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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진우스님 2018.2.1~2.14
2월 1일 [오늘의 명상] . . “수보리야, 남쪽, 서쪽, 북쪽과 네 간방과 위아래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모양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이렇게 가르친 바 대로 머물지니라.” .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상하 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 虛空 可思量不 不也世尊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금강경 강의} 제 4. 묘행무주분 (妙行無住分 - 묘행은 머무름이 없음 5.) . . [붙임] 사유(四維)는 동서남북의 간방(間方)을 말하고, 보통 사면팔방(四面八方)이라 하는데 팔방은 사면을 상하로 나눈것이고 중앙을 더하면 5방이요, 5방을 또 상하로 나누면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된다. 세존께서는 “수보리가 동방(東方) 허공(虛空) 하나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 남서북방과 사유 상하 허공을 물어 보시었으니, 이 대목은 충분히 설명하였으므로 전회의 내용과 중첩되므로 생략한다. 다만, 사유(四維) 간방(間方)이다, 사면팔방(四面八方)이다, 5방 시방세계(十方世界)다, 하는 것들은 모두 나를 중심으로 지어낸 망상(妄想)에 불과한 것이니, 나 자신이 허망한 업력(業力)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거품과고 같은 것인 바, 나머지 사량(思量)하는 것들은 더불어 허망하기 짝이 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사량이다 비사량(非思量)이다 하는 것 자체가 허망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왜 허망이냐? 수차례 예를 들었듯이, 본디 바다는 조용하고 적요한 것임에도, 바람이라는 욕심이 불어서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음이라. 그 파도를 보고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고락시비(苦樂是非)하는 분별(分別)이야말로 허망한 것 중에 허망하기 이를데 없는 바보 같은 짓이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보시(布施)에 대해 준다 안준다, 또한 주는 것조차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된다, 하는 것조차도 허망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보살의 상(相)에 머무름이 없는 보시의 복덕 역시 이와 같이 복이 있다 없다, 또는 복덕이 한량이 있다 없다 하는 생각마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준다는 것도, 준다는 것에 머무름이 없다는 것도,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이 모든 것 자체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과 같아서 파도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무주상포시복덕(無住相布施福德) 역시 생각을 일으켜 미쳐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보시(布施)가 이럴진덴 지계(持戒) 또한 마찬가지이다. 참으로 계(戒)를 지킨다는 것은 선(善)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고, 선도 악이요 악도 악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생로병사는 세상의 모습이다. 다만 인연 연기에 의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므로, 어차피 살고 죽는 것은 연기(緣起)의 모습인 것이다. 다만, 마음을 주착하지 말고 머물지 않아야 한다. 선은 악을 낳고 악은 선을 낳으니,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면 선과 악은 서로를 영원히 낳고 멸하는 것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니 선도 악도 분별하지 않으면 남는 것은 연기(緣起)에 따라 자연스런 생로병사의 모습일 뿐이니, 의도적인 분별로 계를 어기지만 않고 마음을 머물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씀이다. 즉, 지켜야된다, 안지키면 안된다 하는 마음조차 머물지 않는 것이 참으로 계를 지키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라, 죄라는 것은 마음따라 생기는 것이니, 계라는 것, 죄라는 것 모두 무분별(無分別)하게 되면 계는 저절로 지켜지게 된다는 말이다.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역시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사량이 완전히 끊어지게 되면 구경(究竟)의 열반에 이르러 영원한 자유를 얻을 것이니, 이야말로 보살이 주하지 않는 보시가 되고 육파라밀법(六波羅蜜法)이 될 것이다. 계속~~ - 진우스님 -
2월 2일 [오늘의 명상] . .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의 몸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부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금강경 강의} 제 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진여의 이치를 실상으로 봄.) . . [붙임] 신상(身相)이란 색신(色身)을 말한다. 즉, 세존의 몸을 가리키니 4대 색신은 지수화풍(地水火風-흙,물,불,바람)으로 만들어진 몸이다. 우리의 몸 역시 4대 색신(色身)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죽음에 이르면 살과 뼈, 가죽, 손발톱, 터럭, 이빨, 때 등은 흙으로 돌아가고, 눈물, 콧물, 침, 정액, 오줌, 피 등은 물로 돌아가며, 더운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운동하는 기운은 바람으로 돌아가니, 지수화풍(地水火風-흙,물,불,바람) 4대로 된 것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32가지의 상(相)과 80가지의 좋으신 몸의 모양을 가지셨다. 32상 80종호(種好)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몸은 단정하시고 금색광명이 빛나시며, 눈빛은 별과 같이 밝고 깨끗하시고, 음성은 멀고 가까움없이 들리는 것 등, 서른 두가지의 모양을 완벽히 지니셨고, 여든 가지의 결점이 하나도 없으신 색신을 완벽하게 구족하셨다. 이러한 부처님의 완벽한 몸을 보는 제자들로서는, 자신들의 누추한 신상에 비해 너무나도 완벽하신 부처님을 흠모하고 공경하는 마음과, 존경하고 찬탄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자 마침 부처님께서 상(相)에 머물지 아니한 복덕(福德)이 무량(無量)함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마음속으로 “무량복덕이란 저렇게 구족원만하신 부처님의 상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를 아시고 이 뜻을 밝히시려 수보리를 불러 물으셨다. “네 뜻이 어떠하느냐? 나는 소위 너희들이 일컫는 여래(如來)이니라. 그렇다면 여래라는 뜻은 어디선가 왔을 것이며, 지금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있을 것이며, 여여(如如)하고 완벽함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내 신상의 몸으로서 여래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옳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보느냐? 그렇지 않다고 보느냐?” 이렇게 물으시고, 만약 여래의 색신을 보고 복덕이 구족하다고 생각하거나 나의 색신을 보고 상에 머무른다면 결코 복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셨다. 동시에 이는 색에 머무르는 생각에 지나지 않으니 옳은 생각이 아니라고 일깨워 주셨다. 부러워하면 진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이에 비하는 것은 맞지 않지만 부처님의 색신을 보고도 부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색신 역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면치 못하고 허망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부처님의 색신(色身)을 보고도 마음이 머물지 말라 했거늘,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더라도 이는 인과(因果)의 모습이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이며, 지수화풍(地水火風-흙,물,불,바람) 4대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분별없는 평안한 마음이 된다는 것을 잘 알아서 항상 초연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 진우스님 -
