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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선종(禪宗)의 다섯 갈래
大凡祖師宗途가 有五하니
曰臨濟宗, 曰曹洞宗, 曰雲門宗, 曰潙仰宗, 曰法眼宗이라.
조사의 종파가 다섯 가지가 있다.
임제종, 조동종, 운문종, 위앙종, 법안종이 그것이다
(1) 5宗의 法統
1) 임제종 법통
臨濟宗 本師釋迦佛로 至三十三世六組慧能大師下 直傳하니
曰南嶽懷讓 曰馬祖道一 曰百杖懷海 曰黃壁希運 曰臨濟義玄 曰興化存獎 曰南院道顒 曰風穴延沼 曰首山省念 曰汾陽善昭 曰慈明楚圓 曰楊岐方會 曰白雲守端 曰五祖法演 曰圓悟克勤 曰徑山宗杲禪師等이니라.
임제종
본사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33세인 육조혜능 대사 밑에서 바로 전해졌으니 남악회양, 마조도일, 백장회해, 황벽희운, 임제의현, 흥화존장, 남원도옹, 풍혈연소, 수산성념, 분양선소, 자명초원, 양기방회, 백운수단, 오조법연, 원오극근, 경산종고 선사등이다.
33세는 선종의 법맥 계승의 계보를 인도에서의 28조와 중국의 6조를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전등록》에 의하면 33세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1. 마하가섭摩詞迦葉 2.아난타阿難陀 3. 상니화수商那和修
4. 우바국다優婆鞠多 5. 제다가提多迦 6. 미차가彌遮迦
7. 바수밀다婆須密多 8. 불타난제佛陀難提
9. 복타밀다伏馱密多 10. 협존자脇尊者
11. 부나야사富那夜奢 12. 마명존자馬鳴尊者
13. 가비마라迦毘摩羅 14. 용수존자龍樹尊者
15. 가나제바迦那提婆 16. 라후라다羅喉羅多
17. 승가난제僧伽難提 18. 가야사다迦耶舍多
19. 구마라다鳩摩羅多 20. 사야다奢夜多
21. 바수반두婆修盤頭 22. 마나라摩拏羅
23. 학륵나鶴勒那 24. 사자존자師子尊者
25. 바사사다婆舍斯多 26. 불여밀다不如密多
27. 반야다라般若多羅 28. 보리달마菩提達磨
29. 대조혜가大祖慧可 30. 감지승찬鑑智僧璨
31. 대의도신大醫道信 32. 대만홍인大滿弘忍
33. 대감혜능大鑑慧能
육조 혜능대사에게 5대 제자가 있었다.
그중 남악회양과 청원행사가 뒤에 선의 종파를 형성하게 한 제자였고,
그 외 영가진각(永嘉眞覺: ?~713)과 남양혜중(南陽慧忠:?~775)
그리고 하택신회(荷澤神會:670~762)가 있었다.
임제종 계보 스님
① 남악회양南嶽懷讓 : 677~744
육조의 법을 이은 적손嫡孫으로 5년간 육조에게 참학한 후 법을 잇고
남악의 반야사에 머물다 나중에 마조 도일에게 법을 전했다.
청원행사와 더불어 육조의 수제자로 꼽힌 2대 제자라 할 수 있다.
처음 육조를 찾아 갔을 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甚麽物 恁麽來]”하는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8년을 시중한 뒤 나중에 깨달아 육조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② 마조도일馬祖道一 :
조사선의 비조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한주(漢州:四川廣漢)출신으로 속성이 마(馬)씨여서 마대사(馬大師)라고도 한다.
즉심시불(卽心是佛)·비심비불(非心非佛)·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의 화두로 선풍을 크게 떨쳤다.
③ 백장회해百丈懷海 :
복주(福州) 장락(長樂) 출신으로 속성은 왕(王)씨이다.
황(黃)씨라는 설도 있다.
백장산에서 선원(禪院)을 세우고 청규를 제정하여 대중을 이끌고
농사와 선수행을 병행하며 대중을 이끌었다.
④ 황벽희운黃蘗希運 :
복건성 복주(福州) 민현(?縣) 출신이다.
문인인 상국(相國)배휴(裵休)가 집록한 『傳心法要』가 유명하다.
⑤ 임제의현臨濟義玄 ? ~ 867
황벽의 법을 이어 임제종을 연 스님으로
황벽으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 방망이를 맞고
고안대우高安大愚 화상한테 가 깨달음을 얻은 후
황벽회상으로 다시 돌아와 인가를 받고 법을 이었다.
황벽은 임제에게 선판禪板과 궤안几案을 주고 인가를 내렸다.
그 후 여러 선림의 노사들을 방문하여 제방을 유력하다
하북성 정정현의 호타강滹陀江 강변의 작은 원에 머물게 된 인연으로
임제원이라 불려진 게 임제라는 호가 되엇다.
임제가 한창 선품을 드날리며 교화를 펼 때
진주보화鎭州普化나 마곡보철麻谷寶徹 등이
그의 교화를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⑥ 흥화존장興化存槳:?~925 :
임제의 화상에서 시자로 있다
뒤에 삼성三聖의 회상으로 가 수좌가 되어 지냈다.
후에 다시 대각의 회상에 가 깨달음을 얻고
흥화사에서 개당開堂하여 향을 피워 들고 말하기를
“삼성스님은 나에게 너무 무정하였고,
대각스님은 너무 사정을 보아 주었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임제스님에게 공양 올린다”하고 임제의 법을 이었다.
장종莊宗이 그에게 귀의하였으며,
입적한 뒤 광제廣濟 선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⑦ 남원도웅 南院道顒 : 860~930 :
흥화존장의 법을 이어 여주의 남원에서 법을 펴 교화하였다.
혜옹慧顒이라 기록된 곳도 있으며 풍혈연소에게 법을 전했다.
⑧ 풍혈연소 風穴延沼 : 896~973 :
유학자로 있다 출가한 스님으로 처음 천태의 지관을 닦다
남원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그의 법을 이었다.
여주汝州의 풍혈사에서 법을 펴고 교과하다
어느 날 울음을 터뜨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대중이 깜짝 놀아 그 까닭을 물었더니
“임제의 법이 내게 와서 끊어지려 한다” 하였다.
법을 이어 줄 사람이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이때 평소에 《법화경》을 열심히 지송하던 염법화念法華라는 별명을 가진
수산성념이 “저 같은 사람도 스님의 법을 전해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풍혈이 다시 “자네는 법화경에 걸려 있어 곤란하네.” 하였다.
수산이 “법화경을 버리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은 뒤
참선에 몰두하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풍혈의 법을 이었다.
⑨ 수산성념首山省念 : 926~993 :
어려서 출가하여 《법화경》을 열심히 수지 독송하였기 때문에 ‘염법화’라는 별명을 얻었다.
뒤에 풍혈 회상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풍혈이 상단 설법을 하면서 대중에게 물었다.
“세존께서 푸른 눈으로 가섭을 돌아보신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말씀 없이 말씀하신 것으로만 본다면 이는 부처님을 매장하는 것이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크게 깨쳤다.
그리하여 풍혈의 법을 이어 수산에서 개당開堂하여 법을 펴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어느 날 그가 죽비를 들고 말했다.
“이것을 죽비라 하면 부딪치고 죽비가 아니라 하면 등진다.
말해 보시오. 무엇이라 해야 되겠소?”이를 수산의 배촉관 背觸關이라 한다.
