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1 구주께서 부르되 오늘 오라 하시니 올수 있는 기회에 긍휼함을 받아라
너 위하여 비시는 주의 음성 들으며 주의 약속 믿어서 네 구주로 섬겨라
2 구주께서 널 위해 기다리고 계시니 모든 고통 두려움 주께 와서 아뢰라
풍성하신 그 은혜 감사하신 그 사랑 회개하고 주께와 간구하여 얻어라
3 모든 죄를 버리고 회개하고 나오라 주가 용서 하시고 너를 영접하시리
눈보다도 더 희게 너의 맘을 씻어서 이 세상에 천국을 임하시게 하리라
4 지체말고 주께로 어서 바삐 나오라 예비하신 구원은 지금 받을 은혜라
좋은 기회 놓치고 슬피 후회 말찌니 지금 문을 두드려 구원함을 받아라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권하는 것이 주제인 이 찬송은 20세기 초
에 부흥집회 등에서 많이 애송되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두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는 예수의 말씀을 배경으로 작시되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는다. 3절과 4절에서 이 찬송가의 작시자는 회개하고
구원함을 받으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요1:12).
252.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뜻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주신 명령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다(마 28:19-20;막 16:15; 눅 24:27;행1:8). 역사상 이 명령을
가장 잘 수행한 전도자는 바울이었다. 그는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 수많
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2에서 "너는 말씀을 전
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다. 환경과 조건이 좋을 때
에만 전도할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을 때에도 전도할 수 있어야 한다.
253.
좁은 문이란 구원에 이르느 문을 가리키며 좁을 길이란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
리킨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9에서 "내가 문이다"고 하셨고 요한복음
14:6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리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문이요
길이시다. 따라서 그 문과 길을 좁다. 큰 문과 넓은 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적다. 이 사실은 마태복
음 22:14의 "청함을 받을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와 일치된다 하
겠다.
254.
1890년 미국의 기독교 면려회 영례 회의에서 선교 찬송으로 소개된 것을 계기로
널리 알려지게 된 찬송이다. 이 회의의 주제는 세계 선교였으며 이 찬송은 적절
한 시기에 소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복음 전파는 주님의 구속의 은통에 감격하
여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행위이며, 타의에 의해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작시자 게이츠는 2절에서 불신자를 길 잃은 무리, 3절에서는 죄중에 빠져 헤매
며 죽어 가는 무리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14:6). 불신자들은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255.
1절의 '너 시온아 이 소식 전파하라'는 구절은 이사야 40:9의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라는 말씀이 배경이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
랑을 깨달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를 전하
지 않는 사람은 아직 그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의 삶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는 삶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다. 기도와 온 재물, 삶 모든 것을
드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장차 하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
다.
256.
6.25 사병이 발발하자 석진영 여사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이
찬송시를 작시했다. 당시의 부산은 수라장과 같았고, 신자들 가운데 어려운 현
실을 잘 극복하지 못하고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석진영 여산
느 이 사실을 보고 "믿는 자여 어이할꼬"하며 탄식하였던 것이다. 세상이 어지
럽고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들려온다고 할지라도 신자들마저 그리스도의 빛을
상실하고 탕자처럼 해매먀 기진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자들은 그럴수록 더욱
어지러운 세상에 빛을 나타내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심어 주어야 할 것
이다.
257.
1869년 겨울, 영국의 부흥사 헨리 무어 하우스가 시카고에 와서 요한복음
3:16을 중심으로 일 주일 내내 설교를 한 적이 있다. 이 찬송가 작시자 블리스
는 이때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 요한복음 3:16의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에서
'누구든지'라는 말에 큰 감동을 받고 이 찬송가를 작시, 작곡하여 그 집회 기간
동안 부르도록 하였다. 바울은 로마서 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퀮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이 예외도 없이, 또
한 남녀노소·빈부귀천에 관계없이 구원받아야 한다.
258.