2월 3일 [오늘의 명상] . . [너의 몸을 보고 너의 몸이 아니고 나의 몸이라고 한다면?] . 우리는 보통 사람을 상대할 때 일단 나와 다른 너로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몸을 보면서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보고 듣고 이해하며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규정짓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상대방 또는 각각의 사람을 연상하면서 상대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 상대는 번개와 같이 사라지게 되고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돌아가는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결국에는 그 사람을 연상하면서 그 사람의 말과 생각과 감정이 어떠했는가 에 대한 나의 생각만 남을 뿐이다. 나의 몸이나 상대의 몸이나 때가 되면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몸은 사라져도 나의 생각과 감정은 남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과(因果) 인연(因緣)으로 인하여 육도(六道-천상,인간,수라,지옥,아귀,축생) 가운데 어느 한곳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의 몸과는 전혀 다르게 태어나겠지만, 생각과 감정의 업(業)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나의 생각과 감정의 업(業)에 의해 지금 나타났던 인연들과 비슷한 상대들이 또 나타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과 감정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완전히 나와 별개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감정의 업(業)에 따라서 나타나는 나의 모습, 나의 아바타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두 내 마음이 만든다)요, 만법유식(萬法唯識-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이라 한다. 따라서 나의 생각과 감정의 업(業)이 달라지지 않는 한, 지금 대하는 사람들과 유사한 사람들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고 반복하며 나타나게 될 것이다. 참고로 부처님은 업(業)이 없으므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분별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업식(業識) 가운데 분별이 없으므로, 모두가 무분별하고 평등한 사람들만 인연될 뿐이다. 그러므로 첫째 내가 보는 상대의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에 불과한 것이요, 둘째, 따라서 내가 보는 상대의 몸은, 따로 상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나의 생각과 감정의 업(業)이 거울처럼 비쳐서 나타난 나의 업식(業識)의 그림자, 또는 아바타로 생각해야 한다. 더구나 부처님의 32상 80종호의 몸조차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니, 사대색신(四大色身)과 공(空)함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 32상 80종호를 본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렇게 보는 나의 생각과 감정의 업식(業識)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 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진여의 이치를 실상으로 봄. 2)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몸이 여래의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불야세존 불가이신상 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不也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붙임] 수보리는 세존께서 물어보신 뜻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하여 수보리는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여래의 신상은 아무리 서른 두가지의 상을 갖추시고 여든 가지의 좋은 모양을 지니셨다 하더라도, 이는 사대(四大) 색신(色身)에 불과하여 결국에는 늙고 죽고 썩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여래의 몸도 우리 범부와 다르지 않으므로, 지(地)는 흙으로 돌아가고 수(水)는 물로 돌아가고 화(火)는 불로 돌아가고 풍(風)은 바람으로 돌아갈지니, 이러한 색신(色身)을 여래(如來)라고 보는 것은 대단히 옳은 생각이 아니옵니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왜 그러합니까? 여래(如來)라는 뜻은 그대로그대로 변함이 없고 중생을 위하여 나타나셨으나, 나타남이 나타난 것이 아닐지니, 무너지는 몸이 아니고, 늙는 몸이 아니며, 병드는 몸이 아니고, 죽는 몸이 아니며, 썩는 몸이 아니고, 더러운 음식을 먹고 사는 몸이 아니며, 이는 항상 머무는 몸이시고, 생(生)이 없으므로 멸(滅)도 없는 몸이시며, 늙고 아픔이 없는 몸이시고, 죽고 썩음이 없는 몸이시며, 다함이 없는 실상법(實相法)의 몸이시고, 금강(金剛)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항상 머물러 변함이 없으시고, 다함이 없는 법신(法身)의 여래(如來)이거늘, 연(緣)으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는 색신,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색신(色身), 허위이고 실이 아닌 무상(無常)이요, 순간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색신에 비유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신상(身相)은 허망하고 실다움 없음이 물거품과 같고 찰나이며, 항상하지 않음이 번개와 같기에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의 신상이 곧 신상이 아니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물으신 바에 대해 여러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길게 대답을 하였다. - 진우스님 -
2월 4일. [오늘의 명상] . . 요즘 자기의 몸에 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몸을 위해 투자하고 가꾸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성형은 기본이고, 다이어트니, 운동이니, 요가니 하면서 옛날에 비한다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엄청나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의술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몸이 커지고, 몸매도 좋아지고, 건강하고, 병도 많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때가 되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왕이면 좀더 건강하고 병이 없으며, 덜 늙고 오래도록 살다가 죽는다면 이 또한 즐거움과 행복이 그만큼 길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기대를 사람들은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이면이 있다. 이 세상의 모습과 이 세상을 만드는 마음의 모습은 결코 성불(成佛)을 하지 않고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즐거움과 괴로움, 행복과 불행한 마음, 이 두가지의 상반된 마음은 서로 그 무게가 같으므로, 행복을 구하면 구할수록 불행 역시 똑 같은 무게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풍선효과라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어느 한곳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불어나게 되고, 다른 쪽에서 누르게 되면 이쪽이 불어나게 되는 법칙성 학설이 있듯이, 중생의 삶이란 바로 이와 같은 모습으로서, 양면성이 있으며 이면의 법칙이 존재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진리를 이미 아시고, 몸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시고, 몸을 진짜 몸으로 생각해서도 안된다고 설파하신다. 마음 바깥으로 드러난 몸에 대해 착각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허망한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지금부터 라도 마음의 분별심을 없애야 만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 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진여의 이치를 실상으로 봄. 3) [붙임] 그런데 세존께서는 세존의 몸이 곧 신상(身相)이 아니라는 것을 왜 다시 밝히시는 것일까? 신상이란 결코 영원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즉시,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마는 허망무실한 것이다. 물거품의 인연이 다하면 찾을 래야 찾을 수 없고 이름만이 전해질 뿐이다. 물에 의해 거품이 일어날 뿐이지 거품이 물은 아니다. 그러므로 물의 거품이 거품이 아니요, 바람은 바람일 따름이지 거품은 아니다. 거품의 본래 고향은 물과 바람이 듯이, 신상의 몸은 신상의 몸이 아니라 본래 지수화풍 사대가 인연에 따라 화합함에 있어 거짓이름으로 신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상(身相)이 인연이 다한 다음에는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지수화풍은 지수화풍일 따름이지, 신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의 몸을 진짜 몸으로 집착하여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면, 그에 따른 인과(因果)가 생기게 되고 또한 몸으로 인한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받게 된다. 하물며 地水火風 4대 역시 신상(身相)이 물거품인 것과 같이 허망하여 실재(實在)가 없다. 지수화풍의 실재 모습은 요즘말로 분자(分子)와 원자(原子)에 속한다. 물론 분자와 원자까지도 실상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일단 공성(空性)이라는 가칭을 붙여주었다. 신상의 몸이 되었든, 지수화풍 4대가 되었든, 또한 분자와 원자가 되었든, 이러한 실상은 번갯불과 같이 빠르다. 그러나 저 번갯불이 말이 번개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것이어서 사실 있다고 할 수도 없으니, 우리의 신상의 몸 역시 번갯불과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번갯불과 일생일대를 사는 신상의 몸을 같이 볼 것인가? 이는 신상에 애착하므로 허망과 찰나임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이다. 시간은 본래 공하다. 깨닫고 보면 길고 짧은 것이 없다. 다만, 일생이라는 시간을 느끼는 것은 즐겁고 괴로운 고락(苦樂)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하루살이나 찰나 간에 생멸이 오고 가는 미균(세균) 등의 짧은 생을 살아가는 중생이나, 수 억겁을 살아가는 제천(諸天)의 중생까지도 번갯불같이 찰나와 순간의 시간일 뿐이다. 각자가 살아가는 모습은 결국 즐겁고 괴로운 고락(苦樂)의 업(業)이 있기 때문이니, 애착의 정도에 따라 살아가는 시간이 짧고 길게 느낄 뿐이다. 능히 이렇게 번개와 같이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는 안목을 잘 갖추어서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신상의 몸에 집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달관(達觀)의 경지에 도달하여 마음을 제대로 제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계속~~~ - 진우스님 -
