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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원권에 실린 신사임당은 남휘.정선공주의 외고손녀
2009.6.23일 새 5만원권이 발행 되었는데, 지폐의 도안 5천원권의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이자 여류 서화가로 유명한 신사임당이 실려있다.
얼른 보기에는 남씨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나, 실은 신사임당(申師任堂)은 남휘(暉).정선공주의 외고손녀이다.
족보를 살펴보면 1693년(숙종19년)에 발행된 남씨 최초의 족보인 계유보(癸酉譜)에 의산군 남휘(暉)와 정선공주 소생으로 아들 빈(份)과 딸로서는 신자승(申子繩)이란 사위와 서자로 표시된 동(仝), 흡(翕)이 기록되어있다.
그 후에 나온 족보에 붕(倗)이 2남으로 추가되어 붕(倗),동, 흡으로 이어져 오다 동, 흡 후손은 절손 된 상태다.
이를 조선왕조실록과 대조해보면, 정선공주의 소생이 1남1녀라고 했으니, 빈(份)과 신자승에게 출가한 딸이 공주의 소생이고, 붕, 동, 흡은 실록에 나오는 후처 윤이(閏伊)에게서 난 소생인 것이다.
조선조의 사회구조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를 거론한다면, 문벌(門閥)간의 연혼(連婚)을 들 수 있다.
그 당시는 사돈의 가문을 내세우는 것으로, 은연중에 자신의 가문이나, 지위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족보를 살펴보면 아들의 경우에는 이름을 차례대로 먼저 적는다. 딸은 누님이라 할지라도 아들 다음에 女라고 표시하고 사위의 이름을 등재한다.
물론 어느 가문의 누구의 핏줄임도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당시의 여성들에게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찮은 잡초에도 거기에 합당한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귀한 딸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을 리 없다.
이름은 있었으되 족보에 등재하지 않았던 것은, 사위의 이름을 등재하면서, 사돈의 문벌을 과시하고자 하였던 것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정선공주의 소생인 딸과 결혼하여 남휘의 사위가 된 신자승의 가문을 살펴 보면
<신자승>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평산 신씨>의 시조 <신숭겸>의 17대손으로, 신자승의 부친은 신개(申槩)라는 분으로, 1445년(세종27년)에 좌의정에까지 이른 분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시호는 문희(文憘)로서 세종의 묘정에 배향된 분이다.
신자승의 형은 자준(관찰사), 동생은 자형(집의)으로 명문대가 집안이었다.
신자승에게 출가한 공주의 딸은 무려 아들8, 딸5명을 두어, 1758년(영조34)에 2번째로 발간한 의령남씨 무인보(戊寅譜)를 보면, 4P에 달할 만치 후손들이 번창하였음을 볼 수 있다.
장남 숙정(叔楨))은 평산 신씨 장령공 종중을 이루고 있으며, 2남은 숙모(叔模), 3남은 숙근(叔根)이다.
4남은 영월군수를 지낸 숙권(叔權)으로 군수공 종중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아들 진사 신명화(命和)의 딸이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그러니까 남휘. 정선공주의 외 고손녀인 것이다.
5남은 숙삼(叔杉), 6남은 숙회(叔檜), 7남은 숙지(叔枝), 8남은 숙완(叔椀)으로, 평산 신씨(申氏) 중에 70%이상 차지할 만치 번창하게 된 것이, 이에서 비롯되었다 할 만하다.
세종6년3월6일자 조선왕조 실록 정선공주의 졸기 편에 당대의 문장가 윤회(尹淮)가 쓴 묘지명(墓誌銘)을 보면
“정선 공주는 태종비 원경 왕태후의 막내 따님으로, 보국숭록대부 의산군 남휘에게 출가하였으니, 의령부원군 충경공 남재의 손부이었다.
공주는 나면서부터 어질고 아름다웠으며, 덕과 용모가 아름다웠다.
