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패왕 항우 1 -거록(鉅鹿)의 전투와 영웅의 탄생
진나라를 통일한 진시황이 회계산을 시찰하면서 절강이라는 강을 건널 때의 일이다. 그 지방에 있던 사람들은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황제의 화려한 순행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 들었다. 비록 먼거리에서 구경할 수 밖에 없었지만, 화려하면서도 질서정연하고 웅장한 황제행차의 위용을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위세만으로도 주눅들어 있을 때 오직 한 소년만이 황제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머지 않아 내가 저 자리위에 있으리라" 함께 구경나온 삼촌 항량(項梁)은 급하게 조카의 입을 막아서, 더이상의 사고를 막을 수 있었지만 그 어린 소년의 입에서 나온말에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담대한 소년이 바로 중국역사상 전설적인 영웅중 한명인 항우(項羽BC 232∼202)였다.
항우는 옛 초나라 명문귀족 출신이었으며, 그 아버지는 진나라의 왕전장군과 혈전을 벌이다가 분패하여 전사한 항연이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진나라와의 통합에 대해 매우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항씨 집안이 초나라 부흥에 압장 서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항우는 그런 기대와는 달리, 어려서 부터 글공부나 검술수련을 매우 게을리 하여, 그저 자기이름 정도만 겨우 쓸 줄 아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병법에 대한 공부만은 아주 능통할 정도는 아니어도, 여느 장수 못지않을 정도로 섭렵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08년 진승과 오광의 난에 의해 진의 체제가 급격하게 약화되자, 곳곳에서 진나라 타도를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여파는 항우와 항량이 있던 오중(현재 중국 강서성)지역까지 미치게 되었다. 항량은 초나라 귀족과 민중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만큼, 어느정도 세력을 쌓고 있었다. 따라서 그곳에 부임하게 된 군수 은통은 항량과 맞서기 보다는 혼란한 틈을 타 야합하여 일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 관료출신과 손을 잡을 수 없었던 항량은 항우에게 은통을 살해하라하였고, 항우는 즉각 참살한 후 치안과 행정공백상태에서 순식간에 오중지역을 장악해 버렸다.
항량의 거병소식이 알려지자, 진나라에 가장 극렬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옛 초나라 사람들은 너나없이 봉기군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장강(현재 양자강)을 건널때는 진영이라는 사람이 2만명의 병력과 함께 합류하였으며, 회수를 건널때는 무장세력인 경포가 합류하였다. 또 거소(현재 안휘성)지역에서는 각종병법은 물론 지략과 처세술에 통달한 범증을 만났다. 범증은 70세에 불과한 한 명의 노인이었지만 항상 초나라 부흥을 꿈꾸고 있었으며, 이후 항우가 서초패왕이 되기까지 군사(軍師)로써 타고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그는 항량을 만나자, 진승(陳勝)·오광(吳廣) 난이 실패한 이유는 성급하게 초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옛 초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초나라 왕조를 부활 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하였다. 항량은 범증의 의견을 받아들여 옛 초왕실의 인물 중 한명을 초회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 시황제의 공사현장에 동원될 인부 인솔 담당자였던 유방(劉邦)이, 시황제의 죽음과 함께 인부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자 100여명의 인원을 데리고 항량의 진영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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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가 즉흥적이면서도 단순하고 또 다소 감상적인 면이 있었다면, 항우를 만날 당시 40을 바라보고 있던 유방은 처세술에 밝고 야심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타협적이면서도 본심을 숨기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훗날 중국패권을 두고 치열한 혈전을 벌이지만, 결국 다수의 재후들의 지지를 받은 유방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 이제 진승와 오광의 군대를 격파한 진나라 장한의 군대와 일전을 벌이는 일만 남았다. 사실 진나라 마지막 명장인 장한의 군대만 격파하면,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일은 시간 문제에 불과하였다. 항량이 이끄는 군대는 기세좋게 산동성지역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항량은 자신이 이룬 성과에 고무된 나머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 하였다. 그 결과 병력을 둘로 나누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였고, 항우와 유방이 거느린 부대와 지나치게 간격이 넓어지고 말았다.
항량이 거느린 부대가 둘로 나뉘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장한의 군대는, 최대한 빠른시간안에 그들을 포위하고 말았다. 항량은 산동성에 있는 정도에서 농성하며 지원군을 오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지만, 농성전에 익숙치 못했던 그는 성의 방어태세를 다소 느슨하게 하였다. 이에 비해 노련한 장한은 한밤중에 몰래 병력을 성안으로 침투시켜 성문을 별다른 피해도 없이 여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일단 성문이 열리자, 대부분 휴식과 수면을 취하고 있던 항량의 군대는 일시에 밀어닥치는 장한의 군대를 막을 수가 없었다. 전군을 전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항량역시 전사하고 말았다.
