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주대첩[幸州大捷]
조선왕조실록을 보고
실록기준으로 역사를 배워야 한다.
행주대첩은 1593년3월14일에 벌어지는 대첩이다.
김경로(남원) 황해도 방어사(종3품)는 황해도 황주, 봉산 이남에서 맹활약을 펼쳐 왜군을 몰아내고
강화도에 묶여있는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의 1만대군 중에서 군관, 종사관들을 김천일과 함께
행주산성으로 8천여 명이 자원하여 들어가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하는 장수였다.
행주대첩 이후 김경로는 승진하여 전라도 방어사(정3품 당상관)로 임명되어 전주성으로 들어간다.
이후 정유재란 때 임사미 등과함께 담양으로 상륙한 명나라 부총병 양원을 남원성으로 안내하러 갔다가
순창에서 합류하여 전라 병마절도사 이복남, 오응정(전라 우방어사), 산성별장 신호 등과 함께
남원성 불더미속에서 산화한다.
1597년 8월 13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이 50~100여 명을 이끌고 도망치자,
이복남, 김경로, 오응정, 신호 등은 자신들만 살아나오자 풀더미속으로 들어가 종사관에게
불을 지르라하고 불더미속에서 산화하고 만다.
불에 타죽는 이복남, 김경로, 오응정, 신호 등은 조선의 진정한 전사였다.
행주대첩은 전라도 병력으로 대승을 거두는 대첩이다.
왜군 (우희다수가, 소서행장) 3만명 중 1만5천의 사상자를 내고 아군 피해는 13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종2품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의 8천병력, 김천일 수원 부사겸 창의사(종2품)가 이끄는 1천 사수부대,
김제 금산사 주지 처영스님의 1천 승병이 주력이며 종2품 전라 관찰사 권율 병력은 800여 명이다.
그리고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가 전주성에서 이끌고 올라간 6천병력 중 4천이 주력이었다
일반적인 역사에는 축소하여 2천 800여 명으로 발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의 1만병력 중
8천 명과 최원 병력을 행주로 이동시키기 위해 설득하러 온 황해도 방어사 김경로 병력이 더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김천일, 김경로를 시켜 최원을 설득하여 황해도로 나가 왜군을 상대하라는
선조의 계획이 나오지만 실패하고, 황해도에서 병력을 모아 행주 주변에서 교란전을 펼친다.
김경로는 김해 부사로 있다가 임진왜란을 맞아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조방장으로 출전하였다.
징비록 드라마에서 동인 조경이 참전한 것은 사실이나, 수십명을 거느린 조방장 조경이 나온다는 것은
역사를 동인 편중적으로 그린 것으로 밖에 볼 수가 없다.
한마디로 전라도 병력을 전혀 관련도 없는 영남 장수가 지휘했다고 주장하는거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신라 장수가 백제 병력을 거느리고 승리했다고 말하는거나 다름없다.
이 당시 수원 부사겸 김천일이 맡은 창의사라는 직책은 비변사로부터도 공식 인정을 받는 종2품의
고급직책으로 의병사령관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행주대첩은 전라도 병력이 치루는 전투이기 때문에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 대첩,
또는 전주성과 남원성 10만 의병중 특별 차출된 사수부대를 이끌었던 수원부사겸 창의사
김천일 대첩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전투라는 말이다.
이 시기에 전라 병마절도사가 최원에서 1592년 10월 수원에 주둔했던 선거이로
임시 교체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행주대첩은 최원, 선거이, 김천일, 권율, 처영 등을 주축으로
치뤄지는 전투이다.
병권이 임시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계속 강화도에서 1만대군을 최원이 지휘하고 있었던 시기였고,
선거이는 전주성에서 6천을 이끌고 수원에서 주둔하고 있다가 한양을 점령하고 있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시흥으로 병력을 전진 배치시킨 후, 한양탈환 연합작전을 벌이기 위해
행주로 이동하여, 4천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간다.
사령관 우희다수가 [우끼다 히데이에/사령관]군과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3만 군이
행주에 집결한 조선군이 명나라 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치기 위해
선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593년 3월 14일 행주대첩이 벌어지는 어려운 시기에 충청 수사 정걸,
경기 수사 이빈이 화약과 화살을 수로로 공급하여 승리하는 원동력이 된다.
전라도, 충청도, 강화도에서 마련한 화약과 화살을 수로로 운반하여 승리하게 된다.
징비록 드라마가 왜 문제가 많은 드라마인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경기수사 이빈은 전라도와 전주성에서 화살을 싣고 충청수사 정걸은 충청도에서
강화도로 이동하여 최원의 군수물자를 지원받아 행주산성에 공급한다.
