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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근대
- 일본화된 한국사상사를 넘어서 -
조성환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목차]
I. 들어가며 - 우리의 근대는 어디에 있는가?
II. 본론
II-1. ‘실학’ 개념의 재고
1. 서양화된 조선사상사
2. 일본화된 ‘실학’ 개념
3. 조선시대의 ‘실학’ 개념
4. 실심실학과 영성실학
II-2. 재영성화하는 한국 근대
1. 영성적 근대의 모색
2. 동학의 영성적 민주주의
3. 실학불교로서의 원불교
III. 맺으며 - 비서구 세계의 영성적 근대
I. 들어가며 - 우리의 근대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대개 ‘근대’라고 하면 ‘영성’보다는 ‘이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학교에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이성적 주체’가 근대철학을 열었다고 배우고, 역사책에서 서양의 근대는 정교분리로 시작되었다고 학습된 이래로, 근대는 항상 이성과 동일시되어 왔다. 그리고 이때의 ‘이성’은 ‘서구적 이성’을 의미하였다.
반면에 ‘영성’이라고 하면 반이성적이거나 신비적인 것, 또는 중세적인 것을 연상시키기 십상이고, 따라서 영성과 근대와의 연관성을 묻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이성’ 중심의 서구적 사관으로 우리의 근대사를 서술해 왔는데, 그것이 바로 ‘실학’과 ‘개화’ 담론이다. 즉 조선후기의 개혁적 ‘유학’인 실학파에서 근대적인 특징이 보이고, 그것이 개화파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근대가 과연 ‘우리’의 근대인가라는 데에 있다. 또는 그 근대가 비서구지역의 근대와 동일시되어도 되는가라는 점에 있다. 확실히 한국을 비롯한 비서구지역에서 ‘서양의’ 근대성을 수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서구지역의 근대도 반드시 서양과 같은 이성 중심의 근대로만 진행되었으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서양 중심의 근대사에서 벗어나서 보다 넓게 세계사의 영역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의 근대는 유럽이나 (그것을 수용한) 일본의 근대보다는 오히려 이슬람이나 인도 또는 아프리카나 이란에서 진행된 근대와 유사한 측면이 더 많다. 심지어는 중국의 근대보다도 이 지역들의 근대와 더 친화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 . 바로 여기에 우리가 그동안 근대 담론에서 소홀히 해왔던 ‘영성’이라는 요소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II. 본 론
II-1. ‘실학’ 개념의 재고
1. 서양화된 조선사상사
한국의 근대를 서구의 이성 중심적 근대의 틀로 서술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의 조선학운동에서부터이다. 정인보나 안재홍과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후기 ‘유학자’들을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실학자’로 규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1950년대의 천관우의 ‘삼실론(三實論)’을 거쳐 1970년대에 이르면 이우성이 이른바 ‘삼대실학파’(경세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를 정립하기에 이르고, 이 학설이 이후에 교과서적인 정설로 굳어진다.[주1]
확실히 조선후기의 일부 사상가들에게서 종래와는 다른 일련의 개혁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학 담론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는 과도하게 어느 한 부분만 부각시키면서 나머지 부분은 의도적으로 사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즉 실학자들에게서 보이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측면은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반면에, 그 반대편에 있다고 여겨지는 영성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동학을 서술하면서 신분평등을 주장한 반봉건적인 측면은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것의 바탕에 깔려있는 영성적이고 생명적인 세계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과 유사하다.
이처럼 실학사상이나 동학운동을 서술하는데 있어서 특정 부분만 강조되고 나머지 부분은 무시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간단하다. 서구 근대를 중심으로 한국의 근대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 근대가 영성이나 종교와는 거리를 둔 채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실학자나 동학을 볼 때에도 영성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근대사상사도 종교가 아닌 철학(유학)을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서술 방식은 한국의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계몽주의 역사를 쓰는 것에 다름 아니다.
2. 일본화된 ‘실학’ 개념
이와 같이 서구의 계몽주의 또는 합리주의 역사에 짜 맞추어 조선후기사상사를 서술하는 계기를 간접적으로 제공한 것은 아마도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실학’ 개념일 것이다. 카타오카 류에 의하면, 후쿠자와는 종래의 동아시아적 세계관과 결별하고 서양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새로운 학문 개념을 주창하였는데,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실학’이었다.