이미 출가하여 남편을 순하게 받들며 시어머니 섬기기를 예로 하였고, 치가(治家)함에 부지런하고 검박하게 하여, 조금도 귀한 세력이라 자긍(自矜)하지 아니하였다. 그 명(銘)에 이르기를
왕가의 파벌로서 무성한 오얏나무에 광채가 더하였다. 엄숙하고 화한 덕은 남편이나 집사람들에게 마땅하게 하였다. 수(壽)는 비록 짧다하나 그 남은 것은 길도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과연 오늘날에도 신사임당을 통해 정선공주를 다시한번 추모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하는 것을 보면 과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몇 가지 바로 잡을 것은 족보에 의산군 남휘가 3남으로 되어 있으나, 이 실록에서 2남으로 되어 있고, 남이장군은 정선공주의 손자인데 연려실 기술에서부터 아들이라고 잘못 전해지고 있는 점도 고쳐 나가야 할 부분이다
<평산 신씨>와의 관계는 숙종 19년 (1693년)에 발행한 <남구만> 공에 의해서 의령남씨 족보가 최초로 발행한 계유보(癸酉譜)에서 참고한 것인데, 1995년도 평산 신씨 <문희공 족보>를 발행하는데, 4남 <숙권>이 장남으로, 장남 <숙정>이 4남으로 뒤바뀌어 논란이 일고 있던데, 우리 남문의 <계유보>가 하나의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리라 본다.
* 참고 : 다음카페- 신사임당 가계도. 신자승 검색. 계유보
2009.6.30 의령남씨 의산군파 봉사공 후손 남인우 쓰다.
(연락처 부산 해운대 HP 010-3885-0484)
우리나라 현모양처의 상징 '신사임당(申師任堂)'
신사임당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 율곡 이이를 길러낸
지(知)와 덕(德)을 갖춘 총명하고 인자한 어머니라는
이미지와
글씨와 그림에 능했던 여류 예술가라는 평가로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인식되며 우리나라 역사상
보기 드문 여성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 강릉 오죽헌,
5만 원권 지폐 속 주인공이라는 것 말고는
정작 우리가 신사임당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는데요.
'현모양처(賢母良妻)'라는 말은
어진 어머니이면서 착한 아내라는 뜻인데
신사임당의 어떤 면이
현모양처의 표본이 되었던 것일까요?
어떻게 신사임당은
자식 교육의 모범이 된 어진 어머니
그리고 내조 잘하는 착한 아내가 되었던 것일까요?
과연 신사임당은 조선시대 유교적 여성상이 말하는
가부장적 시대에 어울리는 현모양처였을까요?
마음이 부자 되는 글은
'한국 여성의 사표' 신사임당의 삶을 조망하면서
평생 자주적 인격체로 살아가면서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개척하려 애썼던
한 여성의 노력이
역사라는 시대적 수레바퀴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사임당은
조선 시대 중기 1504년(연산 9년)에 태어나
1551년(면종 6년)에 사망한
여류 문인, 유학자, 시인, 작가이자 화가입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정치인 율곡 이이와
여성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이기도 한데요.
신사임당의 집안 평산 신씨 가문은 강원도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로 증조부가 성균관 대사성, 조부는 영월 군수, 아버지 신명화는 기묘사화로 벼슬길에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당대에 이름이 높은 선비였습니다.
외가도 부유하고 집안 내력이 좋아서 오죽헌만 해도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장인에게 받았던 것을
사위인 신명화에게 넘겨준 재산으로
집안의 노비만 해도 1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용인 이 씨 사이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는데 아들은 하나도 없었답니다.
신사임당의 본명이 나와 있는 문헌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정확한 성명은 알 수 없으나
'신인선'이라고도 하나 분명하지 않고
'사임당'은 그녀의 당호입니다.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스스로 호를 '사임당(師任堂)'으로 지었다고 하는데요. 사임당 신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다른 자매들보다도 일찍 글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시, 글씨, 그림에 매우 능하여
4세부터 글공부, 7세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는데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려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였습니다.
