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4장 22-26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할 때 유일하다는 것은 또 다른 중보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하시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사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속죄 사역이고, 다른 하나는 중보 사역입니다. 첫째, 속죄 사역은 말 그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사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친히 속죄 제물로 드리심으로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를 얻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자이십니다. 둘째, 중보 사역은 승천하신 이후에도 자기 백성을 위해 계속해서 중보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일을 하시는데, 히브리서 7장 25절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로마서 8장 33절, 34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는 변호하시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과 18절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여기서는 속죄 사역과 함께 중보 사역까지 밝히시는데, 우리를 능히 도우시는 분으로 계시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서는 이런 점에서 그가 우리의 대언자이심을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더 이상 육신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보혜사’란 단어가 요한일서 2장 1절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대언자이시지만, 또 다른 보혜사 혹은 또 다른 대언자를 주시도록 간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냐?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 대언자 외에 또 다른 번역으로는 돕는 자, 중재자, 변호인, 혹은 위로자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중재자로서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고 변호하시고 돕고 위로하실 수는 있지만,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수는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보자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계셔야 하는데,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이런 자격을 갖춘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 하나님을 주시도록 구하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는 어떤 분이신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의 모든 사역이 진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사도로 부르신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그들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 없이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구하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도록 구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에 대하여 너희는 그를 알지만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물론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인성을 취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영이십니다. 당연히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자라면 그를 압니다. 알기에 믿음 안에서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분이 믿는 자들과 함께 거하시며 믿은 자들 안에 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역사로 말미암아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너희와 육체적으로 함께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내가 너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전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보내는 성령을 통해서도 너희와 함께 하여 너희가 고아가 아님을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승천하신다고 해서 너희를 버려두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 승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4장 처음부터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장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교회의 완성을 위하여 예비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그 완성 안에 제자들의 사역이 있는 것이고, 나아가 주의 몸 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택자 모두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9절의 말씀을 하시는데,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육신적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습니다. 믿는 않는 결과 세상은 죽음을 향해서만 나아갑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런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생명이 주어졌고,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갑니다. 20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처럼 성자와 제자들과의 관계도 그만큼 밀접하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믿음 안에서는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고 할 만큼 하나 됨으로 있다는 것이고, 그 하나 됨은 그의 뜻이 곧 내 뜻일 만큼 동일한 뜻을 가진 자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의 명령을 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다만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만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있다는 것을 통해 제자들을 통해 이루실 모든 뜻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인 22절을 보시면 가룟 유다가 아닌 또 다른 유다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요한계시록 바로 앞에 유다서가 있는데, 가룟인 아닌 유다는 유다서의 기록자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야고보의 형제요(유1:1), 알패오의 아들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다대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10:3, 막3:18). 그런데 그가 질문한 것이 무엇이냐?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19절 말씀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유다는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지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겁니다. 사실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알리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라는 사실이고, 그 빛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비추도록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비추는 의의 태양이라는 것인데, 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자신의 빛을 한정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직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빛을 비추시고 그리스도의 광채를 구별 없이 온 사방에 쏟지 않는 것은 결코 일관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비춰졌다고 해서 그 빛을 모두가 볼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이후 모든 인류의 상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증거 한 바가 있습니다. 9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9-13)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부패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무능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표현처럼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다고 할지라도 세상이 그 빛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을 볼 수 없는 상태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상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상태로 전락한 것입니다. 좀 더 분명한 표현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감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빛을 비춰도 감각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으면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빛이 비췄다는 것을 어느 정고 감각할 수 있는데, 죽었다는 것은 그러 감각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담의 타락 이후 구원의 역사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장의 표현으로 하자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데, 이는 혈통도 아니요 육정도 아니요 사람의 뜻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에 한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모두 인류가 구원에서 제외될 상태에 놓이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중 일부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죽었는데 살리셔서 빛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예수님께서는 알패오의 아들인 유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십니다. 먼저 2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질문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자신을 믿는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믿지 않는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마치 동문서답(東問西答)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무슨 질문인지도 모른 채 답하시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맞춰 답하시기보다는 질문 이상의 답을 하시는 경우도 많은데,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이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동문서답이 아니라 우문현답(愚問賢答)을 하고 계신 겁니다.
