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10일, 숙박지 우루밤바에서 다시 쿠스코로 온 우리는 첫 날 건너 뛰었던 산토도밍고 성당을 먼저 들렀다. 잉카지역에 산재한 24개 유적지(성당) 중에서도, 잉카양식과 스페인풍이 혼합된 보기 드문 건축양식의 이 성당은 여러 가지 볼 거리를 지니고 있어 우리의 눈을 긴장시켰다. 원래 잉카제국의 신전이었던 곳을 기초만 남겨두고 무너뜨린 위에 천주교 성당으로 개축한 이곳에서 우리는 잉카 신과 예수의 기묘한 동거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쿠스코 공항에서 푸에르토 말도나도 행 LP071편에 탑승한 우리가 말도나도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35분, 비행기가 말도나도에 착륙할 때 공중에서 바라본, 아마존의 지류 ‘마드레 디오스’의 흙탕 강물과 대비되는 밀림의 푸른 색채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모처럼 창가에 앉은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바로 옆자리의 아리따운 미국 아가씨가 목을 길게 빼며 안타까워 하길래 바짝 시트에 목을 붙이며 시야를 확보하게 해 주었더니 “쌩큐”를 연발하며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기 바쁘다. 테네시주 내쉬빌(Nashville) 출신이라는 이 금발처녀는 구레나룻이 멋진 남자 친구와 함께 현재 남미 배낭여행 중이었다.
마치 필리핀이나 태국의 시골마을을 연상시키는 말도나도 시내의 현지 랜드사 사무실에 큰 짐을 맡기고 취침 및 세면도구만 든 작은 가방을 휴대한 우리 일행은 모터카누로 약 1시간 이상, 아마존강의 지류인 마드레 디오스강(Rio Madre de Dios)을 가로질러, 흙탕물의 강숲에 숨어있는 ‘땀보빠다 국립공원’ 내 롯지(Eco amazonia Lodge)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에 여장을 푼 우리는 긴팔 옷으로 무장하고 모기약을 잔뜩 바른 후, 몽키 아일랜드 투어에 나섰다.
몽키 아일랜드에 도착한 후, 약 20분을 앞장서 걷던 현지 안내인이 괴성을 지르며 신호를 보내자 어디선가 원숭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바나나와 먹을 것들을 그네들에게 던져주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동물원 아닌 야생 원숭이들을 밀림 속에서 조우하는 기분이 이상 야릇하다. 이곳에 서식하는 원숭이는 덩치가 큰 거미원숭이와 수명이 긴 카푸치노원숭이의 2종이었는데, 찌는 듯한 무더위와 모기군단의 집중공격을 이들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을 듯하였다.
거의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아마존의 열대 밀림 속에서 오후 한때를 보내고 숙소인 롯지로 돌아온 우리는 저녁 식사 후, 말로만 듣던 ‘아마존의 별 헤는 밤’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롯지의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일행에게 ‘아마존강 밤마실 특별이벤트’가 준비되었다는 전갈이 오자마자 카누의 인원이 초과될 세라 몰래 몰래 선착장으로 나갔던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살짜기 옵서예”를 외치며 선착장에서 잠복 중이던 또 다른 일행들과 마주 치고는 멋쩍은 미소를 교환해야 했다. 결국 소수 특공대의 이벤트로 준비되었던 아마존강 밤나들이는 단체 밤소풍으로 변경되었고 우리는 올 때 탔던 40인승 카누를 이용해 아마존강의 낭만을 즐길 수 있었다.