아들딸의 차별을 두지 않았던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과 조카 딸들에게도 글을 가르쳤고
신사임당을 비롯한 다섯 딸들은 신명화에게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유교의 사서 육경과 주자를 배우면서 일찍부터 성리학적 학문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사임당은 기억력이 비상하여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외할아버지 이사온으로부터 부덕과 소학, 대학,
가례에 대한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친정어머니 이 씨는
죽은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고 죽은 남편에게 정절을
지켰다 하여 열녀로 표창을 받은 인물로
사임당은 홀로 5녀를 키운 어머니 이씨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컸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의 어머니 이 씨를 아들 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살도록 하였기에
신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서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신사임당은 감수성 또한 예민하여
예술가로 대성할 특성을 보여주었는데요.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 눈물을 지었다든지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는 일화 등은
사임당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임당이 그린 그림이나 글씨, 시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요.
풀벌레, 포도, 화조, 어죽, 매화, 난초, 산수 등에 뛰어났습니다.
어숙권은 자신의 저서 '패관 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라고 평할 정도입니다.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이 얼마나 섬세한 사실화였는지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으니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산수도, 초충도, 연로도, 자리도, 노안도, 요안조압도와 6폭 초서 병풍 그리고 서예작, 수자수 등의 그림과 글씨가 전해져 옵니다.
신사임당이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적었던 시
'사친' 즉 '어머니를 그리며'입니다.
어머니를 향한 신사임당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보여주는 시인데요.
외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과 배려를
마음껏 받으며 부덕을 갖춘 현모양처가 될 수 있었고
자신이 누렸던 그것을 그대로 자식들에게 베푸는
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로서 대학자 이이, 이우
그리고 화가 이매창을 길러내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번 바라보니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내리네."
신사임당은 친정을 떠나 대관령 고개에 이르러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며 친정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유대관령망친정'이라는 시로
남기고 있는데요.
어머니에 대한 신사임당의 특별한 사랑은
율곡 이이가 어머니 신사임당에 대해 보여준 존경과
사랑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고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정결한 지조,
순효한 성품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는데요.
율곡은 어머니에 대해 "어렸을 때 경전을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라고 적었습니다.
이이는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 신명화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기도를 올릴 만큼 효심이 컸다고 하는데요.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이이는 한때 금강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요.
율곡에게 우상이라 할 수 있었던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슬픔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합니다.
시, 글씨, 그림은 물론 학문에도 능했던
조선 시대 엄친딸의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사임당의 명언입니다.
사임당은
조선 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의 틀을 벗어나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상을 스스로 개척하며
자유로운 영혼의 사상을 가진 여성으로 살았습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 '현모양처 신사임당'이었음이
틀림없었겠지만
신사임당은 '화가 신사임당', '시인 신사임당',
'활동하는 여성 신사임당'이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십시오.
우리가 7남매나 두었으니 더 구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기'의 교훈을 어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앞둔 신사임당이 남편 이원수에게 한 말입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조선시대 전통이라면
가당치도 않은 말을 남편 이원수에게 하고 있었습니다.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무조건 고분고분한 여성'은 아니었습니다.
집안을 다스리고 자녀들을 올바르게 양육하며
남편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현모양처의 길이라면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인 동시에
능동적인 삶을 스스로 개척하며
뛰어난 화가이자 시인의 예술적 역량을 발휘하며
역사 속 자주적인 한국 여성의 표본을
선도적으로 보여준 활동하는 한국 여성의 사표로
더 기억되고 싶을 것입니다.
