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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환경 크로아티아의 국토는 사바(Sava), 드라바(Drava), 다뉴브 강 사이의 지역인 슬라보니아(Slavonia)의 파노니아(Pannonia) 평원으로부터 이스트리아 반도를 지나서 아드리아 해변을 따라 달마티아(Dalmatia) 남쪽까지 부메랑 모양의 곡선을 이루고 있다. 면적은 5만 6538km2이며 한반도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한다. 인구는 476만 명(1991년 기준)인데 그 가운데 86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자그레브(Zagreb)가 수도이다. 크로아티아 해변의 길이는 약 600km이며 마치 까마귀가 날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앞 바다에 있는 섬들은 그리스 섬들과 같이 작지만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섬들은 1185개에 이르며 그 가운데서도 북쪽에 있는 큰 섬은 츠레스(Cres), 크륵(Krk), 로쉬니(Lo午inj), 파그(Pag), 랍(Rab) 등이며 남쪽에 있는 섬으로는 브라치(Bra匸), 흐바르(Hvar), 코르출라(Kor匸ula), 믈례트(Mljet), 비스(Vis) 등이 있다. 또한 중부에 있는 섬으로는 두기 오토크(Dugi Otok)가 유명하다. II. 역사 B.C. 229년 로마인들은 달마티아(Dalmatia)와 살로나(Salona) 등지에 거주한 토착 원주민 일리리아(Illyria)인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 때는 일리리쿰(Illyricum:달마티아와 보스니아 지역)과 파노니아(Pannonia:크로아티아)를 속주로 만들었으며, 로마 제국이 395년에 분열되자 크로아티아는 서로마 제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은 고트족, 훈족, 랑고바르드족(롬바르드족) 등의 침입으로 5세기에 멸망하였고, 그후 625년께 슬라브족의 한 부류인 크로아티아인이 현재의 폴란드 지역으로부터 현재의 지역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그들은 925년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서도 토미슬라프(Tomislav) 공작의 지도에 따라 왕국을 설립하였고 로마 문명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그러다가 1101년에 크로아티아는 비잔틴 제국으로부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헝가리와 통합하였다. 그러나 14세기에 터키인이 발칸 반도로 진출하기 시작한 이래 헝가리가 터키 제국에게 크게 패해 약화되자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로 넘겨졌다. 그후 오스트리아의 크로아티아에 대한 통제권은 1918년까지 유지되었다. 아드리아 해변 지역에도 위협이 끊이지 않았지만 1571년 스페인과 베니스(Venice) 군대가 레판토(Lepanto) 해전에서 터키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그 위협은 훨씬 감소되었다. 베니스는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를 점령하였고, 두브로브니크(Dubrov-nik)는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보스니아 국경선을 따라 보이나 크라이나(Vojna Krajina) 지역에 세르비아인들을 이주시켰는데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통제하에서도 자치 정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797년 베니스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에게 짓밟힌 후 프랑스는 크로아티아 남부를 점령했으며, 1808년에는 두브로브니크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1815년 워털루(Waterloo)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가 패배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아드리아 해변 지역들을 얻기 위해 움직였다. 크로아티아의 정치, 문화 생활의 부활은 1835년부터 시작되었다. 1848년의 민중 봉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이로 인해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1868년 오스트리아로부터 헝가리로 양도된 크로아티아는 헝가리의 슬라보니아와 통합되었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국이 됨에 따라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1929년 이후 유고슬라비아로 불림)'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 때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대항해 1934년, 세르비아계 출신의 왕인 알렉산더 1세를 암살하는 등 강한 저항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1년 3월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함에 따라 크로아티아에는 친나치 우스타샤(Usta午a)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우스타샤 정권은 나치의 학살과 맞먹을 정도의 `인종 청소' 캠페인을 벌여 약 35만 명에 이르는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들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우스타샤 정권의 프로그램은 “세르비아인 가운데 3분의 1 학살, 3분의 1 추방, 3분의 1 기독교 개종”이라 불렸다. 그렇지만 모든 크로아티아인들이 이 정책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으며 티토(Tito)와 같은 인물은 크로아티아 출신이었지만 빨치산 투쟁을 통해 독립 운동을 헌신적으로 펼치기도 하였다. 