이 찬송가는 늘 해안을 거닐며 바다를 보는 것을 즐겼던 유포드 목사가 해난 구
조 본부의 구조 훈련을 지켜 보면서 영감이 떠올라 작시, 작곡한 것이다. 바다
에서 사고를 당한 선박을 구원하기 위해 구조대원들은 줄을 던졌는데 이 줄 이
름이 '생명줄'이었다. 사고를 당한 선박이 생명줄을 통해 구원을 받듯이 우리는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선박이 사고를 당해 침몰하고 있는데 가만히
지켜 보고 구경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모르고 죄
악에 빠져 죽어 가고 있는데 모르는 체하고 방관할 수는 없다.
259.
이 찬송가의 성경적 배경은 사도행전 1:8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
하신 후 하늘에 오르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으로서, 온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것을 강조한다. 이 찬송가에서는 그리스도의 증인을 빛의 사자라고 표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빛이라는 사실은 특히 요한복음에 강조되어
있다(요1:4-9;3:19;8:12;9:5;12:35-36,46). 마태복음 4:16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을 이사야 9:2을 인용하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고 하였다.
260.
작시자 노울즈 쇼 목사는 시편 126:6의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
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가 구원의 복으
므이 씨를 열심히 뿌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눈물과 희생이 없는 선교란 있을 수 없다. 삶의 전체를 주님과 이
웃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이다. 에
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말씀하셨다.
261.
자유주의 신학의 기수였던 김재준 목사가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의 사명과 또한
세계 속에서 한국인의 사명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작시한 것이다. 복음의 빛이
들어온 이래, 한국 교회에는 많은 갈등과 모순이 있었지만 경이적인 성장을 해
왔다고 본다. 그 가운데서도 김재준 목사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깊은 사명 의식
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보수주의 신학을 반대하면서 교회의 사회 참여를 강조
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한국신학대학에 오랫 동안 몸담고 있으면서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위원장, 민족수호협의회 회장등을 역임하였다.
262.
이 찬송가의 전체적 배경은 고린도후서 6:2의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여기서 '보라'라는 감탄사
를 두 번, '지금'이라는 낱말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 구원에 현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시대가 장차 미
래에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시대
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구원은 더 이상 미래적이지 않고 현재적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지금 받을 수가 있다.
263.
이 찬송가 1절의 배경은 누가복음 10:2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
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는 말씀이
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하신 말씀으로 복음을 전
파할 사역자들이 많이 나설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주님께 돌아와
야 할 영혼들이 많이 있지만, 이에 비하여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사람들은 많
지 않다. 한국 교회는 해외에 선교사들은 더욱 많이 파송해야 한다. 아직 흑암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영적인 눈을 떠서 죽어 있는 영혼들을 바
라보자.
264.
이 찬송은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천국이 이 따위에 실현되고 있음을 노래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마귀를 슛아내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셨다. 마
귀는 강한 자로서 모든 사람을 자기의 나라 속에 가두어 두었으나 예수께서는
더 강한 자로서 마귀를 결박하고 그의 나라를 붕괴시키고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
셨다. 누가복음 17:20에서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고 하셨다. 이
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해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 나라가 현재 이
땅에 임해 있다는 사실은 마태목음 13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도 잘 나타
나 있다.
265.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요14:6). 마귀는 아담을 유혹하여 범
죄케 함으로써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였다. 아듬은 진리와 생명의 길을 택하지
않고 거짓과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진
리와 생명의 길을 찾으려 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길을 스스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모든 노력은 무익하였다.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
스도 없이 이 길을 찾을 수 없다. 흑암으로 가득찬 세상을 비추고 있는 그리스
도의 참 빛을 바라보며 진리가 승라하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기도하자.
266.
이 찬송가의 전체적 내용은 이사야 40:3-5을 기초로 하고 있다. 본래 이 에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라는 것이었는데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예언은 성취
되었다. 이 찬송가는 이 예언을 응용하여 지금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267.
이 찬송은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사무엘의 고백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이사야의 고백을 기초로 하고 있다. 우리는 천한
몸에 불고하다.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하나님만 신뢰하자.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다.
268.