[출처] 현모양처의 아이콘 신사임당 명언|작성자 분양 도깨비
남휘. 정선공주의 외 고손녀인 신사임당
남인우(47)카페지기추천 0조회 14711.08.06 07:26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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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곡의 어머니. 예술가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 신사임당(申師任堂) 신사임당...본명은 인선...( 1504~ 1551). 그는 강릉 북평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19세에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한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죽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 왔다. 이후 시가(媤家)인 파주 율곡리에서 생활하기도 하였지만, 자주 강릉에 내려가 홀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렸으며,이 시기에 셋째 아들인 이율곡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가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하여 서울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가 되던해 삼청동으로 이사간다. 그 해 남편이 평안도로 부임하기 위하여 아들과 함께 갔을 때, 혼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최근 한국은행이 고액 신권화폐의 모델로 신사임당을 선정하였을 때,여성계는 "현모양처"라는 家父長的 사회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選定이나 그 反對의 이유가 현모양처이라면 한국은행이나 여성계나 둘 다 웃기는 이야기이다. 신사임당은 결코 현모양처가 이니었기 때문이다. 처가에서 결혼을 하고, 친정아버지 3년 喪을 치르고 나서야 시어머니를 처음 대면하였으며, 혼인한지 19년이 지나서야 시집에 들어 온 신사임당이 과연 女性界가 반대하는 이유인 가부장 사회의 理想的 여인상이었을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신부집 본채 뒤에 서옥(壻屋..사위집)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혼례를 치른 뒤에도 사위가 서옥에 살면서 아이를 낳아 장성한 뒤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처가에 머무는 동안 사위는 노동력과 패물을 제공하여야 했다. 태종실록에도 " 혼인 예법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들어 아들과 손자를 낳아서 외가에서 자라게 합니다, 조선에서도 아직 옛 풍속을 따르고 있습니다" 라고 예조가 보고한 내용이 있다. 이러한 혼인 풍습을 바꾼 것은 世宗과 유학자인 士大夫들이었다. 세종은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와 신랑집에서 혼인하는 중국식으로 바꿔야 한다고생각했고, 왕실이 앞장 서 이를 실천하였다. 세종이 숙신옹주의 혼례를 中國式으로 치른지 87년이 지나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잡았던 중종17년(1522년)에 혼인한 신사임당은 이 풍습을 거부하였다. 신사임당의 아들 이율곡의 명성이 그 어머니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왜곡되어 간 것이었다. 차라리 위와 같은 행적의 신사임당을 家父長 社會를 거부한 여권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할지 모른다. 역사는 이렇게 왜곡되고, 그렇게들 알고 있게 된다. 사임당의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才能은 일찍부터 나타나 이미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보고 스스로 사숙하기도 하였다. 그의 주된 그림 소재는 풀벌레, 화조(花鳥), 매화, 난초, 산수(山水) 등으로, 이러한 화제(畵題)를 통해 나타난 그림은 마치 生動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이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와 詩, 문장에도 주위의 격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율곡은 후일 어머니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율곡은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그리고 정결한 지조 등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넷째 아들 우(瑀)와 큰딸 매창(梅窓)을 자신의 재능을 계승한 예술가로 키워 냈다. 대표작 으로는 자어리도(紫魚里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연로도(蓮鷺圖) 등이 있다. 대관령 구도로 옆에 있는 申師任堂思親詩碑 (신사임당사친시비)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신사임당은 1504년 강릉에서 태어난 19세에 서울로 출가해 친정과 시가(媤家)를 오가려면 부득불 대관령을 넘어야 했다. 