⑩ 분양선소汾陽善昭 : 947~1024 :
출가한 후 제방을 순력하며 수많은 선지식을 찾아다녀 무려 71인의 스님을 찾아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나중에 수산성념 선사의 상당법문 상당법문을 듣다 홀연히 깨달아 그의 법을 이었다.
수산의 법문 중에 “코끼리가 다니는 곳에 여우는 발을 못 붙인다[象王行處絶狐蹤]”말을 듣는 순간 크게 깨달았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분주무덕선사어록汾州無德禪師語錄》3권이 있다.
⑪ 자명초원慈明楚圓: 987~1040 :
분양선소의 회상에 가 공부를 하는데
분양이 늘 거친 말을 하면서 제대로 법을 설해 주지 않아
한 번은 자명이 분양에게 법다운 법을 설해 달라 청했더니
벌컥 화를 내면서 “네가 나를 비방하느냐?” 고 쫓아내었다.
자명이 무어라 말을 하려하자
분양이 손으로 자명의 입을 틀어막는 순간 크게 깨쳤다.
그리하여 분양의 법을 잇게 되었다.
그의 제자에 황룡혜남과 양기방회가 나와
황룡파와 양기파를 이루어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⑫ 양기방회楊岐方會:992~1049 :
자명초원의 회상에서 감원의 소임을 맡아 지내다 깨달음을 얻은 후
양기산에 들어가 법을 펴다 또 운개산으로 옮겨 법을 폈다.
그의 법어를 정리한 《양기어록 》2권이 전해진다.
⑬ 백운수단白雲守端 : 1025~1072 :
양기방회의 법을 이어 서주徐州 백운사에서 법을 폈다.
어록인 《백운수단선사광록》이 있다.
⑭ 오조법연五祖法演: 1024~1104 :
35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처음 유식학을 배우다 백운의 회상에 가 선을 참구하였다.
어느 날 백운에게 어떤 스님이 ‘마니주’ 화두에 대한
법을 묻다 꾸중을 듣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게송을 지었다.
산 밑에 한 마지기 묵은 밭이여
손 모아 어르신께 여쭙나이다.
몇 번이나 팔았다 다시 사셨습니까?
솔바람 댓잎소리 못내 그리웠지요.
山前一片閑田地 산전일편한전지
叉手叮寧問祖翁 차수정녕문조옹
幾度買來還自買 기도매래환자매
爲隣松竹引淸風 위린송죽인청풍
오조의 이 송은 매우 격조 높은 선시禪詩로 평가 받는다.
‘마니주’ 화두란 사조師祖라는 스님이 남전 남전에게 물은 것이다.
“마니주를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데 여래장如來藏 속에서 찾는다 하니
어떤 것이 여래장입니까?”
남전이 대답했다.
“내가 그대와 함께 다니는 것이다.”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을 때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또한 그것이지”
“마니주는 어떤 것입니까?”
“가게나, 그대가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군.”
이 말에 사조가 깨쳤다고 전해진다.
오조법연의 밑에
삼불三佛로 알려진 불안청원佛眼淸遠, 불감혜근佛鑑慧懃, 원오극근이 나왔다.
원오를 불과佛果라 불렀다.
⑮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 :
유교의 집안에서 출가한 원오선사는
처음 경전을 보다 환희심이 나
전생부터 자신이 불연이 깊어 출가했다고 생각했다.
처음 교학을 배우다 선사들을 찾아다녔다.
한번은 오조법연에게 가 있었는데
어느 스님이 “부처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고 묻자
원오가 말하기를 “바람이 불어오니 전각殿閣이 시원하구나”하는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오조의 법을 이어 여러 곳에서 법을 펴 교화하였다.
무진거사無盡居士 장상영張商英의 청으로 영천선원靈泉禪院에 있을 때
설두중현雪竇重顯이 지은 《송고백측頌古百則》에 대해 짧은 서론을 붙인 수시와 평가하는 말을 붙인 착어, 그리고 본칙과 송에 대한 해설을 한 평창 평창을 붙여 《벽암록》10권을 만들었다.
벽암이란 그가 거처하던 영천선원의 방장실方丈室 편액이 벽암실이었는데
이에서 이름을 따 《벽암록》이라 하였다.
원래 이 말은 협산선회夾山善會 선사가
자신이 깨달아 읊은 오도송에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푸른 산 뒤고
돌아오고 새는 꽃을 물어다 푸른 바위 앞에 떨어뜨린다
[猿抱兒歸靑嶂後 鳥啣花落碧巖前]’ 글귀 속에 벽암에서 따온 말이다.
《벽암록》외에 그의 법어를 모아 엮은 《원오불과선사어록》20권이 있다.
불과佛果는 송宋 휘종徽宗이 지어준 호이고,
원오圓悟는 남송 남송의 고종 고종이 지어준 호이다.
⑯ 경산종고 徑山宗杲:1089~1163 :
대혜大慧 종고로 많이 알려진 스님은
간화선의 완성자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17세에 출가하여 처음에는 묵조선을 하는 조동종 스님 회상에 있다
원오선사를 만나 깨달음을 얻은 후 새로운 간화선풍을 드날리고자
묵조선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당시의 많은 사대부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선법을 주창했는데
모함을 받아 17년간 귀양살이하기도 했다.
참선에 있어 활구活句를 참구해야 한다는 것의 그의 주장이었으며
묵조선법을 척파했다.
저서로는 《정법안장正法眼藏》6권, 《종문무고宗門武庫》, 《대혜보각선사어록 大慧普覺禪師語錄》30권이 있다.
이 중 《대혜보각선사어록》에 들어 있는 26권부터 30권까지 당시 사대부들과 주고 받은 편지이다.
이를 별도로 엮어 《서장》이란 이름으로 제하여 사집과의 한 과목으로 전통강원에서 학습해 왔다.
《서장》에는 42명과 주고 받은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2) 조동종 법통
曹洞宗 六祖下傍傳이니,
曰靑原行思 曰石頭希遷 曰藥山惟儼 曰雲巖曇晟 曰洞山良价 曰曹山耽章 曰雲居道膺禪師等이니라.
조동종
6조의 밑에서 곁갈래로 전해졌으니
청원행사, 석두희천, 약산유엄, 운암담성, 동산양개, 조산탐장, 운거도응 선사 등이다.
조동종의 이름은 동산양개와 조산본적의 스승과 제자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서 붙인 이름이다. 스승의 이름자가 뒤에 붙은 것은 중국 사람들이 쓰는 음운법칙에 의해 발음상 조자와 동자를 붙여 읽을 경우 조를 앞에 쓰고 동을 뒤에 붙인다는 설이 있어 조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법안문익이 지은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에 조동종이란 이름이 제일 먼저 쓰였다. 육조 밑에서 곁갈래로 전해졌다.는 것은 부처님 이후 삽삼조사 삽삼조다로 이어 내려온 법맥계승의 정통 종손이 아닌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육조혜능 스님의 5대 제자에 남악회양, 청원행사, 영가진각, 남양혜충, 하택신회가 있었는데 선종 법맥의 적손이 남악회양으로 되어 있으므로 청원행사 아래를 방계傍系로 본 것이다.