일단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내 말을 지키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 사랑의 결과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를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문제는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3절과 34절을 보시면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나는 떠나지만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으로 넘어와서 12절 후반부에 보면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말씀하시면서 13절 그리고 14절에서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합니다. 지난주 살핀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9절에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라고 말하면서 21절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합니다.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이 땅에 남아 주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계명의 핵심은 사랑하라는 것이고, 그런 사랑에 있어 마땅한 열매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13장에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14장에서는 그렇게 계명을 지키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며, 나를 사랑하는 자만이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라고 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스스로가 먼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언어적으로만 보자면 주어가 사람이고,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조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먼저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비춰지기 쉽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쪽으로 갑니다. 많은 이단들이 이런 조건으로 말씀하시는 것 때문에, 혹은 이유와 원인처럼 말씀하시는 내용 때문에 넘어집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우리는 믿음을 조건과 원인으로 생각합니다. 회개해야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할 때도 회개가 조건과 원인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도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회개해야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진술이 이것만 말하느냐? 이것 외에 다른 것은 말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이 믿음에 대하여 성경은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리고 그 선물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것도 밝히십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즉 믿음이 선물이라는 것은 믿음이 원인과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을 따라 택자에게만 주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자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회개한다면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 강퍅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자신의 죄를 다 보지 못합니다. 죄에 대해서도 변명함으로 죄를 좀 더 가볍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기경하여 우리의 죄를 인식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라고 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 것은 철저히 우리로부터 시작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 요한일서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7-11)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 것은 본문에서는 조건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조건이 아니라 결과로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결과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입니다.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느냐?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화목 제물로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너희도 하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사랑은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인 이웃에게까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나타났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에게 나타난바 된 자요,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요한복음 1장의 내용으로 말하자면 혈통도 아니요,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내 말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내 말을 지키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인데, 이미 사랑하시지만 주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를 더욱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순종이 아닌 불순종으로 일관한다면 어떻게 그를 사랑한다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택한 백성이기에 사랑을 거두시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하시기에 책망하시고 징계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때문에 택한 백성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되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으로 나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말을 지키라고 명하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결국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안식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여기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성부와 성자와 분리할 수 없으신 성령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왜 당신을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여기에 대한 답으로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기 때문이요,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원한 안식까지 보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형식 자체는 우리에게 있는 어떤 조건처럼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혈통도 아니요 육정이나 사람의 뜻도 아닌 너희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전제를 깔고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왜 저들에게는 빛을 비추시지 않습니까? 왜 우리에게만 빛을 비추십니까?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답이 없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예정론 부분에서 하나님의 뜻의 원인은 알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의 원인을 알 수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하시면 사랑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을 열매라는 의미로 풀어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는 택자다. 세상은 유기자다. 그런데 택자에게 나타나는 열매를 보라.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느냐? 사랑한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본문에 대한 가톨릭의 해석을 주의해야 한다는 언급도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이중적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통해 우리를 중생시켜 주기 전에도 우리가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성경을 따라 고백하는 것은 전적 타락입니다. 전적 부패요, 전적 무능력입니다. 그런데 중생 이전에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전적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락하기는 했는데,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 이전에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랑 때문에 중생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곳저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 전에는 늘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자연적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입니다. 그런 결과를 은혜로 받은 자의 마땅한 자세가 주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더욱 그를 사랑하여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있는 자는 받아 더욱 넉넉하게 된다는 표현도 했지만 본문도 다르지 않는 내용입니다(마13:12, 25:29).
그러므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게 되고,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은 내 쪽에 어떤 원인을 제공해야지만 하나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조건, 내게 있는 원인에 따라 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주께 순종하는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 그런 점에서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질문은 왜 누구에게는 비추시고 누구에게는 비추시지 않느냐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는 전제를 깔고서, 너희가 택자라는 전제를 깔고서 너희의 마땅한 바가 무엇인지를 잊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는 겁니다.
23절이 택하신 자기 백성과 관련된 말씀이라면, 24절은 그렇지 않는 자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그러니까 세상은 어떤 곳이냐? 혹은 세상은 어떤 사람들이 모인 곳이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 모든 곳인데,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말은 내 개인의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내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요, 내 말이 아버지의 말과 일치한다고 할 때 내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그를 보내신 자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와 영원토록 함께 거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은 그들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다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는 것으로 넘어가서는 안 되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 일부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택하신 자들을 거절하는 자에서 거절하지 않고 영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서 영접하게 하시는 겁니다. 사람은 받는 자로만 있을 뿐입니다. 엄밀하게는 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순종에 있어 내 계명을 지키라는 명령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순종에 참여하게 하시되 나태한 우리를 일깨우시기 위해서입니다. 나태한 우리를 더욱 일깨우시기 위해 순종과 불순종에 대하여 복과 저주까지 말씀하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너희의 마땅한 바라고 할 때 마땅한 바를 행했다고 해서 상급이 주어져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마땅히 행해야 바를 한 것인데, 거기에 어떻게 상급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17장에서 말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눅17:9-10) 이것이 우리의 자세로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기에도 은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은혜의 상급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칼빈은 인생에 있어 은혜의 과잉만 있을 뿐이라고 한 것은 거짓이 아닌 겁니다. 그 은혜를 받는 대상이 택자요,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의 말씀을 제자들이 깨닫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25절과 26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지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란 겁니다. 역으로 말하면 지금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승천 이후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겁니다. 그 말씀의 씨앗은 한동안은 죽은 것처럼 보이듯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 말씀의 씨앗이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있을 때 그렇게 됩니다. 누구에 한해서 그렇게 되느냐? 세상이 아닙니다. 제자들입니다. 주를 참되게 믿는 자들입니다.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그들에 한해서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저들에게 위로를 하고 계십니다. 비록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씀의 씨앗은 결코 헛되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반드시 우리에게 믿음으로 반응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자라면, 주를 참되게 믿는다면 이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것으로 우리의 위로를 삼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지 이해되지 않더라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동일한 말씀을 깨닫게 하실 때까지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우리의 들음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은 아닌가로 우리 자신을 살펴야지, 하나님의 말씀에 뭔가 점과 흠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바로 그 말씀으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그 말씀으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으로 있지 않는 것은 결단코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쪽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기로 하셔서 깨닫게 하시면 그 말씀은 결코 헛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헛되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도록 명하고 계시지만 그 명하신 바를 행하도록 하시는 분은 누구시냐? 성령 하나님이시요, 성령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는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부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