특히 어머니가 된 사임당은 어린 아들 율곡 이이의 손을 잡고 대관령을 넘곤 했다. 대관령을 넘어 친정으로 향할 때는 구름이라도 탄 듯 홀가분했겠지만 다시 대관령을 넘어 서울 시댁으로 향할 때는 늙으신 어머니를 남겨두고 발길을 돌리는 것이 너무 힘겨워 어머니를 그리는 사친시를 온 맘으로 썼으리라. 지금도 대관령 옛길을 오르다 보면 옛 영동고속도로 구간과 마주치는 곳에서 ‘신사임당사친시비’를 만날 수 있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이런 사임당의 마음이 새겨져 있다. 이 시는 사임당이 38세 때 강릉 친정으로 어머님을 찾아뵙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대관령에서 오죽헌 쪽을 바라보면서 홀로 계시는 늙으신 어머님을 그리며 지은 것이다 율곡 이이선생이 어머니 신사임당의 손을 잡고 한양으로 가기위하여 험한 산길을 오르시던 모습과,이제가면 친정에 또 언제오려는지, 오죽헌을 향햐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신사임당의 모습이 떠오른다. 약속한 十年 공부 사임당은 19세에 李元秀와 결혼한다. 그러나 남편인 이원수는 학문과 예술 등 모든 면에서 사임당만 못 하였던 것 같다. 부인은 어느 날 남편과 마주 앉아 서로 각각 나누어서 10년 동안 학업을 닦은 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마침내 이원수는 부인을 처가에 두고 서울을 향해서 길을 떠나게 되었다. 10년동안에 크게 성공해서 돌아 오라는 부인의 강력한 권고의 말을 들으며 그는 길을 떠나지만, 처가인 오죽헌에서 20리 되는 성산이란 곳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집으로 되돌아 왔다. 둘째 날..그는 다시 길을 떠나지만 대관령 가맛골이라는 곳까지 40리를 갔다가 다시 집으로 되 돌아온다. 또 다시 3일째...이번에는 대관령 반쟁이라는 곳까지 갔다가 역시 돌아 온다. 사임당은 " 대장부가 한번 뜻을 세우고 10년을 작정하고 학업을 닦으러 길을 떠났건만, 이같이 사흘을 잇따라 되돌아 오고, 되돌아 온다면 당신이 장차 무슨 인물이 되겠소" 하며 아픔을 느낀다. 남편인 이원수는대답한다. "학업도 학업이지만 나는 도저히 당신을 떠나서 10년이란 긴 세월을 따로 있을 수가 없소. 한 시각도 떨어 질 수가 없는데야 이쩌겠소"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사임당은 바느질그릇에서 가위를 끄집어 내어 남편 앞에 두고, 심각한 목소리로, "만일 당신이 이 같이 나약하고, 무능력한 남자로 그친다면, 나는 세상에 희망이 없는 몸이라 어찌 더 오래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이 가위로 머리를 자르고 여승이 되어 산으로 가든지, 그렇치 않으면 불측한 얘기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내 인생을 마치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이원수는 눈이 번쩍 띄어, 그 날 밤이 지나서는 부인과 작별하고, 서울로 올라 와 열심히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타고 난 그릇은 어쩔 수 없었던지 그저 평범한 관리로 지내다 죽는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본명은 신인선이다. 사임당(師任堂)은 당호(堂號)이다. 당호란 본채나 별채의 이름이다. 그리고 당(堂)은 안주인이 기거하는 집안의 한건물을 말한다. 신사임당이 강릉 오죽헌에서 자신이 거처하는 곳의 당호를 지었는데,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신사임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즉, 사임당은 그의 호(號)가 아니라 그가 거처하던 건물의 이름이다. 師任에서 師는 스승을 의미한다. 그리고 師任의 任은 옛날 중국 周나라 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 즉, 신사임당은 太任을 스승으로 본 받고 싶다는 의미에서 사임이라고 한 것이다. 공자(孔子)는 周나라 文王시절을 이상향으로 보고, 그 문물을 존중하였다고 한다. 특히 태임의 태교(胎敎)를 본받고 싶어 하였다. 태임의 성품은 단정하고 성실하며 오직 덕(德)을 실행하였다고 한다. 그가 문왕을 임신해서는 눈으로 사악(邪惡)한 빛을 보지 않았고,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오만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문왕을 낳으니 총명하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여 마침내 주나라의 최고 현군이 되었다. 이렇게 신사임당은 율곡을 비롯하여 7 남매를 그렇게 키워냈다 성종23년 3월10일 강원도 인제에 사는 남이장군의 노비 8명을 인제현에 영구히 속하게 한 기사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할머니 정선 공주의 딸이 시집간 평산신씨의 세거지가 강릉 쪽 이고보면, 정선공주 때 부터 강릉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쉬어가는 거처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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