그래서 후쿠자와에게 있어서 ‘실학’이란 곧 ‘science’를 의미하고, 그것의 모델은 물리학이었으며, 이러한 학문이야말로 “문명의 학문”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학문관에서는 당연히 유학이나 종교와 같은 종래의 인문학은 적극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그는 “지금의 문명의 학문을 종래의 일본・중국의 학문과 비교하여 양자의 차이점의 요점을 찾으면, 단지 물리학의 기초에 의거하고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에 있다.”(《福翁百余話》「物理學」)고 하면서, 이러한 자연과학을 수용한 문명국 일본이 “문무의 힘으로 이웃 나라들을 보호하고 유도하여, 곧바로 일본처럼 지금의 문명의 경지에 도달시키지 않을 수 없다. 혹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무력으로 그 진보를 협박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福翁百話》「造化と争ふ」)는 일본문명론에 입각한 ‘탈아론’과 ‘침략론’을 정당화하고 있다.[주2]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특징으로 규정되었던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성향”으로서의 ‘실학’ 개념의 원형을 보게 된다. 즉 1930년대의 조선학 운동에서 규정한 ‘실학’ 개념은 그보다 적어도 30여년 전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용하고 있던 ‘실학’ 개념에 이미 단초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학운동 주창자들은, 자신들이 의식을 했던 안 했든지 간에, 후쿠자와의 ‘실학’ 개념으로 조선후기 사상사를 ‘해석’한 셈이 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일본의 근대”를 특징짓는 학문 범주를 가지고 조선후기 사상사를 서술했음을 의미하고, 그 틀이 1세기가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음을 뜻한다.
3. 조선시대의 ‘실학’ 개념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에 사용된 ‘실학’ 개념의 본래 의미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거기에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하는 ‘과학’이나 ‘물리학’으로서의 ‘실학’ 개념은 찾아보기 어렵고, 실천성이나 현실성이 동반된 학문이라는 의미가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이하에서는 대표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실학’ 개념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실학’이라는 말이 총 85회에 걸쳐 나오고 있는데, 조선중기에 해당하는 중종 시대가 제일 많고(23회), 이어서 조선 말기의 고종(11회), 그리고 조선 전기의 세종(10회)과 성종(8회)이 그 다음을 잇고 있다. 반면에 실학 시대에 해당하는 조선후기의 에는 영조 시대가 1회, 정조 시대가 6회에 머물고 있고, 그 의미도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실학’이 아닌 ‘성리학’을 가리키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에 앞서 정미년간에 이상황과 김조순이 예문관에서 함께 숙직하면서 당·송 시대의 각종 소설과《평산냉연》같은 서적들을 가져다 보면서 한가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이 우연히 궁궐에 들어와 있던 주서(注書)로 하여금 이상황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였는데 이상황이 마침 이런 책들을 읽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가져다가 불태우라고 명하고서는 두 사람에게 경전에만 전력하고 잡서는 보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이상황 등이 그때부터는 감히 다시는 패관소설을 보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남공철이 대책(對策)에 소품의 어투를 인용한 것을 보고, 마침내 공함을 보내 그의 답을 아뢰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이가 젊고 재주가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실학에 힘쓰도록 하고 그들이 지향하는 바를 보려 함이었다.[주3]
여기에서 말하는 ‘실학’은 패관소설과 같은 잡서가 아닌 유교(성리학) 경전을 공부하는 학문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용례는 이 외에도 “진재(眞才)와 실학(實學)이 있는지를 타진해본 다음에 안팎의 직책을 제수한다,”[주4] “명실을 따져서 실학인지 분별한다,”[주5] “(임금께서는) 정교(政敎)가 모두 지성(至誠)에서 추진되고 문장도 실학에 근본하시니 성(誠)으로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주6] 등으로 나오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실학’은 정조 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전반에 걸쳐 통용되고 있는데, 가령 세종시대의 중신(重臣) 허조의 말에 나오는 “국학의 유생들이 오로지 사장(詞章)만 익히고 경서(經書)는 읽지 않으니 폐단이 실로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과거 시험에서 강경(講經)하지 않기 때문이니, 만약에 강경법(=경전 시험)을 다시 시행하게 되면 자연히 실학에 힘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주7]라는 용례나,
중종시대에 중종이 “인재는 반드시 학교에서 나오는 것이니 선생이 유능하면 깨우칠 수 있다. 다만 만약에 실학을 숭상하지 않고 한갓 부문(浮文)만을 일삼는다면 학교라고 할 수 없다."[주8]라고 말하거나,
