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흥인지문 밖 낙산(駱山)이다.
그 낙산은 한양을 동쪽에서 지켜주는 좌청룡에 해당한다.
한양도성의 내사산(內砂山)으로 비교적 낮은 편이다.
그 산의 기는 다른 내사산에 못지 않다. 왕성한 기를 자랑한다.
그 옛날 낙산자락 숭인방이다.
그 숭인방으로 가는 한적한 산길에서
단 두 칸짜리 아주 허름한 초가를 만난다.
비우당(庇雨堂),
사람들은 이 집을 이렇게 부른다.
비는 덮을 비(庇)이고 우는 비 우(雨)이니
그저 ‘비나 가려주는 집“ 비우당(庇雨堂)이다.
이 비우당은 찢어지게 가난한 백성의 집이 아니다.
그렇다고 몹시 궁색한 남산골 샌님의 의 집은 더더욱 아니다.
세종 때 우의정 하정(夏亭) 유관(柳觀)의 집이다.
어느날 장맛비가 오래 내렸다.
집안에 비가 새었다. 빗물이 삼(麻)줄기처럼 줄줄 흘렀다.
정승 유관은 방안에서 손에 우산을 받쳐 들고 비를 가리면서
부인을 돌아보고 말했다. 그리고 부인이 맞대응을 했다.
“나처럼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디겠소.”
“우산 없는 집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
그 후 사람들은 그의 집을 우산각(雨傘閣)이라고 했다.
유관 황희 맹사성
이들을 선초삼청(鮮初三淸)이라고 칭송한다.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세 분의 청백리라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온 선초삼청이다. 그 중 한 분이 유관이다.
유관은 태조 이성계 때 개국공신이다.
태조 이성계를 최측근에서 보좌한 인물이다.
중요한 행사 때 운검(雲劍)으로 서는 등 태조의 신임이
아주 두터웠다. 그때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전북 부안에
엄청나게 큰 땅을 사패지로 받았다.
그는 개국원종공신으로 요직을 두루 거쳐 정승에 오른 인물이다.
"그가 죽을 당시에 세종임금이 흰옷을 입었다. 그리고 백관을 거느리고
애도를 표했다, 또 울었다. 그의 인물은 온량하고 돈후한 성품이면서
자질이 밝고 늘 민첩했고 네 명의 임금을 섬기면서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이긍익의 <연려술기술>에서
조선의 선비에서 가장 영광된 청백리에 녹선된 유관이다.
그가 청백리에 뽑힌 이유는 이렇게 전한다.
"공은 청렴하고 방정해서 비록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초가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검박하게 살았다. 집이 흥인문 밖에 있었는데 궁궐에
들어올 때는 간편한 사모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수레나 말을 타지 않았다."
그의 검소하고 소박한 삶은 곳곳에 기록으로 남았다.
"집에 손님이 와서 술을 꼭 접대할 경우에 반드시 탁주 한 항아리를 뜰위에
준비해 놓고 늙은 여종으로 하여금 사발 하나를 가지고 술을 바치게 해서
각기 몇 사발씩 마시고는 바로 끝냈다. 당시 음복을 해도 소금에 저린
콩 하나를 놓고 서로 돌러가며 먹었다."
-성종 때 청파 이륵 '청담극담'에서
"어떤 사람이 찾아오게 되면 겨울이라도 맨발로 짚신을 끌고 나와서 맞이했고
평소에도 호미를 들고 다니면서 채소밭에서 일하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성재의 용재총화에서
그의 청렴한 생활은 당대에서 끊기지 않았다.
그의 아들 유계문이 충청도 관찰사를 제수 받으면서
아버지의 이름 觀자와 관찰사의 觀자가 같다는 이유로
거절한 사연은 유명하다. 세종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유관(柳觀)은 그의 아들
계문(季聞)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관(觀)이 혐명(嫌名)이라는
이유로 계청(啓請)하여 이름을 관(寬)으로 고치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풀어서 재구성하면 이렇다.
"전하, 대단히 송구하지만 신은 관찰사로 나갈 수 없사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저의 아버님 함자에 볼 관(觀)자가 들어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아버님 함자에 들어 있는 그 觀자의 벼슬을 하겠습니까?