이 찬송가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게 하는
감동적인 찬송가이다. "전하고 기도해 매일 증인되리라"는 후렴 가사는 초대교
회의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연상케 하여 준다. 사도행전 5:42에는 "저희가 날마
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 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기로고디어 있다. 그렇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열심히 전하지 못
하는 것은 구원의 확신과 감격이 없기 때문이다. 전도는 생활화 되어야 한다.
자기 안에 예수님이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예수님을 증거하게 된다.
269.
우리는 이 찬송에서 영혼 구원에 대한 작시자 찰스 웨슬리의 안타까운 심정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회개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지옥의 형벌을 실제로 분명히 믿
는 사람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지옥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사람마다 불로써 소듬
을 치듯 하는 곳이라고 하셨다(눅 9:48). 이 찬송가의 4절은 불신자들이 죄악에
매여 한없이 고생하는 것을 목보겠다고 노래하고 있다.
270.
작시자 카셀은 의사로 생활하다가 60세가 자니사 목사가 된 사람이며 작곡자는
그의 부인이다. 카셀은 1절에서 우리를 나그네로 묘사하였다. 나그네로서 우리
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전도이다. 전도는 특정한 사람
들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16에서 "내가 복음을 전
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라고 하였다. 바울이 전도를 한 것은
자신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니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요, 어떤 보수를 위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부득불 해야 할 필연적인 사명이었다.
271.
이 찬송의 성경적 근거는 이사야 6:6-8이다. 여기서 숯불이 입에 닿았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며, 주께서 이사야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역을 뜻한
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으셨고,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 하였다. 그리스도께
서 자기를 위하여 죽으신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복음을 전하라는 권면을 받
이 않는다고 해도 그는 나를 보내 주소서 하고 주님 앞에 고백하게 되는 것이
다.
272.
1절에서 인류는 하나 되게 지음받은 한가족이라는 것은 사도행전 17:26의 "인류
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라는 바울의 말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창1:26), 그에게서 모든 족속을 일으켜 온 땅에 흩
어져 살게 하셨다(창 11:6-8). 오늘날 수많은 교인들이 교회 내에서 여러 분파
로 나위어져 분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잘못된 것들을 타파할 수 있
는 것은 어떤 이간적인 이론이나 힘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각각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273.
에수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
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행1:8) 이다. 우리가 이웃 사랑 및 세계 선교에 관심이 없는 것은 성령
의 능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주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 가고 있다. 우리는
전적으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힘
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 필요한 재물을 비롯해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
274.
이 찬송가는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5:7-8에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
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
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실 그리스도의 사랑
은 우리의 좁은 지식으로는 측향할 수 없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자각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의 사랑에 감격하여 열심을 다해 이 사랑을 전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275.
크로스비는 어떤 집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설교를 마치고
마지막 결신하는 시간에 청중을 향하여 간절하게 호소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시 집과 어머니의 가르침을 버리고 방황하다가 이 모임에 참석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계시다면 이 예배가 끝난 후에 저를 찾아 오시기 바랍니
다." 이때 한 청년이 눈물이 가득히 고인 눈을 들어 기쁨에 찬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제 천국에서 어머니와 만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
님을 찾았기 때문이다!" 크로스비는 집에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단숨에 이 찬송
시를 썼다.
276.
이 찬송은 1871년 신니내티에서 발간된 주일학교 음악 모음집 「멋」(The
Charm)에 처음으로 실렸다. 필립 블리스는 무디의 다음과 같은 설교를 듣다가
영감을 받고 이 곡을 창작했다고 그 배경을 밝혔다. "형제들이여! 주님께서는
큰 등대가 되사 끝까지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작은 등
대로 타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자들은 그 존재의 본질이 빛이다. 산 위의
동네가 숨겨질 수 없듯이 그 빛은 가려질 수 없다. 누가 빛을 말 아래 두고 그
빛이 비추이지 못하게 하겠는가?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생명은 그것 자체가 이
미 빛이다.