숙부의 패전소식에 분노한 항우는 즉각적인 반격을 원하였지만, 그의 즉흥적이고 과격한 성격을 우려한 초회왕은 송의에게 임명하였다. 송의는 모든 변수를 검토한 후 신중하게 작전을 전개하는 전략가였다. 성격이 급한 항우와는 자연스럽게 마찰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송의는 장한의 군대와 조나라 부흥군이 서로 싸워 지칠대를 기다려야 한다며 한달이상이나 진지사수만을 고집하였다 .
송의의 전략이 전혀 틀렸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문제는 송의가 전투를 가급적 피하면서 손쉬운 승리만을 얻고자 하는데 있었다.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짐은 물론 군량까지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항우는 송의를 단칼에 참해버렸고, 이 소식을 접한 초회왕은 항우를 상장군에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상장군에 오르자 마자 항우는 더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진의 주력군이 있는 거록(중국 하북성(河北省))으로 진격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가 거느린 총 병력은 7만여 명, 30만명에 이르는 장한의 군대와는, 숫적으로나 병장기 면에서 절대 열세였다. 더구나 장한은 요소요소제 산성을 구축하고, 산성과 산성사이에는 용도(勇道)라고 하는 흙담을 쌓아 연결시켰다. 그리고 각종 병법이나 전략을 섭렵한 이들에게는 이 용도를 돌파하는 계책을 생각하는 일은 대단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최고의 지략가인 범증조차 현재의 전략으로는 도저히 돌파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하지만 항우는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감이 차 있었다.
"인간이 만든것이면, 인간이 깨뜨리지 못할리가 없소. 나는 싸우면서 깨드리겠소."
때로는 지나치게 많은 생각이 스스로의 발을 묶을 수가 있다. 항우가 생각한 계책은 오직 하나 필사의 정신만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하여 항우는 황하강을 건너자 마자, 타고온 배를 모조리 침몰시키고 괴력의 힘을 이용하여 가마솥을 때려 부셔 버렸다. 어차피 3일내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모두 전멸할 수 밖에 없으니, 더이상의 식량이나 돌아갈 궁리를 한다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항우의 모습을 본 혈기왕성한 젊은 장수들 역시 솥을 깨며 필사의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항우의 선봉장인 경포는 3만의 손봉대만을 이끌고 맹렬한 기세로 용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진군역시 이처럼 무모하게 돌진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방어태세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였다. 더구나 지형적으로도 좁은 병목지역이라, 숫적우위만으로는 경포가 거느린 부대를 포위하기 힘들었다.
결국 경포가 이끈 선봉대는 용도를 돌파하였다. 진군은 이 진지를 회복하기 위해 몇차례나 병력을 보냈지만 그때마다 경포는 보기좋게 물리치며 진나라가 힘들게 구축한 진지를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 한편 항우는 언덕지역을 점령하고 진군의 본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나라의 장수 중 최고의 맹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소각(蘇角)이 용도를 회복하기 위해 본대를 이끌고 왔다.
언덕위에서 지켜보던 항우는 주저없이 소각이 이끈 진군을 향해 돌진해 갔다. 특히 추라는 이름을 붙인 말위에서 병사를 지휘하던 항우는 가장 선두자리에 있었다. 언덕위에서 항우가 이끈 부대가 일시에 쏟아져 내리자, 진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순간 항우는 진군의 진영을 돌파하여 단 일합에 소각의 수습을 베어버렸다.
소각이 목이 떨어지자 진군은 일시에 혼란에 빠졌고, 기회를 노리던 범증이 수비병력을 이끌고 기습적인 공세를 가하였다. 여기에 경포까지 공세에 가담함으로써, 진군은 완벽하게 괴멸당하고 말았다. 진의 상장군 왕리가 사로잡힘으로써, 거록의 전투는 항우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으며, 그가 포로로 잡은 병력만도 10만에 이르렀다.
이 거록의 전투로 인해 항우는 전국쟁패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으며, 그의 이름은 삽시간에 중국전역으로 알려졌고, 그가 타고 다니던 말도 오추마라 하여 항우못지않은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거록의 승리는 단순하지만 예리하였던 전술과, 구태적인 병법을 넘는 필사의 의지와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