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박문수가 거지차림으로 민정(民政)을 살피러 다니다가 어느 산골짜기에서 앞서가는 노인(老人) 한 사람을 발견했다. 길벗이나 할까 해서 그 노인을 따라잡으려고 아무리 빨리 걸어도 노인과 자신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한참을 쫓아가는데, 마침 노인이 길가 잔디밭에 앉아 쉬고 있어 마침내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함께 쉬다가 두 사람은 동행(同行)이 되어 함께 길을 가게 되었다.
산길을 한참 가고 있을 때였다. 노인이 박문수에게 시장하고 목도 마르니 밥이나 좀 얻어먹고 술도 한 잔 얻어 마시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박문수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산중이라 밥이나 술을 얻을 곳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노인이 말하기를, 이 산을 넘어가면 큰 부잣집에서 묘(墓)를 쓰는 곳이 있으니 거기 가서 요기나 하고 가자고 했다. 반신반의하면서 노인을 따라 고개 하나를 넘자 과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막 하관(下棺)을 하려는 참이었다.
노인이 사람들에게 왜 이런 자리에다 묘(墓)를 쓰느냐고 하자, 상주(喪主)와 지관(地官)들이 모두들 여기가 얼마나 좋은 자리인데 그러느냐고 화를 내었다. 조금만 더 파고 들어가면 물이 그득한데 그곳이 무슨 좋은 자리냐고 노인이 말하자, 상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일꾼들에게 광(壙)을 조금만 더 파보라고 했다. 일꾼들이 괭이로 한 번 찍자 광중(壙中)에서 물이 솟구쳐 올랐다.
이 모양을 본 지관(地官)은 놀라 도망치고 상주는 노인에게 좋은 자리를 하나 잡아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노인이 근처에 좋은 자리를 하나 잡아주자 상주는 무척 고마워하면서 노인과 박문수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보답으로 천량(千兩)짜리 녹지 한 장을 끊어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받아 박문수에게 지니고 있으라고 했으므로 박문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품속에 넣어 두었다.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나서 한나절을 가서 해가 지려고 할 무렵에 어느 마을에 이르렀다. 노인이 박문수를 이끌고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으로 들어갔는데, 딸의 혼례(婚禮)를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노인이 다짜고짜 신랑에게로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신랑의 어깨를 힘껏 내려치자, 신랑이 나뒹굴어지는데 보니 커다란 여우였다. 이렇게 되자 신랑과 신부의 가족들은 크게 놀라고 당황해서 노인에게 해결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매달렸다. 노인은 가족들에게 빨리 상여집으로 달려가서 죽어 가는 진짜 신랑을 데려오라고 해서, 그를 살려내어 무사히 혼례를 치르게 했다. 노인 덕분에 무사히 혼례를 치르게 된 신랑과 신부의 집안에서는 백배사례(百拜謝禮)하면서 노인과 박문수를 융숭히 대접하고, 감사의 표시로 천량(千兩)짜리 녹지 한 장을 끊어주었다. 노인은 이번에도 그것을 받아 박문수에게 지니고 있으라고 했으므로 박문수는 그것을 받아 품속에 넣어 두었다.
한밤중이 되자 노인은 박문수에게 떠나자고 했다. 신부집의 가족들이 극력 만류했으나 노인은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박문수에게 어서 떠나자고 재촉했다. 그래서 두사람은 밤길을 나섰다. 산골짜기 길을 얼마를 가다가 커다란 바위 앞에 이르자, 노인은 박문수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박문수는 무서움에 떨면서 노인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산아래에서 불빛 하나가 나타나더니 박문수가 있는 바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박문수는 노인이 돌아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가까이 오는 것을 보니 노인이 아니라 함지박을 머리에 인 처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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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는 겁도 나고 당황해서 얼른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동정을 엿보고 있었다. 바위 앞으로 다가온 처녀는 박문수가 숨어있는 줄도 모르고, 함지박을 내려서 가지고 온 몇 가지 제물을 바위 앞에 차려 놓았다.
그러더니 오늘이 백일기도(百日祈禱)의 마지막날이니 자신의 아버지를 살려줄 것인지 아닌지를 말해 달라고 신령님께 정성껏 빌기 시작했다. 박문수는 처녀의 정성에 감동해서 자신도 모르게 살려주겠다고 바위 뒤에서 말하고 말았다. 박문수의 말을 신령님의 응답으로 알아들은 처녀는 백배사례(百拜謝禮)하고는 산을 내려갔다. 박문수도 가만히 처녀를 뒤쫓아 마을로 내려와 주막에서 묵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박문수는 동헌(東軒)으로 가보았다. 동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막 누군가에 대한 사형(死刑)을 집행하려는 참이었다. 어떤 처녀가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며 통곡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어젯밤에 정성을 드리던 그 처녀였다. 처녀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병(病)을 고치느라고 나라에 바칠 돈 이천량(二千兩)을 써버린 죄로 사형을 받게 된 것이었다. 박문수는 노인이 이천량을 자신에게 맡긴 것이 처녀의 아버지를 살리라는 신령님의 뜻이었음을 깨닫고, 그 돈을 처녀에게 주어 아버지를 구하게 했다.
위 이야기는 1986. 7. 10. 울주군 청량면 상남리 신덕하경로당에서 차극출 할아버지(조사 당시 7 4세)가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구비문학학술조사단에게 구연한 이야기이다.
<자료출처>
박경신(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울산지역의 설화」, 『울산광역시사』(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전통문화편, 2002. 247~249쪽
첫댓글 노인이 처녀집안의 조상인가 보네요
잘되면 조상덕이라는 옛말이 생각나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