① 청원행사靑原行思:?~740 :
육조의 인가를 받은 오대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중의 상수로 있었다. 뒤에 고향인 길주吉州 청원산靑原山 정거사靜居寺에서 법을 교화하였는데 육조 입적 이후 많은 남자들이 청원회상으로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② 석두희천 석두희천 : 700~790 :
출가하여 육조스님을 모시고 지내다 육조의 유언으로 청원행사를 찾아가 참구하다 크게 깨치고 청원의 법을 이었다. 뒤에 남악에 가서 큰 바위 위에 절을 짓고 살았으므로 돌에 사는 스님이란 뜻으로 석두스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강서에는 마조가 있고 호남에는 석두가 있다고 할 정도로 두 스님의 법풍이 크게 떨쳤다. 저서로는 《참동계參同契》1권과 《초암가草庵歌》1권이 남아있다.
③ 약산유엄 약산유엄:751~834 :
17세에 출가하여 삼장을 널리 통달하고 계율을 엄격히 지키가 선을 참구하였다. 처음 석두희천을 찾아가 깨달은 바가 있은 후 다시 마조를 찾아가 크게 깨쳐 한동안 마조를 모시고 지내다 다시 석두에게 돌아와 그의 법을 이었다. 풍주灃州의 약산에서 법을 펴고 교화하였다. 당시의 고관이자 유학자였던 이고 이고가 약산을 찾아와 도를 묻고 지은 시가 전해진다.
수행한 몸은 학의 모습과 같고
울창한 송림 아애 두어 개 경을 담은 함이 있네.
내가 와 도를 물으니 다른 말 아니하고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에 있다고 하셨네
鍊得身形似鶴形 연득신형사학형
千株松下兩函經 천주송하양함경
我來問道無餘設 아래문도무여설
雲在靑天水在甁 운재청천수재병
이런 인연으로 이고를 약산의 재가 제자로 보고 있다.
④ 운암담성 운암담성:782~841 :
16세에 출가하여 백장회상에서 20년을 시자로 지내다 백장이 입적한 후 약산에게 크게 깨쳤다. 약산의 법을 잇고 담주潭州의 운암산雲巖山에서 법을 펴고 교화하였다.
⑤동산양개 동산양개:807~869 :
어려서 어머니를 두고 떠나 출가하면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겼는데 그 편지와 어머니가 답한 편지가 《치문》 에 수록되어 있다.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다 남양혜충으로부터 무정설법을 들으라는 권유를 받고 운암을 찾아와 물었다.
“혜충국사께서 무정설법을 들으라 했는데 무정의 설법을 어떤 사람이 듣습니까?”
“무정의 설법은 무정이 듣지.”
“스님께서도 들으십니까?”
“내가 듣는다면 그대는 내 설법을 듣지 못할 것이네.”
이 말에 깨친 바가 있었다. 그 후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크게 깨달아 운암의 깊은 뜻을 알았다. 입적을 하려 할 때 종을 치고 대중에게 작별을 고하려 하자 대중이 통곡을 하므로 울음을 달래고 우치재를 베풀었던 일화도 남아 전한다. 죽을 사람이 살아 남을 사람을 위하여 재를 지냈다는 것이다.
⑥ 조산탐장 曹山耽章:839~901 :
법명은 본적本寂으로 알려져 있다. 탐장은 자라고 한다. 어려서 유학을 배우다 19세에 출가하여 동산에게 의탁하여 공바하다 깨친 바 있어 그의 법을 이었다. 무주撫州의 길수吉水에서 법을 펴고 교화하였다. 동산의 오위 오위법문을 그가 완성하여 조동종의 준칙으로 삼았다. 어록 한 권이 남아 전한다.
⑦ 운거도응雲居道膺: ?~902 :
어려서 출가하여 계행을 잘 닦다가 취미 翠微의 회상에 가 참선을 시작했다. 동산의 소문을 듣고 찾아가 얼마 후에 깨친 바가 있었다. 한때 삼봉암에 있으면서 열흘 동안 공양을 하지 않기에 방장실에 들어온 그를 보고 동산이 그 연유를 물었더니 천신이 공양을 가져다준다 말했다. 이에 동산이 야단을 치면서 “바로 된 줄 알았더니 그 따위 소견을 가지고 있었군. 선한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때는 무엇인가?” 하는 말을 듣고 크게 깨쳤다. 그 후로 천공 天供이 오지 않았다. 강서성 건창의 운거산에서 30여 년간 법을 펴고 교화하였다.
3) 운문종 법통
雲門宗 馬祖傍傳이니,
曰天皇道悟 曰龍潭崇信 曰德山宣鑑 曰雪峰義存 曰雲門文偃 曰雪竇重顯 曰天衣義懷禪師等이니라.
운문종
마조의 곁갈래로 전해졌으니 천황도오, 용담숭신, 덕산선감, 설봉의존, 운문문언, 설두중현, 천의의회 선사 등이다.
운문문언 선사가 창시한 선종의 한 파로 마조에서 갈라져 나온 파이다. 운문문언은 17세에 출가하여 처음 사분율四分律등 율장을 배우다 황벽희운의 법을 이은 목주도명 목주도면에게 가 참구하다가 다시 설봉의존을 찾아가 참구하고 그의 법을 이었다. 그 후 설봉을 떠나 제방을 순력, 여러 선지식들과 교규하다 광동성 조계로 가서 육조혜능의 탑을 참배하고 운문산에 들어가 30여 년을 법을 펴고 교화하였다. 그의 법문을 수록한 어록으로 수견守堅이 엮은 《운문광진선사광록雲門匡眞禪師廣錄》3권이 있다. 운문호병 운문호병, 운문일구 운문일구, 운문일보 운문일보, 운문전수 운문전수, 운문호일 운문호일, 운문참회 등 그와 얽힌 많은 선화들이 《벽암록》, 《선문염속》등에 전해진다.
운문종 계보 스님
① 천황도오天皇道悟:
14세 때 출가하여 했으나 부모가 못하게 해 밥을 굶어 몸이 쇠약해지자 부모가 할 수 없이 출가를 허락했다. 국일도흠國一道欽, 마조도일 등을 참방하다가 석두희천에게 가서 크게 깨쳤다. 석두가 입적하자 탑을 쌓고 떠나 형주 천황사의 옛 터에 절을 크게 짓고 법을 펴며 교화하였다.
② 용담숭신龍潭崇信 생몰연대미상 :
용담스님은 출가 동기가 특이하다. 어릴 때 그의 부모가 천황사 절 근처에서 떡장사를 하였는데 도오선사가 그 절로 오게 되자 그의 집에서 매일 떡 열 개씩을 보내드렸다. 떡을 갖다 주면 도오선사는 꼭 떡 한 개를 남겨 용담에게 먹으라고 되돌려 주었다. 용담이 “왜 내가 갖다 주는 떡을 내게 먹으라고 되돌려주느갸?”고 묻자 도오선사가 “그게 뭐 잘못되었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무언가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이 있어 출가를 했다는 것이다. 출가하여 여러 해 도오선사의 시중을 들며 지내다 하루는 용담이 말하기를 “제가 스님을 모신 지 여려 해 되었으나 공부를 가르쳐 주시지 않아 마음이 답답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도오선사가 “무슨 말이냐? 내가 왜 너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 네가 밥이나 차를 가져오면 내가 먹어 주었고 네가 절을 하면 내가 받지 않았느냐?”고 되물었고 이 말 끝에 용담이 곰곰이 생각는믄 표정을 짓자 도오가 이르기를 “깨닫는 것은 말끝에 바로 깨닫는 것이지 생각해 알려고 하면 벌써 틀려버리는 거야”라고 했다. 이에 용담이 크게 깨달았다.
