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파견 연월일 |
기간 |
인원수 |
명칭 |
파견지역 |
주최 |
1 |
1940.6 |
30일 |
136 |
조선농업보국청년대 |
大分縣,熊本縣,佐賀縣,宮崎縣 |
조선총독부 |
2 |
1940.10 |
30일 |
20 |
-------------- |
鹿兒島縣 |
강릉군 |
3 |
1941.5 |
10일 |
160 |
조선농업보국부인지도대 |
岩手縣六原農民道場 |
조선총독부 |
4 |
1941.6 |
30일 |
313 |
조선농업보국청년대 |
山口縣,島根縣,廣島縣,岡山縣 |
조선총독부 |
5 |
1942.6 |
30일 |
313 |
조선농업보국청년대 |
奈良縣,滋賀縣,岐阜縣,三重縣 |
조선총독부 |
6 |
1942.5 |
11일 |
81 |
조선농업보국부인지도대 |
岩手縣六原農民道場 |
조선총독부 |
7 |
1942.10.11 |
60일 |
100 |
조선흥농청년대 |
熊本縣,佐賀縣 |
조선興農會 |
8 |
1942.10.11 |
40일 |
44 |
강원도농업보국청년대 |
熊本縣玉明郡滑石村 |
강원도농회 |
9 |
1943.5 |
30일 |
403 |
조선농업보국청년대 |
石川縣,富山縣,福井縣,長野縣 |
조선총독부 |
10 |
1943.5 |
30일 |
약200 |
조선농촌중견청년연성대 |
長野縣八ケ岳中央鍊成農場 |
조선총독부 |
11 |
1943.7.8 |
30일 |
100 |
조선중견청년연성대 |
岩手縣六原農民道場 |
조선총독부 |
12 |
1943.11.12 |
40일 |
40 |
조선중견청년연성대 |
愛知縣岡崎市追進農民道場 |
매일신보사 |
13 |
1943.10.11 |
40일 |
350 |
조선농업보국청년대 |
岡山縣,廣島縣,島根縣,鳥取縣 |
매일신보사,경성일보사 외 |
14 |
1943.11.12 |
40일 |
70 |
강원도여자농촌보국대 |
宮崎縣宮崎郡浦武村 |
강원도청 |
15 |
1944.5 |
30일 |
663 |
조선농업보국청년대 |
枋木縣,崎玉縣,茨城縣,群馬縣 |
조선총독부 |
<참고자료> 樋口雄一, 戰時下朝鮮の農民生活誌, 社會評論社, 1998, 240쪽, <표1> 재구성.
<표 1>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농업청년대의 파견 주최는 조선총독부로 대변되는 식민정책당국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직접 주관하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강원도청이나 강릉군, 지역 농회, 조선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사 등 모든 파견 주최는 조선총독부의 하부기구이거나 직접 관할을 받는 관변단체였다. 규모 면에서도 조선총독부가 직접 주최할 경우에 인원수가 많았다.
특히 강원도의 경우는 농업청년대 파견에 적극성을 보인 지역이다. 강원도는 1940년 5월에 10명의 농촌중견인물을 선발하여 일본 내 ‘전몰군인과 출정군인가족’의 집으로 파견하기 시작한 이후 수 차례에 걸쳐서 도 차원에서 농업청년대를 파견했다. 또한 농업청년대원 개인과 농업청년대를 파견하는데 실적이 우수한 마을에 대한 표창장 수여를 통해 농업청년대 파견을 독려하였다.18)
1940년 6월 4일부터 34일간 예정으로 출발한 제1차 농업청년대는 경북과 경남(佐賀현 파견), 충남과 전북(熊本현), 경기와 충북․황해(大分현), 평북과 강원․함남․함북(宮崎현) 등지에서 10여명씩을 선발한 후 2대 11개 반으로 나누어 道농민훈련소에서 5일간 훈련을 거친 후 파견하였다.19) 이러한 과정은 훈련기간이 늘어난 것 외에는 이후에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또한 농업청년대원은 전국 각지에서 동원하였다. 1941년의 경우에 300명 가운데 지도자는 각도마다 1명씩 일본인이 참가하여 313명이 되었는데, 전국 13도에서 20-30명 정도를 모았다. 이들을 일본의 島根縣 1町 2촌, 山口縣의 3촌, 廣島縣의 3촌, 岡山縣의 4촌으로 각각 분할 배치하였다. 이들이 배치된 농가는 전쟁에 나갔거나 전사자로 인해 남성노동력이 전혀 없는 집으로써 한집 당 한 명씩 파견되었다.20) 1941년 6월(4차)과 1943년 5월(9차)에 파견되었던 농업청년대의 파견내용을 통해 살펴보면, 전국에 걸쳐 선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 2> 출신도별 파견지역 현황
파견시점 |
1차(1940.6) |
4차(1941.6) |
9차(1943.5) | |||
출신지별 파견지역 |
佐賀현 |
경북,경남 |
島根縣 |
강원,함남,함북 |
福井縣 |
경기,충북,충남 |
熊本현 |
충남,전북 |
山口縣 |
평남,황해,평북 |
石川縣 |
전북,전남,경북 | |
大分현 |
경기,충북,황해 |
廣島縣 |
경기,충북,충남 |
富山縣 |
경남,황해,평남 | |
宮崎현 |
평북,강원,함남,함북 |
岡山縣 |
전북,전남,경북,경남 |
長野縣 |
평북,강원,함남,함북 | |
파견인원 |
136명 |
313명 |
403명 | |||
훈련기간 |
5일(농민훈련소) |
5일(농민도장,개조농업보습학교) |
7일(농민도장,농업보습학교) |
<자료> 조선총독부 농림국 농정과, 農業報國靑年隊記, 1942, 1-2쪽 ; 조선총독부 농림국 농정과, 皇農への道, 조선행정학회, 1943, 9-13쪽.
