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묵스님의 주장을 지지하며
‘실체 없는 마음’ 현대 과학으로도 증명
이평래 교수는 기능적으로만 마음 파악
강병조 경북의대 정신과 교수
‘마음’을 연구하고 있는 정신과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여래장 사상’에 대하여 외람되게 필자의 소견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마음’이란 단어는 사용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때와 장소(경우)에 따라서 기능적(functional)으로 사용할 때도 있고 실체적(identity)으로 사용할 때도 있다. 또한 개념적(concept)으로만 사용될 때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평래 교수가 말하는 ‘마음(여래장)’은 애매모호하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의 여래장(마음)이나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여래장(마음)이나 모두 여래장(마음)이다”고 말씀하셨다. 이때의 마음은 ‘마음’이라는 개념 내지 단어만 같은 것이다.
싯다르타가 연기, 사성제, 무아, 공, 중도 등의 이치를 깨달은 후의 뇌는, 뇌의 구조나 기능면에서 깨닫기 전의 것과는 다르다. 깨달은 후의 뇌의 기능은 욕망과 애착이 적고 자비로 충만한 뇌로 바뀐 것이다. 땡감(깨닫기 전의 뇌의 구조나 기능)이나 단감(깨달은 후의 뇌의 구조나 기능)이나 모두 감(뇌의 구조나 기능)이다. 같은 감이라고 하는 본성(本性, 마음이라고 하는 개념이나 단어)으로는 불이(不異)이며 떫고 달다는 위상(位相, 뇌의 구조나 기능이 달라진 점)으로는 불일(不一)이다.
이는 여래장(불성, 마음)을 실체적인 면으로 본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나 개념적으로만 보시고 말씀하신 것 같다. 감이라고 하는 것도 개념 내지 단어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감의 본성이란 것도 없으며 단어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떫은 감과 단감은 그 성분이 이미 같지 않다. 물론 도를 깨치기 전의 싯다르타나 도를 깨친 후의 싯다르타는 같은 싯다르타이다. 그리고 떫은 감이나 단감도 같은 감이다. 같은 유전인자(DNA)가 있기 때문에 같다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DNA도 연기로서 생긴 것이고, 무아이며 무상이며 불변이 아니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으며 부처님 말씀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둘째, 각묵스님이 주장하는 ‘마음(여래장)’은 마음을 실체적인 입장에서 말한 것 같다.
각묵스님의 주장은 분명하며 필자도 동감한다. 여래장(마음, 자아)이 상주 불변이라는 것은, 무상, 고, 무아, 연기를 강조하신 석가모니의 주장과 다르다는 것이다. 마음(여래장)은 뇌의 기능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이는 석가모니의 생각과 일치되며 현대과학으로 증명되었다. 여래장 사상이 나온 것은 죽음의 불안에 떠는 낮은 근기(根機, 과학이 덜 발달된 시기)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이다.
‘마음은 뇌의 기능 또는 활동이다’는 사실이 최근 20여년 사이에 뇌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밝혀졌다. 우리 불교도 하루 속히 이 과학적인 사실을 받아드려 이것과 상치되는 교리는 수정하여야 한다. 아니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초기 불교의 교리로 돌아가면 이 과학적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첫댓글 금년 8월 월정사에서 뭐 [교수불자회]라는 단체이름으로 강병조씨가 펴는 불교논조를 읽어 보니까, 과연 성철처럼 체득한 말일까? 아니면 남의 가설과 주장들을 뒤져서 짜집기해서 자기 주장을 일삼는 전형적인 교수라는 직업의 활동인가? 논문 서적 경전 등 문자는 요지음 불자라면 해득하고 있지만 실참 체증은 어려운 것인데, [교수]란 직함을 존립하기 위해서 이런 땀을 흘리나 봅니다. 그것도 정신과 라서.. 더우기 이름난 사람을 공박해야 된다고 판단한 모양.실제로 출가해서 체득하지 않으면 다 허공에 대고 짖는 개에 불과 하지요. 경전 강의를 들어보면 교수와 스님의 차이는 어쩔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여서 더욱 확신 합니다.좀 쓴물
강교수님은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을 말한것 뿐이고 '실참체증'의 단계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뭘? 어떻게? 실참체증하느냐는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실참체증한다고 해도 그 방향과 내용이 부처님의 근본취지와 어긋나면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가 아닐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부처님의 근본 뜻이 무언가 ? 그와 어긋나지 않았나 ? 얼마나 어긋났는가? 잣대를 대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제 세계는 개방화의 시대에 와 있습니다. 따라서 수행에 대한 사고 방식도 개방되고 객관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귄위나 기득의 우월적 위치도 해체하고 다시 시작하는 수행자적인 진지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