차마 송구해서 제가 그 벼슬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뜻은 알겠다. 그러나 난 너를 반드시 관찰사로 기용하겠다.
너는 훌륭한 관료이고 나의 정책을 잘 보좌할 수 있는 신실한
신하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놓칠 수 없다. 그러면 어명으로 너의 아버지
이름을 바꿔주겠다. 볼 관(觀)자에서 너그러울 관(寬)으로 바꿔주겠다.
그래도 못하겠느냐?"
아들 유계문은 아버지의 이름 觀자를 寬자로
바꾸고 난 뒤 비로소 충청도 관찰사에 부임했다고
전한다.
아들 유계문은 장안에서 이름난 효자였다.
아침과 저녁, 어디를 나가거나 다녀서 들어올 때마다 아버지에게
꼭꼭 문안인사를 드렸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버지께서
주무시는 온돌 방바닥에 찬 기운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손을 넣어보는 매우 착한 아들이었다.
조선 실학의 시조 반계 유형원은 그의 후손이다.
유관의 외손(6대손) 지봉(芝峰) 이수광(李睡光)은
외할아버지의 옛 집터에 그를 기리는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 '비우당(庇雨堂)'이라는 현판을 달아 하정의
덕과 인품을 후세에 전하였다.
낙산 기슭의 숭인동 신설동 지역을 〈우산각 골〉이라고 불렸다.
신설동 로터리에서 답십리까지의 길을 하정로로 명명하고 하정 유관의
청백리 정신을 기리고 있다.
하정로가 끝자락에서 청계천을 만난다.
그 청계천에는 하정의 청백리정신을 기리는 비우당교가 놓였다.
이웃 풍물시장 근처에 <어린이 우각산공원>을 조성했다.
이곳 공원에는 유관의 선비정신을 생각하게 하는 설치물을
마련하고 있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다.
'학식이 있고 예절이 바르며 원칙을
지키며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사람',
그것이 조선의 선비이다.
그런 선비들 중에서 특별하게 선발한 청백리이다.
'청백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어야 한다.'
보통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참으로 잘못 된 말이다.
조선에서는 부자도 청백리가 될 수 있었다.
청백은 그저 빈부의 문제가 아니다.
재산이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오로지 내가 얼마나 깨끗하게 검소하게 사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나의 행동이
깨끗하고 마음가짐이 깨끗하고 나라의 재산을
탐하지 않은 생활을 한다면 얼마든지 청백리가 될 수 있다.
부자도 청백리가 될 수 있는 나라였다.
푼돈이라도 나랏돈을 10원이라도 축내는 사람은
그것이 발각이 되면 그 자신은 물론 그 후손들까지도
과거응시자격을 박탈했다.
신체에서 나오는 힘은 길어야 40년이다.
총칼 등으로 무장한 국가의 힘은 100년도 못 간다.
문화 종교 등 소프트 파워는 적어도 천년은 거뜬히 간다.
조선이 500년 이상 융성할 수 있었던 그 밑바탕에
청백리 정신으로 상징되는 소프트 파워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21세기 '욘(YAWNs)' 신조어가 등장했다.
욘족(YAWNs) Young And Wealthy but Normal
그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신조어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렇게 욘족을 설명했다.
“젊은 부자(Young and Wealth)이지만 평범한(Normal)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욘족은 젊어서 백만장자가 됐다.
그들은 자선활동에 열정적이며 가족에게 충실한 엘리트를
일컫는 신조어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게이츠 회장과
사이버콥스의 필립 버버 회장 그리고 야후의
창업자 제리 양 등은 대표적인 욘족이다.
그들은 30~40대에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고 아주 검소한 생활을
해서 '욘족‘의 칭송을 받은 것이다.
600년 전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청백리
그 정신이 21세기 서구사회에 욘족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그 과거의 사실을 오늘에 되살려 내일의
우리들에게 교훈으로 삼아야 할 때 비로소
역사는 진정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난 일을 기술하며 다가 올 미래를 준비한다.
(述往事 思來者)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뒷일의 스승이 된다.
(前事之不忘 後事之師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