2월 5일 [오늘의 명상] . . 요즘 중국 우한에서 2019년 12월 발생한 신종 폐렴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은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분명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기까지는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결과에 따른 현상들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부처님 법을 배우는 우리 불자들은, 보여지는 현상에만 집착하여 수박 겉핥기식의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확실하게 알아야만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될 것이다. 먼저, 각각의 사람에게는 좋고 나쁜 고락(苦樂)의 업(業)을 지니고 있다. 각자의 욕심에 의해 좋은 것을 얻은 만큼 싫고 나쁜 과보(果報)가 생기는 것이 인과(因果)의 법칙이라 했다. 때문에 좋은 것을 얻는 시점이 있으면 싫고 나쁜 과보(果報)를 받는 때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이것의 좋은 것이 생기면 저것의 싫고 나쁜 것 또한 필연으로 생기는 것이 인과(因果)의 법칙이다.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이다. 이러한 인과(因果)의 업(業)을 말하는 것에 대해 너무 식상하다 하여 거부감을 일으키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살아가는데 있어서 규칙이나 법에 대해 강조한다 하여 이를 식상하다고 법을 어기게 된다면, 그에 상응한 벌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듯이, 인과(因果) 또한 법칙이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각자가 지니고 있는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업(因果業)에 의해 좋을 때와 싫고 나쁠 때가 있기 마련이니, 마음속에 있던 좋은 업식(業識)이 일어날 때는 당연히 좋은 일이 나타나게 되는 반면, 마음속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숨어 있던 싫고 나쁜 업식(業識)이 일어날 때가 되면, 반드시 싫고 나쁜 일을 만나게 되는 것이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 했다. 따라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미안한 얘기지만,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나쁜 악업(惡業)이 생겨날 시기에, 싫고 나쁜 인연을 만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자신의 나쁜 업(業)의 정도에 따라 쉽게 고칠 수도 있고 반대로 고통이 더할 수도 있으나, 이러한 업(業)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업(業)을 멸하여 바꾸는 수밖에는 없다 할 것이다. 이때는 인과(因果) 업(業)을 믿고 맡겨서, 집착하는 마음을 비우고 탐진치(貪嗔痴-욕심,성냄,분별) 삼독심(三毒心)을 가라앉히어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는 것이 최선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도와 염불, 참선, 보시, 정진으로 업(業)을 멸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업(業)이 작은 사람들은 일단 탐진치(貪嗔痴-욕심,성냄,분별) 삼독심(三毒心) 또한 작은 사람일 지니, 좋은 일에 대해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과보(果報)로 인해, 싫고 나쁜 일 또한 만나지 않게 된다. 설사 남이 보기에는 좋지 않은 일을 만났다 할지라도, 본인은 결코 싫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과 괴로운 마음이 없다. 세상에는 비단 ‘코로나 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무리한 욕심때문에 인과(因果)로 인한 싫고 나쁜 과보(果報)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는 각자 개개인의 욕심이 뭉쳐져서 때가 되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공업의 현상들이다. 이에 대한 과보 역시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탐진치(貪嗔痴-욕심,성냄,분별) 삼독심(三毒心)에 따라서 스스로 싫고 나쁜 업(業)이 적용되어 시절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연기(緣起)의 작용이라 한다. 이렇든 저렇든 결국은 모두 허망한 것들의 현상일 뿐이니, 각자가 마음을 모두 내려놓을 때, 불국정토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다음 설명하는 금강경 제1 사구게를 보면 명확히 이해될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 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진여의 이치를 실상으로 봄. 4) “불고 수보리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佛告 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인연따라 화합된 모든 모습은 모두 다 거짓이고 헛된 것이니, 만약 모든 모습을 그 모습이 아닌 것으로 알면 바로 여래의 참모습 볼 수 있으리." [붙임] 이 구절은 금강경 사구게 가운데 첫번째 사구게이다. 부처님께서는 지금까지 수보리에게 묻고 또 물으신 다음, 여리실견분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결국 모두 사라지고 만다. 허망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모든 형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변한다는 것은 자기의 본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따져봐야 남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다만 착각하고 있는 나의 상념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지금 바로 현재 나의 생각과 감정 역시 변하고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다. 문제는 감정덩어리다. 좋고 싫고 좋지도 싫지도 않는 세가지 감정 즉, 삼수(三受)작용만 윤회(輪廻)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 역시 더 좋거나 더 싫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생기는 즉시 싫고 나쁜 감정 역시 똑 같이 생기므로, 이 또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수고로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좋은 것 만을 취하려 하니, 어리석음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 계속 ~~~~ - 진우스님 -
2월 6일 [오늘의 명상] . . 보통의 사람들은 모든 대상을 나의 고정된 생각에서 보려고 하는 버릇이 있다. 이를 숙업(宿業)이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고, 고정된 생각을 버려야 편치 않는 마음이 사라진다고 하신다. 즉 고정된 생각을 없애야 곧 진실된 여래(如來)를 본다는 말씀이다. 어떤 것을 보고 ‘좋다’ 라고 하는 것에 생각이 머물러 집착한다면, 곧 좋지 않은 것이 생기게 된다. ‘예쁘다’ 라고 하는 것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한다면 곧 예쁘지 않은 것,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좋은 것이나, 예쁜 것이나 결국 허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는 말씀이다. 만약 돈에 대하여 ‘가지고 싶다’거나, ‘아깝다’거나, ‘좋다’거나, ‘뺏고 싶다’거나, ‘감추고 싶다’거나, 등등의 집착을 하게 된다면, 그 과보(果報)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변동이 생기는 것에 대해 애를 쓰게 되고 화가 나며, 여러가지 상념으로 인하여 마음이 불편하게 될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그리고 죽음으로서 나와 돈의 관계는 끊어지고 말 것이다. 결국 돈의 상(相)은 없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은 인연 연기(緣起)따라 변하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고정된 생각에 치우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여 집착을 하게 되지만,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므로, 이러한 착각이 실망으로 이어져서 괴로워하게 된다. 