이에 대해 방유녕이 "올해 강경(講經)에서 뽑힌 자가 매우 적은 것은 참으로 실학에 힘쓰지 않은 까닭입니다. 근년에 여러 번 별시(別試)를 행하였으나 모두 강경을 하지 않았기에 한갓 풍운월로(風雲月露)의 글만 숭상하고 실학에 힘쓰지 않습니다. 이제 비록 정시(庭試)를 보더라도 평시에는 유생들로 하여금 실학에 독실하도록 해야 합니다."[주9]라고 말하는 가운데 나오는 ‘실학’ 개념이 그러한 예이다.[주10]
이 외에도 조선의 대표적인 주자학자 율곡 이이도 ‘실학’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의미 역시 “도덕적 실천을 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이상에서 살펴본 조선왕조실록의 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용례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에서 사용된 ‘실학’의 의미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것이라기보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적으로 변용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4. 실심실학과 영성실학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실학’보다 더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실심(實心)’이다. ‘실심’은 ‘실학’의 3배가 넘는 294회의 용례가 보이고 있는데, 그것도 실학의 황금기라고 하는 영정조시대에만 99회가 보이고 있다(그 이외에 고종 시대에는 104번). 이것은 이른바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이 단지 실용이나 실리만 추구한 학자들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바로 여기에 오가와 하루히사나 정인재가 주장하는 ‘실심실학론’의 통찰이 담겨 있다.
오가와 하루히사는 대표적인 실학자로 알려진 홍대용(1731~1783)에게서 보이는 ‘실심’ 개념에 주목하여 조선후기의 실학은, 근대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지향한 것과 같은 ‘실업실학’이 아닌 ‘실심실학’이었다고 주장하였다.[주11] 또한 정인재는 조선의 양명학자 정제두(1649~1736)의 후학들이 자기 스승을 “실심실학의 선구자”라고 평가한 것을 근거로 정제두야말로 최초의 실심실학자였고 하면서, ‘실학’이란 “실심을 가지고 실천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다.[주12]
이러한 ‘실심’ 개념은, 조선후기에 들어서 홍대용이나 정제두와 같이 특정 학파나 당파에 상관없이 두루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빈번히 나오고 있는 “실심으로 실정을 행한다”(以實心行實政)[주13]는 표현을 참고하면, ‘진정성’이나 ‘실천의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것 같다. 또한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알려져 있는 정약용의 “실심사천(實心事天)”[주14], 즉 “참마음으로 하늘을 섬긴다”는 용례에 주목하면, 실심이 ‘영성’과 유사한 의미로도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초월적인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실심인 것이다(정약용에게 있어 ‘하늘’은 유교적인 ‘천’보다는 천주교의 ‘신’에 가깝다). 그렇다면 적어도 정약용에게 있어서만큼은 실심실학은 ‘영성실학’이라고 불러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아가서 유학 또는 성리학 자체가 영성을 추구하였고, 실학자들도 기본적으로 유학자 내지는 성리학자였다고 본다면, 조선후기 실학의 성격을 ‘영성실학’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의 저자 오구라 기조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실학자들은 단순히 물질・현실・실용 중시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성리학이라는 영성적 세계관을 견지하면서 현실개혁을 지행한 학자들이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가장 실리주의적인 실학자였던 박제가조차도 유배 후에는 오로지 성의(誠意)만을 강조했다. ‘이용후생’은 단순히 실리적인 개념이 아니라《서경》「대우모」의 원래 말처럼,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이었다. 그리고 ‘정덕(正德)’이라는 영성적 측면은 결코 부정되지 않았다. 원래 실학을 최초로 제창한 정인보도 양명학자로, 단순히 실리・실용을 중시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주15]
여기에서 오구라 기조가 말하는 성리학적 ‘영성’이란(“성리학이라는 영성적 세계관”), 흔히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초월적 신과 관계하는 신비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천인합일’이나 ‘만물일체’를 지향하는 인간의 성향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경주나 영남지방에는 ‘하늘과 사람은 같다’고 하는 영적인 세계관이나, 대립하는 것끼리 회통시키는 영성이 있고, 이것이 원효나 화랑이나 이퇴계나 최제우라는 형태로 역사의 표면에 때때로 분출하듯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24~5쪽)라고 말하고 있다.[주16]
결국 종래의 실학 담론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된 ‘실심실학론’이 함축하는 것은, 조선후기의 일부 사상가들이 실학이라는 현실개혁을 추구했지만, 그것이 결코 후쿠자와 유키치에서와 같이 도덕이나 영성을 경시한 ‘실용실학’이나 ‘실리실학’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에 두는 ‘도덕실학’ 또는 ‘영성실학’이었다는 사실이다.