다른 기록에는 행주전투가 벌어지는 전투 현장으로 문관 출신인 이빈이 풍랑으로 포구에
제대로 상륙하지도 못하고 포탄소리에 무서워서 못들어 가는 것을 보고,
개전초기 전투경험이 많았던 충청 수사 정걸(고흥)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는 1593년 6월 21일 진주 제2차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과함께 함안 수군전투에도 참여하여 왜 수군을 격퇴시켜
함안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함안을 수성하는 장수이다.
이후 전라 수군절도사(정3품)로 공식 부임하여 이순신과 연합작전을 벌이는 장수이다.
선거이(보성)는 왜란 전 1591년에 전라 수군절도사, 1592년 전라 병마절도사를 지낸 바가 있음.
현재 대장 예편후 5년간 대기했다가 전시에 바로 재기용되는 군 편제와 같음].
조선왕조실록을 봤지만 1593년 행주대첩 시기에
충청, 전라, 경상 3도체찰사로 류성룡이 임명되었다는 실록은 보지 못했다.
1593년 3월14일 행주대첩 시기에 류성룡은 평안도 도체찰사였다.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4일 신미 4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兼京畿、黃海、平安、咸鏡道都體察使柳成龍啓曰: "臣旣受四道體察之任, 凡各道官吏,
自監司以下所行非法及施措乖宜等事, 皆當隨聞啓達, 紏正愆違, 以肅頹綱。
蓋監司者, 守令之綱, 朝廷先責監司, 而監司仍責守令, 乃是體統當然也。
경기 황해 평안 함경도겸 도체찰사(兼京畿黃海平安咸鏡道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4도 체찰사의 임무를 받았으니, 각도의 관리를 감사(監司) 이하로부터 그 소행이
건전치 못하거나 행정이 정상에 어긋나는 등의 일에 대하여서는 적발되는 대로 계달하여
그 잘못을 규정하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킴이 마땅한 것입니다.
대개 감사란 수령들을 거느리는 직위이니 조정은 먼저 감사를 독책하고 감사는 이어 수령을
독책하는 것이 바로 체통에 있어 당연한 일입니다. -1596년 1월4일에 가서야 4도 체찰사였음.
이미 각도에 정1품 도체찰사가 파견되어 있는데 1592년4월13일 임진왜란 발발이후,
전쟁책임을 물어 동인정권이 물러나고 서인정권이 들어서는 시기에
동인을 다시 충청, 전라, 경상 삼도체찰사로 임명했다는것은 역사적사실에 맞지 않는다.
류성룡은 전쟁터인 충청,전라,경상도 삼도체찰사가 아니라 전쟁초기 평안도 도체찰사였고 1596년에 가서야
경기,황해,평안,함경도 4도체찰사였다.
1592년 왜란발발 후 6월9일 평양몽진지에서 동인정권이 물러나고 서인정권이 들어서며,
1593년 10월24일 환양 환도 후 3일후에 동인 이산해, 류성룡 등이 정철에게 광해군을 왕세자로
임명하라고 사주하여, 광해군을 싫어했던 선조에 의해 서인정권이 물러나고 다시 동인정권이 들어선다.
이후 정철을 명나라 강화사절로 보내 강화도를 거쳐오도록 하여 강화도에서 병사처리 하고 만다.
정철은 동인 이산해, 류성룡의 정치공작에 걸려 병사처리되고 말았다.
동인이 서인을 지휘한다는 것은 그당시 정치적상황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전라도는 서인지역이며 호남 동부지방은 혼재지역이었으나,서인 관할 하에 놓인 지역이었다.
아무리 높은 동인출신이 지휘한다고 지휘가 되는 지역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미 서인 정철이 1592년7월이후 도체찰사가 되어 강화도를 거쳐 최원 병력을 둘러보고
왜 수군의 한양 입성작전을 차단케 하며 충청남도 연기를 거쳐 논산 연산, 연무로 내려가
10월 청주성 수성전투를 총지휘한다.
징비록 드라마에 선조를 보필하는 정철이 나오는 것은 모순이라는 이야기이다.
1592년 6월 9일 평양 몽진지에서부터 1593년 3월 14일에 벌어지는 행주대첩 때는 서인정권이었으며,
1593년10월 24일에 한양환도 후 동인정권이 들어선다.
광해군을 옹립하라고 동인 이산해, 류성룡 등이 서인 정철에게 사주하여 광해군을 싫어했던
선조에 의해 서인정권이 몰락하고 동인정권이 들어선다.
