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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도피처
True Refuge
타라 브라크
[4]
참 도피처로 가는 세 통로
때로 너는 문을 통해서 너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물에서 나온 고기처럼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네가 깊이 사랑하는 그것을 향한 돌아섬이 너를 구원하느니. -루미
영성의 오솔길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참 도피처로 가는 길을 당신 스스로 찾을 수 있다고 믿게 해주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있는 바로 거기에서, 당신 삶의 한복판에서, 당장 출발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당신 발밑에서 토대가 심하게 흔들려도, 당신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는 상실을 경험해도, 여전히 당신은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고 그런 당신을 믿을 수 있다. 본디 당신 안에 있는 영원한 사랑과 알아차림에 닿아있는 당신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
인류역사를 돌아보면, 깨어남으로 가는 길 위에 거듭거듭 나타나는 세 가지 원형적인 통로가 여러 종교전통들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에게는 이 세 통로의 내용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가 ‘진실’(truth), ‘사랑’(love) 그리고 ‘알아차림’(awareness)이다. 현재 순간에 계시된 살아있는 실재(living reality)가 ‘진실’이다. 자기가 모든 생명하고 연결되어 있음 또는 하나임을 감지(感知)하는 것이 ‘사랑’이다. ‘알아차림’은 모든 경험 뒤에 있는 고요한 깨어있음(silent wakefulness), 지금 이 글을 읽고 소리를 듣고 무엇을 느끼고 지각(知覺)하는 의식(consciousness)이다. 이 통로들이 저마다 우리의 참 자아를 이루는 근본 요소들이며 우리의 참 도피처다. 언제나 여기 있고 우리 존재 속에 깊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불도(佛道)에 친숙한 사람이면 전통적인 불교 서원(誓願)에 이 세 통로가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붓다님(‘깨치신 이’ 또는 우리 안에 있는 순수한 알아차림)께 귀의합니다.
법(현재 순간의 진실, 가르침, 길)에 귀의합니다.
상가(영성의 길을 가는 도반들 또는 사랑의 공동체)에 귀의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내 경험에 비추어 세 통로의 순서를 좀 바꿔야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재 순간의 진실에 접속하는 것이, 또는 사랑에 깨어나는 것이, 내면의 도피처로 가는 첫 번째 통로다. 보통은 진실과 사랑의 통로에 먼저 익숙해진 다음 형태 없는 알아차림(붓다)으로 가는 길을 탐색한다. 물론 세 통로들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했든지 때가 되면 저절로 다른 통로들과 이어질 것이다. 그것들은 서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다.
힌두교도 이 통로들이 교리의 중심을 이루는데 산스크리트어 ‘사트’(sat, 궁극의 진실 또는 실재); ‘아난다’(ananda, 사랑 또는 행복); ‘치트’(chit, 의식 또는 알아차림)에 그 내용이 담겨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에서도 아버지(근원 또는 알아차림); 아들(형체를 갖춘 알아차림); 성령(사랑,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의 삼위일체 하느님한테서 같은 것을 본다.
이런 말들이 매일매일 힘겹게 살아야 하는 당신에게 가서 닿을 수 없는 뜬구름처럼 들리는가? 어떻게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이 통로에 들어설 것인가? 다시 보면 이 모든 도피처들이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는 것이 보인다. 주변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치유와 영감의 원천들이 바깥에 있는 도피처들이다. 우리는 지혜로운 스승의 가르침(진실)에서 배울 수 있고 선한 친구와 도반들의 따뜻한 보살핌(사랑)을 먹고 자랄 수 있으며 영적 지도자들의 모범(알아차림)에 의하여 높이 오를 수 있다. 모든 종교 전통들이 이런 바깥 도피처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런데 바깥 도피처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이것 말고 또 있다. 순수한 알아차림, 진실과 무한 사랑이 살아서 흐르는 내면의 도피처로 들어가는 현관문이 그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참 본성인데 우리가 그 안에 거하면 자신이 동떨어진 존재라는 미망(迷妄)이 부서지고 우리는 자유다.