젊은 것에 대한 애착과 집착으로 인해, 늙음으로 변하는 것에 애탐과 슬픔이 오고, 건강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병으로 변하는것에 괴로움이 찾아오고, 얻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잃게 되는 변화에 고통을 느끼게 됨이니, 젊다느니, 건강하다느니, 얻음이니 하는 상(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상(相)을 진짜라고 믿지 말고 상(相) 아닌 비상(非相)으로 보라고 신신당부하신다. 부처님께서는 한마디로 모든 상(相)은 절대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이니, 이를 진짜로 알고 집착하게 되면 실망에 의한 고통과 괴로움이 생기게 되므로, 그 어떤 상(相)이라도 집착하지 말고 진짜로 보지 않아야 제대로 된 마음의 상(相) 즉, 여래(如來)를 볼 것이라고 하신다. 만약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믿는다면, 억울한 상(相)을 억울한 상(相)으로 보지 말라는 뜻이다. 억울한 것을 억울하다고 보는데 이를 억울하게 보지 말라는 것은 무슨 괘변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나, 이렇게 의심하는 생각의 상(相)까지도 갖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과 상(相)이란 결국 허망한 것이어서 집착할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하늘이 있고 구름이 있다. 구름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며 변하고 또 변한다. 구름에 집착하게 되면 하늘이 있는 줄도 모른다. 그러나 흘러가는 구름의 변화에 집착하지 않으면 항상 하늘은 그대로다. 우리의 삶에 있어 일상의 모든 움직임은 구름과 같다. 구름을 진실된 상(相)으로 보고 집착하게 되면 하늘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구름을 진실된 상(相)으로 보지 않으면 비상(非相)의 하늘이 열린다. 그러나 하늘은 그 무엇도 없다. 그러므로 구름과 하늘을 모두 상(相)으로 보지 않으면 결국 참 하늘 즉,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된다. 구름 없는 하늘이 없고 하늘 없는 구름이 없는 까닭이다. 이것이라는 상(相)에 머물면 저것이라는 상(相)이 나타난다. 이러한 상(相)은 진실된 상(相)이 아니다. 태어났다 라는 상(相)이 생기면 죽는다 라는 상(相)이 따라 생긴다. 얻었다 라는 상(相)이 생기면 잃는다 하는 상(相)이 저절로 생긴다. 이것이라는 상(相)이나, 태어난다는 상(相), 얻는다는 상(相)을, 상(相) 아님으로 보면, 저것이다, 죽는다, 잃는다 라는 상(相)도 생기지 않으니, 이것이 곧 여래(如來)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상(相)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그대로를 모두 받아들이고 집착하지 않고 마음이 머물지 않으며, 모든 상(相)을 비상(非相)으로 보는 훈련을 쌓아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허깨비 업(業)에 매일 속아서 마음에 멍이 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래의 금강경 4구게를 다시한번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 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진여의 이치를 실상으로 봄. 5) “불고 수보리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佛告 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인연따라 화합된 모든 모습은 모두 다 거짓이고 헛된 것이니, 만약 모든 모습을 그 모습이 아닌 것으로 알면 바로 여래의 참모습 볼 수 있으리." - 진우스님 -
2월 7일 [오늘의 명상] . . 사람들은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하면 좋았을 걸, 저렇게 하면 더 좋았을 걸.. 그리고 때로는 후회를 넘어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몸서리치며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스스로를 못살게 굴기도 한다. 이러한 후회에 따른 후유증이 생기는 것은, 고정관념이라는 자기업(業)에 묶이어 지금보다 더 잘되기 위한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스스로 어떤 기준을 만들어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거나, 못하게 된다는 예측을 미리 함으로서 스스로 좌절과 상실감을 가져오게 되는 상(相)이 또 생기게 된다. 바로 금강경에서 말한 상(相)이라는 모양에 마음이 머물렀기 때문이다. 잘된다는 상(相), 잘 못된다는 상, 잘되어야 한다는 상, 자신이 세운 어떤 기준에 대한 상, 좋다는 상, 후회라는 상, 등등.. 스스로 상을 만들어서 스스로 갇히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상을 자신의 생각이 소유하기 때문이다. 바로 범소유상(凡所有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상이야 말로 모두 허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고 하셨다.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다. 이렇게 허망한 상에 머물지 않는 비상이 된다면 상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는 의미이다. 가끔 생각지 못하게 돈이나 물건이 나가거나 잃을 때가 있다. 아까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소치다. 심한 경우에는 좌절을 넘어 타락을 하기도 한다. 바로 상에 마음이 머물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에 머물지 않는 마음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번에는 업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업 또한 스스로 만든 자업(自業)의 그물 인데도 말이다. 일단 자기 것, 내 것이라는 아상(我相)에서 벗어나야 한다. 참으로 건방지고 아둔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본래 자기 것이란 없을 뿐더러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붙잡을수록 놓치게 된다. 따라서 나갈 것은 나가게 되어 있고, 들어올 것은 반드시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 인과(因果) 인연에 맡기고 마음이 머물지 않아야 걱정 근심의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 아상(我相)을 버려라. 들고 나는 것에 쿨하게 마음 머물지 말라. 그리하여 영혼을 자유롭게 하라. {금강경 강의} 제 6.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함.) 1.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 부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 不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혹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과 글귀를 듣고 참다운 믿음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붙임] 수보리 존자가 이와 같은 깊은 법의 4구게를 듣고 보통의 중생들이 잘 알아들을까? 하는 의심이 생겨 부처님께 다시 여쭙는 장면이다. 부처님께서 “머무름이 없음으로 묘한 행동이 저절로 나오고, 이러한 묘한 행동을 원인으로 삼아서 ‘이것이다’ 라고 하는 고정관념을 없애고 참 깨달음의 결과를 얻어라” 하심이니, 이것이야 말로 깊은 인(因-원인)을 심기도 하고, 깊은 과(果-결과)도 심게 됨이다. 여기서 주(住)함이 없음으로 묘행(妙行)이 나온다고 하는 것은, 정말 정말 진정코 머무는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다면, 무심(無心)속에서의 행동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는 뜻이다. 이를 걸림 없는 무애행(無碍行)이라 한다. 사람들은 보통 생각을 한 후에 행동을 하게 된다. 이는 벌써 생각을 했기 때문에 생각에 따른 과보(果報)가 생겨서 장애가 생긴다는 뜻이다. 수보리는 중생들이 이렇게 미묘(微妙)한 법을 만나서 듣기도 어렵지만, 설사 만나서 듣는다 하더라도 믿는 마음이 생기기 어려울 것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하는 염려가 생긴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근기는 박약하기가 미세한 티끌과 같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깊고 멀어서 허공과 같은 것이매, 적은 것이 큰 것을 용납하기 어렵고, 이 깊고 묘한 법은 값이 없는 보배구슬과 같으므로, 감히 미천한 중생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뿐더러, 감당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부처님께 애둘러 어쭈었던 것이다. 계속~~~ - 진우스님 -