③ 덕산선감 德山宣鑑:780~865 :
어려서 출가하여 계율을 잘 지키고 경에 밝았다. 특히 《금강경》에 정통해 그때의 사람들이 그를 주금강周金剛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속성 속성이 주周씨였기 때문이다. 그가 금강경에 대한 주소를 지었는데 <청룡소 靑龍疏>라 하였다. 어느 날 그가 걸망에 자기가 지은 <청룡소>를 넣고 길을 가다가 도중에 떡 파는 노파를 만났다. 마침 시장기를 느껴 요기를 하려고 떡을 사 먹으려 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요기를 하는 것을 점심點心이라 한다. 점심하게 떡을 달라 했더니 노파가 물었다. “스님 걸망에 무엇이 들어 있소?” “금강경을 해석한 책이 들어 있소.” 노파가 다시 물었다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다. 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하려고 합니까?”
이 말은 《금강경 》제18분<일체동관분>의 마지막 부분에 설해져 있는 말이다.
이 물음에 덕산이 말문이 막혀 대답을 못했다. 노파가 용담숭신 선사를 찾아가 보라 하였다. 덕산은 노파가 일러준 대로 용담숭신을 찾아갔다. 덕산을 절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담이라 소문이 났더니 용도 보이지 않고 못도 보이지 않는구나.”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이때 바로 용담이 나오면서 “그대가 참으로 용담에 왔네.” 하였다.
그날 밤 방장실인 용담의 방에서 덕산은 밤이 깊도록 법담을 나누다 객실로 돌아가려 하니 밖이 컴컴하여 촛불을 하나 켜주기를 청했다. 용담이 촛불을 켜 덕산에게 내밀기에 덕산이 받으려는 순간 용담이 입김으로 훅 촛불을 꺼버렸다. 이 순간 덕산이 크게 깨닫고 용담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용담이 물었다.
“그대가 무엇을 보았기에 절을 하는가?” 이에 덕산은 “이제부터 다시는 천하 노화상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여 덕산은 용담의 법을 이어 받았다. 다음 날 덕산은 자신이 지었던 <청룡소>를 불에 태워버리고 길을 떠났다.
④ 설봉의존雪峰義存:822~908 :
독실한 불교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오신채를 먹지 않고 불교용품을 좋아했다. 12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사들을 참방하다가 한번은 덕산에게 가 법을 묻다 방망이를 맞고 깨달았다. 그러나 확철대오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는데 사형되는 암두巖頭의 꾸중을 듣다 다시 크게 깨달았다. 복주의 상골산象骨山에 들어가 산 이름을 설봉산雪峰山으로 고치고 40여 년간 법을 펴고 교화했다.
⑤ 설두중현 雪竇重顯:980~1052 :
20세 때 부모를 여의고 출가했다. 지문광조선사를 찾아가 법을 묻다가 한 대 맞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가 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데도 허물이 수미산 같다 한 뜻이 무엇입니가?” 하고 물었을 때 선사가 그를 가까이 오라하고는 한 대 때렸다. 그러자 설두가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 했더니 또 입을 때리는 것이었다. 이때 홀연히 깨달았다는 것이다. 소주 취봉사에 있다가 나중에는 설두산 자성사로 옮겨 법을 펴고 교화하였다. 시호는 명각明覺으로 많은 저서가 남아 전해진다. 《명각선사어록》, 《폭천집瀑泉集》, 《조영집祖英集》, 《염고집拈古集》, 《동정어록洞庭語錄》, 《설두개당록雪竇開堂錄》등이 있다.
⑥ 천의의회 天衣義懷:989~1060 :
어려서부터 고기잡이 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산 고기를 강물에 다시 넣어 주는 등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을 보였다. 출가 후 설두선사를 모시고 살면서 고생을 많이 하였다. 어느 날 설두선사가 말하기를 “이렇다고도 할 수 없고 저렇다고도 살 수 없다. 그러나 또 이렇다고 아니할 수도 없고 저렇다고 아니할 수도 없다”라는 말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천의가 무슨 말을 하려 하자 설두가 몽둥이로 때리며 내쫓는 것이었다. 이렇게 네 번을 내쫓긴 후 한 번은 물지게로 때리며 내쫓는 것이었다. 이렇게 네 번을 내쫓긴 후 한 번은 물지게로 우물물을 길어 오다 물지게가 부러지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설두의 법을 이은 후 천의산에 가 법을 펴고 교화하였다.
4) 위앙종 법통
潙仰宗 百丈傍傳이니,
曰潙山靈佑 曰仰山慧寂 曰香嚴智閑 曰南塔光湧 曰芭蕉慧淸 曰霍山景通 曰無着文喜禪師等이니라.
위앙종
백장의 곁갈래로 전해졌으니
위산영우, 양산혜적, 향엄지한, 남탑광용, 파초혜청, 곽산경통, 무착문희 선사 등이다.
위앙종 계보 스님
① 위산영우潙山靈佑:771~853 :
제자 앙산과 더불어 위앙종을 개창한 스님은 처음에는 백장의 제자였다. 15세 때 출가하여 항주抗州 용흥사龍興寺의 법상法常에게 율을 배우고 23세 때에 백장스님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참구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한겨울 밤에 백장이 거처하는 방장실에 들어가 법을 묻는데 백장이 화로에 불이 있느냐고 물었다. 위산이 화로를 이러 저리 뒤졌으나 불씨가 보이지 않아 불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백장이 몸소 화로를 뒤져 불씨 하나를 찾아내고는 이게 불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는 말에 크게 깨달았다. 이를 계기로 백장의 법을 이어 후에 호남성湖南省 담주潭州 장사부長沙府에 있는 대위산大潙山으로 들어가 절을 짓고 40여 년간 법을 펴면서 선풍을 드날렸다. 상국 相國 배휴裵休가 선사를 참방하고 법을 물었으며, 배유의 묘가 대위산에 있다 뒤에 나라에서 대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앙산, 향엄, 영운 등 뛰어난 제자가 있었으며 《치문》에 수록되어 있는 <위산경책潙山警策>과 <어록語錄> 등이 남아 전한다.
② 앙산혜적 仰山慧寂:803~887 :
17세에 출가하여 남양혜충의 제자 탐원 耽源을 참방하고 혜충국사의 원상圓相을 전해받고 위산에게 참문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위산에게 참부처가 있는 곳을 물었다.
“생각해도 생각할 수 없는 미묘한 이치로 신령스러운 불꽃을 돌이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근원에 돌아가면 본성과 현상이 그대로 있고 본질과 현상이 둘이 아닌 그곳에 참부처가 그대로 있으니라[以思無思之妙 返思靈燄之無窮 思盡還源 性相常主 理事不二 眞佛如如]” 라고 위산이 말해 주는 데서 크게 깨달았다. 강서성江西省 대앙산大仰山에서 오래 교화하였다. 지통智通이란 시호를 받다.
③ 향엄지한香嚴智閑:?~986 :
처음 백장스님 문하에서 도를 배우다 뒤에 위산에게 가 참학하였다. 위산이 묻기를 “평생에 보고 들은 것을 떠나 네가 세상에 나오기 전의 네 본래면목에 대하여 한 마디 일러보라” 했다. 이 말의 대답을 찾으려고 여러 책을 뒤졌으나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위산에게 보고 들은 것을 제외하고는 말할 수가 없으니 가르쳐 달라 청했다. 위산은 “내가 말하는 것은 내 소견이지 너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하였다. 그는 답답하여 울면서 위산을 떠났다. 그 후 남양혜충 국사의 유적이 있는 곳으로 가 지내게 되었는데 하루는 운력공동작업이 있어 대중과 함께 일을 하다고 돌멩이를 하나 주워 던졌는데 마침 대밭으로 날아가 대에 부딪쳐 “딱!” 하고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이를 두고 향엄격죽香嚴擊竹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는 게송을 지어 읊었다.
