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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단강 도하
여호수아 3;1-17
서 론 이 설교 준비하면서 다시 이스라엘 광야 40년 말씀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출애굽 했던 장년세대가 거의 다 광야에서 죽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로 놀랄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제게는 새로운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영적 출 애굽한 신자라 할지라도 광야에서 죽을 인생이 많구나 하는 사실이 실감으로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제목은 요단강 도하입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철저하게 양육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스라엘의 요단강 도하는 광야생활을 졸업하고 새 시대를 향하여 출발하는 첫 역사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내가 건너야 할 요단강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1) 죽음의 요단 강 2) 대한민국에 오는 민족적 환난의 요단강 3) 세계적인 대 환난의 요단강(짐승정권 통치)
광야생활 끝까지 승리해야합니다. 실패자들 보십시오 출애굽부터 실패자가 있습니다. 유월절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다. 그리고 홍해바다서 실패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난관 앞에 원망하는 자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세례의 의미대로 살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 외 광야에서 애굽을 동경하고 지도자를 원망한 자들입니다.
요단강 도하의 복을 함께 하려면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새 출발하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수아는 참으로 큰 복이었습니다. 모세의 시종으로 철저하게 훈련받은 지도자이기 때문에 요단강 도하는 성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은혜림 교회 목사가 복 있는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끝까지 잘 훈련받은 목사가 되도록 기도할 필요가 절대 있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입니다.
지도자에게 절대 복종하는 백성들이 되어야 요단강 도하에 성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비록 모세는 죽었지만 하나님이 새로 세우신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함으로 넘실거리는 요단강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라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믿음으로 요단 강 물에 발에 담글 때 강물이 갈라지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때의 장면을 보게되면 4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앞에 놓고 좌충우돌 혼란에 빠지거나 지도자를 원망하는 모습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광야 40년 동안 철저한 복종과 겸손을 배웠고 말씀의 실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법궤의 실상이 내 안에 있어야 요단강 도하에 성공합니다. 상기와 같은 이스라엘의 요단강 도하를 보면서 이 시대 광야생활을 하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귀중한 섭리는 무엇입니까? 이 시대도 과거나 역사 최종말 같은 단체적인 혹은 민족적인 요단강 도하는 없을찌라도 각 개인이 건너야 할 요단강 도하는 반드시 있습니다. 이 땅에도 있고, 이 땅의 삶을 마칠 때도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성도 한 인생이 그 삶을 마치면서 건너는 요단강은 죽음 그 자체가 최후의 요단강입니다. 이 강을 건너지 않고는 결코 영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신자는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을 두려워하다가 숨을 거두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한 평생을 살은 광야생활의 실패자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감사로 맞이해야 할 죽음의 요단강을 불신과 두려움으로 맞이하는 신자는 가장 중요한 순간 그에게는 법궤가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보혈의 신앙이 강을 건너게 하고 부활의 신앙이 강을 건너게 하며, 생명의 법으로 살았던 신앙이 강을 건너게 하는 필수적 요소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강 앞에서 그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기막힌 영적현실은 그로 하여금 두려움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제 성도의 승리신앙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광야생활도 하지만 한 평생 삶속에 주시는 가나안 정복의 삶도 살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광야로만 헤메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빨리 끝내야 합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처럼 사흘 만에 끝냅시다. 시간적으로 40년이 나에게 꼭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 6:2)
과거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듯이 오늘 우리들은 법궤의 실상이 되는 신앙으로 내가 건너야 할 강을 건너야 합니다. 법궤가 실체화 된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피로 뿌려진 시은소 아래의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보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 양의 보혈 아래서 말씀의 실체화가 이루어진 신앙, 승리의 부활신앙과 내 심비에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각인된 신앙입니다.(생명의 성령의 법)
과거의 제사장들은 법궤(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넜지만 우리들은 우리들의 영혼 속에 법궤가 실체화 된 영격으로 강을 건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법궤는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당신의 영혼이 어린 양의 피아래(시은소) 법궤의 실체를 믿음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결단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현실의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과 영광을 체험하며 승승장구하는 승리의 생활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 삶을 살다가 인생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죽음의 요단강을 찬송하며 건너는 성도가 됩니다. (찬송 291장)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이제 역사종말의 가나안 땅의 실상이 되는 천년왕국의 입성을 위해 최후의 요단강을 건너야 할 시점에 왔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역사종말의 요단강 도하는 영적의미만은 아닙니다. 실제적 역사로서 과거 옛 시대의 요단강 도하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너무 엄청난 역사가 될 것입니다. 대 환난이나 심판기를 통과하는 자체가 마지막 시대의 요단강 도하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좀 더 구체적인 말씀증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 환난은 역사의 전면만 본다면 분명 죽음의 거대한 강입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이 강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다른 면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의 최고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 강이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계11:3-6절을 보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계 11:6)
"여호와께서 애굽 해고를 말리우시고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서 그 하수를 쳐서 일곱 갈래로 나눠 신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사 11:15)
상기 말씀 속에서 대 환난의 강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온 세계 인류전체를 집어 삼키려는 거대한 강물을 갈라 세우는 위대한 기적이 보이지 않습니까?
역사종말에 등장하는 두 증인은(14만 4천의 집합체=신부들의 집합체) 마지막 시대 주님의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법궤의 실상이 영격으로 완전히 성취된 종들로서 그들은 움직이는 법궤입니다. 말씀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생명의 일체를 이룬 종들이요, 첫째부활에 속한 종들이며, 생명의 성령의 법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진 종들입니다. 그야말로 법궤의 실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그 왕권을 완전히 나타내는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는 곳마다 법궤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로막을 환난의 강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 증인들의 전도를 통해 구원받은 백성들이 보호받는 예비처도 대 환난의 강물 곧 용과 짐승의 입에서 쏟아내는 엄청난 강물도 결코 피해를 주지 못합니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계 12:15-16)
오늘의 교회는 마지막 시대의 거대한 환난의 강을 건널 준비를 해야합니다. 대 환난이 오기 전에 교회는 휴거한다는 세대주의 휴거론에 의지하고 그것을 피난처로 삼는 교회나 신자들은 결코 대 환난의 강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유브라데 강을 건너 아마겟돈까지 건너야만이 가나안의 실상이 되는 천년왕국에 입성을 하게됩니다. 아브라함도 강을 건넜고 이스라엘 백성도 강을 건넜으며 신약교회도 지금까지 강을 건너 생명역사를 흐르게 했습니다. 마땅히 역사종말에도 강을 건너야 합니다.
당신은 대 환난의 강을 건널 준비를 끝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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