II-2. 재영성화하는 한국 근대[주17]
1. 영성적 근대의 모색
이와 같이 이른바 사회적 개혁(실학이나 실용)을 추구하면서도 내적인 영성(실심 또는 정덕)을 강조하는 경향은 이후에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와 그 뒤를 이은 일련의 개벽종교[주18]에 이르면 더욱 강화되게 된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의 수심경천(守心敬天)과 보국안민(輔國安民)[주19], 천도교 이론가 이돈화의 정신개벽과 사회개벽[주20], 대종교의 수전병행(修戰竝行=수행과 전쟁의 병행),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새생활운동 등은 모두 영성수련과 현실변혁을 병행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다만 이들 개벽파가 실학파와 달랐던 점은 실학파가 유학이라는 전통을 놓지 않은 채 그것을 ‘보완’하는 노선을 지향했다고 한다면, 개벽파[주21]는 유학과는 ‘다른’ 세계를 꿈꾸었다는 데에 있다(‘개벽’이란 말 그대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연다”는 뜻이다).
즉 정약용이나 최한기가 서학을 통해 유학의 보완이나 완성을 지향했다면, 최제우나 박중빈(원불교 창시자)은 유학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표현을 빌려 말해보면, 개벽파는 ‘술(述)’이 아닌 ‘작(作)’의 길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개벽파가 기존의 ‘도’를 ‘술’하는 길이 아닌 새로운 ‘도’를 ‘작’하는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른바 “서구의 충격”으로 종래의 중국사상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교적 영성이 더 이상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 일을 담당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점은 개벽파의 효시인 최제우가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용담유사》「「교훈가」)라고 말한 점으로부터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화파처럼 영성에 거리를 두는 서구적 근대의 길을 가는 것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길은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성적 근대’가 아닌 ‘영성적 근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성은 더 이상 중국적 영성이 아닌 한국적 영성에 바탕을 둔, 그런 근대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개벽종교가 하나같이 영성을 훈련하는 독자적인 수양론을 가지고 있는 이유이다. 개벽파는 이러한 영성프로그램을 통해서 사회를 변혁하고 나아가서 서양도 수용하고자 하였다.
2. 동학의 영성적 민주주의
이성이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영성은 세계와 하나되는 능력이다. 이것이 이른바 서양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양의 수양철학과의 가장 큰 차이이다. 서양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데리다는 세상에 본질은 없고 모든 것은 그물처럼 얽혀있다고 보았다. 확실히 이런 세계관은 노장이나 불교와 매우 흡사하지만, 문제는 데리다에게는 수양론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는 점이다.
반면에 장자는 하나의 가치체계를 고집하지 않는 허심(虛心)이나 특정한 아이덴티티를 고수하지 않는 무기(無己)를 말하고 있다(“至人無己”). 즉 세계의 진리와 하나될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의 덕론(德論)과 그 덕을 성취한 자의 경지를 보여주는 성인론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모든 현상은 인연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는 공(空)사상을 말하면서도, 그 공(空)이라는 진리와 하나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론을 수양론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똑같이 해체철학을 설파하고 있지만 동아시아인들에게 데리다가 장자나 붓다와 같은 성인의 이미지로 다가올 수 없는 것은 데리다의 철학에는 영성을 훈련하는 수양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영성과 수양의 전통에 민주주의적 요소가 가미되게 되면 이른바 ‘영성적 민주주의’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동학이다. 동학은 만민이 평등하고 누구나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근대적 민주정신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민주정신의 바탕에 이성과 계약이 아닌 영성과 수양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서구적 민주주의와는 달랐다. 즉 동학은 이성적 민주주의와는 다른 영성적 민주주의를 모색한 것이다.