한 번 부딪치는 소리에 알던 것 다 잊으니
더 이상 닦으려 할 것도 없네.
활달한 모습 옛길에 드날리고
말초적 신경 반응이 없구나.
아무데도 자취를 남기지 않으니
소리와 색깔 밖의 동작이런가?
온 곳의 도를 통달한 사람들은
모두들 제일 높은 기틀이라 하네.
一擊忘所知 일격망소지
更不假修治 갱불가수치
動容揚古路 동용양고로
不墮悄然機 불타초연기
處處無踪跡 처처무종적
聲色外威儀 성색외위의
諸方達道者 제방달도자
咸言上上機 함언상상기
④ 남탑광용南塔光涌:850~938 :
유년시절에 독서를 좋아해 유전 유전과 불경을 많이 읽었다. 《유마경》을 배우고 19세에 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 앙상에게 참학하고 심인心印을 얻어 그의 법을 이었다. 남탑사에서 오래 머물며 법을 폈으므로 남탑이라 불린다. 태어났을 때 집 안에 이상한 광명이 비치가 마구간에 있던 말이 놀라 울었다. 그리하여 빛이 솟아나왔다는 뜻의 용광이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⑤ 파초혜정芭蕉慧淸:생몰연대 미상 :
신라 태생으로 당에 들어가 18세에 남탑에 가서 광용의 상단법문을 듣다가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5년 동안 남탑사에 머물다 그 뒤에 파초산으로 가 법을 펴고 교화하였다.
⑥ 곽산경통霍山景通:생몰연대미상 :
앙산에게 등나무 주장자로 네 차례 얻어맞고 깨달았다. 그리하여 스스로 “집운봉 아래에서 등나무 주장자 네 번 맞은 천하에 븐 부처[集雲峰 下四藤條 天下大仙佛]”라 하였다. 앙산의 법을 잇고 곽산에서 교과하다 죽을 때 들판에 마른 나무를 쌓아 스스로 불을 붙여 불 속에 들어가 몸을 태웠다.
⑦ 무착문희無着文喜:820~899 :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출가하여 처음에는 계율을 익히다가 중간에 청량국사 징관에게 화엄 교의를 배웟다. 그후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서원을 세워 오대산까지 들어갔으나 문수의 화현이 나타났는데고 알아보지 못했다 한번은 가마솥에 팥죽을 쑤어 주걱으로 죽을 젓다가 솥 안에서 보살이 나타났는데 이것을 보고 “문수는 문수요, 무착은 무착이다. 무슨 상관이야?” 하고 주걱으로 뺨을 때렸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앙산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의 법을 이었다. 입적하고 난 뒤 당 소종昭宗이 무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5) 법안종 법통
法眼宗은 雪峰의 傍傳이니,
曰玄沙師備 曰地藏桂琛 曰法眼文益 曰天台德韶 曰永明延壽 曰龍濟紹修 曰南臺守安禪師等이니라.
법안종
설봉의 곁갈래로 전해졌으니
현사사비, 지장계침, 법안문익, 천태덕소, 영명연수, 용제소수, 남대수안 선사 등이다.
법안종 계보스님
① 현사사비玄沙師備 : 835~908 :
30세에 출가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정진하였다. 바위 밑이나 산꼭대기 등지에서 좌선에 몰두, 혼자 공부하여 깨친 바가 있었다. 또 《능엄경》을 보다 깨친 바도 있었다 하며, 설봉의 법을 이은 뒤에슨 매계梅鷄의 보응원普應院에서 법을 펴다 복주의 현사산으로 옮겨 주석하면서 법을 펴 교화하였다.
② 지장계침地藏桂琛:867~928 :
어려서 특이한 데가 있었다. 채색으로 하루 한 끼만 먹고 지냈다. 20세에 출가 처음 계율을 숭상하다가 나중에 몸을 구속하는 것이 해탈을 얻는 지름길이 아니라 생각하고 선을 참구하기 시작, 먼저 설봉을 찾아갔으나 얻는 바가 없었다. 그후 현사사비를 찾아가 깨달음을 얻고 그의 법을 받아 이은 뒤 민성閩城의 지장원地藏院에서 18년을 머물다가 장주 장우의 나한원羅漢院으로 옮겨 법을 펴고 교화하였다. 그래서 그를 나한선사라고도 불렀다.
③ 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 :
어린 나이인 일곱 살에 출가하여 계율ㅇ르 닦고 경서를 배우고 시문에도 능했다. 그가 깨달음을 얻은 계기는 계침을 만나면서였다. 행각 도중에 폭우를 만나 지장원에 들어가 피해 있던 중 계침이 이것저것 질문을 하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법안이 비가 멎자 인사를 드리고 절을 나오려는데 계침이 마당가에 있는 돌멩이 하나를 가리키면서 “삼계가 오직 마음이라 하니, 이 돌이 마음속에 있는가? 마음 밖에 있는가?” 하고 물었다. 법안이 대뜸 “마음 안에 있지요” 하고 대답했더니 “행각하는 사람이 마음속에 돌을 넣어 가지고 어떻게 다닌단 말인가?” 하였다. 이 말에 대답을 못한 법안이 걸망을 도로 내려놓고 지장원에 달포를 남아 머물면서 여러 가지로 자기의 소견을 계침에게 말했다. 그때마다 계침은 “불법은 그런 것이 아니야”라는 말만 했다. 답답해진 법안이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말해버렸기 때문에 무어라 말씀 드릴 수도 없습니다.” 했다. 이때 다시 계침이 “만약 불법을 말하자면 모든 것이 눈앞에 그대로 다 이루어져 있다네” 하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법안이 크게 깨달았다. 계침의 법을 이어 받고 임천臨川의 숭수원崇壽院과 금릉金陵의 보은선원報恩禪院, 청량사淸凉寺 등지에서 법을 펴고 교화하였다. 그의 법을 이은 사람이 63인이나 되었으며, 그 가운데 고려의 도봉혜거道峰慧炬국사와 영감靈鑑선사가 있었다.
④천태덕소天台德韶:891~972 :
15세에 출가하여 18세에 구족계를 받고는 여러 선지식들을 찾아 다녔다. 무려 54인의 선사들을 찾아다니며 법을 물었다 한다. 나중에 법안 회상에 가 있게 되었는데 법을 묻는데 진력이 난 뒤라 찾아가 법을 묻지도 않고 대중과 어울려 지내다 하루는 법당에 들어가 법안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다. 어떤 스님이 법안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계의 한 방울 물입니까?” 그러자 “이것이 조계의 한 방울 물이니라”하고 법언선사가 말했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덕소가 이 말을 듣는 순간 크게 깨달았다. 이후 법안의 법을 잇고 천태산으로 들어가 지의대사의 유적을 정리하고 오래 머물렀다. 천태산에서 지의대사의 유업을 기리며 중국의 천태 종지를 부흥하고자 힘쓰기도 했다. 고려 충의왕에게 사람을 보내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에서 구해 가져왓던 천태학 서적을 다시 빌려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송 태조 개보開寶 5년972년에 82세로 입적하였다. 법을 이은 제자가 100여 명이나 되고 그중 보문희변普門希辯에게서 고려의 혜홍慧洪선사가 법을 이었다.