277.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그 권위하여 선포하는 대사적으로서의 행사인 것
이다. 따라서 이 구원의 선포를 세상적인 두려움에 의해서 그만두면 안된다. 복
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 대한 참된 메시지이며, 모든 거짓된 것들과 대
조를 이루는 것이다. 더욱이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다 주고 화평을 전하는 자로
말미암는 이와 같은 공공연하고 공명 정대한 선포(나훔1:15; 롬 10:15)는 사단
과 그의 종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음성적이고도 간악한 침투와는 날카롭게 대조
를 이룬다. 이러한 복음의 전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시행되어야 한다.
278.
이 찬송시는 1822년 E. 파슨즈가 대표 편집한 「성가 모음집」의 '우주를 둘러
썬 영광'(The Glorious Universe Around)의 5연 4행으로 처음 나타나고 있다.
1825년 저자인 J. 몽고메리의 「기독교의 찬송작가」(Christian Psalmist)에는
약간 개정되어 「땅과 바다와 하늘」이라는 하나의 연이 제2연에 첨가되어 전체
6연의 형식을 취한다. 또 1853년 그의 「창작 찬송가」에도 다시 수록되었다.
이것을 1866년 스펄전이 4,5,6연만 취하여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된 형제'라는
제목으로 「우리들의 찬송」(Our Own Hymnbook)에 수록, 오늘에 이른다.
279.
이 시의 배경은 사도행전 17:26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
스시고 그 경계를 정해 두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
견케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결국 인생은 그가 어디서 태어났든지 어떤 곳에
서 살든지 한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
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생들은 그들의 생명을 맘껏 누리고 향유하면서도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대해서는 둔감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복음으로 인해 그
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또한 이 찬송가의 사상이기도 하다.
280.
이 찬송시의 원제(原題)는 '그런데 우리가 아직 살아 있습니까?'(And are we
still alive)로서 이는 웨슬리 형제들이 영국 전역에서 감리교 신앙운동을 펼칠
때 영국 교회에서 강력한 핍박을 받아 언제 순교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속에서
오가는 마음과 마음의 인사였다.
281.
이 찬송은 성찬식 때 불리는 곡이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성찬을 제정하
여 교회가 이것을 세상 끝날까지 지키도록 하셨다. 이는 참 신자들이 예수와 더
불어 갖는 고통, 신비한 몸의 지체들로서 그들 상호간에 갖는 고통과 화평의 줄
과 보증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282.
예수께서 이 땅에서 가지신 최후의 유월절 만찬의 기록인 마태복음 26:26-28을
그대로 의역해서 만든 찬송이다. 주께서 이 만찬의 떡을 떼시는 순간부터 이스
라엘의 유월절은 예수를 주(主)라고 인정하는 신약 교회의 성찬식으로 그 형식
이 바뀐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친히 속죄양이 되어서 영원히 한번에 하나님께
드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곧 지금까지 구약의 모든 제사법이 이 한 사건, 그리
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신약의 성도들은 바
로 그 사건을 회상하고 기념하는 입장에서 성찬을 주의 명령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다.
283.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바울은 이와 같
이 뜻깊은 예식을 경홀히 여기는 죄를 범치 않도록 하기 위해 "사람이 자신이
살핀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잔을 마시라"고 권면하였다(고전 11:28). 이 찬송시
에는 이러한 조심스런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성찬은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이다. 그래서 성찬을 통해 시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며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한편,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회상적 의미 뿐만
아니라 장래에 천국에서 함께 먹고 마실 것을 소망하는 미래적인 의미도 있다.
284.
1877년 뉴욕 주 서버 셔터쿠아 호숫가에서 전도집회가 열렸다. 당시 집회 인도
자였던 빈센트 목사는 성경 공부 이전에 호숫가에서 부를 만한 찬송이 하나 있
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라드버리 여사에게 찬송시를 부탁하였다. 여기서 이
찬송시가 작시되었고, 이 찬송은 성찬 찬송으로 분류되어 있긴 하지만 성찬 예
식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찬송은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
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찬송이라고 할 수 있다. 1절에서
는 예수께서 해변에서 오병 이어의 이적을 베푸신 사실을 노래하고 있다.
285.