서인정권 시기에 전라, 충청, 경상 삼도도체찰사를 평안도에 있었던 류성룡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류성룡은 평안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활동함.
1596년에 들어가서야 경기, 황해, 평안, 함경도 4도체찰사로 임명됨].
왜 수군의 한양입성 차단작전은 최원, 김천일 등이 막아내고 큰 성과를 올린다.
청주성 수성전투는 충청도 관찰사 허욱, 조방장 배흥립, 조헌, 영규스님 등이 치루고
조헌, 영규대사는 산화한다.
이 전투를 충청도 도체찰사 [정1품] 정철이 총지휘하였다고 해서 승전장으로 오르지 못하듯이,
1593년 3월 14일 행주대첩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가지고 있었던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가
승전장이 되어야만 한다.
도병마절도사: 종2품 조선 주력군으로 기마군을 가진 보기군으로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주력군이다.
(군단장/군령권/지시,지령,명령권)으로 좌병마절도사, 우병마절도사(사단장)를 지휘함.
>휘하에 절도사[연대급]부대가 있음.
도관찰사(지휘권): 종2품 도감사를 말하며 행정권한을 가지고있는 관찰사를 말한다. (현재의 도지사)
도방어사(군령권): 정3품의 당상관 직급의 지방 특수군으로 의병의 관군화 정책 이후
공수부대 역활을 하였다. [좌방어사 [종3품], 우방어사[종3품]를 지휘함.-최초 수성지역을 빼앗기면
진지를 수시로 적주변으로 이동하며 관할지역을 수성하는 부대.
도순찰사(지휘권): 정2품으로 각병영을돌며 군무를 순찰하고 중앙에 보고 하던 임시적,
한시적으로 만든 직책으로 전시에 군사인력, 군수물자 징발권한을 가지고 있다.-(군사령관)
-순찰사는 종2품(군 감찰권한).
도순찰사는 자기 병력이 없으며 이동할 때 1천 이내의 감영소속의 기본병력만 이끌고 지휘소에서
군행정적인 전략지휘만 한다.
왕명을 받은 중앙군을 이끌고 출병했을때는 군령권을 직접 행사할 수 있다.
순안어사-정2품으로 평시에 관할지역을 돌며 공무원과 행정적으로 민간 동원 권한체제를 순시하고
전시에는 공무원 등 행정 동원권한과 민간인력 동원권한을 가지고 있다.-어사는 종2품(행정 감찰권한).
도순변사(지휘권)-정2품으로 북방의 전방부대를 평시에 순찰하여 비변사에 보고 하고,
전시에 북방에 있는 전방부대의 도병마절도사에게 왕명과 비변사의 명령사항을 전달하며
기본 수행병력만 이끌고 도순찰사처럼 후방에서 군행정적인 전략적 지휘만 한다.
왕명으로 중앙군을 이끌고 출정했을 때는 군령권을 직접 행사한다.
순변사는 종2품(북방 전방지역 감찰권한).
도절제사-종2품으로 임진왜란 때 향토 예비군 사단[지방방위군]인 절제사를 지휘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부활된 직제였다.
부윤[시장/정3품]휘하의 종5품 도사병력[대대급]과 절제사, 첨절제사 병력을 임시적으로 지휘한다.
절제사-원래 종 3품으로 전주진, 경주진에만 있던 직제였다. [전주진, 경주진 절제사만 정3품]
절제사 병력은 성주변 지리에 익숙한 병력으로 구성하여 성을 방어하는 병력이고
평시에 부윤의 군행정권 지휘를 받고 전시에 도절제사가 오기전까지 부윤이 지휘권을 행사한다.
해당지역에 성을 쌓아 진지를 구축하고 성안에서 수성하는 군대를 절제사 [종3품]병력이라고 한다.
적이 침투하기 용이한 해안지역 요충지에 성을 쌓고 수성하는 절제사는 첨절제사[종3품]라 한다
지방에서 농사를 병행(농사병행병)하는 동원예비군, 일반예비군을 강제 징집하여 움직이므로
조선 주력군인 병마절도사 군대나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군보다도
한단계 하위직제였다.
군단장이 1개사단을 거느리고 후방에서 군단본부를 차리고 3개사단을 지휘한다.
각 전방에서 3개사단이 전투를 수행한다.
각 전투사단 중 1개사단이 전투에 승리하면 그 공적은 누구의 공적으로 가장 먼저 올라가야 할까?
해당 사단장인가? 아니면 군단장인가?