진실의 통로
초기 불경의 언어인 팔리어로 ‘다르마’(dharma)는 길, 법 또는 사물의 본성을 의미한다. 불교 스승들이 법당에서 법문(法問)을 베풀 때, 다음 세 가지 경로로 진실의 도피처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1)명상수련으로 내적 삶에 충실함. (2)지혜롭고 윤리적인 행위에 헌신키로 결심함. (3)자기를 영성의 길로 안내하는 가르침과 진리를 이해함.
[명상: 진실에 깨어남]
당신은 건강강좌나 심리치료학 세미나 같은 데서 마음 모으기 수련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목적을 지니고 무엇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놀라운 발견이라 하겠다. 수련을 막 시작한 초보자들도 번잡한 생각에서 깨어나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모음으로써 맛보게 되는 고요한 평안을 경험할 수 있다.
내가 지도하는 수요일 밤 명상교실에 참석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건강문제 때문에 왔다가 자기들이 발견한 다른 효과에 스스로 놀라워한다.
테란스는 워싱턴의 고등법원 판사다. 그는 재판정에 모여드는 군중과 매일같이 목격해야 하는 고통 받는 사람들 때문에 질식할 것 같은 심정일 때가 자주 있었다. 그 모든 번잡한 상황에서 숨 쉴 공간을 찾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가 내게 물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숨 쉴 공간”이라는 말에 힌트를 얻어, 호흡을 닻으로 삼는 매일 명상수련을 권하면서 비록 근무 중이라도 잠시 일을 멈추고 호흡을 지켜보면 속에서 고요한 평안이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테란스는 수련에 성의를 보였다. 법관들이 주로 나오는 수련모임에 참석하여 하루에 삼십 분씩 명상을 계속했다. 과정을 마치고 나를 다시 찾아온 그가 웃으며 말했다. “타라, 효과가 있어요. 하지만 처음에 기대한 대로는 아닙니다. 내가 좀 더 조용해진 건 사실이지만 다른 뭐가 있어요. 요 며칠 법정에 오는 사람들이 나한테서 존중 받아 마땅한 ‘진짜 사람’들로 바뀌었고,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들 모두가 근본바탕에서 ‘나와 다른 누구’가 아닌 겁니다.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인간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요.”
명상의 대중적인 효과는 구체적이고 방대한 것이지만 붓다에게는 그보다 근본적인 의도가 있었다. 마음 모으기로 참 자아가 누군지 그 진실을 곧장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테란스는 세상과 자기가 자비와 연민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체험으로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윤리: 진실에 발맞추어 살기]
티베트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마음은 하늘처럼 넓고 매일의 행동은 모래알처럼 조촐해야 한다고. 이 가르침에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남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에너지를 발산하고 땅과 사물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자신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주변 세계에 파문을 일으킨다는 근본 진실이 담겨있다. 매순간 선택하는 말과 행위가 자기 미래를 결정하는 씨앗이 된다. 이 진실을 기억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우리 가슴과 머리를 참된 도피처로 들여보내는 관건이다.
다른 많은 영적 스승들이 그랬듯이 붓다도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경외를 가르치면서 그것들을 해치지 말라고 했다. 살생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속이지 말고 술 취하지 말고 성행위로 남을 해치지 말라는 계명 외에 자비롭게 살고 생명을 보살피고 너그럽게 처신하고 진실을 말하고 몸과 마음을 챙기고 모든 인간관계를 존중하라고 했다.
나는 이 가르침을 생명선으로 삼고서 거친 세파를 헤치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나와 함께 명상을 공부하는 매니는 소프트웨어 상품을 개발하는 팀의 리더였다. 젊은 남녀로 구성된 그의 팀에서 창의적이고 기발한 상품들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회사 중역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명상 중에 본인의 행동을 성찰하다가 강한 자괴심이 느껴졌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한테로 돌아가야 할 영예와 신용을 자기 것으로 돌렸으니 결국 세상을 속이고 남의 것을 훔친 셈이었다. 여태까지 무엇이 진실인지를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자기를 본 것이다. 이 깨우침이 있은 뒤로 그는 자기 팀원들과 상급자에게 돌아가야 할 명예를 가로채지 않았다. 그러자 머리가 더욱 맑아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친구가 하루 종일 거짓말하고 훔치고 사람을 때리다가 집에 돌아와서 평화로이 명상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폭력적인 행동은 곧장 우리 신경계와 기분에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삶은 우리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고 만족스럽게 해준다. 비록 우리 안에 있는 지혜와 자비에 충분히 연결되지 못했어도 그렇게 하려는 의식적인 노력만으로도 우리는 삶의 균형을 이루고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남을 해치지 않겠다는 서원(誓願)이 누구를 해치거나 술을 너무 마셨을 때 자기를 벌주겠다는 약속은 아니다. 오히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자기한테서 무슨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성찰하겠다는 약속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의도를 깊이 강화시킬 때 우리는 본디 우리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에 연결된다.