파견 당초에는 100여명이 조금 넘을 정도였지만 시기가 지나면서 인원수는 많아져 1944년에는 663명이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농촌조선인여성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단기교육의 성격을 띤 3번과 6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견기간이 30일을 넘고 시기적으로도 봄과 가을에 치중되어 있어서 대부분 농촌노동력 일손돕기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21)
그런데 <표1>에 기재된 내용 외에도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파견사례는 추가로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9월에는 경북도에서 농업청년대를 일본 佐賀현에 파견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런데 이 기사에 의하면, 1939년 여름에 이미 중견청년 16명을 40일 동안 일본 佐賀현에 파견했음을 밝히고 있다.22) 이로 보아 1930년대 말부터 이미 소수의 인원이 일본에 파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파견과정 및 절차는 어떠하였는가. 농림국의 관장업무였으나 구체적인 절차는 강제연행의 경우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앙에서는 조선총독부 농림국이 농업청년대 파견업무를 총괄하였으며 지방에서는 군이 중심이 되어 업무를 수행하였다. 군의 하부인 면과 읍에서는 면서기와 구장23)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농업청년대 파견의 실질적인 업무(대상자 선정, 훈련기관 이송, 수송을 위한 구체적인 업무 등)에 대해서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농업청년대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과정을 기억하고 있는 차일봉도 ‘郡(*하부행정당국을 의미)에서 보냈다’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강제연행의 절차나 남양농업이민 업무에서 면과 읍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통해 볼 때, 농업청년대 파견업무에서도 면장 및 면서기와 구장의 역할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 일반적인 강제연행관련 업무 절차와 남양농업이민관련 업무절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 강제연행관련 업무 절차 : 사업주의 신청수 결정 → 부현장관 모집 신청 → 후생성 사정 → 조선총독부 접수 → 조선총독부, 모집 할당 → 후생성 → 부현장관 → 사업장허가서 수령→ 기업 모집원, 조선 도착 → 모집(조선총독부 → 지정된 도청 → 지정 군청, 경찰 → 지정 면 사무소 → 면 사무당국, 구장, 경찰서 및 주재소, 면 유력자)24)
○ 남양농업이민 업무 절차 : 계획 입안 → 사업주의 요청 → 남양청 접수 → 조선총독부에 요청 → 조선총독부 접수 → 道에 하달 → 해당 도 내무부, 희망자 선정 및 신원조사(지정 군청, 경찰 → 지정 면 사무소 → 면 사무당국, 구장, 경찰서 및 주재소 등이 문서출납, 이주자 선정 업무, 이주자 신원조사 업무, 이주자 수송업무 등 농민송출과정의 실제적인 업무를 담당) → 해당 도지사, 조선총독부 내무국에 상신 → 조선총독부 접수 → 남양청 내무부 전달 → 남양청 내무부 접수 → 해당 도, 수송업무 → 기업 인수25)
‘남양농업이민’은 기업 모집원이 직접 조선에 와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와 해당 도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수행되었다. 해당 도의 도지사는 군을 중심으로 해당자를 선발하였는데, 선발과정 및 수송과정에 대해서 상세한 보고를 상신하고 있다.
두 경우는 기업모집원이 직접 조선에 와서 업무를 하느냐, 조선총독부가 지방행정기관의 도움을 받아 이를 대행하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선발과 파견업무를 지방의 군과 면에서 담당한 점은 동일하다. 따라서 농업청년대의 경우에도 유사한 절차를 거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농촌통제정책을 추진하던 실제적인 단체인 국민총력운동기관의 조력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문기사 내용이나 총독부가 발간한 간행물을 살펴보면, 일본농촌사회는 파견된 농업청년대원들은 반기고 차별 없이 대우함으로써 얼핏 내선일체가 실현된 듯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 내내 일본사회에서 조선인은 결코 환영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전쟁기간은 물론이고, 1910년 이후 일본 당국은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내 걸고, 同化를 강조했지만, 실제로 일본인들은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인에 대한 일본 민간인의 습격이나 危害행위는 조선인들의 생명을 위협하였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조선인의 대응이 식민지 시기 내내 일본 전역에서 끊이지 않았다.26) 특히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에 도일하여 일본에 생활터전을 갖고 있던 재일조선인들은 직장과 거주지 등에서 민족차별과 직접적으로 맞부딪치면서 생활했다.27)
