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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흘러 단양에 이르러 천하일색의 단양팔경을 빚어낸다.
이곳 단양(丹陽)이라는 지명은 <연단조양(鍊丹調陽)>이란 말에서 왔다고 한다.
<연단(鍊丹)>은 옛날 신선들이 만들어 먹었던 특수 환약이었다.
<조양(調陽)>은 그 빛이 고르게 비친다는 뜻이라고 한다.
단양팔경의 제4경 옥순봉은 단연 으뜸으로 가히 신선이 노니는 절경이다.
희고 푸른 빛을 띤 바위들이 힘차게 솟아 마치 대나무싹과 같이 보인다는데서 유래한 옥순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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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 때 관기였던 두향(杜香)은 그 절경에 반해 당시 단양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에게 옥순봉을
단양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을 넣었다고 한다.청풍부사의 거절로 일이 성사되지 않자 퇴계 이황은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글을 새겨 단양의 관문으로 정했다는 사연이 전해진다.
훗날 청풍부사가 그 글씨를 보고 감탄하여 단양군에 옥순봉을 내주었다는 뒷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토정 이지함은 형 이 지번과 함께 옥순봉 일대 남한강을 몹시 사랑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지번에 대한 이야기를 옮겨본다.
"선조 8년[1575년 12월 1일] 전 내자시정(內資侍正)이 지번이 졸[사망]하였다. 지번은 목은 이색의 후예인데 병오년 진사에 올랐다.
어릴 적부터 침착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병들자 다리를 찔러 피를 받아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상중에 몹시 슬퍼하였고 한결같이 가례를 따라 행하였다. 일찍이 김안로의 재앙을 입어 해도에 유배되었다가, 김안로가 패망하자
석방되었다. 성균관의 추천으로 재랑이 되었으나 사은하고는 출사하지 않다가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사평이 되었다.
아들 이산해는 어릴 적에 신동으로 일컬어졌는데 윤원형이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아주려 하자, 지번이 즉시 벼슬을 버리고
아우 지함과 함께 단양의 구담 곁에 가 살면서 열심히 학문을 닦고 담박한 생활을 하며 만족스럽게 스스로를 즐기니,
사람들이 그를 구선(龜仙)이라 불렀다. 퇴계 이황이 그와 벗하여 도학을 권면하였다.
금상초년에 청풍군수를 제수하여 옛날 은거하던 곳에서 가깝게 살도록 하였는데, 이황이 강요하여 취임한 뒤 애쓰지 않고도
깨끗하게 잘 다스렸다. 떠나가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으며, 후인들은 모두 그의 풍절을 숭상하였다.”
그 무렵 동생 이지함은 구담에 은거하여 잡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창하정 옛터에서 오른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오로봉 아래에 토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 터가 남아있다.
토실은 허물어져 식별이 불가하고, 가운데 소만한 바위가 눌러 앉은 곳엔 지금도 샘물이 솟고 있어 토실 위치를 더욱 신빙성
있게 한다.
구담과 오로봉 사이에 칡넝쿨을 가로 질러 학 모양의 탈 것을 만든 이는 이지번이다.
구담봉 정상 부근에 풍수상 “금계포란형“으로 불리는 아늑한 지형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세대 한 가족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농토가 있고 물도 있다. 적막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어 다소 외롭다.
그 곳과 이곳 오로봉 사이를 오가며 이 지번과 이지함이 생활을 즐겼던 것 같다.
풍수와 관련하여 전하는 얘기가 또 하나있다. 토정은 가형인 이 지번에게 구담봉 부근에 명당이 많음을 말하여
가족의 무덤 5개나 이쪽으로 이장 안치하였다고 한다. 당대가 지나기도 전에 이 지번의 아들 이산해가 영의정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한다. 지금도 구담봉. 옥순봉. 현학봉. 오로봉. 채운봉 등이 모두 한산 이씨 소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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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만난 연인 두향(杜香)이다.퇴계 이황의 시 매화(梅花)를 두향이 즐겨 노래해 더욱 가까워진다.