⑤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
어려서 출가하여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리 생활을 하다가 28세 때 출가, 취암영참翠巖令參에 의해 득도得度하여 스님이 되었다. 천태덕소의 법을 이어 법안종의 3세가 된 후 설두산 자성사資聖寺, 또 영은사靈隱寺, 영명사靈明寺, 그 뒤 정자사淨慈寺 등으로 옮겨 다니며 법을 펴고 교화하였다. 선과 염불을 겸수하라고 권장하였고 자신이 직접 행도염불行道念佛을 하였다. 정토종에서 7조로 받들었고 자씨 慈氏의 하생下生이라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고려에서 36명이 그에게 유학하여 법을 배웠다. 100권에 달하는 대부작 《종경록》을 지었으며 그 외에도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유심결唯心訣》등이 있다.
⑥ 용제소수龍濟紹修 생몰연대미상 :
법안문익과 함께 나한계침에게 참학하여 계침의 법을 이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남방에 있다가 처음 계침을 찾아갔을 때 계침이 물었다. “남방의 불법을 어떤가? 우리가 여기서 농사지어 주먹밥을 먹던 것과 다르던가?” 용제가 대답했다. “그러나 삼계를 못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하니 “자네가 무엇을 가지고 삼계라 하는가?” 이 말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이후 무주의 용제사에서 교화하며 머물렀다.
⑦ 남대수안南臺守安 생몰연대 미상 :
계침의 법을 잇고 강주 江州 오공원悟空院에 있다가 뒤의 형악衡岳의 남대사에서 교화하였다.
(2) 5종 가풍(五宗家風)
1) 임제종 가풍
臨濟家風은 赤手單刀로 殺佛殺祖하며,
辨古今於玄要하고, 驗龍蛇於主賓이라.
操金剛寶劍하여 掃除竹木精靈하고,
奮獅子全威하여 震裂劒狸心膽이로다.
要識臨濟宗麽아?
靑天에 車轟霹靂이요, 平地에 起波濤로다.
임제가풍臨濟家風
맨손에 칼 한 자루 들고서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인다.*
삼현(三玄)·삼요(三要)**로써 고금의 진실을 판별하고
사빈주(四賓主)로써 용과 뱀***을 가려낸다.
금강보검을 쥐고서 나무에 붙어사는 귀신[竹木精靈]을 쓸어 없애고,
사자의 온전한 위세를 떨치며 여우의 간담을 찢는다.
임제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마른하늘에 벼락치고 펀펀한 땅에 물결을 일으킨다.****
* “그대들이 법과 어긋나지 않는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다만 남들에게 미혹당하지만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무엇이건 만나기만 하면 곧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며,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야
비로소 해탈을 얻어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모든 것을 뚫고 벗어나 자재하게 될 것이다.”
(『臨濟語錄』
爾欲得如法見解, 但莫受人惑.
向裏向外, 逢著便殺.
逢佛殺佛, 逢祖殺祖, 逢羅漢殺羅漢, 逢父母殺父母, 逢親眷殺親眷,
始得解脫, 不與物拘, 透脫自在.)
** 임제의현(臨濟義玄)이 학인을 지도하기 위한 방법으로 설한 것.
삼현은 체중현(體中玄:조금의 꾸밈도 없이 본체 그대로의 깊은 도리를 나타내는 구절)·
구중현(句中玄:언어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그 속에 담긴 현묘(玄妙)한 뜻을 나타내는 구절)·
현중현(玄中玄:모든 상대적 논리와 어구에서 벗어난 구절)을 말한다.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에 의하면 삼요 가운데 제1요는 분별하거나 조작하지 않은 언어, 제2요는 있는 그대로 현요(玄要)에 들어가는 것, 제3요는 언어문자를 떠난 것을 말한다. “임제에게는 4빈주·4료간·4할·3현·3요 등의 선법이 있다.”(『五家語錄』 「序」 卍119 p.1007a18. 臨濟, 有四賓主, 四料揀, 四喝, 三玄, 三要.)
*** 탁월한 자와 평범한 자.
**** 『人天眼目』 권2 「臨濟門庭」및 「要訣」 참조
2)조동종 가풍
曹洞宗은 權開五位하여 善接三根하며,
橫抽寶劍하며 斬諸見稠林하며,
妙協弘通하여 截萬機穿鑿이로다.
威音那邊에 滿目煙光이요,
空劫已前에 一壼風月이로다.
要識曹洞宗麽아?
佛祖未生空劫外에 正偏不落有無機로다.
방편으로 오위설(五位說)*을 열어 상·중·하 세 근기에 적절하게 응대하며,
보검을 마음대로 빼어들고 무수한 무명의 견해**들을 베어버리고,
본분에 잘 맞추어 널리 통하게 하며 갖가지 실마리를 가지고
파고드는 온갖 분별[穿鑿]을 끊어버린다.***
위음왕불도 출현하기 이전에 눈앞 가득히 펼쳐진 가물가물한 광경이며,
공겁 이전의 호리병 속 풍경이로다.
조동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부처와 조사가 태어나기 이전의 공겁까지 벗어난 소식이니,
정위나 편위 중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고
유와 무를 자유롭게 오가는 기틀이다.****
*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가 학인을 가르치기 위해 제창한 설.
조산본적(曹山本寂 840~901)이 동산의 이 오위설을 이어받아 새로운 비유로써 다시 밝힘으로써 조동종의 표준이 되었다.
오위에는 정편오위(正偏五位)와 공훈오위(功勳五位)가 있는데,
정편오위는 정중편(正中偏)·편중정(偏中正)·정중래(正中來)·편중지(偏中至)·겸중도(兼中到) 등의 다섯 가지이다.
정(正)은 음(陰)으로서 진여의 본체 또는 무차별·평등·정(靜)·공(空)·이(理) 등을 가리키며, 편(偏)은 양(陽)으로서 차별·동(動)·용(用)·색(色)·사(事)·생멸의 현상 등을 나타낸다.이 두 가지가 서로 의지하며 지위를 바꾸어 다섯 가지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공훈오위란 향(向)·봉(奉)·공(功)·공공(共功)·공공(功功) 등인데, 중생에게 본래부터 불성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고서 그 불성을 사무쳐 통달하고자 하며[向], 그 불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하며[奉], 불성을 깨닫고[功], 불성이라는 무차별의 평등과 함께 차별의 세계를 인정하며[共功], 다시 그것까지 넘어서 차별된 색 그대로 모든 것에 자재한 평등의 경지[功功]를 말한다.
** 조림(稠林).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우거진 숲이란 뜻으로 사견(邪見)·번뇌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방편으로 오위설을 열어 상·중·하 세 가지 근기에 적절하게 응대하고, 하나의 소리를 크게 떨쳐 널리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이끌었다. 보검을 마음대로 뽑아들고 모든 무명의 견해들을 베어버리고, 본분에 잘 맞추어 널리 통하게 하며 갖가지 실마리를 가지고 파고드는 온갖 분별[穿鑿]을 끊어버렸다.
또한 조산본적을 제자로 얻으니 그가 종지를 깊이 밝혀 아름다운 불도를 묘하게 드러내었다.
그 도는 군신(君臣)의 관계와 일치하였고, 편과 정이 서로 지위를 바꾸며 의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동산의 현묘한 선풍이 세상에 퍼지게 되었으므로 제방의 종장들이 모두 함께 그들을 추존하여 조동종이라 하였다.”
