낮은 물길 열고 날아오르는 오목눈이 떼 하며 연분홍 들길을 열어주는 메꽃 하며 아직도 세상은 날 위해 돌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비선실세니 국정농단이니 곧 파국으로 치달을 것 같아도 우리의 하늘이 오천년 역사 위에 정의와 진실의 편에 설 것을 안다. 우리가 올바른 견해, 올바른 생각,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마음씀, 올바른 정신 통일을 이루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한.
# 가랑잎은 춤으로 생을 벗는다
날개가 있거나 날개가 없거나 지상의 모든 것은 더 낮은 곳으로 내려앉을 궁리로 일생을 수놓는다. 왕후장상으로 살았거나 계집종으로 살았거나 슬픔의 질량은 같다. 여기 온 것이 축복이라면 울며 올 리 없지 않은가. 생은 슬픈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세상은 큰 울음으로 열린다. 축복으로 살았거나 슬픔으로 살았거나 ‘나’는 온 존재로써 “세계를 뒤흔들어놓고 사라지는/ 가랑잎/ 하나(「춤」)”와 다를 게 무언가. ‘나’라는 세계가 멸하는 순간 세계도 멸한다. 내가 눈을 감는 순간 세계의 창도 닫히는 것. 가랑잎은 온 존재를 내려놓는 무욕의 춤으로 생을 벗는다.
산자락 붉나무 코끝도 빨간 아침
버틴다고 버틴 산발치 배추들이 소름 돋은 고갱이 환히 내밀고 있다 무슨 기척에 도망갔는지 웃잎만 건드린 어린 고라니 엉덩이 강종강종 건너갔을 마른 개울 저만치
겁먹은 어미의 긴 속눈썹 눈망울도 지나갔다
-「상강 무렵」 전문
『춤』을 내고 이듬해 제4회 한국시조대상을 받을 때 유심작품상을 받을 때와 같이 수상작은 단시조(「춤」)와 사설시조(「상강 무렵」) 2편이었다. 「상강 무렵」은 만해마을을 오가며 얻은 작품 가운데 하나다.
만해마을 입구 다리를 건너면 오른 편으로 지금은 넓은 공터가 있다. 아니 공터라기보다는 봉정암으로 공수할 건축자재나 식자재 등이 모인 창고가 있는데 전에는 백담사 주지 삼조스님께서 가꾸는 텃밭이 있었다. 배추 상추 고추 오이 감자 등이 시퍼렇게 자라고 있었는데 검정콩 같은 배설물을 발견한 그때는 가을도 다 지나 첫서리가 내린 상강 무렵이었다. 그 콩알들을 보니 어린 고라니가 뛰노는 모습이 환히 떠올랐다. 어미 고라니가 먼발치에서 걱정스레 바라보는 모습도 보였다. 알이 꽉 찬 삼조스님의 배추들 가운데 가장자리 배추들은 여린 잎이 뜯겨 있었다. 고라니가 다녀간 것이다.
# 고마운 풍경들
작은 것은 아름답다고 고라니도 고라니지만 어린 고라니의 환하고 작은 엉덩이는 얼마나 어여쁠 것인가. 양재천 물길 들길을 따라 걷다보면 붉은머리오목눈이 떼를 매번 만난다. 붉은머리오목눈이는 이름처럼 오목한 눈이 얼마나 예쁜지. 까만 채송화씨앗 같기도 하고 분꽃 씨 같기도 한데 분꽃 씨라면 너무 크다.
새는 어디서 오는 걸까
버들강아지 낮은 물가
붉은머리오목눈이 쓰다듬는 눈을 하고
물 건너
보기만 보네 하느님도 꼼짝없이
-「어린 봄」 전문
마른 갈대 줄기에 붙어 놀고 있는가 하면 어느새 물가로 내려와 버들강아지 늘어진 가지를 타고 재재거리는 어린 것들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 작은 새들의 부산한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행여 셔터 누르는 소리에 화르르 날아갈까 몸 낮추고 가만히 바라보던 시간들. 누가 허락한 시간일까. 그 고마운 풍경들.
조운문학상이 제정되고 이 단시조 「어린 봄」으로 제1회 수상자가 되었는데 양재천을 산책하며 얻은 연시조와 사설시조도 함께 수상작이 되었다.