한편 세르비아인들로 구성된 게릴라들은 우스타샤 정권의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10만 명 이상의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간에는 씻을 수 없는 원한이 맺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의 종결 후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이 설립됨에 따라 연방 내의 공화국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1960년대 유고 연방 내에서도 크로아티아 공화국은 슬로베니아 공화국과 함께 경제적으로 가장 급성장하여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중 1980년 티토가 사망함에 따라 연방 정부의 통제력은 더욱 이완되었고, 1989년 세르비아 공화국의 코소보(Kosovo) 자치주에서 알바니아 소수 민족에 대한 혹독한 탄압은 크로아티아 및 다른 공화국 국민들에게 세르비아 민족의 패권주의에 대한 부활을 연상케 하였다. 이로 인해 크로아티아인들은 완벽한 자치권을 얻을 수 있고, 40년 동안의 공산 통치를 종식시킬 수 있는 호기라고 여겼다. 1990년 4월에 실시된 자유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Hrvatska Demokratska Zajednica:HDZ)은 구공산당에 쉽게 압승했다. 또한 1991년 5월의 국민 투표에서 93%가 독립을 지지하였고, 그해 6월 25일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계는 그들의 집단 거주지인 크라이나(Krajina)에서 크로아티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나섰으며 인종간의 갈등으로 인한 충돌은 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바란야(Baranja), 슬라보니아 등지에서도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계가 주축이 된 유고 연방군은 인종 충돌을 막는다는 구실하에 세르비아 민병대의 공격을 후방에서 지원하면서 그들의 자치권에 대해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EC(유럽 공동체)가 중재에 나섰고, 이를 받아들인 크로아티아는 유혈 참사를 막기 위해 3개월 동안의 독립 선언 유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유고 연방군은 중재자인 척하면서도 부코바르(Vukovar) 근처의 크로아티아 마을들을 공공연히 공습하는 등 내전에 가담하였다. 그러자 같은해 9월에 크로아티아 정부는 군장비를 대거 구입하며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더니 유고 연방군의 주둔군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유고 연방군은 아드리아 해를 봉쇄하기 시작했으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부코바르 지역에 대해 포위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유고 연방군이 크로아티아 마을들에 가한 포격으로 수십만 명의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고, 많은 잔학 행위들이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자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역사적인 도시 두브로브니크도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EC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대한 제재 조치를 취했으며 그후 10여 차례에 이르는 중재 노력 끝에 1992년 1월 3일에는 15번째의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로 인해 유고 연방군은 크로아티아 내에 있는 그들의 기지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크로아티아는 3개월 동안의 독립 유예 기간이 끝나자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EC, 미국 그리고 1992년 5월에는 UN(국제 연합)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크라이나 지역의 UN 평화 계획은 세르비아계의 무장 해제와 피난민들의 귀환, 크로아티아 옛 지역의 반환 등이 제안되었으나 영구적인 해결책을 얻지 못하였고, 크라이나 지역의 세르비아인들은 유고 연방으로부터의 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맹세하고 나섰다. 또한 크로아티아 측에서도 중요 거점 지역에 대해 포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평화 상태는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라 전망된다. III. 정치 독립 이후 세르비아계가 주도한 유고 연방군과 유혈 내전을 겪었던 크로아티아 공화국은 1992년 1월의 휴전 이후 독립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제정된 신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 선거 및 총선을 실시하였다. 현재 암 투병중인 프란요 투즈만(Franjo Tudjman) 대통령은 1992년 8월에 당선되어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으며, 1995년 10월에 실시된 총선에서도 현직 대통령이 이끄는 민족주의 집권 여당인 HDZ이 의회의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IV. 경제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GDP(국내 총생산)는 82.3억 달러(1992년 기준)이며, 1인당 GNP(국민 총생산)는 1700달러이다. 무역 규모는 수출 46억 달러, 수입 45억 달러(1992년 기준)이다. 화폐는 크로아티안 디나르(Croatian Dinar)를 사용하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구유고 연방의 공산 정권이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중공업을 중점 육성시켰기 때문에 알루미늄, 화학, 섬유, 조선 등이 발달해 있다. 