이들은 남한강 강선대를 노닐면서 시와 노래를 즐겼다.조선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이 좋아하던 여인 두항은 관기였다.
이들은 퇴계가 풍기군수로 떠나면서 서로 혜여진다.이때 두향은 어머니가 아끼던 매화를 퇴계와 나누어 갖는다.
퇴계에게 매화는 두향이었고 두향에게 매화는 퇴계였다.퇴계는 늘 매화를 가까이 두고 두향을 그리워 한다.
두향은 퇴계가 단양을 떠나면서 관기를 그만두고 강선대 근처 단양에서 산다.임종 직전 안동으로 퇴계를 찾아간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함께 노닐던 강선대로 돌아가 남한강에 몸을 던진다.사랑하는 님과 함께 유람하던 남한강에.
그 강가에 두향의 무덤을 쓴다.수 백년의 세월을 지켜온 두향의 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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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인호는 장편소설 <유림>에서 퇴계 이황의 연인 두향의 묘를 찾아 묘비를 살피며그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확인한다.
두향의 무덤 앞에 서 있는 표석에 기록되어 있는 두향과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의 인연을 찾는다.그 대목을 <유림>에서 옮긴다.
두향이 단양팔경을 지정하기 위해서 청풍군수인 토정 이지번 선생에게
청풍 경계인 옥순봉을 양보 받도록 이황에게 청원하여 단양팔경을 지정하게 하였다.
그러나,나는 표석에 새겨진 문장을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다.이 문장은 분명한 오기이다.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의 호는 성암(省菴)이지 토정(土亭)이 아니다.
-중략-
이러한 일화로 인하여 이산해의 가문에서는 아버지 이지번과 작은아버지 이지함이 은둔하였던 단양의 구담을 대대로 기리고
곁들여 두향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던 것이다. 스승 이퇴계를 존경하여 애인이었던 두향의 제사까지 함께 지내준 이산해의
사제지도(師弟之道). 그러한 사제지도가 없었더라면 오래 전에 두향의 무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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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 아니다.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새겨져 있다. 나는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조선 숙종 때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호조정랑, 의금부부사,
단양군수였던 수촌(水村) 임방(任傍:1640~1724)은 ‘두향묘시(杜香墓詩)’를 남긴다.…”
묘석에 나오는 임방은 송시열의 제자로 의금부도사를 거쳐 대사성·호조판서에 이르렀던 명신인데,
일찍이 단양의 군수로 재직하다가 두향의 무덤 앞에서 추모시를 한수 읊는다.
그 추모시가 임방의 문집 수촌집(水村集)에 실려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이라네.
강 언덕 강선대 그 아래 있네.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 주었네.
(一點孤墳是杜秋 降仙臺下楚江頭 芳魂償得風流價 絶勝眞娘葬虎丘)”
두향에 대해서 노래한 시 중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 시에서는 두향을 ‘두추(杜秋)’라고 부르고 있다.
두추는 당나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최고의 명기. 따라서 임방은 두향을 감히 두추에 비유하여 시를 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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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표석에 새겨진 임방의 시를 묵묵히 읽어 보았다.
표석 측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그 밖에 영조 때 문인 월암 이광려 퇴계 후손인 이휘재 등의 시가 있으며
토정(이것 역시 오기이다) 이지번 선생의 아들 아계 이산해로 하여금
두향의 제를 지내게 하였다.-단성향토문화연구회건립(丹城鄕土文化硏究會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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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법으로 ‘구담도’를, 심재 이방운은 남종화법으로 ‘구담도’를,
단원 김홍도는 실경산수화법으로 ‘옥순봉도’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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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뉴시스】강신욱 기자 = 퇴계 이황(李滉·1502~1571) 선생과 단양 출신 관기(官妓) 두향(杜香)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스토리텔링 공원으로 새롭게 피어나고 있다.충북 단양군은 2억원을 들여 두향의 무덤이 내려다보이는 단성면 장회나루 언덕에
400여㎡ 규모의 스토리텔링 미니공원을 조성했다고 25일 밝혔다.이 공원에는 허리 뒤춤에 매화를 들고 선 퇴계와 거문고를
타는 두향의 모습이 청동상으로 표현됐다.이들의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순애보를 주제별로 새겨 넣은 12개 입석도 세웠다.