이와 같이 당시 일본 민간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여전한 상태였고, 특히 탄광이나 공사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차별의식을 절감하고 있었다. 심지어 노무지도자훈련소(공주 소재)에서 6개월간 지도자훈련과정을 수료한 후, 1941년에 충남보국대장으로서 1,000명의 근로보국대를 이끌고 도일을 했던 전봉한(85세)의 경우에도, 차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바라키(茨城)현 히다치(日立)공장에 도착한 후에 ‘노예취급’을 당하던 그는 조선총독부 노무협회 규정을 제시하며, 보국대장으로서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조선의 규정은 일본에서 통하지 않으니 일본의 규정을 따르라”는 이유로 통솔권을 박탈당하고, 일반 노무자와 다름없는 강제노동을 강요당하면서 처음으로 반일의식을 느꼈다.28)
그러나 농업청년대원들은 그런 분위기를 접하지 못했다. 일단 일본 농가에서는 당장 시급한 노동력을 해소해주는 존재였고, 일본 남성들이 마을을 비운 상태에서 조선청년들의 분노를 격발시킬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일본농촌여성이 노동강도가 높다고 해도 덩치가 큰 장정을 완력으로 당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나타낼 수 없었다. 일본 현지의 주민들은 한결같이 ‘내선일체의 성과’로 평가하며, 농업청년대원들의 노고에 후의를 표하였다. 石川현에 거주하던 일본주민 니시다(西田淸吉)의 감상문에서도, “대동아전쟁목적완수를 위한 식량확보작업에 반도와 내지인들이 함께 정진”한 사업에 참가한 농업청년대원들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확인할 수 있다.29) 황농으로의 길에는 일본 현지 어린이들이 쓴 감사의 편지가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일본의 언론에서 청년대원들의 활동을 ‘報國’이나 ‘援軍’으로 보도한 것으로 보아 농업청년대가 놓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30)
1944년 봄에 이바라기(茨城)현에 파견되었던 차일봉의 구술자료에서도 일본인 농가에서 일본인과 동등한 상태 속에서 생활했음이 나타나 있다. 일본 농가에 배치된 농업청년대원들은 일본 옷을 입고, 같은 내용의 식사를 했으며, 무시당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차일봉은 그 배경을 ‘여자들 밖에 없었고’ ‘아들 대신으로’ ‘자기 집의 농사 일을 해주므로’ 무시하거나 차별적으로 대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31)
농업청년대 파견 초창기에는 환영의식도 매우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1942년 6월에 파견되었던 농업청년대의 경우, 출발 당시에 총독부에서 모여 결단식을 하고 부민관에서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壯行會를 열었다. 7월 11일에 경성에서 열린 귀국행사를 보면, 경성 도착(오전 9시경) → 시가행진 → 조선신궁 참배 → 조선총독부 방문, 해단식 거행 → 농림국 주최 환영회(부민관) → 해산(오후 4시) 등으로 되어 있다. 해단식에는 정무총감이 참석하여 기념장을 수여하는 등 자못 성대했다. 이들 일행은 조선에 도착하기 이전인 7월 4일에 東京에서 수상관저와 척무대신의 관저를 방문하고 도죠(東條) 수상을 만났는데, 이 실황이 경성중앙방송을 통해 17일에 전국으로 중계 방송되기도 하였다.32) 1943년 5월에 파견된 9차 농업청년대의 경우에도, 총독부가 주관하는 결단식과 장행회를 거친 후 일본으로 출발했고, 일본에서 귀국할 때에는 도쿄(東京)로 가서 궁성요배와 明治신궁 및 靖國신사 참배, 내무대신 관저 및 수상관저 참배를 한 후 나고야(名古屋)․나라(內良)․교토(京都)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을 통해 귀국을 하였다. 이들의 귀국에도 환영행사는 성대했다. 고이소(小磯)총독과 다나카(田中)정무총감이 경성역으로 직접 환영을 나갔고, 부민관에서 열린 해단식에도 고이소 총독이 참석하여 훈시를 했다.33) 이러한 행사를 통해 농업청년대원들이 느꼈을 감동과 감격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부터는 도 차원의 행사로 축소되어 1944년의 농업청년대는 道가 주관하는 환영식으로 그쳤다.34)
<표1>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농촌중견인물의 일본 파견대상에는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농촌여성에 대한 중견인물양성정책은 남성에 비해 시기적으로 늦었으나 당국의 주요한 대상이었다.35) 이들의 파견 목적은 농촌의 중견인물로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내지농촌을 견학’이라는 매일신보 기사 제목(1941년 3월 12일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농업보국부인지도대’ 라는 이름 아래 10여일간 일본의 농민도장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36) 매일신보는 이들의 일본 견학을 전후하여 각오와 견학기, 좌담기, 보고서 등을 연재하여 선전효과를 극대화했다.37)
연 2회, 일본파견활동이 실제적으로 일본농가에 미친 기여도는 어떠하였을까. 1년 중 2회 동일한 지역에 파견되었다 하더라도 총 체류기간은 6개월에 불과한 결과가 되니 이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다. 그러나 이 파견 기간이 모내기와 추수철 등 농번기라는 점을 볼 때, 일본농가에 대한 기여도는 적지 않았다.