오늘날 크로아티아는 세계 3위의 조선국이며 풀라(Pula), 리예카(Rijeka), 스플리트(Split) 조선소가 유명하다. 화학 공업은 크르크(Krk), 리예카, 스플리트, 자그레브에 집중되어 있으며, 공작 기계 제조는 카를로바츠(Karlovac), 슬라본스키 브로드(Slavonski Brod)와 자그레브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전기 공학은 자그레브, 직물은 자그레브와 크로아티아 북서쪽 지역에 발달되어 있다. 한편 크로아티아 석유의 80%가 자그레브 북동쪽 지역의 유정(油井)에서 산출된다. 이 곳은 유고 연방군의 포격으로 시삭(Sisak) 정제소가 화염에 휩싸인 적이 있지만 다행히도 내전의 직접적인 피해는 받지 않았다. 또한 과거 크로아티아 국가 수입의 3분의 1은 관광업이었지만 내전으로 인해 관광객이 크게 감소되었다가 현재는 다시 증가되는 추세에 있다. 크로아티아의 내륙 평원에서는 과일, 야채, 곡물 등이 생산되며(특히 옥수수와 밀) 해변 지역에서는 올리브와 포도가 경작된다.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에서 독립한 이후 구유고 연방의 남부 지역 시장에 대한 손실과 시장 경제 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어려움들이 산재함에 따라 경제가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1993년의 경우 월평균 임금은 125달러였고 인구의 16.9%가 실업자였으나, 1992년 이후 이탈리아, 독일, 슬로베니아가 수출입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시장으로 등장하고 경제 개혁 정책의 성과가 서서히 드러남에 따라 경제가 안정 쪽으로 다시 돌아서고 있다. 현재 크로아티아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 추세(1996년 추정치:6.5%, 1997년 전망치:5.5%)를 시현하고 있고, 인근 체제 전환 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의 인플레율(1996년:3.5%)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수출 여력이나 잠재력이 상당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외채 규모(1996년 6월 기준 총외채:39억 달러)가 비교적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V. 문화와 생활상 1. 언어 크로아티아어는 세르비아어,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 불가리아어처럼 남슬라브어에 속한다. 1991년 이전에 크로아티아어와 세르비아어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Sebo-Croatian)로 묶여 하나의 단일 언어처럼 여겨졌으나 내전의 결과 각 공화국의 언어들로 개정되어 철자와 관용어들이 달라지게 되었다.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세르비아어는 키릴 문자로, 크로아티아어는 로마 문자로 표기한다는 점이다. 2. 민족 크로아티아의 인구는 거의 500만 명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78%가 크로아티아인이며 12%가 세르비아인이다. 소수 민족으로는 슬라브계 무슬림(이슬람교도), 헝가리인, 슬로베니아인, 이탈리아인, 체코인, 알바니아인 등이 있다. 3. 종교와 도시 크로아티아인은 대부분 카톨릭교를, 세르비아인은 세르비아 정교를 신봉하고 있다. 구유고 연방 내의 다른 공화국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인은 특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보이보디나 북부 그리고 몬테네그로의 코토르(Kotor) 만 근처에 있다. 또한 약 230만 명의 크로아티아인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데 미국에 150만, 독일에 27만, 오스트리아에 24만, 캐나다에 15만, 아르헨티나에 15만 명이 있다. 미국의 피츠버그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는 유럽 밖에서 가장 큰 크로아티아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크로아티아 내에서 가장 큰 도시로는 수도인 자그레브(100만 명) 외에 스플리트(30만 명), 리예카(22만 5000명), 오시예크(Osijek:17만 5000명), 자다르(Zadar:5만 명) 등이 있다. 4. 예술 조각가 이반 메쉬트로비치(Ivan Me午trovi :1883~1962)의 작품은 크로아티아 내 도시의 광장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는 공공 기념물 등을 만들었으며 자그레브에 있는 원형의 크로아티아 역사 박물관과 같은 인상적인 건물을 디자인하였다. 그의 조각과 건축은 모두 로댕에게서 습득한 고전적인 자제된 멋을 보여 주고 있다. 5. 음악과 춤 남녀가 원형으로 번갈아 추는 생동감 넘치는 슬라브 원무(圓舞)인 콜로(Kolo)는 집시 스타일의 바이올린 연주자와 5줄을 가진 만돌린 즉 탐부라(Tambura) 연주자의 반주에 맞춰 춤춘다. 달마티아의 율동적인 기타 연주 또는 리드미컬한 아코디언은 이탈리아 풍을 지니고 있다. 6. 관광지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의 수도로서 유럽 문화의 정연한 아름다움이 흐르고 있다. 자그레브에는 두브로브니크 출신의 세계적인 중세 물리학자의 이름을 딴 루데르 보쉬코비치(Luder Bo午kovic) 핵 연구소와 자그레브 국제 박람회가 유명하다. 그 외에 가볼 만한 곳으로는 성 슈테판 사원(Prvostolna Crkva), 토미슬라브 광장(Tomislavov Trg), 즈리니스코 광장(Zriniskoga Trg), 고고학 박물관(Arheolo午ki Muzej), 크로아티아 인민 혁명 박물관(Muzej Revolucije Naroda Hrvatske) 등이 있다. 또한 아드리아 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변일 뿐만 아니라 누드주의자들의 메카이기도 하다. 약 100개 이상의 섬들이 연이어 있으며 많은 누디스트 비치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두브로브니크 앞바다에 표주박처럼 떠 있는 로크룸 섬이 가장 유명하다. 아드리아 해는 따뜻하고 투명해서 수중 낚시와 다이빙을 하기에 이상적인 곳이며, 약 370여 종의 물고기가 서식한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