[진실에 대한 가르침들: 진실인 것 받아들이기]
20년쯤 전, 가까운 친구와 남부 버지니아에서 열린 베트남 스님 틱낫한의 수련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모임을 마치는 시간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파트너를 선택하라고 그리고 그를 껴안아주라고 말했다. 나는 내 친구를 선택하였다. 그의 말은 그냥 껴안으라는 게 아니었다. 세 번 마음 모아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자기 파트너를 껴안는데, 첫 번째 숨을 쉬면서 “나는 죽어가고 있다”고, 두 번째 숨을 쉬면서 “당신은 죽어가고 있다”고, 세 번째 숨을 쉬면서 “우리는 지금 아주 값진 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고 속으로 말하라는 것이었다. 천천히 포옹을 풀면서 나와 친구는 눈물 글썽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틱낫한은 그렇게 멋진 방법으로 우리를 참 도피처까지 데려다주었다.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자기에게 안정과 즐거움을 주리라고 기대되는 것들은 움켜잡으면서 고통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려는 성향이 우리 존재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내 친구 폴은 결혼생활 이십 년을 움켜잡으려는 성향에 묶여 살았다. 바깥의 다른 사람들한테는 무척 개방적인 그가 아내 카렌 앞에서는 꽉 막혀 있는 자신을 느껴야 했다.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있기보다는 고양이나 자기 시(詩)하고만 있으려 하지요.” 상처받고 화가 나서 그는 아내가 자기를 포기했고 그래서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다가 카렌이 성장한 딸을 방문하러 집을 비운 어느 주말에 그는 깜짝 놀랄만한 진실을 깨달았다. “오랜 세월 그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고 그러면 우리 관계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카렌은 천성이 그런 사람인데!” 자기와 카렌이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친밀한 부부관계를 맺을 수는 없겠다는 진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가 자기 상처와 외로움에 자기를 열어놓고 그것들을 받아들이자 그만큼 카렌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관계가 차츰 편안해졌고 둘 사이에 정직, 상호존중, 신뢰가 두터워졌다. 폴이 내게 말했다. “우리가 갈라서기로 결정한 것은 서로 싸워서가 아니라 피차 정직했고 …그리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뭔가 아쉬운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서로 상대방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사랑을 멍들게 한 오랜 세월이 참으로 가슴 아프군요.”
진실의 통로를 지나갈 때 우리는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무엇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피동적인 체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용감하게 대면하고 그 실상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실상이 우리가 좋아하는 게 아닐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자애로운 현존 안에서 그것을 용납할 수가 있다. 현존 안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그만큼 우리의 안목은 맑고 명료해진다. 그리하여 생각, 느낌, 감각들의 변화무쌍한 연극 너머로 건너가서 우리 내면의 진정한 도피처―모든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behold) 안아주는(enfold) 부드러움과 열려있음―를 발견하는 것이다.
사랑의 통로
수련공동체는 하나의 아름다운 도피처일 수 있고 진정한 도피처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도 있다. 불교 전통에서 ‘상가’(sangha, 僧家)는 본디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는 남녀 수도자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늘 서양에서는 ‘상가’의 폭이 넓어졌다. ‘상가’나 다른 수련공동체가 일반 사회조직들하고 다른 점은 특별한 가치관을 공유하며 영적인 깨달음을 위한 의전(儀典)과 수련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상가’들 가운데 하나로 AA(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의 ‘열두 단계 그룹’을 들 수 있겠다. 거기에 속한 멤버들은 중독에서 헤어나 좀 더 나은 인생으로 바뀌기 위하여 서로를 돕고 있다.
