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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연극 연극 무대는 웰즈에게 마치 첫사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청소년기에 웰즈는 진보적인 사립학교에 다니며 30편이 넘는 연극에 연출자와 배우로 참여했는데 그가 가장 좋아한 작가는 셰익스피어였습니다. 1930년, 그의 나이 15세에 웰즈는 영원히 학교를 떠나고 유산으로 물려받은 돈으로 유럽 여행을 다니다가 더블린의 게이트 극단에 입단하게 됩니다. 이 때 그는 자신이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스타라고 허풍을 부렸는데 극단의 매니저들이 그를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깊은 인상을 남겨 주게 되었고, 결국 그는 극단에 고용되게 됩니다. 그 후 약 1년간 그는 주로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고전극을 위주로 수많은 무대에 연출가 겸 배우로 등장합니다. 1933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웰즈는 당대 연극계의 대형 스타 중 하나였던 캐서린 코넬과의 순회 공연에 배우로서 일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들은 주로 셰익스피어와 버나드 쇼의 작품을 공연했습니다. 1935년 뉴욕에서 웰즈는 야심적인 연극 제작자 존 하우스먼과 손을 잡습니다. 1937년 웰즈와 하우스먼은 자신들의 전용 극단인 머큐리 극단을 창단하고 이들의 작품 중 몇몇은 극찬을 받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현대 의상과 반파시즘적인 해석으로 만들어 낸 "줄리어스 시저"는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웰즈는 주인공과 연출자는 물론 세트와 의상 그리고 조명 디자인까지 모두 맡아 해냅니다. 당시 영향력이 컸던 비평가 존 메이슨 브라운은 이 작품을 가리켜 "천재의 작품"이라고 했는가 하면, 비평가 엘리엇 노튼은 "우리 시대 가장 감동적인 셰익스피어 무대"라고 평했습니다. 웰즈는 라디오 스타로서 자신이 벌어들이는 돈으로 극단의 살림을 꾸려 나갔고 1930년대 말 전성기 시절, 웰즈는 라디오에서 1주일에 약 3,000달러를 벌었으며, 그 중 2/3 정도를 극단에 투자했습니다. 하지만 극단의 재정은 언제나 쪼들리는 상태였고, 언제 망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1939년 최초의 실패적이 나왔고, 머큐리 극단은 바로 문을 닫게 됩니다. 웰즈가 처음 할리우드에 간 것은 사실 짧은 시간 동안에 돈을 벌어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머큐리 극단을 재건하자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웰즈가 연극 무대에서 쌓은 경험은 영화 제작에서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영화가 다른 문학 매체보다 본질적으로 훨씬 더 극적인 매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본 바와 같이 "시민 케인"의 조명 스타일은 영화보다는 연극 무대에서 많은 부분을 빌려 왔으며, 장시간 촬영 방법을 쓴 것은 통합된 한 공간에서 연기를 펼쳐야 하는 연극 무대의 필요성과 같은 이유에서 끌어낸 것입니다. 이는 미술 감독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방 하나를 전부 보여 주기보다는 특정 부분만을 보여 줌으로써 웰즈는 수천 달러의 비용을 절감했습니다. 재너두 씬들에서도 웰즈는 방의 나머지 부분을 어둠 속에 남겨 둔 채 크기를 과장한 가구나 조각상, 벽난로 등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마치 방이 너무나 커서 제대로 조명을 비출 수가 없다는 식인 것입니다. 이 같은 테크닉만으로는 부족할 경우, 웰즈는 RKO 사의 특수 효과 담당 부서에 부탁해 애니메이션, 매트 쇼트, 모형 촬영 등의 기법을 활용해 서사적인 화면을 창조해 냈습니다. 에드워드 스티븐슨이 담당한 영화 의상은 영화 속의 각 시대에 철저히 맞추었습니다. 거의 70년의 세월을 넘나들며 시간적 순서와는 상관없이 사건이 진행되는 까닭에, 각각의 장면마다 관객이 해당 시대를 알아차리려면 의상으로 바로 식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케인의 유년 시절의 의상은 찰스 디킨스와 마크 트웨인을 섞어 놓은 19세기적 취향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의상은 기능적 역할뿐만 아니라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도 한데 개혁 정신을 가진 청년 신문인으로서 케인은 회색을 좋아하며 작업 도중에는 재킷과 넥타이를 자주 벗곤 합니다. 말년에 이르면 그는 거의 언제나 검은색 정장과 넥타이를 착용합니다. 