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8.(목) 노워리기자단
정지아 지음,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언젠가 다다를지도 몰라, 그 섬*
안정인
가만 보니 매혹적인 소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로 꼽는 건 가독성이다. 유튜브, SNS, 넷플릭스 등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것들이 도처에 깔린 시대다. ‘읽고 쓰기’를 삶의 중심에 놓고 있는 나조차도 책으로 시선을 옮기는 게 쉽지는 않다.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도입부, 주위의 방해에도 지속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이야말로 요즘 시대 소설이 갖춰야 할 필수 조건이다.
두 번째는 새로움이다. 주제의 새로움, 소재의 새로움, 기법의 새로움, 형식의 새로움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몰랐던, 알지만 모른 척했던, 혹은 모르고 싶었던 낯선 세계를 보여주는 소설에 마음이 뺏긴다. 반복적인 일상에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신선한 충격, 문학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밑줄을 긋고 싶은 매력적인 문장이 많다면 금상첨화!
세 번째는 공감 가는 인물이다. 나와 유사점이 있거나 나를 돌아보게 되는 등장인물, 왠지 마음이 가고 말을 건네고 싶은 그와 그녀를 만날 때 책이 더 좋아진다. 꼭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다. 전형적인 인물처럼 보여도 그 사람만의 고유함,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녀는 소설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와 내 옆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이 된다.
2022년 9월에 출간된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여전히 서점가의 초대박 베스트셀러다. 무려 문재인 전 대통령과 유시민 작가의 추천 도서고, 지난달 평산책방 첫 문화행사에 정지아 작가와의 만남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내남이 다 읽는 베스트셀러라면 시큰둥해지고 마는 나는 굳이 찾아 읽지는 않았다. 그러다 올해 초 한 독서 모임에서 이달의 책으로 선정되어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반쯤은 시큰둥한 상태로. 그러다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라, 첫 문장 좀 보소.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7쪽)
“아버지가 죽었다.” 로 시작하는 책이라니. 요샛말로 엄근진(엄격·근엄·진지)의 표상인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생을 마감하셨다고 포문을 여는데 어찌 다음이 궁금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근래 읽은 가장 강렬한 첫 문장이었다. 대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며 책장을 넘겼다. 놀랄만한 흡인력은 마지막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 책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장편소설인데 차례가 달랑 아버지의 해방일지, 작가의 말 이게 다다. 표면적으로는 아버지 장례식 3일간의 풍경을 다루지만 그 3일에 아버지 전 생애를 관통해 내는 작가의 솜씨에 경탄했다. 아버지와 주변 인물들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가 당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전쟁도 통일도 민주화도 다 교과서로 배운 나에게 1965년생 작가가 들려주는 아버지 세대의 얘기는 그 자체로 새로움이다. 암호 해독하듯 몇 번씩 읽어야 겨우 이해하는 전라도 지역어의 향연은 또 어떻고.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주인공 ‘아리’의 아버지는 일견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농사도 『새농민』에 의지해서 지을 만큼 고지식하고, 말끝마다 철 지난 사회주의, 민중 운운하며 현실감 제로인 모습이다. 그런데 장례식이 진행될수록 주변 인물들의 증언으로 인해 몰랐던 아버지를 마주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묵묵히 돕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딸의 변화된 시선을 함께 따라가며 독자들도 아버지의 여러 얼굴을 만난다. 어떤 비난도 판단도 없이 “긍게 사람이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아버지식 위로가 딸인 작가에게도, 두 세대를 지나 나에게도 울림을 준다.
그 외에도 내 마음에 훅 들어온 인물이 있다. 바로 떡집 언니. 떡에 홍어 무침에 각종 전과 직접 만든 양갱은 물론 김치까지 담가온 능력자. 혹시 상주들 체할까 싶어 깨죽에 전복죽까지 살뜰히 만들어 온 속 깊은 사람. 가장 취약한 순간에 이런 이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로다. 손이 발이라고 놀림을 받고, 주기보다 받기에 익숙한 나 같은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다. 돌봄 능력 만렙인 그녀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 바라다가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한숨을 폭 쉬었다.
안다. 이쯤 되면 내 아버지 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책 내용을 길게 늘어놓는 것은 아버지 얘기를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도. 가족만큼 할 말이 많은 주제도, 그렇지만 하기 어려운 주제도 없을 것이다. 정지아 작가는 픽션이라는 형식 뒤로 숨을 수 있지만 나는 어쩌나. 장례 이후에나 겨우 뭔가를 쓰고 말할 수 있으려나. 그땐 너무 늦으려나. 아버지를 꼭 닮은 딸, 아버지의 장점과 단점, 강점과 약점을 모조리 물려받은 나. 사춘기 반항이 없었던 탓일까? 마흔이 넘어 마음의 방황이 깊다. 아버지는 분명히 사랑이었는데, 사랑이었을 텐데 결정적인 순간에 주파수가 어긋났던 때가 자꾸 떠오른다.