동학이 제시한 새로운 인간관인 ‘천인(天人)’은 ‘하늘’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영성’에 바탕을 둔 평등한 ‘인민’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유교적 백성과도 다르고 서구적 시민과도 다르다. 하늘과 사람이 결합된 하늘사람(天人)은 신에 종속되는 인간도 아니고 인간에 버려지는 신도 아닌 새로운 신인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동학은 서양과 같이 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인간 안에 신을 끌고 들어옴으로써 영성적 근대를 준비한 것이다.
3. 실학불교로서의 원불교
원불교 역시 동학과 마찬가지로 “민중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의미에서의 개벽을 표방하였는데, 원불교의 특징은 창시자인 소태산이 앞장서서 간척사업이나 협동조합과 같은 경제적 자립운동을 추진했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유병덕은 원불교야말로 ‘실학’이고, 소태산이야말로 실학자라고 말하고 있다.[주22] 조선후기 실학자들처럼 단지 경제개혁론을 집필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민중들과 함께 노동을 하면서 경제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실학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병덕이 말하는 ‘실학’ 개념은 과학성이나 실증성을 기준으로 하는 이른바 서구적 실학이 아니라, 실천성과 현실성을 강조하는 조선적 실학 개념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서구화된 실학 개념이 아닌 조선 유학의 전통에서 사용된 ‘실학’ 개념에 비추어 보면 원불교만큼 실학적인 사상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래의 실학에 대한 이해를 뒤집는 것으로, 실학의 중심을 철학에서 종교로 이동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아울러 유병덕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원불교는 일종의 ‘실학의 민중화’라고 할 수 있고, 조선후기의 실학이 ‘양반실학’이었다고 한다면 원불교는 ‘민중실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단지 경제적 자립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공부와 정신훈련을 병행한다는 점에서 원불교의 실학을 ‘영성실학’으로 규정할 수 있다.
III. 맺으며 - 비서구 세계의 영성적 근대
개벽종교가 추구한 영성적 근대의 건설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장일순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한살림운동이 대표적이다. 한살림운동은 산성화되는 농토를 살려서 거기에서 나오는 신선한 먹거리를 소비자에게 공급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생명을 살린다고 하는 생명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협동조합운동으로, 그 바탕에는 동학의 생명사상과 이에 대한 장일순의 현대적 해석이 깔려 있다.
그런 점에서 한살림운동은 영성적 근대를 추구한 동학의 현대판이자 ‘신동학’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생명은 하나이다”라는 우주론적 신념을 바탕으로, 그 우주적 진리와 하나되는 삶을 추구하는 영성적 시민의 양성과 영성적 시민사회의 건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영성적 근대 또는 생명적 근대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성 중심이 아닌 영성 중심으로 보면 그동안 우리가 놓쳐왔던 많은 현상들을 다시 볼 수 있고, 그동안 설명되지 못했던 많은 사건들이 설명될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영성적 근대의 추구는 단지 한국에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서구 이외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는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이것을 기타지마 기신은 “토착적 근대”라고 명명하였다.[주23]
토착적 근대의 특징은 토착사상을 바탕으로 한 전개된 영성운동으로,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하고 안으로는 자생적 근대를 모색한다는 점에 있다. 대표적으로는 아프리카, 인도, 이슬람 등을 들 수 있는데, 한국은 이중에서 가장 빠른 사례에 속한다.