대추 꽃만 한 거미와 들길을 내내 걸었네
잡은 것이 없어 매인 것도 없다는 듯
날개도 없이 허공을 나는 거미 한 마리
가고 싶은 데 가는지 가기로 한 데 가는지
배낭 멘 사람 따윈 안중에 없다는 듯
바람도 없는 빈 하늘을 바람 가듯 날아가데
날개 없는 거미의 날개는 무엇이었을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다는 듯
매나니 거칠 것 없이 훌훌, 혈혈단신 떠나데
-「바람의 머리카락」 전문
배낭 메고 운동화 신고 혼자 산책하며 명상하는 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 한번 나가면 만보 이상 걷는다. 시야에 무언가 비행물체가 들어왔다. 보일 듯 말듯 연둣빛 작은 물체. 가까이 가 들여다보니 아주 작은 거미였다. 이름을 몰라 부르지 못하는 거미. 날개도 없는 거미는 허공을 날고 있었다. 바람도 없는 빈 하늘을 바람 가듯 날아갔다 날아왔다 사라질듯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내 눈길을 붙들고 있는 거미.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바람 가듯 오고 가는 거미의 날개는 무엇이었을까. 거칠 것 없는 마음이라는 게 거미에게도 있을까. 배낭이 필요하고 주머니가 필요한 사람 따위는 안중에 없는 거미의 마음. 하류에 이를 때까지 내내 없는 거미가 내 마음을 날고 있었다.
어느 별이 보낸 인연이었나
부르지 않아도 찾아와서는
기꺼이, 하늘 아니어도 솟구쳤다간 날개를 펼쳐 선회하듯이 마땅히, 날 기다리지 않아 날 붙잡아두지도 않아 아닌 듯, 내 마음 잔가지 흔드는 바람이었다가 정말은, 잠시도 날 가만 두지 않는 파랑波浪이었다가
어느 날
보내지 않아도 떠나버릴 그대여
-「큰고니를 노래함」 전문
어느 날 초저녁, 탄천 가까이 하류에 이르러 혼자 큰 소沼에 노니는 백조를 만났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큰고니는 처음이다. 미동도 없이 셔터를 누르다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을 들켜버린 순간 이륙하는 큰고니. 그 큰 날개로 초저녁 하늘을 유유히 날아오르다 선회하여 다시 소에 들 듯 하다가 한강 본류 쪽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 짧은 순간 설레던 마음이 멈추어 바라보게 했으리. 파랑 치던 마음이 가까이 다가가게 했으리. 부르지 않아도 찾아왔던 새는 보내지 않아도 떠나고 말았다. 제행무상 회자정리.
# 후회는 인간의 양식
가까이 다가가던 발길을 후회한다. 그냥 멀리서 바라만 볼 걸 그랬다. 셔터를 누르지 말 걸 그랬다. 가지려고 하지 말 걸 그랬다.
후회로구나
그냥 널 보내놓고는
후회로구나
명자꽃 혼자 벙글어
촉촉이 젖은 눈
다시는 오지 않을 밤
보내고는
후회로구나
-「명자꽃」 전문
후회로구나. 후회는 인간의 양식. 세상 모든 사람은 후회를 먹고 산다. 그냥 보낸 ‘너’가 사랑이거나 기회이거나 물질이거나 간에 그냥 보내고 놓치고 후회하지 않은 이가 지상에 있을까. 동서고금 남녀노소 누구나 한번쯤 후회하며 탄식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제1회 유심작품상 수상자라는 인연으로 이상국 시인의 「기러기 가족」과 함께 만해마을 앞마당에 서 있는 빗돌 「명자꽃」은 제12회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작이다.
# 동행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불교와 나의 문학’이라는 코너에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유심작품상과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작을 이야기하게 했다. 다 아는 말이지만 실상 누구나 깨달을 수도 실천할 수도 없는 제행무상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변하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 해도 나는 이 모든 것에 머물고 싶다. 마음 바꾸지 않고 싶다.
머물고 싶은 데 있던
그런 때가 있었어
아무렇지 않게 분꽃 핀 옛집 내려다보고
나는 또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잖아
-「분꽃 핀 옛집 흘러가고」 전문
나는 또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는 나를 본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흘러가는 나를 내려다 본다. 흘러가며 사는 중에, 흔들리며 사는 중에 기쁨이 있다면 잠시간 나의 동행이 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잠시간 나의 도반이 되어주는 고마운 이가 있기 때문이다. 떠나도 나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는 사람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잔잔한 냉이 꽃이
풀밭 위에 아름다운 건
바람 가는 대로 흔들렸다, 흔들려서가 아니다
날 따라
냉이꽃무리도 흔들리기 때문이다
-「잔잔한 눈길」 전문
약력: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등단. 시집 『춤』, 단시조60선 『소풍』, 조운문학상수상기념시집 『바람의 머리카락』, 한국대표명시선100 『애인 있어요』 등이 있음. 유심작품상∙중앙시조대상∙한국시조대상∙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수상. 성균관대 강사∙『유심』 상임편집위원 역임. 현재 유심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