작시자인 보나 목사가 그의 형이 시무하는 자유교회에서 성찬식을 돕고 예식에
참여할 때마다 받은 영적 감격과 체험을 옮긴 것으로 이 예식을 통해서 주님을
친히 만나는 감격을 가진다고 했다. 사실 성찬은 '시각적인 말씀'(Visible
Word)으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
286.
작시·작곡가 미상의 이 찬송가는 교회의 전례 찬송으로서 결혼 예식 때 즐겨
부르는 찬송이다. 이 찬송은 성부 하나님께는 복 주실 것을, 성자 예수에게는
서로 섬기는 부부가 되게 해 주시기를, 성령께는 항상 승리하는 가정되게 해 주
시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287.
작시자는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한 미국인 선교사 캐롤 데이비슨이다. 이 찬송
시의 배경은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이다. 예수께서는 '결혼은 진실로 분리될 수 없는
결합, 곧 죽음이 둘을 나누기 전 까지는 변경할 수 없는 결합'이라고 하셨다.
이 결합의 제정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잠언 2:17에는 결혼이 인간끼리의 계
약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이며,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로 남녀
를 결합시키고 그 맹세를 재가하는 규정자이시라고 선포하였다(말 2:14).
288.
도로시 브롬필드 거니 여사는 영국 국교회 사제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몸
에 밴 신앙생활로 장성한 후에도 신앙의 시를 많이 쓰게 되었고, 큰 호평을 받
았다. 이 찬송시는 다음과 같은 동기에서 작시되었다. 거니 여사에게는 사랑하
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 여동생의 결혼식이 가까와오던 어느 날, 그녀는 결혼식
때 부르기에 알맞은 찬송이 없다는 여동생의 걱정스런 말을 듣게 되었다. 사랑
하는 동생이 '완전한 사랑'이시며 '완전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결
합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거니 여사는 이 찬송시를 작시했다.
289.
장례식 때 주로 불리는 이 찬송은 요한계시록 14:13의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시자 가브리엘은 그의 친구 에드
카드에게서 영향을 받아 이 찬송시를 쓰게 되었다. 그의 친구는 매우 열정적인
신앙인이었으며 항상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기쁨에 찬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
다. 그는 설교 도중이나 기도 도중에도 갑자가 '영광일세, 영광일세'라는 말을
외치기도 하였다. 에드는 항상 천국의 영광을 누리며 사는 듯한 사람이었다. 이
에 가브리엘은 '영광일세'라는 말을 후렴으로 하여 이 찬송시를 작시, 작곡하게
된 것이다.
290.
이 찬송시는 불과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테일러 목사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에 작시한 것이다. 그가 고향에 돌아와서 처절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죽기 바
로 전날 밤(1835년 3월 6일) 한 편의 시를 곰다. '이 땅에서의 나의 삶은 단지
나그네 일생일 뿐이다. 저 하늘이야말로 내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다'라는 말
로 시작하고 있다. 2절에선 '나의 순례길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이다. 3절에서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에 가득차서 노래하고 있다.
291.
장례식 찬송의 대표적인 이 찬송시는 의사인 베네트가 지은 것이다. 그러나 원
래는 장례식을 위해 작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찬송의 작곡자인 웹스터가
한 몇 마디의 말을 듣고서 영감을 받아 작시했던 것이다. 그것은 우울증에 걸려
있는 웹스터에게 의사 베네트가 안부를 묻자 "뭐 앞으로는 더 나아지겠지요"라
고 대답한 말이었다. 이 찬송시는 요한계시록 21:13의 "그 성은 행와 달의 비췸
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는
말씀이다. 1절에서 햇빛보다 더 밝은 천국을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292.
작시·작곡자가 모두 미상인 이 찬송은 인생의 길을 거의 마친 노년의 성도가
일생을 회고하면서 지은 것 같다. 1절에서 본향 간다는 것은 땅 위의 수고가 모
두 끝났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영원한 안식에 들어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2절
에서 영원한 나라에는 지상의 썩어질 것과 대조되는 주님이 예비하신 새 집이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전에 지나
온 과거를 돌이켜 볼 때에 부끄럽고 부족한 것뿐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러
한 부족함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용납될 것이라고 한다.