“내가 부모에게 받은 상처와 이에 따른 마음과 내 삶에 끼친 영향을 잘 인식하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부터 극복이 시작됩니다. 부모에게 미운 마음이 생기는 것, 괜찮습니다. 그 마음을 가졌다고 당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오은영 박사님이 하신 말씀에 깊이 위로받았다. 인식이 먼저 왔으니 극복도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언젠가는 작가처럼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빌어 나의 해방일지를 쓸 수 있을까. 냉담의 파고를 넘어 화해라는 섬에 다다를 수 있을까.
*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제목을 패러디해보았습니다.
첫댓글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주었던 몰입감에 이어
선생님 글도 빨려들어 휘리릭 읽어버렸어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안 읽은 사람이라면 이 글 읽고 아 읽어봐야겠네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아요~
아버지의 이야기까지는 쓸 수 없는 마음도 공감하며.. 술술 정말 홀딱 반해 읽었어요~~~
항상 이 책을 안 읽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꼬시는(?) 글을 쓰는 게 제 서평의 목적인데… 오늘도 부합한 것으로! 대신 책을 읽으신 분들은 재미가 덜 하시겠죠…? 😅😅 혜화쌤 카톡 글자로만 만나다가 화면으로나머 얼굴 뵈서 반가웠습니다 :-)
ㅎㅎㅎ 믿고 읽는 정인 샘의 서평
'어라, 첫 문장 보소' '전라도 지역어의 향연은 또 어떻고.' 이렇게 어미의 활용을 능숙하게 활용하셔서 놀라워요
다만, 매혹적인 소설의 특징 3가지와 이 소설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뒤에, 아버지 이야기를 지금은 하기가 어렵다고 마무리 지었는데, 제목까지 차지할 만큼의 비중인가. 약간 갸우뚱합니다.
그쵸…? 역시 탁 집어내시는 송아쌤, 아예 “매혹적인 소설의 3가지 특징” 이렇게 갈까요? 제목은 편집부에 일임하는 것으로! 😆
저는 엄마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았어요. 모녀관계 관련된 책 많이 읽었고 지인들과 그 주제로 이야기도 정말 많이 했는데 어느정도 하고 싶은 만큼 말하고나니 정리 되는 부분도 있더라고요. 제 말의 요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 해야지 정리도 되는 거 같아오. 오은영의 책 '화해' 추천합니다
저는 별로 안 하고 싶은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직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네요. 오은영의 화해, 기억해둘게요. ^^
저 아직 읽는 중이라 정인샘 글을 일부러 안 읽었어요. ㅎㅎ 맛있는 거 아껴두는 기분으로~
쌤, 아직도 안 읽으신 거 아니죠…? 아끼다가 X 된다는 진리가 ㅋㅋㅋㅋ
@안정인 똥 안되고 잘 익은 된장 되었어요.
마지막 정인 선생님의 복잡하고 미묘한, 떨리는 그 마음이 잘 전달되네요.
솔직한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 복잡다난한 심정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역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여러 감정들이 있지요. 그냥 편한 방법으로 외면하고 살고는 있습니다만 이런 글을 마주치면 외면 말고 다른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된답니다.^^
와~ 역시! 저는 정인 샘의 글 솜씨에 경탄하며 읽었어요.^^
마지막 부분의 오은영 박사님 말씀, 저에게도 위로가 되네요. 아직 마음이 자라지 못한 나를 조금 더 보살펴도 될 거 같아요. 감사해요~
그 마음이 너무 공감돼서 일까요? 전 제목도 너무 좋은데…^^;
고맙습니다~ 저는 영경쌤의 목소리가 인상적이더라고요. 맑으면서도 귀에 꽂히는 소리! ^^ 공감해주셔서 감사해요. 다음 주 목요일에 또 뵈어요!
"아버지 이야기를 쓸 자신이 없어...." 제 얘긴줄요;;;;;돌아가신 후에나 말해볼까. 저도 그생각도 했다는.결국 비겁하게 할머니 이야기로 우회한 1인 여기 있습니다;;;;마지막 단락에서 선생님의 진득한 아쉬움이 느껴졌다면 과민한 걸까요. 조만간 이야기를 하실 날이 오겠지요. 함께 바래봅니다. 덧)저는 첫문장에 단박에 카뮈의 이방인 생각났었어요. 첫 문장에 왜들 난리람. 심드렁하다가 전소설을 관통하는 문장이었음을 한참 뒤에나 느꼈던 무지렁뱅잌ㅋ.
은경쌤과는 비슷한 정서(한없이 모범생이지만 또 삐딱선을 타는)라 공감이 잘 되는 것 같아요. 유혹하는 첫문장, 저도 늘 고민입니다!
평소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이지만, 매혹적인 소설(글)의 특징을 아주 잘 설명해 주신 것 같아요. 너무 공감이 되면서 또 반성이 됩니다..^^; 여전히 일기 수준에 머무르는 제 글을 독자들을 꼬실 수 있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도록 노력해 봐야겠어요..^^
소설을 잘 안 읽으신다면 유미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장르는 어느 쪽인지 궁금합니다. 퇴고를 거듭하는 선생님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