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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
-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신자의 모습입니다. 억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해 놓고 하나님의 뜻이라 말해서는 않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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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경우를 예를 들어본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 사신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위의 인용한 말씀이 인간 긍정을 위한 직설법인가? 혹은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에 속하는가? 결코 아니다! 신자 자체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정적 견해를 배경으로
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속죄 업무가 무의미해진다. 주님의 속죄 사역은 선한 일을 신자에게 일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홀로 해 내시므로 여전히 오로지 주님 자신으로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신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신자의 의(義)로 인한 영광이란 있을 수 없고 하나님 자신의 의의 결과로 인해서만 자신이 영광 받는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그 이유는 , 모든 자비와 긍휼이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인한 결과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 참된 구원 사역의 핵심이자 곧 하나님의 영광성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명령법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것이 자비를 베푸시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어느 것 하나 자비 아닌 것이 없다. 주님의 말씀(지시와 명령)을 통해서 인간은 늘 자신의 탐욕과 죄를 알아 가고 미워짐의 대상으로 재확인한다.
즉 다음과 같이 고백이 끝까지 이어진다는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k 교수의 모든 주장은, 인간 긍정을 바탕으로 해서 인간이 이성적으로 해 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추려서 그 실천으로 생산된 의나 선으로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고 계속 구원의 길로 한 걸음 전진해 보자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실제로 한번이라도 구원의 은혜에 접하지 못하고 그저 어떻게 하든 구원을 필히 따내어야겠다고 심리적 투쟁을 벌리는 자의 대표적 성향이다. 즉 구원은 되지 못하면서 남들 앞에서 마치 구원받은 자의 행세를 해야 하는 괴로움을 못 견뎌서 기껏 자신 내부에 있는 윤리성을 발판으로 하여 타인과 하나님에게 대드는 것이다.
바로 이런 k 교수의 모습도 신학생에게는 장래를 위해 좋은 공부 재료가 된다.
그들이 교회 내에서 만날 비신자들의 '신자 모방' 형태를 이 신학교 시절을 통해 미리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 저래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3:18)
http://crossvillage.org/이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