종교마다 자기네들의 영적 공동체가 있다. 하지만 당신이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들어가야만 ‘상가’에 속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 명상수련센터에는 여러 종파에 속한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드나든다. 20여 명으로 구성되는 작은 그룹들(‘칼랴나 미타’라고 부르는)이 여러 개 있는데 가르침을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이 그룹에는 누구든지 관심 있는 사람이면 들어올 수 있다. 십대 아이들과 젊은이들, 유색인종들, 중독자들,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같은 특수 계층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룹도 있다.
물론 우리는 어느 한 단체에 속하지 않고서도 ‘상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여러 가지 수련 경험들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생일이나 결혼 잔치에서 기쁨을 함께 나눌 때, 사랑하는 이를 여읜 자리에서 함께 슬퍼할 때, 병들어 아픈 사람을 위로하고 도와줄 때, 어려운 일 당한 사람 곁에 있을 때, 그럴 때 우리는 가슴을 열어놓는다. 이런 절실한 순간마다 우리는 ‘작은 자아’ 너머에 있는 ‘참 나’를 흘낏 본다.
사랑의 도피처는 나에게 준열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다가온다. 아픈 친구 곁에 말없이 앉아있을 때, 남편 조나단이 형편없는 내 컴퓨터 솜씨를 도와줄 때, 사람들이 둘러앉아 눈물을 보이며 서로 고민을 나눌 때, 그럴 때 나는 사랑의 도피처를 만난다. 공동의 목적으로 사람들과 함께 작업할 때, 글을 쓰거나 수학문제를 풀거나 요리를 할 때 또는 작지만 구체적으로 지구별을 도울 때 ‘나’라는 존재에 대한 감각이 느슨해지면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된다. 나는 나보다 큰 무엇의 한 부분으로서 더 이상 분리된 자의 두려움과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모든 멤버들이 친절하고 사려 깊고 관대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우리 센터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영성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모임일 따름이다! 그들은 함께 명상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판단하고 무식하게 행동하고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것을 보면 실망하여 고개를 돌린다. 그러면서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한테도 실망하고 낙심한다.
하지만 누구를 비난하거나 자기를 방어하는 버릇이 나올 때도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도반들과 함께 나누면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수련공동체가 진실한 깨어남의 현장인 참 도피처로 되는 것이다.
내게 상담하러 오는 대학교 상급반 찰리는 어머니한테 무시당하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으며 자랐다. NA(Narcotics Anonymous, 익명의 마약중독자들)에 들어갔을 때 그는 과연 후견인이 자기를 잘 돌봐줄 것인지 다른 멤버들이 자기를 받아들여줄 것인지 그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나는 찰리에게 단순히 마약을 끊기 위해서만 단체에 참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라고 격려했다. 몇 달 뒤, 그가 내게 와서 마침내 진정한 가족을 찾았다고 말했다.
찰리처럼 밖에서 겉돌며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통제가 안 돼서 남들과 가까이 지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자기-방어적이어서 남들과 자주 다투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 안에도, 친밀하고 순진한 인간관계를 맺을 잠재력은 있고 수련으로 그것을 드러낼 수 있다.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음 모아 현존하는 법을 배워 익힐 때 피차 친절로 대하고 함께 깨어있기로 서약한 공동체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
영적인 벗들과의 사귐은 겉치레 위안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 깊어서 그런 게 있는 줄도 잘 모르는, 자기가 ‘분리된 존재’라는 착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깨어있는 인간관계는 자기가 쓸모없고 동떨어진 존재라는 저변의 느낌과 함께 자기가 자기보다 큰 무엇의 한 부분이라는 진실에 빛을 비춰준다. 우리의 진정한 공동체가 다른 존재들을 모두 포용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 생명 그물망에 자기가 소속되어 있음을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영적 벗들이 무조건 사랑의 참된 도피처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알아차림의 통로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남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자 바깥세상으로 나갔다. 그의 환하게 빛나는 얼굴과 평화로운 거취에 사람들이 놀랐다. 그중 하나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천상의 존재입니까? 아니면 신입니까?” 붓다가 답했다. “둘 다 아니오.” 그가 또 물었다. “성자 아니면 현인입니까?” 붓다가 답했다. “아니오.”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럼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붓다가 답했다. “나는 ‘깨어남’(awake)이오.”