3) 참가자 구성과 농민훈련기관의 관계
참가자의 선발 자격을 살펴보자. 충북도가 1941년 가을에 20명을 30일간 廣島현에 파견하고자 농업청년대원을 선발하는 기사를 통해서 지원 자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町부락연맹 이사장, 애국반장, 도연맹 추진대원 ② 아직 일본 시찰의 경험이 없는 자 ③ 소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일본어를 잘 하는 자 ④ 근검 노력, 어떠한 곤란이라도 묵묵히 감내할 수 있는 자 ⑤ 봉사관념이 왕성하여 현재 농업에 종사하며, 다녀온 후에 농업에 종사함은 물론 부락의 중견이 되어 활동의 열의를 가진 자 ⑥ 연령 만 18세 미만 30 미만의 자로서 품행이 방정하고 신체 건강한 자 등이다.38) 1942년 5월에 파견한 4차 농업청년대원의 선발자격은 ① 도립의 長, 단기농민도장, 개조농업보습학교졸업생으로 재학 당시 성적이 우수한 자 ② 귀향 후 농업생산보국운동에 진력하고 마을의 중핵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자 ③ 스스로 농사에 종사하며 농사개선에 대해 상당한 체험을 가진 자 ④ 연령이 만 18세 이상 30세 미만으로써 품행이 방정하고 신체가 건강한 자이다. 반장은 농민도장 또는 개조농업보습학교 직원 중에서 일본인으로서 각도별로 1명씩 선발한다.39) 9차(1943년 5월) 농업청년대원의 선발자격도 4차의 경우와 같다.40)
이상에서 살펴본 농업청년대 자격의 주요한 조건은 조직적으로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과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농민도장․청년연성소․훈련소 등 당국이 설립한 단기 훈련시설 출신이다. 당시 농민도장(이후 황민 도장)과 청년연성대 등은 조선 내 60여개소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들 기관의 출신자는 대부분 자소작농이나 소작농이었으므로 농업청년대원들도 경제규모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들을 배출한 농민도장은 어떤 기관이며 어떠한 인물을 배출하였는가. 이들 기관은 총독부의 농촌통제정책 및 청년정책41) 과 관련이 깊다. 그러나 양자 가운데 농업청년대 파견에 더욱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농촌통제정책이다.
당국의 대표적인 농촌통제정책인 농촌진흥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자력갱생’과 ‘중견인물양성’이 강조되었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수행된 것이 농민훈련소(농민도장, 혹은 농촌중견부인양성소, 농촌청년훈련소) 건설이다. 중견인물양성정책은 1930년대 전반기까지 ‘졸업생지도’가 중심이었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는 직접적인 농촌청년층이 운동의 대상이 된다.42)
1932년부터 시작된 농촌진흥운동은 당국이 마련한 새로운 농촌통제책으로써 농촌경제의 타개방안으로써 수립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경제운동이 아니라 일본정신을 기초로 한 농가갱생운동이며 ‘유용한 황국신민의 육성’을 최종목적으로 하였다. 이 운동은 전체 조선농촌을 대상으로 관의 강력한 지도와 조직력을 뒷받침한 ‘국민운동’의 색채를 띠고 전개되었다. 농촌진흥운동은 조선총독부에 설치된 조선총독부농촌진흥위원회(1932년 9월 30일)의 주관 아래, 각 도와 郡島읍면에 농촌진흥위원회를 설치하고 전개했다. 면에는 면장(농촌진흥위원장)과 면서기가 중심이 되어 관의 행정사무와 농촌진흥운동을 일체화하였으며, 면 아래 행정보조기구인 동리에는 구장이 진흥회의 회장을 맡음으로써 농촌진흥운동은 말단농촌사회에 까지 미칠 수 있는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농업진흥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조직적 체제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전개와 아울러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조직은 종래 농촌진흥운동의 조직체와 별도로 조직 운영되었으나, 전시생활의 철저를 위해 통제를 감수해야 한다는 원칙을 비롯하여 구체적으로 ‘생업보국’의 정신 아래 증산을 강조하는 강령과 要目을 채택한 것으로 보아 양측의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연관성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조직이 애국반과 부락연맹을 결성하는 등 농촌진흥운동의 그것을 토대로 정비해나가면서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해나가게 된다. 또한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식량증산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고 농촌재편성 문제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종래의 농촌진흥운동은 국민총력운동에 흡수 통합된다. 이후부터 전시농업정책의 수행을 위한 농촌통제정책은 국민총력운동의 조직체가 주관해 나가게 된다.43) 물론 농업청년대 파견사업은 국민총력운동의 구체적인 업무가 아니었다. 일제 말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의 농촌은 노동력 부족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 노력의 하나가 여성노동력의 활용이다. 그러므로 해외로 노동력을 송출하는 농업청년대 파견사업은 국민총력운동에서 중심적인 운동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농업청년대가 국민총력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수행되었음은 확실하다.