2월 8일 [오늘의 명상] . . ‘희망이 있다’, 또는 ‘희망이 없다’ 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희망이 있다는 것은, 누구든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업(業)을 모두 없애기만 한다면, 중도(中道)의 안락처(安樂處)인 해탈(解脫) 성불(成佛)을 하여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희망은, 즐거움과 괴로움, 행복과 불행은 적어도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 전체와, 전생, 금생, 내생의 삼세(三世)를 모두 합쳐서 계산을 한다면, 즐거움과 행복의 무게와, 그에 따른 인과(因果) 즉, 과보(果報)로 나타나는 괴로움과 불행의 무게가 같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기분이 좋은 만큼 기분이 나쁜 일이 생기고, 기분이 나쁜 만큼 기분이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고락(苦樂)의 업(業)이라 하고, 인과(因果) 윤회(輪廻)의 인연이라 한다. 따라서 이 둘의 기분은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것이고, 손바닥과 손등,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이니,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 의한 기분을 잘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기분이 좋은 것은 그냥 좋은 것이 되고, 기분이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이로 인한 인과(因果) 인연으로 기분 좋은 희망을 가질 수 있으므로, 그리 실망할 일도 아니고 좌절할 일도 아니다. 다만, 좋고 싫음의 고락(苦樂)이 계속적으로 반복 윤회(輪廻)하게 되어 번거로울 뿐이다. 만약 기분이 몹시 나쁜 상태의 사람을 본다면, 저 사람은 금생 또는 금생이 아닌 내생(來生)에라도 언젠가는 기분 좋은 일이 반드시 생길 것이다 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인과(因果)라는 윤회(輪廻)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극심한 즐거움은 극심한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인과(因果)의 사실은 꼭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희망이 있다 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없다 라는 것은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망이 없다는 것은 애초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무주(無住) 유주(有住), 유위(有爲) 무위(無爲)의 세상에는 두가지의 모습 이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는 인과(因果)의 세계 즉,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요, 하나는 피안(彼岸)의 세계, 곧 열반(涅槃) 적정(寂靜)의 완전한 경지다. 즉, 부처님의 세계다. 어느 세계이든 상관이 없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곧 보살의 마음이 된다. {금강경 강의} 제 6.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함.) 2. . 불고 수보리 막작시설 여래멸후 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어차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실 佛告 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그런 말 하지 마라. 여래가 멸도한 후 오백세를 뒤로 하더라도 계행을 지키고 복을 닦는 사람은 이와 같은 말과 글귀에 능히 믿음 마음을 내어 이것을 진실이라 여길 것이니라.” [붙임] 후오백세(後五百歲)라 함은, 대집경(大集經)이라는 경전에 다섯개의 5백세가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부터 5백세인 2,500년 후의 말세(末世)를 의미한다. 그러나 정확히 해석하면 한량없는 후오백세(後五百歲)를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유지계수복자(有持戒修福者) 즉, 계행(戒行)을 지킨다 함은, 계행의 굴레로 하여금 무명(無明) 번뇌(煩惱)를 단속하여 끊어낸다는 뜻이다. 복(福)을 닦는다는 의미는, 무위자성복(無爲自性福)의 그곳까지 간다는 뜻으로써, 자성(自性) 즉, 자기의 성품에 비치어 계(戒)를 지님으로써 무명(無明)의 괴로운 혹을 끊고 한량없는 무위복(無爲福)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수보리 존자가 어쭙되 ‘먼 훗날 후래(後來)의 중생들이 신심(信心)이 약해서 이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하니 부처님께서 ‘무슨 소리냐?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말은 꺼내지도 말라.’ 라며,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머무름 없는 묘한 행동과 변함이 없는 실체에는 반드시 뿌리깊은 믿음과 무르익은 대근기(大根器) 라야 믿을 수 있을지니, 대단히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법(法)의 실체는 항상 밝아서 멸(滅)함이 없는 고로, 전하고 전하는 마음의 등불은 비록 찰나라도 꺼질날이 없을 줄 믿어라” 왜냐하면 “이러한 본성(本性)이 실체에는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가 없고, 공간적으로는 동서남북 방위(方位)와 멀고 가까운 원근(遠近), 넓고 좁음의 광협(廣狹)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본래에는 흥망성쇠(興亡盛衰), 고금우열(古今優劣)이 없는 것이다. 왜냐? 시간과 공간이 초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이니, 후래(後來)니 하고 논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그러니 후래중생이 부처님법을 잘 알아 듣지 못한다고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를 알지 못함은 설명한대로 법성(法性) 자체가 시간과 공간이 초월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가 멸한 후 5백세에 자성(自性)이 청정한 계(戒)인 머무름 없는 무주계(無住戒)와 스스로 밝은 자성계(自性戒)를 가지고 무위(無爲)의 복덕(福德)을 닦는 자가 있을 것이니, 곧, 너희와 같이 신심(信心)을 내어 깨달을 자가 있을 것이다. 왜 그러냐면, 5백세 동안에 자성(自性)을 밝힌 덕(德)이다. 또 후오백세(後五百歲)도 그러하고 또 후오백세(後五百歲)에도 그러하여 이 무주상법(無住相法)은 한량없도록 끊일 날이 없을지니, 이것을 실다움으로 여길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내일 계속~~ - 진우스님 -
2월 9일 [오늘의 명상] . . 세상이 온통 시끄럽다. 예나 지금이나 시끄럽지 않는 때가 있으리오 마는, 이 모든 현상이 근본적으로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분석은 잘 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내 입장에서 유리한 것이 어떤 것이냐? 또는 불리한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내편, 네편으로 갈려서 공방을 지속하고 있으니 시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일체가 모두 허망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신다. 이를 진정코 깨달을 때 걱정 근심과 번뇌 망상이 사라진다고 하시고, 이러한 경지에 다다라야 참 여래(如來)를 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에 대해 후래중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말에 부처님께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물음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시었다. “나타난 모든 현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그러므로 결국 실체가 없다 할 것이니 모두가 공(空)할 뿐이다. 따라서 미혹한 견해를 가진 중생이 시간과 공간(空間)이라는 조작된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서 이에 묶이어 이러쿵저러쿵하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하신다. 이와 같은 거품과 같은 망념(妄念)을 제거하고 나면 모든 형상과 망념이 사라지게 된다고 하시고, 이러한 망념을 벗어나 본래의 경지로 되돌아가서 환귀본처(還歸本處-제자리로 돌아옴)함을, 진실된 여래를 보는 것이라 하시고, “망념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거품과 같은 형상을 진짜로 보는 것은 거짓됨이라”고 알려 주신다. 따라서 이러한 거품과 같은 망념에서 벗어나게 되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허황된 망상(妄想) 또한 사라지게 됨이니, 모든 형상과 일체의 그 무엇도 허공속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은 것이라고 알려주시고 계신다. 그러함에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생각 자체가 허망한 망념(妄念)일 지니, 언제 어느 곳에서의 중생이라도 이 같은 망념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일체의 거짓된 모든 형상이 사라지게 되니, 미래의 중생이 알아들을까 걱정하는 것조차 불필요하다는 말씀이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듯이, 걱정 근심 번뇌 망상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고 스스로 없애는 것이므로, 나라는 것은,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기계와 같은 것에 불과함이라. 이 같은 진리를 하루빨리 깨달아서 온 몸에 박혀 있는 잘못된 망념의 업식(業識)을 없애는 길만이 유일함이라 하겠다. 모든 것이 허망하고 거짓이며 물거품 같다고 한다면,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나,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욕심을 앞세운 견해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 라고 깨달으라 함은, 그것이 진정코 진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를 두고 욕심과 집착을 하게 되면, 백퍼센트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으므로 실망과 좌절에 의한 고통과 괴로움이 생길 뿐이다. 그러함에 이를 제대로 알아챔으로써 집착과 욕심을 벗어 던지고 걸림 없는 무애자재(無碍自在)의 대자유를 얻어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남이다. {금강경 강의} 제 6.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함.) 3.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 부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 不 불고 수보리 막작시설 여래멸후 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어차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실 佛告 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혹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과 글귀를 듣고 참다운 믿음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그런 말 하지 마라. 여래가 멸도한 후 오백세를 뒤로 하더라도 계행을 지키고 복을 닦는 사람은 이와 같은 말과 글귀에 능히 믿음 마음을 내어 이것을 진실이라 여길 것이니라.” - 진우스님 -