랜턴으로 악어를 유혹하는 뱃사공과 안내인의 집념에도 불구하고 동양인 앞에서 희생되기 싫은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파업(?) 중인지 끝내 악어는 포획되지 않았다. 그러나 뱃전에 기대누워 올려다 본 남반부, 아마존강의 여름 밤하늘은 말할 수 없이 처량한 아름다움을 뿜어대고 있다. 문득 남미 여행 중이던 체 게바라가 페루의 아마존 유역 ‘산파블로’의 나병원에서 잠시 자원근무할 때, 나환자들과 자신의 생일을 함께 하려 병원 근무자 지역에서 강 건너편의 나환자 지역으로 헤엄을 쳐서 건너던 영화 속 장면이 연상되었다. 게바라가 헤엄을 치던 그날 밤, 아마존강의 상공에도 오늘처럼 숱한 남반부의 별들이 떠 있었을 것이다.세월이 흘러 인간은 변하고 죽어가도 별은 그때의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내가 이곳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내가 오늘밤 본 아마존의 저 별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지켜며 내 흔적이 되어주기를 부질 없이 빌고 또 빌었다.
롯지에 돌아와 샤워기를 틀었더니 아마존의 흙탕물이 쏟아진다. 도저히 샤워할 엄두가 나지 않아 대충 수건으로 문지르고 침대에 누웠더니 밤 10시면 단전되는 이곳의 전력 수급원칙 때문에 이내 전등이 나간다. 준비했던 비상랜턴으로 화장실을 드나들어야 했다. 그러나 냉방시설이 안 된 롯지에서 이 밤을 지샐 것을 생각하고 공포에 움추렸으나 심야엔 기온이 뚝 떨어져 오히려 모포를 덮어야 할 정도로 시원 썰렁해 다행이었다.
아마존에서의 1박 2일 짜리 오지체험을 마친 우리가 다음날 다시 말도나도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쿠바에서 우리와 조우했던 O사의 패키지팀이 대합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보다 100만원이나 비싼 그들의 비용을 떠올리며 우리 모두는 똥집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늦은 저녁 시간, 다시 리마에 도착한 우리는 석양이 지는 시가를 차창 밖으로 둘러보며 황금박물관으로 향했다. 칠레와의 해전에서 나라를 구한 페루의 이순신 ‘미겔 그라우’ 제독을 기려 조성된 5월(5.2)광장, 소년 소매치기범들의 관광객 집단 급습을 막기 위해 노란 유니폼의 시청 단속반이 군데 군데 포진해 있는 구시가의 중심 산 마르틴 광장, 그리고 국회의사당 등을 지나 한때 테러분자에 점거돼 세계 뉴스의 중심이 되었던 백색의 미 대사관에 이를 데까지 치안이 불안하다는 리마의 구시가는 온갖 다양한 인간군상의 파노라마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며칠 전 한국에서 포교여행을 온 어느 스님이 의사당 근처의 구시가에서 소년 털이범 10 여명에게 장삼을 포함한 입성과 소지품 일체를 홀라당 강탈당해 거의 팬티 바람에 버스를 타고 경찰서를 거쳐 호텔로 귀환했다는 환타지소설 같은 ‘믿거나 말거나 뉴스’를 가이드로부터 듣는 사이, 우리 버스 옆으로 “김해- 구덕”이란 한글 행선지 표식이 뚜렷한 한국산 버스가 나란히 가고 있다. 버스 안에선 남자 차장이 선 채로 열심히 차삯을 거두는 모습이 보인다. 한글표식을 지우지도 않고 그네들 노선에 그대로 투입되는 모습을 보니 한국인으로서 뿌듯한 자긍심이 샘솟는다.
남미대륙을 종으로 연결하는 팬아메리카나 고속도로가 4차선에서 1차선으로 좁아지는 지점 쯤에서 우리의 버스는 비로소 부유층 저택과 칠레계 대형백화점이 운집한 신시가에 접어들 수 있었다. 치안이 비교적 양호하다는 이 지역을 차창 밖으로 둘러보니 거리도 깨끗하고 구시가와는 달리 전봇대가 지상에 나와 있었다. 이때까지 우리는 세 가지 이색적인 풍물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교통순경이 원형 통속에 앉아 단지 몸의 방향전환으로 교통 흐름을 통제하는 ‘교통신호통’과 페루에서만 볼 수 있는 총알 승합택시 ‘꼴렉티뽀’, 그리고 페루의 택시계를 평정하고 있는 국산 소형차 ‘티코’의 존재였다. 특히 ‘꼴렉티뽀’ 기사의 모습은 예외 없이 꾀죄죄했는데, 항상 창문을 연 채 왼 손으로 탑승 가능한 승객의 수를 보여주며 달려야 하는 관계로 더러운 먼지와 바람을 뒤집어 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격적이고 인상적인 것은 노후할 뿐 아니라 3도어로 탑승에 불편한 ‘폭스바겐’을 시장에서 몰아내고 그 뛰어난 유가 경제성으로 페루의 택시계를 완전 석권한 한국산 티코의 앙증스러운 주행 광경이었다.