농업청년대가 도일 직전에 거친 단기훈련시설은 농민도장․농업보습학교․농민훈련소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활발히 보급되는 훈련기관은 농민훈련소이다. 농민훈련소는 1933년 7월 경기도 양주군에 경기도농사훈련소 설치를 시점으로 전국 각지에 설립된다. 이는 특히 1935년부터 10년간 75,800여 개 전 부락을 대상으로 전개한 ‘갱생확충계획’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농민훈련소 설립은 1935년에 들어서 정책적 차원에서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된다. 1935년에는 농민도장 건물을 신축하거나 기존의 農業實修校(농업실습교)를 농민도장으로 변경하는 제도적인 절차가 진행되었다.44)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듬해에 각도별로 도지사가 훈령을 발하여 규정을 만들고, ‘농민도장’이나 ‘농민훈련소’의 설립을 명하게 된다. 이미 1934년 6월 17일에 충남에서 농촌훈련소설치를 고시로 정하였고, 함경남도와 강원도에서는 1936년 4월 1일자로 각각 농민도장과 농민훈련소규정을 발했다.45) 1936년 총독부 당국이 밝힌 농민훈련소 훈련생의 계급별 구성을 보면, 자작농이 31.7%이고 자소작이 44.3%, 소작이 24%이다. 비록 소작이 24%나 차지하고 있으나 주류는 자소작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46)
1936년 4월 1일에 발한 함경남도훈령 2호(함경남도 농민도장 규정)에 따르면, 함경남도 농민도장의 정원은 60명이고, 수련기간은 9개월 과정이며, 농민도장부속농가에서 숙식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들은 군수의 추천을 받아 입소여부가 결정되었다. 입소자격은 1, 20세 이상 30세 미만의 남자로서 보통학교나 심상소학교를 졸업하거나 이와 동등한 자격을 얻은 자 2, 신체 강건하고 지조견실하며 근로에 좋은 조건을 갖춘 자 3, 本道에 거주하며 현재 농업에 종사한 자로서 수료 이후에 농촌중견인물로서 활동할 자이다.47)
농민훈련소에서는 주로 실습 위주로 훈련을 받았다. 충남 예산의 농촌청년훈련소에서는 ‘단련에 의해 적극적인 노동에도 이겨낼 수 있는 신체를 양성하기 위하여 매일 노동시간 목표를 12시간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 외 학과목은 수신과 국어, ‘農民道’라는 정신훈련에 그쳤다. 그러나 정신훈련은 학과목 수업으로 그치지 않았다. 전북 진안군 농촌청년훈련소의 하루 일과를 통해 정신훈련의 정도를 살펴보자. 먼저 아침 저녁으로 신사참배와 조선신궁 요배․皇太신궁 요배․궁성요배․부모요배 훈화를 행하고 월례행사로 월 2회 국기게양일 행사, 월 2회 국체황실일 행사, 매주 일요일 사회봉사일 행사 외에 매월 30일에는 조회에서 칙어를 봉독하는 행사를 갖는다. 아울러 매월 2회 정신개발에 관한 강연을 하고 매월 3일은 감사일로 정하여 각자 본가에 편지를 쓴다.48)
함남도지사가 발한 농민훈련소설립과 관련한 규정에는 설립목적을 ‘근로에 의해 황국농민의 신념을 배양’하고 ‘지방에서 합리적 영농법을 修得하여 농촌갱생에 공헌’하는 중견인물양성임을 명시하였으나, 1930년대에는 ‘문맹퇴치’나 야학운영 등을 통한 교육에 치중하였고, ‘영농법 획득’이나 ‘근로보국’은 1940년대에 들어서 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1940년 1월 6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함남농민도장 출신 尹載源의 경험담을 보면, ‘일가의 생계를 부지할 수 없어 산중으로 들어가 연명’했던 윤재원이 농민도장의 훈련을 통해 익힌 근면과 합리적 영농방법의 도움으로 3년만에 자작농으로 ‘광명스러운 갱생’을 획득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윤재원은 함남농민도장을 거쳐 같은 해 10월 농업청년대원으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 따라서 당국은 윤재원을 ‘농민도장을 거쳐 농촌갱생에 성공한’, 농촌청년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1930년대 후반에 농민훈련소에 대한 당국의 관심은 더욱 높아져 설치도 활발해졌을 뿐만 아니라 매년 도별로 농민훈련소와 농민학교장 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고, 1940년부터는 농민훈련소에 대한 예산 배정이 증액되었다.49) 단기농민도장이나 단기강습회는 1939년부터 설치되었으나 1942년부터 더욱 활성화되었다.50) 1941년도에 들어서는 농림국장 주관 아래 전국농민도장長 회의가 개최되어, 농민도장을 통한 생산성 확대를 논의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는 南次郞 총독이 참석하여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같은 해 12월부터는 여성이 장기농민도장의 대상자가 되기 시작하였다.51)
그러나 농민훈련소에 관한 농촌중견인물 대상자들의 관심은 당국의 추진 의지를 따르지 못한 듯 여겨진다. 1939년 강원도는 농민학교와 농민훈련소의 입학지원자가 격감하는 현상에 대해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52) 강원도가 분석한 지원자 격감의 원인은, 졸업자의 구직난과 이농에 대한 욕구이다. 농촌청년들이 농촌을 떠나려는 의지가 강함은 물론이고 ‘졸업자들이 농촌관련기관에 취직을 하고 싶어하지만, 여의치 않다’는 점으로 보아, 당국이 양성하고자 하는 중견인물 조차 직접 농사를 짓는 일에 종사하고 싶어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농촌청년들이 농민훈련소 입소를 꺼렸지만 농민훈련소가 농촌청년으로부터 완전히 배척당한 것은 아니었다. 관제야학운영이라는 당국의 정책으로 인해 1930년대 농촌청년들에게 농민훈련소는 일정한 유인력을 갖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농촌갱생’이라는 실질적 측면보다 농촌진흥운동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정착시키고 동원의 토대를 수립하고자 하는 단계였다. 특히 군 단위 농민훈련소는 서당출신이나 문맹상태의 농민들에게 ‘농촌야학’․‘계몽야학’이라는 이름 아래 무료야학을 개설했다. 야학운영은 문맹을 타파하여 농민의 생활상 불편을 덜어준다는 측면보다는 동원을 위한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53) 주로 교사들은 면사무소 직원이나 마을 내 보통학교를 마친 학력 소지자였는데, 조선어와 일본어를 가르쳤다. 이러한 과정은 무료로 운영되었는데, 교재도 무료 지급되었고 농사일이 끝난 저녁에 이루어졌으므로 청년들의 호응도는 높았다. 관제야학은 1940년대에도 계속 운영되었다.54)
농업청년대원의 자격은 청년단이나 농민훈련소 자격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고, 농민훈련소는 선발된 농업청년대원을 위한 단기훈련의 장을 제공했다. 그러므로 청년단 조직 및 농민훈련소 운영과 농업청년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농업청년대는 청년단과 농민훈련소 등 농촌진흥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수립된 정책의 구체적인 실천 사례였다. 비록 농민훈련소 설치나 청년단 운영이 농업청년대만을 위한 제도는 아니었으나 그 파생물이 농업청년대였음은 분명하다. 이들 정책에서 목적으로 한 ‘영농법 수득’을 통한 ‘농가갱생’을 구현하기 위해 직접적인 실천 대상으로 삼은 존재가 바로 농업청년대였기 때문이다.