2월 10일 [오늘의 명상] . . 사람들은 모두가 재수(財數) 좋기를 바란다. 재수란 재물을 얻거나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뜻한다. 어떻게 하면 재수가 좋을까? 재수가 좋으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나? 재수란 복(福)이 있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재수나 복은 일단 기분이 좋아지는 과정을 말한다. 즉, 재물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지고, 좋은 일이 생기면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복이 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복이 있으면 재수가 좋을 것이고, 기분 좋은 일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재수 좋고 복이 많아서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 지는 것까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으나,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렇게 재수 좋고 복 있는 것도 인과(因果)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다음의 결과는, 재수없고 복이 다하는 인과(因果)로 말미암아 기분이 나빠지게 되는 과보(果報)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저급하고 저열한 인과(因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49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할애하여 미혹한 우리 중생을 위하여 줄기차게 가르쳐 주셨다. 그 가운데 금강경이라는 위대한 경전이 탄생케 되었으니,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축생(丑生)이나 할 법한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에 빠져서 고통과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받으면서도, 재수를 찾고 복(福)을 비는 악습(惡習)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는 이를 깨닫는 이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5백세 후에도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주고 계신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도 5백생 동안 환생을 거듭하며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를 깨치기 위해서는 한점 의심 없는 신심(信心)을 가져야 한다. 신심(信心)이란 마음을 믿는 것, 또는 마음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믿는가? 인과(因果)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연기(緣起)와 공(空)을 믿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이기 때문이다. 인과(因果)를 믿고 연기(緣起)와 공(空)을 믿으면 곧 부처님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일체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신심(信心)을 지닌 중생들은 지금도 깨칠 수 있고, 앞으로도 깨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인과(因果)와 연기(緣起)와 공(空)을 완벽히 믿는 신심을 가진다면, 저절로 재수가 좋아지고, 복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니, 신심(信心)이야 말로 공덕이 되고 복덕(福德)과 지혜(智慧)를 얻는 최첨단의 기술이라 할 것이다. 인과(因果)와 연기(緣起)와 공(空)을 믿는다는 것은, 일상 생활에 있어서 평상심을 유지케 하고 일체의 장애가 사라지면서 근심과 걱정, 고통과 괴로움을 여읠 수 있는 손오공의 여의봉이 내 손안에 쥐어 지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 6.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함.) 4. 당지 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 이종선근 이어무량천만불소 종제선근 當知 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마땅히 알아라. 이러한 사람은 한 분의 부처님, 두 분의 부처님, 셋, 넷, 다섯 분의 부처님에게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요, 이미 한량 없는 천만 부처님 계신 곳에서 모든 선근을 심었느니라. [붙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신심을 가진 중생들이 깊고 깊은 말과 글귀에 대해 신심을 내는 것이 결코 수월하다고 보지는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넷 다섯 부처님께 선근(善根)을 심어서 이렇게 쉽게 됨이 아니다. 이미 한량없는 수많은 부처님께 모든 선근(善根)을 심었으므로 이와 같이 어려운 말귀에 신심(信心)이 생기는 것이니, 이 말귀의 뜻은 허공같이 광대하고 보배구슬과 같이 고귀하여서 티끌같이 하잘 것 없고 개, 돼지같이 형편없는 근기(根器)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지만, 5백세의 기나긴 세월 속에서 한량없는 부처님께 모든 선근을 심기를 거듭하고 거듭하였던 결과, 드디어 근기(根器)가 익고 익어서 크나큰 도(道)를 감내할 만한 힘을 길러 신심(信心)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귀를 알아듣고 신심(信心)을 내는 자는, 과거 한량없는 부처님께 무량한 공덕을 쌓았음인 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 너희들도 그러했고 나도 그러했느니라” 고 하심이다. - 진우스님 -
2월 11일 [오늘의 명상] . . 기차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사람들은 오른쪽에 모두 서있고, 왼쪽으로는 걸어서 올라가고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왼쪽은 비워 두고 오른쪽에 붙어서 있는 것은, 바쁜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한 사회적 관행이 된 것 같다. 나도 앞사람을 따라서 올라가는데 갑자기 멈춰 서고 말았다. 위를 쳐다보니 한사람이 왼쪽 계단을 막고 비켜주지 않았다. 두 사람 뒤에 있던 내가 가로막고 있던 이를 보고 “실례지만 먼저 가면 안될까요?” 하고 양해를 구했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걸어가려면 계단으로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스님이 되어 더 이상 뭐라고 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아무 소리 않고 그대로 멈춰선 채로 끝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조금 화가 나면서 막고 선 사람이 못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속한 생각을 했던, 그리고 순간적으로 화를 낸 나 자신에 대해 참회를 했다. 분별심(分別心)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무심한 생각을 앞섰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야속함이 생기면서 화가 났던 것이나 곧 참회를 했다. 상대가 나에 대해 소리를 지른 것은 순전히 그 사람의 행위이다. 상대 또한 나에 대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 것에 대한 과보(果報)는 순전히 그 사람의 몫이다. 길을 막아 섰던, 비켜주지 않았던, 화를 내고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각자의 업(業)이요, 각자의 몫일 뿐이다. 세상 모든 모습은 그대로 그대로 인연 연기(緣起)로서, 자연의 움직임이 되었건, 사람의 행위가 되었건, 그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시공(時空), 시비(是非), 광협(廣狹), 대소(大小), 거래(去來), 고락(苦樂), 선악(善惡), 생사(生死) 등등의 것은 그 자체로서의 모습일 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시비고락(是非苦樂)의 업(業)에 의해 좋고 싫은, 옳고 그른 분별(分別)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분별심(分別心)이 모두 멸(滅)해지면 세상에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것이니, 아래의 구절(句節)과 같이 완전한 해방을 얻어서 자유자재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키지 않는 습(習)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모두 자신의 업(業)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참회해야 한다. 