293.
원 제목은 '동쪽 문'(The Eastern Gate)이다. 작시자이며 편곡자인 마틴은 성도
들이 천국에 이르게 될 때 동쪽 문안에서 만나 보게 될 것을 이야기한다. 요한
계시록 21:13을 보면, 천국에는 동서남북에 각 세개 씩 모두 열 두개의 문이 있
다고 한다. 그 뭉은 출구가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이 들어가는 천국의 입구이
다. 그런데 그 문들이 각 방향으로 나 있다는 것은 교회, 즉 천국은 만국에 흩
어져 있는 모든 족속들이 구별없이 모이게 되는 곳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
므로 마틴이 여기서 굳이 동쪽 문을 언급한 것은 단지 지상적 의미로 사용한 것
이다.
294.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우리를 주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성도의 죽음은 멸절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의 관
문이다. 그러므로 잠언 14:32에서는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말하
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소망이 있음을 안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을
슬퍼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위대한 성도 아브라함도 그 아내 사라의 죽음 앞
에서 슬퍼하며 애통하였다(창 23:2).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심으로써 사별의 슬픔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보여 주셨다(요
11:35).
295.
크로스비가 71세에 작시하였다. 평생을 맹인으로 살아 온 크로스비 여사는 비록
사랑하느 부모와 친구의 올굴을 본 적은 없었으나 그 나라에 이르러서는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과 소망을 고백한 것이다. 청중 가운데
이 시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시는 감동적이었
다. 생키는 이 시에 맞는 곡을 붙여 주기를 스테빈스에게 의뢰하였고 비로소 이
찬송가가 탄생되었다. 그후 무디는 집회 시마다 이 찬송을 불렀으며 강단에 서
서 이 찬송을 부르는 그의 빰여는 언제나 눈물이 흘러 내렸다고 한다.
296.
이 찬송시의 배경이 되는 성구는 시편 65:2로서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
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라는 말씀이다. 번즈는 찬송시의 제목을 '아버지 하나
님, 당신 발 앞에 나아 가나이다'(At Thy Feet, Our God and Father)라고 붙였
다. 번즈는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과거의 복과 은혜를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 찬송할 것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늘날 까지, 그리고 여기까지 우리
를 도우신 '에벤에셀'(도움의 돌; 삼상 7:12)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는 새
해를 맞이할 때에 겸손히 주님 발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297.
이 곡이 본 찬송시에 붙여져서 불리게 된 경위는 분명치 않다. 1-3절에서는 사
회 복음주의적인 내용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4절에서 예수를 주(主)로 칭함으
로써, 간단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복음의 내용을 규정한다. 신자들은 사회개혁에
주님의 방법을 따라 행해야 한다.
298.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 찬송은 매우 아름다운 시어(詩語)들을 사용하고
있다. 히버는 어린이들을 꽃으로 비유하며, 한 송이의 백합·한 떨기의 장미 꽃
으로 묘사한다. 성경에는 주님의 귀하신 모습을 샤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
으로 비유하고 있다(참조, 아2:1).
299.
작시자 커싱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일생 동안 300여편에 달하는 주옥 같은
찬송시를 썼다. 특별히 그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위한 찬송을 많이 작시하였는
데, 어린이는 물론 성인들에게도 널리 애송되는 찬송이 되었다. 이 찬송시는 말
라기 3:17의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라는 말씀을 배경
으로 하여 작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인 성도들은 가리켜 '나의
소유'(출19:5), 또는 '보배로운 백성'(신 26:18)이라고 부르신다.
300.
크로스비 여사가 쓴 찬송시 중에 어린이를 위한 것도 많이 있다. 이 시는 누가
복음 18:16에서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크로
스비는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얼마나 잘 받아들여 주셨는지를 잘 알고, 한 어린
이가 고백하는 형태로 이 시를 작시한 것이다. 찬송시 속의 어린이는 자기가 슬
플 때에 예수님께로 가면,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노래하고
있다(1절). 또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며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노래
한다(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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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해설 251 - 300장
지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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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5.2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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