가령 아프리카는 흑인의식운동의 리더 스티브 비코(1946-1977), 정치 지도자 넬슨 만델라(1918~2013), 종교 지도자 데즈먼드 투투(1931~) 등이 중심이 되어 인종차별정책을 철폐하였는데, 이 때 운동의 사상적 동력이 된 것은 우분투(ubuntu)라고 하는 만인의 일체성(oneness)을 강조하는 아프리카의 토착사상과 흑인신학이었다.[주24]
또한 인도에서 간디를 중심으로 일어난 비폭력평화운동(사티아그라하)은 고대 인도의 종교전통에 걸쳐있는 윤리규범인 야마스(Yamas)에 기초하는 것으로[주25], 그런 점에서 토착적 근대화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인도의 토착적 근대화 운동에는 이슬람의 네트워킹적 사고, 즉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타우히드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이슬람과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
이상의 토착적 근대화(indigenous modernization)의 사례는, 비서구적 근대가 전통과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을 현대화(modernizing traditions)하는 형태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심실학’ 개념 역시 그러한 예에 해당하는데, 조선후기의 ‘실학’이 성리학이나 주자학과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연속선상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동학과 같은 개벽종교도 ‘하늘’로 대변되는 한국적 영성을 현대화한 토착적 근대화의 사례에 해당한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근대는 중국이나 일본의 근대보다는 인도나 아프리카의 근대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과 인도, 아프리카는 모두 식민지지배를 받았고, 이에 대해 민중들이 영성에 바탕을 둔 종교운동으로 저항했으며, 그 과정에서 전통사상에 기반하면서도 그것을 현대화한 근대 세계를 모색하였다. 반면에 일본이나 중국은 식민지를 당한 경험이 없고, 그들이 추구한 근대의 성격도 영성적 근대보다는 이성적 근대의 측면이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의 근대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이나 일본으로 대변되는 동아시아의 근대사, 그리고 ‘근대’의 대명사가 된 서구 유럽의 근대사보다는, 그 외의 지역의 근대사에 주목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즉 ‘실학’으로 포장된 ‘일본적 근대성’에 주목하기보다는, ‘토착성’에 기반한 인도적 또는 아프리카적 근대성을 살펴보는 것이 개벽종교가 추구한 한국적 근대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반면에 중국이나 일본 또는 서구의 근대성은 한국의 근대성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한국의 근대성을 적극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고찰은 우리의 학문적 관심을 종래의 중일(中日)과 서구 중심에서 그 외의 지역으로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근대에 대한 관점도, 철학(유학)과 이성 중심에서 종교와 영성까지 아우르는 근대관으로 확장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즉 우리의 시야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우리의 근대사도, 더 나아가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도 더 넓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인식이 지금보다 폭넓고 다양해질 때 비로소 한국근대사상사도 본래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주석]
(1) 1930년대 이래의 실학연구사에 대해서는 김현영, 「실학 연구의 반성과 전망」(《한국 중세사회 해체기의 제 문제(상)》, 1987, 311-337쪽), 지두환, 「조선후기 실학연구의 문제점과 동향」(《조선시대 사상사의 재조명》, 역사문화, 1998) 등을 참조.
(2) 이상, 후쿠자와 유키치의 ‘실학’ 개념과 인용문에 대해서는 사사키 슌스케(佐々木集相)‧카타오카 류(片岡龍), 「일본과 한국에서의 ‘실학’의 근대화」(《한국종교》43, 2018.03)를 참조하였다.
(3) 先是丁未年間, 相璜與金祖淳伴直翰苑, 取唐、宋百家小說及《平山冷燕》等書以遣閑, 上偶使入侍注書, 視相璜所事, 相璜方閱是書, 命取入焚之, 戒兩人專力經傳, 勿看雜書. 相璜等自是, 不敢復看稗官小說. 至是, 因南公轍對策, 用小品語, 遂命發緘以聞. 蓋以諸人年少有才, 欲其懋實學, 而視其志趣也. (정조실록 16년 10월 24일 3번째기사)
(4) 叩其眞才實學, 授以內外之職. (정조실록 7년 1월 5일 7번째기사)
(5) 綜核名實, 明知其有實學. (정조실록 7년 1월 16일 1번째기사)
(6) 政敎皆推於至諴, 文章亦本於實學, 敎以誠也. (정조실록 8년 1월 18일 2번째기사)
(7) 國學儒生, 全習詞章, 不讀經書, 弊固不小. 此無他, 科擧不講經故也, 若復行講經之法, 則自不能不務實學矣. (세종실록 19년 9월 3일 1번째기사)
(8) 上曰: “…人材, 必由學校而出, 師長賢則可能敎誨. 但若不尙實學, 而徒事浮文, 則不可謂之學校也.” (중종실록 11년 5월 30일 1번째기사)
(9) 有寧曰: “今歲講經, 與選者甚少, 良由不務實學也. 近年屢爲別試, 皆不講經, 故徒尙風雲月露之文, 不務實學. 今雖爲庭試, 然在平時, 當使儒士篤於實學也.” (중종실록 11년 5월 30일 1번째기사)
(10) 조성환,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 – 율곡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철학논집》33, 2013을 참조하기 바란다.