실제로 전투현장에서 자기 병력을거느리고 전투를 지휘한 해당 사단장의 공적이
제1차적으로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행주대첩은 조선 주력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4천병력과 최원의 8천병력을 인수받아
1만 2천을 가지고 있었던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가 가장 우선이고,
두번째로 1천 사수부대를 가지고 있었던 수원부사겸 의병사령관 창의사 김천일,
창의사에 부속된 1천승병을 거느린 처영스님 병력이다.
전라도 관찰사겸 순찰사 권율병력은 800여 명이므로 세번째이다.
충청도 관찰사겸 순찰사 허욱, 조방장 배흥립 병력은 네번째이다. [병력이 적어 평가절하됨]
다섯번째로 화살, 화약을 공급한 충청수사 정걸,(경기수사 이빈) 등이다.
여섯번째로 강화도에서 군관, 종사관 등과 자원병력 8천명 및 화약, 화살을 보내준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이다.
일곱번째로 행주대첩 중에 주변에서 교란전을 펼친 황해도 방어사 김경로, 고흥에서 화차부대와
비격진천뢰(화포에 폭탄을 달아 터트릴 수 있는 지연식 포탄)를 만들어온 장성의 변이중 등이다.
나머지 참여자들은 자기가 지휘하는 병력이 수십에서 50여 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참여도가 미미하여
논공행상에서 논할 가치도 없다.
1592년 7월7일 이치, 웅치, 슬전전투에서
전라, 충청 순안어사[행정 공무원인력, 민간인 동원권한], 전라도 순찰사, 전라 관찰사 이광이
총지휘하였음에도 이광을 승전장이라고 하지않는데 권율만 승전장이 된다는것은 모순이라는 말이다.
행주대첩도 마찬가지다.
싸움은 군령권을 가지고있는 전라 병마절도사 군과 부사, 의병들이 치뤘는데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전라관찰사, 광주목사 권율의 공적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립기관이자 사법부 소속인 사법적 수사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검찰총장이 수사하여 범인을 잡았는데
사법권도 없고 법무행정권(인사권, 조직개편권, 감찰권, 입법부의 법률개정권, 출입국관리권,교도행정권)만
가지고 있는 법무부장관의 공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웅치, 이치, 슬치전투 시기 전라충청 순안어사겸 2도순찰사겸 전라 관찰사인 군총사령관은 이광,
부사령관 곽영[왕족/전라도 방어사],
의병총사령관 담양부사 [정3품]겸 창의사 고경명 [종2품 예우/5만명] -이치 제1차전투 6천 패전.
광주목사 [종2품]겸 전라도 절제사[종2품] 권율의 이치 제1차 이치 고개 전투 패전.
충청도 병마절도사 조방장[임시 병마절도사/정(종)3품] 황진이 이치 제2차 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었다.
황진은 이치 제2차 전투와 금산전투 승전이후 병조의 중앙요직 중 제3서열인 병조참의[정3품]를
제수받고 이어서 전주 부윤직 (정3품이지만 가선대부직을 받아 종2품 예우를 받고 관찰사보다는
한단계 아랫계급이며 전주진의 절제사(정3품)보다는 한단계 윗계급으로 유사시 지휘함)을 받는다.
[이광이 2도총사였기 때문에 전주성에 집결한 호남의병 5만명 중에서 차출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 군으로 편제시켜 황진(세종시대 황희 정승의 후손으로 장수,남원 황씨 시조)이 지휘함]
-(병조)참의>참판>판서직은 중앙정부 조정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음.
도절제사는 종2품 품계로 향토 예비군 사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이다.
전주 부윤휘하의 종5품 도사병력 (대대급)과 전주진과 경주진에만 있었던 절제사[정3품]병력 중
전주진의 절제사 병력을 거느리는 군대를 말하는 지방방위군 병력으로 전쟁시 순안어사의 명령에 의해
강제징발된 의병이 지원하여 채워주지 않으면 작동이 제대로 되지못하는 동원예비군 병력을 말한다.
이치전투를 강제로 동원된 동원예비군 [지방방위군]으로 채워진 도사병력과 전주진의 절제사 병력을 거느린
권율의 승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평가인지 제대로 고쳐야 할 것이다.
도절제사 병력은 전라, 충청 순안어사 이광[후임자 이시발]의 명령으로 징발되어 강제동원된 동원예비군으로
채우거나, 자원한 의병이 들어가서 활동하는 향토 예비사단으로 농사병행병에 해당하는 지방방위군을 말한다.
조선주력군인 도병마절도사 군처럼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현역 군단병력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김천일 창의사 병력은 전쟁에 적극적으로 자원하여 차출된 의병들로 채워진 특별 사수부대였다.