공립박물관이 아닌 민영 시설인 황금박물관에서는 나스까문명에서 빠라까스문명을 거쳐 잉카문명에까지 전수된 고대 페루인들의 500여 년에 걸친 문명변천사를 한눈에 일람할 수 있었다. 특히 앉은 자세로 표구된 페루인의 미이라와 포로의 머리와 입에 구멍을 뚫어 표구한 해골이 눈길을 끌었다.
다시 4시간 밤길을 달려 우리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숙영지 태평양 연안 빠라까스의 매혹적인 숙소(Hotel Paracas)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심야의 호텔 볼룸에선 한창 밸리댄스 강습이 진행 중이어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했는데, 알고 보니 결혼 피로연 행사였다.
2006년 1월 12일, 마침내 이번 여행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새벽 6시 기상,
우리는 2대의 모터보트에 분승해 물개섬 관광에 나섰다. 막 호텔 앞 선착장을 출발하는 우리 눈 앞에 일사불란히 물을 박차고 상승해 공중선회 편대비행을 하는 펠리퀸 네 마리와 덤블링을 하듯 바다 속에서 곡예를 부리는 돌고래의 무리가 나타났다. 이른 아침, 물개섬으로의 여정을 환송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카메라 셔터를 들이대며 환호했다.
약 1시간 여, 아침 물살을 가른 끝에 우리는 禁斷의 孤島, 물개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개섬에는 숱한 새들과 물개,바다사자 등이 그들만의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빨간부리 바다제비, 가마우치, 갈매기, 펠리퀸에서 펭귄과 콘도르까지 숱한 새들의 함성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사이로 바위 위에 걸터앉아 포효하는 물개, 바다사자의 무리가 한 폭의 해양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들 물개섬의 식구들에게 우리 자신이 오히려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듯한 착각 속에 우리는 ‘동물의 왕국’ 촬영팀이 되어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물개와 바다사자의 출산으로 온통 핏빛으로 변한 해안 자갈밭의 전경과 어디선가 홀로 날아와 죽은 새를 뜯고 있는 콘도르의 모습이 이날 아침, 물개섬의 ‘숨은 그림 찾기’ 과제였다.
숙소로 돌아와 평화롭고 운치있는 빠라까스 해변의 정경을 바라보며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는 나스까 사막을 가로지른 4시간의 대장정 끝에 드디어 나스까 라인을 고공관찰할 수 있는 경비행기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마에서 빠라까스까지의 태평양 연안 도로와는 달리 빠라까스에서 이까를 거쳐 나스까 평원에 이르는 길에는 끝없는 사막의 지평선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버스 안에서 이까 특산의 페루 전통 꼬냑인 ‘피스코’(pisco)를 한 잔씩 돌리며 한낮의 취기를 즐겼다. 거의 50도에 육박하는 독주의 향내가 코끝을 찡하게 압박해 왔다. 내륙의 사막지대를 관통하는 도로는 원래 흙길의 비포장도로였으나 일본 출신의 후지모리 대통령 시절에 고속도로로 포장되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일본에서 임신해 태평양 건너 페루 땅에 도착해서야 낳았다는 후지모리는 5만 명의 재 페루 일본인 중 1명이었다. 역시 일본 교민으로 갑부의 딸인 수산나 히구찌와 결혼 후, 리마농대 교수와 경제부처 장관을 거쳐 1990년부터 5년 임기의 대통령에 3번 연속 당선되었던 그는 일본정부의 경제원조를 바라는 페루국민의 기대와 남미지역의 마약 및 테러 방지 교두보로 삼으려는 미국의 지원을 교묘히 활용해 권좌를 누렸으나, 군부 출신의 심복 정보부장 몬테시뇨르를 구금시킨 후, 군부와의 갈등이 고조되어 결국 현직 국가원수가 자국적을 스스로 포기하고 외국(일본)에서 외국적을 취득하는, 초유의 진기록(기네스북 등재)을 남기고 하야했다.