3. 조선농업보국청년대의 성격
조선총독부가 생산한 자료에서는 농업청년대에 대해 일관되게 ‘내선일체’와 ‘총후보국’을 언급하면서, 영광스러운 ‘봉사’의 길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농업청년대는 당국이 중견청년들에게 베푼 은혜도 아니고, 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 온 몸을 바치며 선뜻 나선 보국의 길도 아니었다. 그저 무임금의 노동력 착취일 뿐이다. 농업청년대의 실체를 알기 위해 농업청년대원의 구술을 통해 일본에서 경험을 살펴보도록 하겠다.55)
1926년에 김제에서 태어난 차일봉은 자작농 집안에서 4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나 서당과 국민학교를 마친 상태에서 농업청년대에 참가하게 되었다. 서당에서는 3년간 수학을 했고, 6년제 국민학교를 마친 것으로 보아 농촌에서는 유식자에 속하였다고 생각된다. 본인 스스로도 일제 시대에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고 회고하고 있어서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국민학교는 4년제와 6년제로 운영되었는데 차일봉은 6년제를 다녔다.
차일봉은 1944년 봄에 19세의 나이로 郡의 지시에 따라 농업청년대가 되어 ‘내선일체’라는 명분 아래 일본 이바라기(茨城)현 西茨城府 北中村으로 파견되었다. 일본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전북 황등(구술자는 항등리로 기억) 소재 농민도장에서 일주일간 현지 적응훈련을 받았다.56)
전북지역에서 50명이 간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이들 50명은 이바라기현의 일본인 농가에 한 명씩 배치를 받아 농사일을 했다. 1개월(또는 3개월) 정도 일을 한 후 다시 千葉縣의 비행장건설공사에 동원되었다가 7월 말경에 귀국을 했다.57) 경상도나 다른 지역에서 모인 농업청년대원들은 다른 지역에 배치 받은 것으로 기억했다. 농민도장에서 처음 만난 인솔반장(일본인)이 줄곧 함께 했는데, 이바라기현에서는 이들을 농가에 배치한 후 보이지 않다가 치바현으로 이동할 때 다시 나타나 인솔을 했고, 치바현에서는 줄곧 함께 생활한 후 귀국 당시에도 인솔을 했다. 인솔반장은 함바(노동자합숙소)에서도 이들과 함께 숙식을 했다고 한다. 인솔반장이 군인이나 경찰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했다.58) 파견될 당시부터 임금에 대한 약속은 전혀 없었고, 치바현의 비행장에서도 최소한의 용돈마저 지급되지 않았다.59)
비행장에서는 일을 하는 동안에 휴일이나 외출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식사는 쌀밥을 제공해주었는데 별로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다. 이들은 전북에서 출발한 50명이 모두 같이 치바현의 비행장에서 노동력 동원에 종사한 후 7월말 이후에 같이 귀국을 하게 되는데, 귀국에 즈음하여 일본군 장교가 전원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고, 귀국 직후에도 도청에서 마련한 성대한 환영식에 참석하는 등 환대를 받았다.
차일봉은 귀국한 이후에 경찰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김제와 정읍, 부안 등지에서 경찰로 근무를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일제말기에 일반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차일봉의 경우에는 경찰월급(월 24원으로 기억)을 받으면서 자작농으로 농사도 지었으므로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 경찰로 근무하였으나 농사일을 위해 7-8년만에 퇴직을 하였다.
차일봉의 구술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자작농의 아들이면서 국민학교 졸업의 학력을 가진 구술자가 군으로부터 선발되어 농민도장에서 1주일간의 훈련을 통해 농업청년대원으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일본 농가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3개월 이후에 다시 치바현의 비행장에서 노동력 동원에 종사한 이후 귀국을 했다. 그 후 그는 성대한 환영을 받은 후 경찰생활을 하게 된다.
이상의 내용에서 특징적인 점은 첫째 농업청년대가 농촌지역 파견에 그치지 않고 노동력 동원에 까지 동원되었다는 점이고, 둘째 귀국 이후 경찰이라는 자리를 통해 대민통제업무를 담당하는 지배권력의 하부층에 편입되었다는 점, 셋째 농사기술을 익힌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제공하고 왔다는 점이다.