상대에 대해 바라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화내거나 잔머리 쓰지 않아야 한다. 곧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키지 않으면, 신구의(身口意-행동,말,생각) 삼독심(三毒心)이 사라지게 된다. 항상 이 화두를 놓치지 말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 6.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함.) 5. 문시장구 내지 일념생 정신자 수보리 여래 실지실견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聞是章句 乃至 一念生 淨信者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이러한 말과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깨끗한 믿음을 내는 자는, 수보리야! 여래는 이를 다 아시고 다 보시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 없는 복덕을 얻게 되는 것이다. [붙임] “모든 형상은 허망한 것이니 만약 형상을 형상 아님으로 보는 자는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이러한 깊고 미묘한 사구게(四句偈)를 능히 아는 자는 근기(根器)가 매우 수승하다 할 것이다. 또 이를 아는 자는 한 생각이라도 깨끗한 마음을 잃지 않는 자로서, 공(空)을 이해하고 청정한 믿음을 지니고 있을 것이므로, 여래께서 이를 다 아시고 다 보신다는 말씀이다. 여래(如來)는 만고(萬古)에 남되 남음이 없고, 시방에 다하되 다함이 없고, 티끌을 용납하되 좁음이 없고, 성(聖)스러움에 처하되 더함이 없고, 평범함에 머물되 덜함이 없고, 악(惡)에 대하여 책망함이 없고, 선(善)을 행하되 찬탄함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선(善)과 악(惡)에 대해 분별(分別)을 여의고, 성(聖)과 범(凡)의 차별을 여의며, 넓고 좁은 광협(廣狹)에 공간을 여의고, 옛과 지금의 고금(古今)에 시간을 여의며, 옳고 그른 시비(是非)의 사량을 여읜 연고이다. 여래의 땅은 이러히 청정한 곳이니, 탕탕(蕩蕩)하여 미세한 티끌에 집착하지 않고, 호호(浩浩)하여 미세한 티끌의 버림이 없는 곳이다. 이러하여 이곳에서는 버릴 바가 없으니, 십악(十惡)에 대해 미워할 것이 무엇이며, 십선(十善) 또는 성(聖)을 찬양할 것이 무엇인가, 이곳에서는 고(古)와 금(今)이 없으며, 부처님이 계신 적멸(寂滅)의 때와 지금의 때가 다른 것이 무엇이며, 이곳에는 공간과 장소가 없으니 사위국과 대한민국 서울을 가릴 것이 무엇이며, 범인(凡人)과 성인(聖人)이 없고 부처와 중생을 찾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를 잘 아는 것은 오로지 신심(信心)의 힘이니, 즉 사량(思量)분별(分別)을 여읜 집착과 망상이 없는 깨끗한 믿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같이 깨끗하고 군더더기 없는 믿음만 있다면, 곧 여래께서 이를 아심이요, 보심이다. 내가 곧 여래를 알고 여래를 보는 것이다. 아니다. 여래가 곧 나요, 내가 여래인 것이다. - 진우스님 -
2월 12일 [오늘의 명상] . . 아이들은 싸움이 잦다. 싸움을 하다 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좋아라 고도 한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이유없이 싸우지는 않는다. 아이들 나름대로 서로의 주장을 첨예하게 펼치다가 끝내 싸움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이렇게 싸우는 아이들을 말리는 어른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의 싸움의 이유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다. 그저 말릴 뿐이다. 그리고 잘잘못을 떠나 싸움을 한 두 아이 모두에게 벌을 주기 일쑤다. 아이들은 서로가 불만을 갖는다. 나는 잘못이 없고 상대아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른이 주는 벌이 무서워 억지로 화해를 하기도 한다. 어른들은 어떨까? 만약 불보살이나 신장(神將)님이 어른들의 싸움을 보는 시각 또한, 어른이 아이들의 싸움을 보듯 하지는 않을까? 어른이라고 해서 아이들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잘잘못이란, 일반적, 또는 사회적, 인간적, 법적으로는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진리의 차원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두가 결국은 공(空)하기 때문이다. 바람 불어 파도가 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바람은 바람일 뿐, 좋은 바람 나쁜 바람, 정의로운 바람, 불의의 바람으로 분별하며 탓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바람을 재판할 있을까? 이와 같이 바람과 같은 욕심으로 마음이 출렁이는 것이다. 바람이라는 욕심을 빼면 마음의 바다는 그저 공(空)할 뿐이다. 바람은 바로 나, 아상(我相)과 같다. 아상(我相)의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라는 분별된 인상(人相)이 생기지 않는다. 또한 이 파도 저 파도라는 중생상(衆生相)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오래 살아 남는다. 바람과 파도라는 생각 또한 분별심(分別心)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오래 살아 남는 것을 수자상(壽者相)이라 한다. 삶에 있어서의 시시비비(是是非非), 희로애락(喜怒哀樂)은 바람 불어 파도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나라는 아상(我相)의 바람이 불어 생기기 때문이다. 나라는 아상(我相)의 욕심이 강할수록 바람은 쌔어지고 인상(人相)이라는 파도는 크게 출렁이게 된다. 그러니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라는 분별심(分別心)이 크면 클수록 마음의 파도는 거칠어 질 뿐이다. 아상(我相-나)이라는 바람은 이렇게 무서운 인과(因果)를 낳는다. 아이들의 싸움을 말리듯이, 아상(我相)이라는 바람을 말려야 한다. {금강경 강의} 제 6.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함.) 6. 하이고 시제중생 무부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무법상 역무비법상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무슨 연고냐 하면 이 모든 중생들이 다시는 나라는 생각, 사람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생각도 없고, 법 아니라는 생각도 없기 때문이니라. [붙임] 그렇다면 이 모든 중생이 여래(如來)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여래(如來)라고 생각하는 복(福)을 얻게 되는 것은 어떤 까닭이냐? 이 역시 모든 중생이 일체의 분별(分別)된 상(相)이 없음에서 온다. 즉, 아상(我相)이 없으므로 아(我나)가 공했고, 아(我)가 공(空)하므로 아(我)를 두고 일어나는 일체의 번뇌 망상 집착 탐욕 업력(業力) 등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이러한 이유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으니, 바로 복(福)을 받게 된 연유이다. 또한 인상(人相)이 없음이다. 인상(人相)이 없으면 인(人사람)이 공(空)했고, 인(人)이 공(空)하면 인(人)을 두고 일어나는 일체의 번뇌 망상 분별과 집착 진에(眞恚-성냄) 업력(業力)이 나타나지 않음이다. 이러한 연고로 복(福)을 받게 된 것이다. 또 중생상(衆生相)이 없음이니, 중생상(衆生相)이 없으면 곧 중생이 공(空)했으므로 중생을 두고 일어나는 일체의 망상 집착 치암(痴暗)의 업력이 사라진 것이니, 이러한 이유로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아(我)와 인(人)과 중생의 3상(相)이 사라짐에 따라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이 생기지 않으니, 삼독심(三毒心)이 없으면 삼취정계(三聚淨戒)를 실현하여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 둘이 아님을 알아서, 비로소 청정자성(淸淨自性)에 생멸(生滅)이 없음을 맛보고 생멸이 끊어짐을 맛볼 때, 이곳이 “무량수지(無量壽地)요, 열반의 땅” 인줄 아는 수자상(壽者相)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수자상(壽者相)마저 없음이다. 수자상(壽者相)이 없으면 열반이 공(空)했고 열반이 공했으므로 열반을 두고 일어나는 일체의 깨달음과 증득(證得), 얻은 바가 없음을 아는 것이니, 이러한 연고로 복(福)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4상(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모두 떠나서 적멸한 피안(彼岸)에 이르렀을지라도 만약 이러한 법이 정법(正法)이요, 반야법(般若法)이요, 큰 법(法)이라 하며, 집착하거나 다른 법은 삿된 법이라고 분별한다면, 이러한 생각까지도 참 법을 모르고 법에 집착하는 법집(法執)에 해당하는지라. 계속~~ - 진우스님 -