에밀리의 의상은 비싸 보이기는 하지만 절제된 우아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언제나 교양 있는 젊은 귀부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세련된 옷차림에 온화하며 지극히 여성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수잔의 경우, 케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단순한 옷을 즐겨 입지만 케인을 만난 이후에는 대게 화려한 드레스 차림이고, 때로는 마치 보석 자랑에 나선 늙은 쇼 걸처럼 금속 장식이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케인의 연령 변화에 따른 오손 웰즈의 모습) 스토리가 진행되는 동안 웰즈는 50년에 걸친 세월을 연기해야 했습니다. 부분적으로 분장사 모리스 세이더만의 도움도 컸지만 웰즈는 25세, 45세, 75세의 케인 역을 완벽하게 연기해 냈습니다. 케인이 늙어 감에 따라 그의 머리는 점점 회색으로 변하며 숱이 줄어 가고, 턱은 늘어지며 뺨은 볼록해 지고 눈 밑에는 점점 더 두꺼운 살이 붙어 갑니다. 세이더만은 합성 고무로 된 보디 수트를 만들어 냄으로써 점점 더 뚱뚱해 지는 노인의 몸체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
8. 스토리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는 재구성된 플롯 시퀸스와 시간 순서로 된 내러티브를 비교하면서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허먼 맨키위츠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생애에 착안한 스토리를 가지고 웰즈를 찾아 왔을 때, 웰즈는 그 안에 담긴 소재들이 너무 산만하고 초점이 선명하지 못하다는 점을 신중히 고려했습니다. 스토리의 흐름을 명확히 하고 극적인 긴박감을 주입하는 방법으로 웰즈가 제안한 것은, 각기 다른 화자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일련의 회상을 통해 사건의 전개 순서를 뒤섞는 방법이었습니다. 웰즈는 그 이전에 많은 라디오 드라마에서 이 같은 복수 회상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웰즈와 맨키위츠는 또 이 영화에 서스펜스라는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케인은 "로즈 버드"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는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신문 기자인 톰슨은 그 말이 지닌 의미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톰슨 기자는 그 말이 케인의 복잡한 성격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케인의 예전 동료들을 찾아 의문을 풀어 나감으로써 영화의 나머지 부분을 끌어 나갑니다. 웰즈는 로즈버드라는 모티프가 단순한 플롯상의 속임수로서, 이를 집어넣은 것은 관객에게 흥미진진하게 극적인 의문을 품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지만 바로 이 사소한 장치가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내게 됩니다. 기자가 이를 단서로 희망에 부풀었듯, 관객도 마찬가지로 로즈버드를 통해서 케인의 모호한 인간성이 명확해 지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 장치가 없었다면 스토리는 산만하고 불분명한 채로 남았을 것입니다. 로즈버드의 의미를 추적함으로써 관객이 알고 싶어하는 극적 의문에 대해 강하게 파고 들어가는 내러티브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바로 이 점을 놓고 외국의 비평가들은 웰즈를 스토리텔링의 천재라고 평가했습니다. 시민 케인 에서 웰즈는 회상 구조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엄격한 시간적 순서에 집착하는 일 없이 케인의 삶의 다양한 시기를 편집해 낼 수 있었습니다. 관객에게 영화의 전반적인 윤곽을 보여 주기 위해 웰즈는 케인의 일생 중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 대부분을 영화 초반부에 짧은 뉴스릴 속에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각각의 회상 속에서 이들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씬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완전히 풀리는 치밀한 그림 맞추기 놀이와 같은 이 영화의 구조에 많은 비평가가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 영화의 주요한 구조상 단위와 해당 단위의 중요한 인물과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프롤로그 ② 뉴스릴 대공항과 케인의 경제적 몰락. 재너두에서 고독하게 은둔 생활을 하는 노년. ③ 전제 톰슨은 신문 편집국장에게서 '로즈버드'에 관한 미스터리를 캐기 위해 케인의 예전 동료들을 만나라는 지시를 받는다. 편집국장의 말로는 아주 간단한 일이라지만, 그것은 틀린 이야기였다. 수잔은 톰슨에게 말하기를 거절한다. ④ 회상 케인의 유년기, 대처가 케인의 후견인이 된다. 케인의 첫 번째 신문. 신문의 번성기. 1930년대 케인의 경제적 쇠퇴 ⑤회상 ⑥회상 ⑦ 회상 ⑧ 회상 ⑨ 결말 ⑩ 배역진과 스탭 크레디트 |
4부에 계속...
*자료출처 : 루이스 자네티 "영화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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