일제 말기는 조선의 전 민중이 인력 동원과 물자 동원의 대상이 되었던 시기였다. 끌고 가는 자, 끌려가는 자, 모두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극소수였다.60) 군속지원서를 쓴 사람 가운데에는 군의 직원도 있었다. ‘어차피 가게 될 것이라면 조금 더 돈을 많이 주는 데로 가자’고 생각한 것이 ‘죽을 고생’이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61) 근로보국대로 강제노동에 종사한 이후에 다시 탄광으로 끌려가거나, 계약 만기로 귀국한 노무자 출신이 다시 2차 연행에 포함되는 등 노동력 동원을 위한 당국의 의지가 매우 강하던 시기였다.62)
“(*강제연행에 대해서) 말, 말은,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 그때 그때만 해두 젊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던지 (음 :면담자) 가게 마련잉게. (음 :면담자) 일 하러 (음 :면담자) 이북으루 가나. 일본으로 가나. (음 :면담자) 일 하러 가게 마련잉게로.”63)
1941년에 九州 탄광으로 강제연행되었던 박승철옹(1914년생)이 아니더라도 농촌의 청년들은 강제연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강제연행관련 구술자료수집과정에서 한결같이 들을 수 있는 ‘그 시대는 그런 시대였다’는 이야기는 지난 시절에 대한 후한 평가로 치부될 수 없다. 주변의 젊은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지는 상황에서 반전운동을 일으키거나 연행거부와 관련한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매일 매일 한반도 전국을 뒤흔드는 전승보에 ‘세계가 일본 천하가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조선농민은 소수였을 것이다.64)
그런데 이에 비해 농업청년대원들은 단기간 노동에 귀국 이후에도 생활의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시기에 단 기간의 ‘봉사’로 시대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농업청년대의 실체는 무엇인가. 강제연행 말기에 신체 건장한 조선인 장정이 비교적 고향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상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일제말기에 초등교육이나 그에 준 하는 교육과정을 마친 중소지주 출신의 농촌 청년들이 일제의 치밀한 계획적 동원정책에 대해 어떠한 대처가 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국에 의해 선별되어 ‘중견인물’이라는 허울을 쓰고 무임금노동에 종사해야 했다.65) 주변에서 모든 조선 청년들이 국내와 일본, 미크로네시아(남양군도) 등지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식민체제 자체를 거부할 조직력을 갖지 못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지 동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편안하고 안전하며 단기간의 일자리를 택하는 정도의 문제였던 것이다.66)
그렇다면 농업청년대의 성격에 대한 해답은 당국의 연행정책에서 찾아야 한다. 일제는 농촌진흥정책 과정에서 시작된 농촌정책을 전쟁 수행과 연결 지어 단계별, 계층별로 노동력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노동력 외에 이용할 여지가 없는 하층 농민들은 인간사냥의 방식으로 동원하고, 조금이라도 농촌지배에서 말단인력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농민에 대해서는 강제연행의 화살을 피하고 지배층의 말단이나마 편입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냄으로써 조선 농민에 의한 농촌통제의 방식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일제의 통치가 아무런 방해나 위협에 처해질 리 없고, 경제적인 비용이 추가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방식을 통한 부가가치는 매우 컸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배웠고, 가진 것이 있다면, 힘든 탄광이나 멀리 남양군도 등지로 끌려가지 않고 단기간의 무임금 노동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이점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혜택을 입은 농업청년대원들이 귀국 이후 일제에 더욱 순응하게 된다는 점은 총독부 당국이 기대한 또 하나의 노림수였다. 청년대 파견과 관련된 각종 환영행사는 물론이고, 귀국 직전에 현지에서 이루어지는 간담회와 귀국 직후 국내에서 열리는 귀환보고대회 등은 청년대원들에게 이들의 활동이 갖는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데 기여했다.
조선총독부 당국의 입장에서 볼 때, 농업청년대는 일본 당국이 내세웠던 ‘내선일체’와 ‘총후보국’은 물론이고, 중견인물 양성의 성과물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을 갖는 존재였다. 조선총독부는 농업청년대를 통해 “(*농업청년대원들은) 농촌의 중견자로서 반도를 대표한다는 自重과 자긍심을 갖고 파견의 취지를 명확히 파악한 純情有爲한 청년. 반도와 가장 관계 깊은 농업국으로서 알려진 중국(*일본의 중국지방을 의미)의 4현, 진흥이 현저한 13개 우량 町村, 壯丁의 應召로 심각한 일손부족을 느끼는 질박한 농가. 이러한 좋은 조건에 혜택을 받아 시일이 지나면서 작업의 진전에 따라 청년과 농가 및 농촌의 친밀함은 더욱 깊어지고 융합은 더욱 깊어가 드디어 서로 아버지라고 부르고 어머니라고 하며 자식과 같이 이끌어 가는 사이에 內鮮이라는 소리는 물론, 內鮮이라는 단어 조차 초월하여 조선통치의 최고지표인 내선일체를 땅에서 실천”하고자 했다.67) 농촌통제정책을 통해 선발한 조선의 청년들, 좋은 조건의 혜택을 입은 청년들을 일본 농가에 파견하여 일선 부족을 해결하면서 내선일체를 이루려는 것이 조선총독부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에 따라 농업청년대의 성격을 규정하면, 농업청년대는 강제연행 가운데 노동력 동원의 범주에 해당한다.68) 농업청년대는 당국의 농촌통제정책에 따라 수립된 농촌청년층에 대한 동원정책의 산물이다. 당국은 1930년대부터 수립한 농촌정책에 따라 전국을 대상으로 지배정책의 지지세력과 하부수행자층을 양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선진 영농법 습득과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이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당국은 파견대상자의 선정에서 훈련과정, 귀국 이후에 부가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귀국 이후 합숙훈련)을 아끼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는 정신적․현실적 보상이 주어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들의 파견활동은 당국이 내세운 논리와 같이 조선농촌사회를 변화시키는데 기여하지 못했다. 당국도 농촌사회의 변화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당국은 귀국한 농업청년대원들을 농촌의 영농지도자가 아닌 경찰 등의 하부수행자로 활용하였다. 설사 청년들이 조선농촌을 개량하고자 한다 하여도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토지소유문제나 농기구 등 조선농촌문제의 걸림돌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없이 몇몇 청년들의 근면성만으로 생산력 향상은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69) 결국 당국의 논리는 명분에 불과했다.