(『禪宗正?』 권7「洞山良价章」
權開五位, 善接三根, 大闡一音, 廣弘萬品. 橫抽寶劒, 剪諸見之稠林, 妙?玄通, 截萬端之穿鑿.
又得曹山, 深明的旨, 妙唱嘉猷.
道合君臣, 偏正回互. 由是, 洞上玄風, 播於天下, 故諸方宗匠, 咸共推尊之, 曰曹洞宗.)
**** 『洞山良价語錄』 『人天眼目』 권3 「曹洞宗」 五家宗旨纂要』 『禪宗正?』 권7 「洞山良介章」 이하 참조.
3)운문종 가풍
雲門宗은 劍鋒에 有路하고, 鐵壁에 無門이라.
掀翻露布葛藤하고, 剪却常情見解라.
迅電도 不及思量하고, 烈燄이 寧容湊泊가?
要識雲門宗麽아?
拄杖子가 跋跳上天하고, 盞子裡에 諸佛이 說法이로다.
칼끝에 오히려 살아날 길이 있고 철벽에는 파고들어갈 문이 없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말들을 뒤집어 엎어 드러내고
고착된 범상한 견해들을 여지없이 잘라내 버린다.**
번개같이 빨라서 사량 분별로는 미칠 수 없고,
불길처럼 거세게 타오르니 어찌 한곳에 안주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운문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주장자는 하늘 높이 뛰어오르고 잔 속에서는 여러 부처가 설법한다.***
* 『人天眼目』 권2 . 판본에 따라서는 ‘劒’자가 화살 ‘전(箭)’자로 된곳도 있다.
** “비은통용(費隱通容)이 말했다.
‘목주가 은산철벽의 경계에서 운문을 쥐어틀어 뚫고 들어가도록 했기 때문에 운문은 기상을 얻었는데 왕과 같이 자유자재하여 비교할 상대가 없었으며, 몸은 북두(北斗)에 숨기고 홀로 동산을 거니는 듯한 경지였다. 또한 사람들을 대하여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말들을 뒤집어엎어 드러내고 고착된 범상한 견해들을 여지없이 잘라내 버렸다.
격외의 경지에서 풀어줬다 사로잡았다 하고 말을 내뱉기도 전에 바로 빼앗으니 상근기의 날카로운 그릇이 아니면 누구도 그와 비슷한 경계조차 엿볼 수가 없었다.
진실로 목주의 독기를 깊이 받았기 때문에 남들을 가르치는 수단도 대단히 매서웠다.’”
(『祖庭鉗鎚錄』
通容曰, ‘睦州向銀山鐵壁, 令雲門?入, 故雲門得, 氣宇如王, 自在無比, 藏身北斗, 獨步東山.
乃至爲人, 打?露布葛藤, 剪却常情見解.
格外縱擒, 言前定奪, 非上根利器, 莫能窺其彷彿.
眞爲受睦州毒氣深, 而爲人手段辣也.’)
*** 『人天眼目』 권2 「雲門門庭」
(4) 위앙종 가풍
潙仰家風은 師資唱和하고 父子一家로다.
脇下에 書字하니 頭角이 崢嶸하고,
室中에 驗人하니 獅子腰折이라.
離四句하고 絶百非하여 一搥粉碎하니,
有兩口로대 無一舌이라 九曲珠通이로다.
要識潙仰宗麽아?
斷碑는 橫古路하고, 鐵牛는 眠少室이로다.
스승이 부르고 제자가 화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일가를 이룬 격이다.①
옆구리에는 글자를 새기고② 머리에는 뿔이 높이 솟아났으며,③
방안④에서 학인을 점검하면⑤ 사자의 허리마저도 끊어진다.⑥
사구(四句)도 여의고 백비(百非)⑦의 방법도 버리고 한 방으로 모두 부숴버리며,
두개의 입에 혀 하나도 없이⑧ 굽이굽이 구슬을 잘도 꿴다.
위앙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조각 난 비석은 옛길에 나뒹굴고, 무쇠소는 소실에서 잠을 잔다.⑨
① 위앙부자(潙仰父子). 위산(?山)과 앙산(仰山)은 부자와 같이 친밀한 사제의 관계로 가르침을 주고받았기에 이렇게 부른다.
“스승이 부르고 제자가 화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일가를 이룬 격이다. 밝음과 어둠 그 어디로나 걸림 없이 통하지만 말로도 침묵으로도 드러내지 않는다〈위앙의 가풍〉.”
(『人天眼目』 권6 大48 p.331a21. 師資唱和, 父子一家. 明暗交馳, 語默不露 〈?仰〉.);
“위앙종풍은 아버지와 아들이 일가를 이루듯이 스승이 부르고 제자가 화답하였다. 말로도 침묵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밝음과 어둠 어디로나 자재하게 통하고, 체와 용을 모두 드러낸다. 혀 없는 사람이 종지를 드러내려 하니 원상을 그려 밝히는구나.”
(『五家宗旨纂要』 권하 潙仰宗風, 父子一家, 師資唱和. 語默不露 , 明暗交馳, 體用雙彰. 無舌人爲宗, 圓相明之.)
② 위산영우(?山靈祐)가 입적한 뒤 ‘위산승모갑(?山僧某甲)’이라는 다섯 글자를 새기고 물소로 태어나 이류중행(異類中行)을 실천할 것이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위산이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노승은 백 년 뒤에 산 아래에서 한 마리 물소로 태어날 것이다. 왼쪽 옆구리에는 「위산승모갑(潙山僧某甲)」이라는 다섯자가 씌어 있을 것이다.
그때에 「위산스님!」 하고 부르면 「물소요」라고 답할 것이요,
「물소야!」 하고 부르면 「위산 스님 아무개」라 답할 것이다.
말해 보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앙산이 나와서 절을 올리고 나갔다.”
(『潙山靈祐語錄』
師上堂云, ‘老僧百年後, 向山下, 作一頭水?牛. 左脇下書五字云, ?山僧某甲.
當恁?時, 喚作?山僧, 又是水?牛,
喚作水?牛, 又是潙山僧. 畢竟喚作甚?卽得?’ 仰山出禮拜而退.)
③ 두각쟁영(頭角?嶸). 뿔이 두드러지게 높이 솟아났다는 말. 뛰어난 인물 또는 영웅호걸을 비유하기도 한다.
④ 실중(室中). 선문(禪門)에서 법을 전하고 받을 때 스승의 방에서 스승과 제자가 직접 마주하고 불법의 비결(秘訣)을 은밀히 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⑤ 실중험인(室中驗人).
“‘위앙의 종지는 어떤 것입니까?’
‘위앙의 가풍은 기용(機用)이 원융하고 스승의 방 안에서 스승이 제자를 직접 마주하고 점검하여 비결을 전하니 그 비결의 구절은 호랑이를 함정에 빠뜨릴 만하다.’”
(『萬法歸心錄』 권하
問, ‘如何是?仰宗?’
答曰, ‘?仰家風, 機用圓融, 室中驗人, 句能陷虎.)
⑥사자요절(獅子腰折). 위산과 앙산의 다음 문답에 근거한 말이다.
“앙산이 위산문하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척천태상좌가 물었다.
‘터럭 한 끝에 사자가 나타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백억 개의 터럭 끝에 백억의 사자가 나타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앙산이 곧바로 소를 타고 돌아가 버렸다. 위산을 모시고 있던 차에 전날의 이 이야기를 여쭙기를 막 마치자 태상좌가 오는 것이 보였다.
앙산이 말했다. ‘바로 저 상좌입니다.’