오는 도중 사막 한가운데에 간간이 목화밭과 양계장이 눈에 띄었는데, 강수량이 적은 이곳에서 어떻게 관개(灌漑)를 해결하는지 적이 궁금했다.
이번 여행 중 만난 숱한 한국 단체여행객들로부터 우리에게만 있는 프로그램이라 적잖은 시샘과 부러움을 받게 했던 ‘나스까 라인’ 경비행기 투어는 나스까 사막 위에 고대인이 그린 숱한 不可思議의 그림 중, 관찰 가능한 10여 개를 경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육안관찰하는 것으로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코스였다. 6세기경, 나스까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나스까의 대지 (정확히 말하자면 ‘빰빠 인헤니오;Pampa ingenio’지역) 위에 표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들은 10평방미터에서 300평방미터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와 유형으로 이뤄져 있는데 ,약 200여 개의 그림이 광활한 사막지대에 분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고도가 낮거나 근거리에선 전체의 윤곽을 파악하기 힘드므로 비행기를 이용한 공중 관찰이 최적의 접근법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선이 되는 얕은 도량은 검은 지표의 작은 돌을 제거하여 밝은 색의 지표를 노출시킨 것인데 비가 내리지 않는 이 지역 기후 특성상,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이 지방에는 지난 17년간 기상당국에 의해 강우 현상이 관측되지 않았단다. 그림들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우주인’설, ‘하늘을 나는 사람’설, ‘성좌를 나타내는 달력’설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아직 확실히 실체를 규명하고 있지는 못하다.
3인승과 5인승, 2종의 경비행기는 각각 고도 800m, 1000m, 1200m를 비행하도록 코스가 정해져 있었는데 나는 P교수, R교육장 두 분과 함께 고도 800m를 비행하는 3인승을 타게 되었다. 가장 낮은 고도를 비행하는 덕분에 대상을 가까이서 세밀히 관찰할 수 있었으나 회전의 반경이 좁고 급격해 선회시 약간의 두통이 뒤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은퇴한 고령의 R교육장께서 급기야 비닐봉지를 입에 갖다 대시는가 했더니 앞자리의 P교수는 땀을 구슬처럼 흘리며 힘들어 한다. 그러는 사이, 내 눈 아래엔 나스까 사막을 가로지르는 ‘팬 아메리카나’ 고속도로의 선명한 검정 라인이 황색 도화지에 그린 검은 실선처럼 뚜렷히 펼쳐진다.
이미 우리의 비행기는 외계인, 새, 전갈, 게, 세모 도형 등 예정된 12개의 그림 위을 각각 좌우 한 번씩 2회에 걸쳐 선회하는데 성공했다. 선글래스가 멋있게 어울리는 미남 조종사가 마지막으로 외계인 그림 위를 한번 더 보너스 선회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이미 그로기 상태인 두 분의 컨디션을 고려해 비행장으로 귀환할 것을 종용했다.
“O.K" 사인도 시원하게 조종사는 기수를 돌려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고대 나스까인들의 꿈이 깃들어진 신비의 형상들이 내 등 뒤로 점차 멀어져 가고 있다. 이윽고 25분 전, 우리가 이륙했던 비행장 활주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땅빛이 점점 가까이 눈 속에 들어찬다 싶더니 어느새 착륙 마찰음도 요란하게 우리의 비행기는 이미 지상을 운행 중인 3인승 자동차(?)로 바뀌어져 있다. 나스까 사막의 한낮 태양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우리의 뺨에 거친 호흡을 내뿜고 있다. 17박18일의 기나긴 중남미 여정이 겸연쩍게 작별을 고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