4. 맺음말
일제 말기에 약 700만명의 조선인이 국내와 해외에서 겪었던 강제연행의 역사는 한국근현대사에서 ‘옛날에 다 그렇게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 ‘오래 전에 있었던 아득한 옛 이야기’ ‘끄집어낸들 아무 소용이 없는, 이미 57년이나 지난 이야기’로 넘길 수 없는 중요성을 갖는다. 강제연행의 역사는 분단문제는 물론이고, 현재 해외한인문제까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70)
그러나 강제연행의 실체는 여전히 분명하게 다가서지 않고 있다. 연인원 5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국내연행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으며, 건설현장에 동원된 산업위안부의 실태에 대해서는 인식 조차 하지 못한 것도 대표적인 예이다.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의 귀환에 대해서도 연구의 출발점에 놓여 있다.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우키시마마루(浮島丸)사건 외에도 다이헤이마루(太平丸)사건, 미츠비시중공업조난사건 등 귀환 당시 선박조난사고는 현재 그 규모 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즉 당시 조선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연행되었고, 무엇을 겪었고, 또한 어떤 과정을 거쳐 돌아왔는가 하는 점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것이다.
강제연행의 개념이나 범주, 성격에서도 통론이라고 할 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현재 연구자 가운데에는 강제연행의 범주를 일본 당국이 설정한 3단계 기준에 따라 1944년 징용이 실시된 이후로 한정하거나 ‘인간사냥’방식에 해당된 사례만으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피해사실에 치중한 나머지 일본제국주의라는 시대적 성격을 간과한 결과이다. 즉 ‘물리적으로 강제력에 의해 끌려갔으면 강제연행이지만 신문의 구인광고를 보고 갔거나 많은 임금을 약속한 제안에 속아서 선택하였다면, 강제연행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바로 이것이다.71) 강제연행의 범주 및 성격에 대한 고민은 식민지 성격과 일제 말기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은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일제 말기는 바로 일본제국주의가 총동원체제 아래에서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시기였다는 점, 일본제국주의가 침략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동원대상인 식민지 조선인 청장년들의 선택지가 제한되었다는 점, 조선인 청장년의 선택이 전쟁수행과 무관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고민의 폭은 줄어들게 된다. 더구나 ‘일본제국주의’라는 용어가 내포하는 함의를 되짚어본다면 해답은 더욱 분명해진다.
일제가 전개한 강제연행의 기준이나 방식도 문헌자료에 나타난 바와 같이 엄정한 원칙에 따르거나 일정하지 않았다. 전쟁의 전개 양상에 따라 임시적인 조치로 일관했다. 전쟁수행을 위한 중앙의 지시가 지방의 하부단위에 까지 전달되어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것도 아니었다. 1945년 3월에 징병을 피해 도주했다가 해방을 맞은 趙萬濟는 징집 대상이었지만 영장발급이 5개월이나 지체되는 바람에 징집을 거부하는데 용이했고, 1944년에 일본제철에 끌려갔던 林君鎬는 강제연행 거부자에 대해 가혹한 懲治가 가해졌던 동원상황 속에서도 “어렵게 살아가는 것을 안쓰러워 한” ‘동리 실력자(면서기 및 구장)’의 비호 및 묵인 아래 수년간이나 강제연행을 피해 생업에 종사하고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며 “딸 하나 낳고 참 재미나게” 살 수 있었다.72) 특히 패전이 임박해서는 더욱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였고, 귀환에 대해서는 ‘무방비상태’로 방임했다. 강제연행의 역사는 현재 이해하고 있는 사실 이상으로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지금까지 규명된 강제연행의 역사는 채워지지 않은 부분을 매우 많이 보이고 있거나 잘못된 내용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본고는 일제말기에 전개된 강제연행의 다양한 양상을 파악하고 공백을 채우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당국이 조선의 농촌청년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조선농업보국청년대의 파견목적, 파견과정 및 실태에 대한 고찰을 통해 강제연행의 또 다른 양상을 제시하였다. 소지주 정도의 경제력과 국민학교 정도의 교육을 받은 농촌 청년들이 ‘내선일체’와 ‘선진 영농법 습득을 통한 조선농촌 갱생’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 농가와 토목노동현장에 파견되어 단기간 무임금노동에 종사한 후 귀국한 것이 조선농업보국청년대의 실체이다. 농민훈련기관을 통한 농촌훈련생 양성 과정은 농업청년대를 이해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농민훈련소와 농민훈련소가 운영하는 관제야학에서는 정신훈련과 근로훈련이 교육과정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당국의 농촌청년정책에 따라 양성된 조선의 청년들이 농업청년대로서 파견되었다.
조선농업보국청년대의 역사는 강제연행의 역사 가운데 극히 소수인 3,000여명이 경험한, 하나의 사례이다. 그러나 일제말기에 대한 완전한 역사적 복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러한 작은 사례의 규명은 강제연행이라는 사실에 다가서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 출처 : < http://wednes.netian.com >
원문 : http://wednes.netian.com/archives/jhk02-02.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