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 작가를 몰랐다. 인기가 많다고 해서, 문대통령이 픽한 작품이라고 해서 나는 살짝 물러나있었다.
비주류 정서인지, 삐딱함인지 모르겠지만 많은 이가 좋다고 하는 책은 우선 보류한다. 그 흘러 넘치는 상찬에 나까지 보탤 필요 있느냐 하는 마음이라서. 그렇다고 문학적 소양이 풍부하거나 뭐 잘나서도 아니다. 그 복잡함에 나까지 보태지 않겠다는 ‘곤조’ -라고 해야 맛이 산다-였다.
이렇게 피하고 고개 돌리던 중에 함께 읽는 도서로 만났다. 작가의 이전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었고, 빨치산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얼마 전 미전향 장기수 분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한 토막 읽고 그 치열하고도 끈질긴, 일견 미련해 보이기까지 하는 열정에 대해 잠시 생각해봤을 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이 걸출한 이야기꾼이 풀어 놓은 사연에 빠져버렸다. 현재를 이야기하다 자연스럽게 과거로 데려갔다가 슬그머니 지금, 여기로 데려다 놓는 마법을 부리는, 한쪽 입술을 올리며 냉소하는 줄 알았더니 한쪽 마음을 마시멜로처럼 녹여버리는, 저간을 사정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어떤 마음인지 아주 조금은 알 거 같아서. 저이도 안됐고, 저이의 아버지도 안됐고 작은 아배도 큰집 사촌오빠도 그저 안됐어서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겪었는가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었다.
남편의 할머니, 나의 시할머니는 29년생이다.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간 날부터 만날 때마다 기승전’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으로 종결시키던 할머니. 연세에 비해서 귀도 밝으시고 워낙 말씀하시는 것도 좋아하시는 터라 흡사 옛날 얘기 듣는 꼬마처럼 이것저것 물었다. 그럴 때마다 옆에 있던 친척들은 ‘재는 왜 또 시작이래.‘ 표정으로 슬금슬금 티브이 앞으로, 다른 방으로 옮겨가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6.25 전쟁 때 서울의 사촌들(할머님의 시조카들)까지 줄줄이 내려와 그 집에서 피난의 시간을 보냈다는 얘기, 원래는 한 칸짜리 집이었는데 땅을 조금씩 늘리고 공간을 칸칸이 늘려서 지금의 집이 됐다는 (레고도 아니고 집이 옆으로 마냥 늘어날 수 있단 것도 엄청 신기했다) 이야기 끝에는 늘, 한해 농사를 지어 마흔 가마니의 쌀을 들여놓은 다음날 그 햇밥 한번 못 잡숫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로 끝맺기 때문이었다. 새로 만난 시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야 새롭지만 다른 가족들, 친척들은 맨날 천날 들어온 레퍼토리였던 것이다. 물색없이 할머님의 레퍼토리를 시작하게 만드니 다들 줄행랑을 칠 수밖에. 물론 나 역시도 할머니의 이야기에 끝엔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는 걸, 할머님의 눈물바람에 눈물이 찔끔 나길 서너해하다 보니 다들 왜 그랬는지 이해했다. 할머니가 왜 그렇게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는지, 할머니 삶에서 그 ‘사건’이 어떤 일이었는지는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글도 모르는 채 18살에 시집와 6남매를 낳고, 남편을 잃고 남매들을 건사하고 농사 지으며 평생을 한 동네, 한 집에서만 사셨다.
고상욱씨에겐 ‘민중해방’이 신념이었다면 할머니는 일찍 간 남편과 낳은6남매를 먹고 입히는 것이 지켜야 할 중한 것이었다.
민중 해방을 외치다 자기 가족을 잃고, 있는 가족마저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폐를 끼치거나 삶을 망가뜨려버리면서 생면부지의 남은, 남의 일은 자신의 일인 양 발벗고 나서는 혁명가의 삶과 글도 모르고 한 평생을 살던 곳을 벗어나 본 적도 없으나 자신의 역할에 허리가 구부러지도록 살아냈던 우리 할머니의 삶.
어느 인생 하나 녹록하지 않다. 내가 허투루 말을 얹기 어렵다.
젊은 시절 노동운동에, 학생운동에 투신하였다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선택에 후회가 없는지, 다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할 것인지 잔인할 법한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그녀가 그랬다.
“나라고 평범하게 가정 꾸리고 애 낳고 남들처럼 살 생각 안 했겠냐. 마음이 그쪽으로 기우는 걸 어쩌겠냐. 엄마가 울며불며 말리고, 미친년, 실속없는년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내 마음이 그 길이라는 걸 어쩌겠느냐. 그래서 난 아마도 비슷한 선택을 하고 살 거 같다. 그게 내 최선인 거다. 자기 길 찾아서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긴 하지. 각자 자기 짐 지고 사는 거지. 왈가왈부할 거 있나.”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도 허덕대는 주제에 이모저모 따지는 거 많고 말 얹기를 좋아하는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는데 인색했다. 사걱세 후원하는 것도 대단한 일인 양, 미래를 위해 큰일이라도 하는 양 아이가 있으면서도 관심조차 두지 않는 사람들에게 냉소하기 일쑤였다. “참 피곤하게 산다.” 고 말하는 사람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다 좋자고 하는 일인데 그 따위로 말해야 하냐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다. 사회주의 혁명가 고상욱씨, 사회를, 나라를, ‘민중’을 위해 헌신하다 늙고 병든 몸만 남은 그 언니, 가족만이 유일한 신념이었던 할머니와 애매하게 끼어 이도 저도 아닌 나. 이 모순됨과 엇갈림의 갈지자 인생사들을 보고 듣고 겪으며 나는 오늘도 비틀거린다.
첫댓글 저도, 오늘 이래저래 일이 많은데, 은경 샘 글이 올라와 있어서 신나서 열었다가
할머니 얘기가 길어져서 스킵하려다가 다시 읽었고만요 >.<
"연세에 비해서 귀도 밝으시고 워낙 말씀하시는 것도 좋아하시는 터라 흡사 옛날 얘기 듣는 꼬마처럼 이것저것 물었다."
흡사 앞에 주어는 밝혀써주는 게 좋겠어요. 맥락상 이해되지만요.
"마음이 그쪽으로 기우는 걸 어쩌겠냐."
마음이 이렇게 모인 사람들끼리, 피곤해도 잘 살아 보아요. 😌
이도저도 아닌 나, 갈 지 자로 비틀거리는 나, 저도 늘 괴롭고 부끄러운 지점인데요, 그 모습 그대로 인정을 해버리기로 했어요. 반 걸음씩만 더 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