나는 특별한 사건인 것처럼 보이는 ‘영적 깨어남’이 본디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임을 상기시켜주는 이 이야기를 자주 한다. 싯다르타 고타마는 사람이었다. 신이 아니었다. 불자(佛者)들이 역사적 실존인물인 붓다―그 이름의 문자적 의미가 ‘깨어남’인―에 귀의할 때 그들은 자신의 해탈을 스스로 실현한 동료인간의 영감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싯다르타는 육신의 아픔과 질병을 겪었고 내적인 고뇌와 번민도 경험했다. 붓다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용감한 구도행각과 영원한 자비에 대한 깨달음을 묵상함으로써 같은 사건이 자기들한테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믿게 된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예수나 다른 종교의 스승들을 묵상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은 모든 존재가 우리도 깨달을 수 있음을 믿게 도와준다. 당신은 이미 현명한 교사들이 있는 바깥 도피처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여든 여섯인 우리 숙모는 소아혈관질환을 앓았는데 중학생 때 의학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여자 몸으로 의과대학에 들어가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지만 열성적인 교사 한 분이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메시지 한 마디를 던져주었다. “네 지성을 믿고 네 호기심을 빛나게 하렴!”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위한 수련모임 지도자인 나의 흑인 친구는 시민운동 리더이자 관용과 유머와 지혜의 모범인 교회 목사한테서 자신의 도피처를 발견하였다. 나는 나에게 처음 명상을 가르쳐준 스티븐한테서 도피처를 찾았다. 명상에 대한 그의 지극한 열정과 사랑과 친절한 태도가 나로 하여금 영성의 길을 갈망하도록 도와주었다. 우리가 스승을 믿고 따르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깨달음의 가능성을 그들이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씨앗을 움트게 하고 그것이 자라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인 것이다.
10년쯤 전에 나를 인도해주는 존재를 상상하는 명상을 시도해보았다. 나는 그를 ‘거룩한 어머니’(성스러운 모성)라 부르고 그가 나를 환한 빛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보았다. 그러자 광활한 밝음이 느껴졌다. 나는 계속해서 거룩한 어머니 가슴이 따뜻한 감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마지막으로 그 부드럽고 밝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깨어있음이 어떻게 내 안에 살아있는지를 보려고 내면에 마음을 모았다. 이윽고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해맑은 하늘(sky)이 가득 차서 세포와 세포 사이 공간으로 빛을 비추는 것처럼 몸과 정신과 마음이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명상으로 바깥 도피처와 안의 도피처를 두루 탐색해보는 순간을 경험하였다. 내 안에 있는 성스러운 현존에 접촉함으로써 ‘참 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졌다. 참 자아를 깨치면 자기 안에 있는 잠재력이 살아난다. 스스로 만든 이야기들과 변덕스러운 감정으로 살아가는 ‘작은 자아’보다 훨씬 더 신비스럽고 큰 존재가 진정한 자기인 것을 직관(直觀)하게 된다. 이렇게 자기 안에 있는 ‘깨어있음’에 마음 모으는 법을 터득할 때 우리는 시공간에 갇히지 않는 ‘밝음’이 곧 자기 자신임을 알아보게 된다. 이 순수한 깨어있음의 내적 도피처에 이르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 귀향(homecoming)이다. 이것이 영성수련의 열매요, 우리 인생에 참된 아름다움과 의미를 안겨준다.