위산이 마침내 물었다. ‘백억 개의 터럭 끝에서 백억의 사자가 나타난다는 말뜻을 물은 사람이 상좌가 아닌가?’
‘맞습니다.’
‘바로 이렇게 나타났을 때는 터럭 전에 나타난 것인가, 터럭 후에 나타난 것인가?’
‘나타났을 때는 전과 후를 갈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위산이 크게 웃었다.
앙산이 ‘사자의 허리가 끊어졌구나’라 하고 곧장 내려와 떠났다.”
(『仰山慧寂語錄』
師在?山, 牧牛時. ?天泰上座問云,
‘一毛頭師子現卽不問. 百億毛頭, 百億師子現, 又作?生?’
師便騎牛歸. 侍立?山次, 擧前話方了, 却見泰來.
師云, ‘便是這箇上座.’
?山遂問, ‘百億毛頭, 百億師子現, 豈不是上座道?’
泰云, ‘是.’
師云, ‘正當現時, 毛前現毛後現?’
泰云, ‘現時不說前後.’
?山大笑.
師云, ‘師子腰折也.’ 便下去.)
⑦ 모든 부정적 형식의 언어 또는 사유분별을 가리킨다. 또는 무한부정(無限否定)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구백비(四句百非) 또는 이사구절백비(離四句絶百非) 등과 같이 사구와 짝이 되어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비에 대하여 이렇게 일(一)·이(異)·유(有)·무(無) 등의 네 글자를 소재로 밝히면 다음과 같다.
일(一)·비일(非一)·역일역비일(亦一亦非一)·비일비비일(非一非非一) 등이 첫 번째 사구이며, 이(異) 등 나머지 세 글자도 이 예를 따르면 모두 16구절이 된다.여기에 다시 과거·현재·미래가 각각 16구절이 되므로 모두 48구절을 이룬다.또한 이미 일어난 것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 각각 48구절이 되어 모두 96구절을 이룬다.
아울러 근본의 사구를 합하면 모두 백비를 이룬다.
그러나 지나치면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총괄해서 말하면 일·이·유·무 등 사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간략하게 이것으로써 백비를 밝힌 것이다.”
(『起信論疏筆削記』 권4 大44 p.318b6.
百非者, 此於一異有無等, 四字上明之.
謂一非一, 亦一亦非一, 非一非非一, 爲一四句, 異等, 例此共成十六.
又過現未來, 各有十六, 成四十八.
又已起未起, 各四十八, 共成九十六.
幷根本之四, 都成百非.
然, 過雖無量, 總而言之, 不出一異等四.
是故, 約此以明百非.)
⑧ 양구무일설(兩口無一舌). 양구일무설(兩口一無舌)이라고도 한다.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입 어느 쪽에도 혀가 없다는 뜻으로서 서로의 뜻을 주고받는 데 말이 어떤 도움도 되지 않으며, 또한 두 사람의 물음과 대답이 말을 넘어서서 하나가 되어 있음을 뜻한다.
양구일설(兩口一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하고 있는 말은 달라도 그 뜻은 같다는 뜻이다.
“앙산은 사람과 상황에 적절하게 대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종문의 표준으로 삼았다. 다시 동평산(東平山)으로 거처를 옮겨 입적하려 할 즈음에 몇몇 학인이 곁에서 시봉하고 있었다.
그때 앙산이 게송으로 읊었다.
‘여러 제자들이여,
똑바로 보고 다시 우러러 살펴라.
입은 둘이나 혀는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종지이다.’”
(『仰山慧寂語錄』
師, 接機利物, 爲宗門標準. 再遷東平, 將順寂, 數僧侍立.
師以偈示之云,‘一二二三子,
平目復仰視.
兩口一無舌,
卽是吾宗旨.’)
⑨ 위앙종에 대한 오조법연(五祖法演)과 설당도행(雪堂道行)의 평가를 취한 말.“위앙종:오조는 ‘조각 난 비석이 옛길에 나뒹군다’고 하였고,
수산(首山)은 ‘서로의 기틀이 암암리에 원만하게 합하였다’고 하였고,
정당(正堂)은 ‘눈앞에 다른 길은 없다’라 하였고,
호국(護國)은 ‘앞으로 밀지도 않지만 뒤로 물러나지도 않는다’고 하였고,
설당은 ‘뿔 없는 무쇠소가 소실에서 잠을 잔다’고 하였다.”
(『人天眼目』 권6 「五宗問答」
?仰宗:祖云, ‘斷碑橫古路.’
山云, ‘暗機圓合.’堂云, ‘目前無異路.’
國云, ‘推不向前, 約不退後.’
雪云, ‘無角鐵牛眠少室.’)
(5) 법안종 가풍
法眼家風은 言中有響하고, 句裡藏峰이라.
髑髏는 常干世界하고 鼻孔은 磨髑家風이라.
風柯月諸는 顯露眞常하고,
翠竹黃花가 宣明妙法이로다.
要識法眼宗麽아?
風送斷雲歸嶺去하고
月和流水過橋來로다.
말 속에 여운이 남아 있고, 구절 속에 칼날이 감추어져 있다.*
청정한 의식[??]**으로써 항상 세계와 접하고, 코로 가풍을 모색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달빛 드리운 물결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진심(眞心)을 드러내고,
푸른 대나무와 노란 꽃도 미묘한 진리를 분명하게 나타낸다.
법안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바람은 조각구름을 불어 산 너머로 돌려보내고,
달은 흐르는 물에 섞여 다리 아래를 지나네.
*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고 색을 보고 마음을 밝힌다. 구절 속에 칼날이 감추어져 있고 말 속에 여운이 남아 있다.〈법안의 가풍〉”
(『人天眼目』 권6 「圓悟五家宗要」
聞聲悟道, 見色明心. 句裏藏鋒, 言中有響.〈法眼〉)
** 촉루(髑髏)는 해골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현상과 접하면서도 번뇌의 물이 바싹 메마르고[乾] 망상의 때가 깨끗이 씻겨나간 청정한 법신(法身)을 뜻한다. 해골의 눈·귀·손발에 대한 세 가지 문답으로 조동종의 종지를 드러낸 ‘동종삼문답’에 촉루의 뜻이 잘 드러나 있다.
“동종삼문답:
‘해골의 눈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눈을 깜박여 보지 않아도 사방의 세계가 온통 밝게 빛난다.’
‘해골의 귀란 무엇을 말합니까?’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원만한 음성이 또렷하다.’
‘해골의 수족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팔을 흔들지 않아도 허공을 흔들어 부수고,
다리를 움직이지 않아도 사해(四海)·오악(五嶽)을 차서 뒤집는다.’
해골이란 메마르고 청정한 몸이니 법신의 일을 밝히는 것이다.
대답한 뜻은 어떤 것인가?
비록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타파한다는 뜻이다.”
(『五家宗旨纂要』
洞宗三問答:
‘如何是??眼?’
答云, ‘目不瞬四維洞照.’
‘如何是??耳?’答云, ‘耳不側圓音歷歷.’
‘如何是??手足?’
答云, ‘臂不掉?碎虛空, 脚不動踏?海嶽.’??者, 乾淨之體, 明法身邊事也.
答意如何?
謂雖不著一切, 而能破一切也.)
*** 콧구멍(본분)으로 호흡을 하며 냄새를 맡듯이 가풍을 모색한다는 말. 『景德傳燈錄』 권21 「白龍道希傳」, 『雪竇語錄』 권4등에 나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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