매화나무에 물을 준 뒤 정성껏 소원을 비는 '양석음석(陽石陰石)', 자연풍경과 인물이 하나의 작품으로 담길 수 있는 매화 문양의
'액자 포토존'도 설치됐다.바닥 군데군데에는 고매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음향과 함께 조명을 설치해 야간에도 관람할 수 있다.
조선 13대 명종 무렵 48세의 나이에 단양군수에 부임한 퇴계에게 열아홉 살 관기 두향이가 정성스레 기른 매화 화분을 선물하면서
둘 사이의 사랑은 시작된다.두향은 집안의 우환으로 시름에 잠긴 퇴계를 위해 거문고를 타고 매화에 대신 물을 주는 등 온갖
수발로 대학자를 위로했다.가끔 짬이 나면 장회나루에서 풍경이 빼어난 강선대에 올라 거문고를 타는 두향을 퇴계는 매화만큼이나
아꼈다.부임한 지 9개월 만에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기는 날 두향은 퇴계에게 매화 화분 하나를 이별의 정표로 보낸 뒤
관기 생활을 접고 평생 강선대에서 움막을 짓고 수절하며 퇴계를 그리워했다.
20여년이 지나 임종을 맞은 퇴계는 "저 매화분에 물을 주어라"는 유언을 했다. 두향이 정표로 준 그 매화였다.
퇴계의 죽음에 슬픈 나날을 보내던 두향은 이듬해 생을 마감했다.
두향은 생전에 자신이 죽거든 퇴계 선생과 사랑을 이야기하던 강선대 아래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두향의 유언대로 강선대 아래에 묻어주었다는 슬픈 이야기는 스토리텔링 공원에 담겼다.
퇴계와 두향의 관계가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70년대 중후반 소설가 정비석(1911~1991)씨가
장편소설 '명기열전(名妓列傳)'을 신문에 연재하고 책으로 발간하면서부터다.
'명기열전'은 이후 1989년에는 '미인별곡(美人別曲)'이란 제목으로 재출간됐다.
정 작가는 단양팔경을 둘러보다가 옛날 단양에 두향이란 명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 해 동안
옛 책을 뒤적이다가 두향의 무덤에 관한 한시(漢詩) 두 수를 발견했고, 퇴계 후손들의 이야기 등을 토대로 퇴계와
두향의 그럴싸한 로맨스를 소설로 엮었다.퇴계가 별세한 지 300년이 훌쩍 넘은 1914년에 한말의 개혁파 문신 김윤식(金允植·1835~1922)의 시문집 '운양집(雲陽集)'에 실린 시 '장호주중(長湖舟中)' 말미에는 두향이 퇴계의 방기(房妓)였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이산해의 아버지이자 토정 이지함(李之菡·1517~1578)의 형인 이지번(李之蕃·?~1575)이 벼슬을 버리고 단양 구담봉 근처로 내려와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단양군수로 재임하던 퇴계와 교분을 나눴다고 한다.
이때 이지함의 아들 이산해가 스승의 연인 두향의 무덤을 돌보며 대대로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근래는 단양문화보존회가 가을에 장회나루에서 망제(望祭)를 지낸다.스토리텔링 공원이 조성된 장회나루는 남한강 푸른 물과
구담봉, 옥순봉 등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하게 하는 단양의 대표적인 관광명소 중 한 곳이다.
군 관계자는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퇴계와 두향의 사랑 이야기는 단양이 지닌 큰 자산"이라며 "지역 주민은 물론 많은 관광객이
찾을 수 있는 스토리텔링 관광 명소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ksw64@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