지금 거기에서 시작하라
이 길에 들어선 지 오래 되었거나 이제 막 들어섰거나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 가장 좋은 때임을 직관할 필요가 있다. 자라온 환경과 내력에 따라서 당신은 이미 바깥 도피처를 찾았을지 모르겠다. 어느 종교에 몸담았을 수도 있고 주말 명상 프로그램이나 다른 영성수련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어디에서 출발했든지 어느 도피처를 만났든지 간에 지금 당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거기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도피처로 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착각은 자기가 지금 (여기 아닌)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그래서 뭔가 다른 존재로 바뀌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의 참 도피처는 우리 바깥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어느 때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이미 여기에 있다. 다음 장에서 거듭 확인하게 되겠지만 ‘진실’(truth)은 이 순간을 살아있음, 그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사랑’(love)은 지금 그리고 여기 바로 이 가슴에서만 경험될 수 있다. ‘알아차림’은 우리 속마음의 공간과 깨어있음을 발견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명상 실습: 가장 중요한 것 기억하기]
우리는 우리 중심(heart, 가슴)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진실, 사랑, 알아차림의 도피처를 향하여 돌아선다. 그 어떤 명상 테크닉보다 우리를 깨어나게 하고 우리 영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스즈키 선사(禪師)의 말마따나 “가장 중요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가장 깊은 염원을 알고 그것에 연결되는 데는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양파 껍질 벗기듯이 우리는 자신의 근원인 ‘참된 염원의 빛’(the light of pure aspiration)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욕망과 두려움의 층들을 벗겨내야 한다. 마침내 자신의 참된 염원 안에 머물게 될 때 우리 중심에 있는 나침반이 우리를 집으로 인도한다.
§
편히 앉아서 호흡으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킨다. 지금 마음상태가 어떤지 있는 그대로 살펴본다. 가슴이 열려있는가? 아니면 닫혀있는가? 느슨한가? 아니면 팽팽한가? 평안한가? 아니면 불안한가? 만족한가? 아니면 불만족한가? 지금 당신한테 뭔가 중요하고 특별한 관심사가 있는가? 격한 감정이 있는가? 있으면 있는 대로 저를 표현하게 놔두어라. 어쩌면 당신 파트너가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당신한테 있을 수 있다. 만성통증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마음 또는 당신 자녀 가운데 누가 좀 더 상냥하고 예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당신 안에 있을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두고 당신한테 진지하게 물어보라. “내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줄까?” 상대방이 당신을 좀 다르게 대해주면 당신이 짜증을 덜 내고 더 자상해질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당신이 만성통증에서 해방되면 더 알차게 인생을 즐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될 것이다.
이렇게 탐문을 계속하다가 당신은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내 중심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가?” 또는 이렇게 물어봐도 좋다. “이번 생(生)에서 무엇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가?” 혹은 “내가 임종을 앞두고 돌아본다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할 때 당신이 당신 중심에 직접 묻고 있음을 실감(實感)하라.
이렇게 물은 다음에는 어떤 말이나 형상이나 느낌이 떠오르든지 그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들을 눈여겨보라. 참고 기다려라. 우리 마음이 생각하는 버릇에서 벗어나 가장 진실하고 살아있는 것에 닿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당신은 여러 번 되풀이하여 “내 중심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는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귀를 기울이는 동안 당신 몸 특히 가슴의 느낌에 닿아있어야 한다.
당신의 염원이 때를 따라서 다르게 저를 나타낼 수 있다. 당신은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염원할 수도 있고 진리를 알아서 평화롭기를 염원할 수도 있다. 남을 잘 도울 수 있기를 바랄 수도 있고 두려움이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옳은’ 염원은 없다. 때로 자신의 염원을 이루기 위하여 당장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당신한테 가장 중요한 무엇에 당신의 모든 것을 조율하는 일이다.
자신의 진정한 염원에 접속되면 저절로 에너지와 의욕이 샘솟는다. 자기한테 새로운 해결책과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내적인 전환이 느껴졌다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나는 게 없을 수도 있다. 괜찮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무엇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다음 기회로 미룰 수도 있다.
뭔가 진정하고 깊은 본인의 염원이 생각나거든 그 염원 속에 계속 머물러 있어라. 그 염원이 당신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드는 것을 상상으로 그려보라. 당신의 염원으로 하여금 당신의 깨어있는 가슴이 드리는 기도가 되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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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명상을 시작할 때 또는 명상을 마칠 때 당신의 염원을 묵상하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짬을 내어 무엇이 당신한테 가장 중요한지를 스스로 물어보라. 당신한테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에 와 닿는 순간 참된 도피처에서 오는 축복을 향하여 당신 가슴이 활짝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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