2월 13일 [오늘의 명상] . . 절친하게 지내는 이에게서 기분 상하는 말을 들었다. 물론 절친한 상대는 너무나 이무로워서 농담으로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몹시 기분이 나쁘다. 그리고 이내 기분이 나쁜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점검한다. 모든 관계, 모든 현상, 모든 일은, 억겁(億劫)의 셀 수 없는 시간과, 끝이 없는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인연에 의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의상존(相依相存)하면서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일어나는 모습들이다. 여기에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라는 단순한 생각을 붙여서는 안된다. 그저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기분 나쁜 말을 하게 된 상대는, 이러한 인연(因緣) 연기(緣起)에 의해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런 말에 대해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갖는 것은 나 자신이다. 만약 나에게 기분이 좋고 기분이 나쁜 인과(因果)의 업(業) 즉, 좋고 나쁜 분별 감정이 없었더라면 상대의 말을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또 다시 말해서, 내가 보고 듣는 일들은 연기(緣起)의 현상 모습이다.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연기(緣起)의 시절 인연이다. 이를 두고 좋다 싫다 이러쿵저러쿵 감정을 갖는 것은 무조건, 지극히 나의 분별업(分別業)일 뿐이니, 결국 누구의 탓도 아닌 나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이러한 진리의 모습을 이해시키기 위해 모두가 공(空)일 뿐이다 라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신다. 순전히 자신의 생각과 감정만이 남게 되는데, 이러한 생각과 감정마저 공(空)하다고 알려주심이다. 그러니 그 어디에도 더구나 공(空)하다고 하는 생각 마저도 공(空)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재차 삼차 강조하시기 위해, 사상(四相)이 공(空)하고, 공(空)함이 또 공(空)하고, 공(空)하다는 것을 깨친 마음까지도 공(空)하고, 깨친 마음이 공(空)했다고 하는 것까지도 공(空)하니, 그 어떤 것에도 머무름 없이 완전히 동화되어 마음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는 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신다. 이러한 진리를 깨치게 되면, 그 어떤 것에도 걸림 없는 완전한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금강경 강의} 제 6.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함.) 7. 하이고 시제중생 무부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무법상 역무비법상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무슨 연고냐 하면 이 모든 중생들이 다시는 나라는 생각, 사람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생각도 없고, 법 아니라는 생각도 없기 때문이니라. [붙임] 어제 설명에서 ‘이것이 정법(正法)이다, 반야법(般若法)이다, 큰 법이다’, 라고 하며 이에 집착하면서 다른 법은 삿된 법이라고 분별(分別)을 한다면, 이 같은 생각을 법에 대한 집착 즉, 법집(法執)이라고 했다. 또 법상(法相-사상을 여의는 법) 이 없음이다. 법상(法相)이 없으면 법상이 공(空)했으므로 또한 사상(四相-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공(空)했고, 사상법(四相法)이라는 이름까지도 공(空)하여 비로소 아상(我相)과 수자상(壽者相)이라는 생각이 공(空)하고 법(法)이라는 생각이 공(空)함에 이르는 것이니, 이러한 고로 복(福)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 아상(我相)이 공하고 법이 공한 곳에 이르렀을지라도, 이에 머무르는 것만 능사로 알아서, 이를 끊고 멸할 수 없는 묘용(妙用)의 자취를 알지 못하니 곧 비법상(非法相)이 된다. 즉, 진짜 진리인 실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막히고 가리웠던 고정된 생각을 벗어던지라고 거짓된 법을 부정하였더니, 진짜 진리마저 보지 못하는 묘용(妙用)의 정법(正法)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진리를 드러내기 위하여 혼란 복잡한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기계가 돌아가는 법을 알기 위해 기계를 멈추었는데, 정지한 상태가 기계의 본분인 줄 아는 것과 같다. 또 이러한 비법상(非法相)이 없음이다. 비법상이 없으면 비법상(非法相)이 공(空)했고, 비법상이 공했으면 아법구공(我法具空)이 공(空)하여, 이를 완공(頑空)을 벗어났다고 하고 단멸(斷滅)을 벗어난 것이 되므로 진공묘유(眞空妙有)와 합치하는 복(福)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이것이 법이다 하면, 법에 머무르고 마는데, 법에 머무르는 상(相)을 벗어난 것을 비법상(非法相)이라 한다. 그러나 비법상(非法相)이라는 것에 또 머물게 됨이 없어야 비법상(非法相)이 공(空)했다고 하는 것이다.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아법구공(我法具空)을 합하여 삼공(三空)이라 하고, 삼삼매(三三昧), 또는 삼해탈(三解脫)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삼공(三空)마저 공(空)하여 완전한 석공(析空)이 되니, 복(福)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완공(頑空)은 공(空)에 집착하는 것을 말하고, 단멸(斷滅)은 악취공(惡趣空)을 말하는데, 이세상은 한번 뿐이라는 허무주의로 생각하는 공(空)이다. 이렇게 공(空)이라는 견해까지도 벗어나야 있는 그대로의 연기(緣起) 모습을 아무런 괴로운 감정 없이 자연스럽게 대처하게 되는 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 진우스님 -
2월 14일 [오늘의 명상] . . 요즘 들어 몸이 많이 힘들다. 이젠 하루가 다르게 체력이 떨어진다는 감을 받게 된다. 이만큼 살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하겠지만, 생각한 것 만큼 말을 듣지 않는 몸이 되다 보니 당장 불편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緣起)의 모습이라 누누이 강조했다. 나나 너나 우리 모두가 행동하는 모습들은, 이런 모습이든 저런 모습이든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과 인드라망(그물)으로 얽히고 설키어 어느 하나라도 우연한 것이 없는 필연적인 모습들이다. 그러니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며,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가를 따진다는 건 바로 사상(四相-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이러한 사상(四相)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사상(四相)을 잘못된 것이라고 보는 법상(法相) 또한 잘못된 것이어서 마음이 아직 청정하지 못한 것이므로 잘못되었다는 상(相)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법상(法相)이 아닌 비법상(非法相)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법상(法相)이라는 상(相)이 또 생겼으므로 이 또한 비법상(非法相)이라는 상(相)이 또 생겨나고 말았으니, 이 또한 상(相)을 떠난 것이 아니므로, 아직 청정한 마음이 되지 않은 것이어서 이는 말이나 글, 생각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하여 몸이 힘들다는 상(相)도 갖지 말아야 하며, 몸이 힘들다는 상(相)을 갖지 말라는 생각 마저도 갖지 말아야 하며, 그리하여 몸도 떠나고 마음도 떠난 무위무상(無爲無相), 무상청정(無相淸淨)의 깨달음을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체득(體得)할 뿐, 단 한 톨이라도 분별심(分別心)을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이를 넘볼 자격이나 될까? 그러니 아무 생각 말고 그저 성실하고 차분하게 행동하며 살 뿐이다. 매사 그러려니 그러려니 할 뿐, 다만,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 복덕(福德)부터 다져 나갈 일이다. {금강경 강의} 제 6.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함.) 8.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 착아인중생수자.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하이고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 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이 모든 중생들이 마음에 모양을 지닌다면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라는 모양의 생각을 가져도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생각에 다시 빠져들기 때문이다. 만일 법 아니라는 생각을 지닌다 하여도 이 또한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법도 지니지 말고, 마땅히 법 아닌 것도 지니지 말지니라. [붙임]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사상(四相)과 법상(法相)과 비법상(非法相)이 모두 없어야 무량복덕(無量福德)을 받을 수 있는가? 이렇게 깨끗한 믿음이 있는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거나 또는, 이러한 사상(四相)이 없다는 상(相) 마저도 취하게 된다면, 이는 또다시 사상(四相)에 도로 주저 앉게 되는 것이어서 깨끗한 믿음이라 할 수 없으니, 곧 여래(如來)가 나이고 내가 여래인 무량복덕(無量福德)을 받을 수 없음이다. 왜 그럴까? 이렇게 무량(無量)하고 깨끗한 믿음의 복덕성품(福德性品)에는 청정한 마음의 깨달음이 아니고는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다. 또 이에 한층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사상(四相)이 없고, 사상이 없다는 상(相)까지 없는 무법(無法)의 법상(法相)까지 없다는 상(相)을 또 취하게 되면 이 또한 사상(四相)에 도로 머무르게 되는 것이므로 깨끗한 믿음이라 할 수 없음이니, 여래(如來)라는 무량복덕(無量福德)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왜 또 그러하냐? 이러한 무량(無量)한 청정복덕(淸淨福德)에는 무상청정(無相淸淨)한 믿음의 깨달음이 아니면 진정코 얻을 수 없는 연유이다. 이 무슨 말이냐? 내 마음이 청정하여 무위(無爲)무상(無相)의 청정실상(淸淨實相)을 믿게 됨은, 내 마음이 모든 상(相)을 무위무상(無爲無相)의 청정(淸淨)실상(實相)이 되는 때인 까닭이다. - 진우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