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반병섭 목사 회고록
“가슴마다 파도쳤던 80년의 세월” 을 읽고
박혜정
반 목사님의 아지트(?)인 노스 뷰(North View)골프 클럽에서 목사님의 회고록을 받았다. 목사님께서 회고록을 읽고 독후감(?)을 써주면 새로 출판하는 책에 싣고 싶다고 숙제를 내 주셨다. 책이 두꺼워서 처음에는 방학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읽어내려 갔다. 읽다 보니 점점 속도가 나면서 목사님의 '추억의 창고'를 조금씩 엿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를 한자어로 된 것을 많이 쓰는데 목사님은 순 우리나라 말인 ‘늘샘’ 즉 ‘마르지 않는 샘’이란 뜻의 호를 쓰시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기 얼마 전 부터 우리 말 이름을 짓는 것이 유행이어서 나도 우리 두 딸 이름을 순 우리말로 지었는데, 그 시대에도 순 우리말을 쓰시다니 시대를 앞서가는 분이셨다는 생각이 든다.
자서전이 한 권의 역사책 같았다. 1924년 ‘묻지 마라 갑자생’이신 목사님은 일제 말엽, 8.15 격동, 6.25비극, 4.19 혁명, 5.16 정변을 겪으시고, 해외 유학, 이민 목회, 은퇴 후 소설에 푹 빠져서 사시는 날까지 글을 쓰고 싶어 하셨다. 한국에서 5.16사건까지의 일을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나는 소설의 주인공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읽어내려 갔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종으로 평생 하나님의 보호 아래 행복한 삶을 사신 분이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제목을 보고 그 의미가 궁금하여 여쭈어 본 적이 있다. “목사님에게 있어 ‘가슴마다 파도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제목은 내가 찬송가를 작사하려고 기도하는 가운데 바닷가에서 파도가 치는 꿈을 꾸면서 찬송가 303장을 만들게 되었지. 그것은 청년의 기백을 뜻하고 또 마음에 파도가 일며 감동 받았던 일들과 감사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남기고 싶어서 그렇게 정한거야.” 라고 하셨다.
목사와 시인을 겸하게 된 동기도 궁금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의문이 풀렸다. “세상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심판하면서도 구원받기를 원하고, 싸우면서도 민망하게 여기고, 구별하면서도 같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 시인의 영감이요 목사의 설교이다. 이런 맥락에서 목사와 시인은 같은 주제의 예술인이다.” 라고 하셨다. 또한 “먼 훗날 누군가가 나의 한 줄의 시를 기억하고 있다면….”이란 생각으로 시를 쓰신다고 하셨다. 누군가가 아니고 목사님의 시는 밴쿠버에 밴듀센 공원(Van Dusen Botanical Garden), 써리 베어크릭 공원, 밴쿠버 동물원에 시비로 세워져서 후세까지도 남겨지게 되었다.
반병섭 목사님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목사님의 시 ‘그대 배달의 후예이거든’이었다. 이민 와서 며칠 지나지 않아 신문에서 반 목사님에 대한 기사가 한 페이지에 가득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기사 중간에 실린 시를 읽고 감동을 받음과 동시에 애국심이 발동해서 즉석에서 멜로디가 떠올라 곡을 붙이게 되었다. 그런데 신문에는 아쉽게도 전부가 소개되지 않고 ‘중략’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분을 어떻게 만나서 완성된 시를 받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만 하고 곡을 미완성된 것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을 우연히 내가 교사로 있던 크리스천 한국어 학교에서 만나 뵐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시 전체를 받아서 곡을 끝까지 완성할 수 있었다. 그 곡은 다른 곡과는 달리 작곡하는데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 보통 시를 가사로 쓸 때는 작사가의 허락을 받고 조금씩 고쳐가며 작곡을 한다. 그런데 그 시는 밴듀센 공원에 있는 바위에 쓰여 있어서 내가 임의로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조금 애를 먹은 것이 기억난다. 또 내가 좋아하는 ‘그냥 물이면 된다’라는 시는 ‘베어 크릭 공원’과 ‘동물원’에 있다. 지금도 오고 가는 발길이 머무는 곳이고 그곳을 지날 때는 단순히 목사님의 시만 생각나는 것이 아니고 부드러운 미소까지도 같이 읽혀진다. ‘늘샘’이라는 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목사님의 시는 물에 관한 것이 많다. “시를 이루는 물질적 상상력의 근원은 물, 불, 대지, 공기의 4원소인데 이중 반 목사님은 물의 시인이다. 그에 있어 물은 순종이고 생명이고 환희이다. 결코 거스르지 않고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피어오르고 구름이 되고 다시 하강하고 아침이슬이 되기도 한다. 그의 인생관이요 예술관이고 동시에 신앙관의 출발이다.”라고 어떤 평론가는 말하고 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6개월 후의 약속은 하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나중에는 ‘일일일생( 一日一生)’으로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심정으로 알차게 하루하루를 지내다 돌아가셨다. 기존 소설가들도 70세가 넘으면 펜을 놓는다는데 괴테가 ‘파우스트’를 70이 넘은 나이에 썼다면서 목사님은 한 술 더 떠서 컴퓨터 자판을 독수리 타법으로 치시며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창작에 열심이셨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의 소설은 허구(Fiction)라기 보다는 융합(Fusion)으로 자신의 인생 경험과 상상력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언어예술이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 문학의 밑천이고 소설을 끌어가는 저력이 된다.
우리는 흰 머리가 몇 개만 보여도 ‘늙어가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위축되기 쉬운데 목사님은 나이가 드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셨다. “머리가 희어지는 것은 멀리서도 알아보는 관록이고, 행동이 둔해지는 것은 매사에 신중 하라는 지혜이며 귀가 약한 것은 이순의 덕이고, 시력이 나빠지는 것은 안 볼 것을 보지 말라는 교훈이고 기억력이 둔 해지는 것은 잊을 것을 망각하는 은혜”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셨다.
목사님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만주이며, 조상의 뼈가 묻힌 곳은 충북, 지금 영원한 삶을 살고 계신 곳은 캐나다로, 정서적으로는 만주, 혈통으로는 한국, 법적으로는 캐나다라고 하시는 밴쿠버 이민의 산 역사이다. 철들면서 생긴 꿈으로 집 밖에는 넓은 정원, 안으로는 많은 책과 갖가지 음반들을 갖고, 또 하나는 세계여행을 하는 꿈을 가지고 사셨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그 꿈은 거의 다 이루신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100세를 사는 시대에 좀 더 후배들의 화목제가 되어주시고 우리 곁을 오랫동안 지켜주시지 못한 점이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도 우리 문우들이 열심히 글 쓰는 것을 지켜보시고, 우리 문협이 잘 되기를 기도해주고 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글을 읽으며 반목사님의대한 기억이 필름처럼 지나갑니다.받은사랑도 큰데 조금이라도 보답해 드리지못해 아쉬움이 남네요.
박선생님글을 읽으며 한참을 추억에 젖어보았습니다 그땐 참 좋았는데... 추억은 늘 아쉬움을 남기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