(11) 오가와 하루히사, 「실심실학 개념의 역사적 사명」,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동아시아 실학, 그 의미와 발전 I》, 경인문화사, 2012, 117~132쪽.
(12) 정인재, 「실심실학연구서설(I)」, 《신학과 철학》14, 181-2쪽.
(13) 이 표현은 조선왕조실록에 총 39차례의 용례가 나오고 있다. 1651년 효종 2년에 처음 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영조 때가 13번으로 가장 많고, 정조부터 고종 때까지 20번의 용례가 보인다. 선구적인 실학자로 알려진 이수광이 1625년에 쓴 「무실론」에도 보이고 있다. 이상, 조성환, 「실천학으로서의 ‘실학’ 개념」 참조.
(14)《중용강의보》「鬼神之爲德」
(15) 小創紀藏,《朝鮮思想全史》, 「實學と靈性」, 筑摩書房, 2017, 188~9쪽.
(16) 참고로 일찍이 20세기 중반부터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스즈키 다이세츠는, 그의 저서《일본의 영성화》(1947)에서, ‘영성’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무분별의 작용”, 즉 ‘지혜’를 말한다고 하였다. 기타지마 기신,〈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성론과 현대적 의의〉, 《동양일보》2017.08.13. 「한·중·일 국민작가를 견주어 새밝힘 한다(5)」 참조.
(17) ‘재영성화’라는 표현은 이병한,〈요가와 쿵푸가 만나면 세상이 바뀐다 : [유라시아 견문] 프라센지트 두아라와의 대화〉에 나오는《유라시아 견문》의 저자 이병한의 “근대화의 위기, 세속화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인간과 사회의 ‘재영성화’가 중요한 정치적 기획이 될 수 있겠네요”에서 빌려왔다.《프레시안》2015.09.01.
(18) 여기에서 ‘개벽종교’란 일제강점기 전후에 탄생한 천도교, 대종교, 증산교, 원불교를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의미에서의 ‘개벽’ 개념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개벽종교’라고 명명할 수 있다(대종교의 경우에는 ‘개천’(開天)). 실제로 최근에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간행된《근대 한국 개벽종교를 공공하다》(모시는사람들, 2018)에서는 ‘개벽종교’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19)《전봉준공초》
(20)《신인철학》
(21) 여기에서 ‘개벽파’란 “개벽종교를 창시하거나 계승하면서 개벽운동을 전개한 사상가들”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 개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이병한으로, 그는 2014년 1월 20일에《프레시안》에 쓴〈동학은 ‘농민 전쟁’ 아닌 ‘유학 혁명’이다!〉에서, 동학을 평가하면서 “유학을 고집하는 척사파와 서학을 맹종하는 개화파 사이에서 제3의 길을 간 개벽파”라고 하였고, 2017년에는 원불교까지 ‘개벽파’에 넣고 있다(이병한,〈‘脫중국 쇄국정책’? 망국의 첩경이다〉,《프레시안》2017.03.24.). 이후에 조성환은 동학・천도교・대종교・증산교・원불교를 묶어서 ‘개벽파’로 통칭하였다(조성환, 「동학이 그린 공공세계」,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근대 한국 개벽종교를 공공하다》, 모시는사람들, 2018)
(22) 유병덕,《원불교와 한국사회》, 시인사, 1986.
(23) 기타지마 기신, 「한국・일본의 근대화와 민중사상」,《한국종교》43, 2018.
(24) 위의 논문 참조.
(25) 이타가키 유조, 「‘전통과 근대’를 다시 묻는 진리 파악」,《한국종교》43, 2018.
* 출전:《문학・사학・철학》52집 (2018년 봄・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