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따오 맥주의 고향 - 靑島를 찾아서
1.
1883년11월 조선(朝鮮)과 독일간의 조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요코하마 독일총영사 자페(Zappe,Edward 1843-1888)와 그의 통역관 부틀러가 참석했다. 그들은 1883년10월24일 군함 라이프치히호를 타고 제물포항에 도착해 독일국왕이 보낸 신용장(信用狀)을 전달하였고 5일후 수호조약이 체결되었으며, 1883년12월1일 다시 일본으로 떠났게 되었다.
1897년11월1일 독일선교사 2명이 산동성(山東省) 거야(巨野)에서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독일은 국가적 대항책으로 교주(膠州-자오저우)만을 점령하게 된다.
1898년1월15일 독일과 청(淸)나라는 독청조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3월6일부터 자오저우 만(灣)을 둘러싼 동쪽과 서쪽의 반도 그리고 작은 섬들이 99년 동안 독일의 조차지(租借地)가 되었다.
작은 어촌(漁村)이었던 칭따오(靑島)는 독일이 조차한 자오저우만의 수도가 되어 모범적인 식민지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독일은 이곳에 독일에서 가져온 설비를 통해 칭따오 맥주(麥酒)를 생산하게 되었고, 1909년에는 덕화대학(德華大學,1909-1914 칭따오특별고등전문학당)을 설립했다.
독일의 식민지였던 칭따오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9년의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연합국측이었던 일본의 위임통치령으로 바뀌게 되고, 일본이 1922년 자오저우만을 중국에 반환하여 다시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칭따오맥주의 소유권은 일본측이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45년 이후 국민당의 품으로 돌아오고 다시 1949년 이후 중국공산당의 국영칭따오맥주공장이 되었다.
2.
독일에 의해 개발이 시작된 칭따오는 전보(電報)와 철도가 개설되어 근대도시로 탈바꿈하였고, 1904년에는 칭다오와 제남(濟南)간의 철도가 완성되었다.
이로인해 독일부터 자오저우만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약13일 동안 서유럽에서 동아시아까지 여행할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전 글에서 이미 <비단길>을 명명한 독일태생의 세계적인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F. von Richthofen:1833-1905)이 동아시아 지질탐사를 통해 산동(山東)에서 조선의 원산만까지 이어지는 자원의 연결고리를 조사했다는 기록을 통해 산동-원산만의 탐사고리가 현 황해(黃海)바다를 가로지르는 지역이 아님을 고찰해 보았다.
우랄산을 넘어온 시베리아횡단철도는 현 카자흐스탄의 동쪽 천산(天山)산맥을 넘어 우루무치와 북경(北京)인 주천(酒泉)을 지나 1900년 당시 산동(山東)이었던 현 난주(蘭州)까지 연결되었고, 독일의 조차지(租借地)였던 청도(靑島)까지 그 지선(支線)이 다시 연결되었던 것이다.
기상(氣象)변화 및 지리(地理)변화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엄청난 간척(干拓)사업과 각종 폭파사업으로 구한말(舊韓末) 당시의 모습과 지금의 대륙지리는 판이하게 다름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전의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 연구는 현재의 지형지리(地形地理)가 구한말에도 똑같았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강역고찰이었기에 많은 오류가 있었고 그로 인해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의 가짜내용을 철썩같이 신봉함과 동시에 거대한 대륙이 하나의 조선(朝鮮)이었는데 둘로 나뉘어졌다는 논리가 유령처럼 20여년을 떠돌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과거의 수많은 기록들을 정밀히 고찰해 그 변화된 지형과 지리까지도 모조리 밝혀낼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조선사(朝鮮史)오천년의 강역과 하(夏)은(殷)주(周) 삼대로부터 시작하여 진(秦)한(漢)수(隨)당(唐)송(宋)명(明)청(淸)으로 이어지는 한족(漢族)과 만주족(滿洲族)의 강역이 명확히 구분되어 끊임없는 투쟁과 이합집산(離合集散)의 역사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음을 재 고찰(考察)할 수 있게 되었다.
하얼빈에서 조선민족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위대한 조선인 안중근(安重根) 선생께서 순국(殉國)하신 여순(旅順)은 바로 현 난주(蘭州) 위쪽, 감숙성(甘肅省) 기련산맥(祁連山脈)의 동단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만주(北滿州)가 조선의 백두산(白頭山)인 현 알타이산 위쪽의 광활한 땅이라면 남만주(南滿洲)란 현 천산(天山)산맥을 중심으로 고비사막을 포함한 기련산맥(祁連山脈)위쪽을 말한다. 남만주와 북만주 사이에 조선의 평안도(平安道)가 백두산(白頭山)을 지키며 단군(檀君)성조(聖祖)이후로부터 오천년의 역사를 숨가쁘게 달려왔던 사실을 이제 정확히 인식하자!
이를 통해 청일전쟁(淸日戰爭)의 격전지 고찰이 정확히 이루어질 수 있으며, 역사상의 산동(山東)이었던 현 난주(蘭州)를 중심으로 거대한 황하의 물결이 커다란 만(灣)을 형성하며 북으로 흘러가는 조선의 황해(黃海)가에 역사의 여순(旅順)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간파해 낼 수 있다.
이를 지도를 통해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3.
2022.09.27.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