절제사 병력은 그지역 지리에 익숙한 사람으로 하여금 해당지역(전주성)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군대라 외부로 쉽게 빼돌릴 수가 없는 군사조직이었다.
종2품 전라 관찰사는
도병마절도사가 이끄는 조선 주력군에게는 평시에만 왕명과 병조,비변사의 명령사항에 대해
군 행정지휘권을 갖는다.
도병마절도사는 비변사(국방부+국무회의)소속으로 별도의 독립되고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조선주력군이었기 때문에, 종2품의 동급직급이라 "전시"에는 함부로 독립된 도병마절도사 군을
군령권을 가지고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군령권은 병조에서 나오는 것보다 비변사로부터 나온다.
[병조판서가 군행정권을 전담하고, 군령권은 왕명을 받은 비변사[3정승과 6부판서 국무회의]에서 나온다.
병조판서가 종3품과 일부 정3품까지만 인사권을 행사하고 정3품 주요 요직과 종2품의 고급직책 부터는
왕명을 받은 비변사에서 인사권을 행사함].
도순찰사가 도착하기 전까지 군행정권만 지휘한다.
단지 도관찰사가 도순찰사 직을 겸하게 되면 왕이나 비변사의 명령사항을 전달하여
지휘소에서 왕과 비변사를 대신하여 지휘하고 실제전투는 군령권을 가진 도병마절도사가 수행하는 것이다.
실제전투는 군단장이 치뤘는데 그것을 군사령관의 공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도순찰사는 정2품으로 한직급 더높지만 자기 병력은 없고
전략지휘만 하는 위치이고 실전에서 전술지휘와 군령권은 도병마절도사가 펼치는 것이다.
도순찰사가 비변사에서 파견될 때 수행병력만을 가지고 해당 전투지역으로 내려가서
군수물자를 징발하고 1천이내의 감영 소속 병력만 이끌고 지휘소에서 행정적인 전략지휘만 한다.
현직에 있는 관찰사에게 순찰사, 도순찰사를 겸하게 되면 군수물자 징발권과
군사지휘권이 주어지지만 감영에 속한 군대만을 거느리고 지휘소에서 군행정적인 전략지휘를 하게 된다.
[이를테면 행주에 집결하고있는 아군을 치기위해 왜군이 한양에서 출병하고 있으니,
지원군을 행주로 보내도록 하는 왕명/비변사의 지시에 대해 군사적인 행정명령을 내리게하는 전략지휘를 함.
한마디로 도순찰사나 관찰사는 군행정권을 가지고 비변사의 명령사항에 대해 전투에 임하라는
지휘를 내리는 위치이고, 위반하거나 명령거부시 종3품이하 장수와 군관들의 인사이동 조치나
진급, 직급 강등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
직접적인 전쟁수행은 도병마절도사가 군령권을가지고 좌/우병마절도사(사단장),중군장(장군급)과
큰틀에서 전투에 대한 전략을 짜고 절도사(연대장)를 움직여서 전술지휘를 하여 전투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전투에 승전하게 되면 그 공은 가장 먼저 도병마절도사의 공이 제1순위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실제전투는 35, 31사단을거느린 군단장(도병마절도사)과 적극적으로 자원하여 전투에 참여한 의병예비군에
해당하는 부사, 창의사, 의병, 승병이 치뤘는데, 도순찰사(군사령관)를 겸했기 때문에
전라도 도지사의 공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직업군인으로 성장하여 도순찰사(군사령관)를 맡아서 도병마절도사(군단장)를 지휘하였다면
도순찰사의 공적이 되어도 무방하겠지만, 문관 출신인 권율이 임시적으로 비변사의 명령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승전의 공은 1차적으로 전라도 병마절도사 선거이가 올라야 정상적인 역사적 평가이다.
현재의 1,2,3군 사령관과는 전혀 다른 체제였기 때문에, 권율이 승전장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평가이다.
전방에 1,2군단이있는데 적이 쳐들어온다고 다급하여 문관인 도지사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승전했다고
도지사의 공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잘못된 평가임에는 틀림없다.
군령권 (지시, 지령, 명령권)을 가진 합참의장이 전투를 치뤘는데 군행정권 [인사권]을 가진 참모총장
또는 병조판서[정2품 국방부장관/지휘권/예산편성권]가 승전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에
바로잡아야 한다.
-현대는 육군 참모총장이 군행정권(인사권)을 행사하지만,
조선시대는 병조판서가 정3품 당상관 일부와 종3품 당하관 이하의 인사권을 행사하고 정3품 주요 요직과
종2품의 고급직책 부터는 왕명을 받은 비변사(3정승과 6부판서 국무회의)에서 인사권을 행사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