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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면적
터키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세 대륙을 연결하는 교두보로서 삼면이 북쪽은 흑해, 서쪽은 에게 해, 그리고 남쪽은 지중해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리스, 불가리아, 구소련,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의 6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2. 지역별 특성 전체적인 지역적 특징을 보면 북쪽의 흑해를 따라 달리는 폰토스 산맥과 남쪽의 지중해 연안을 동서로 달리는 토로스 산맥은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의 고원과 광활한 평원을 에워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동부 지역은 산맥이 많아 평균 고도가 높은 편이고 구소련과 터키, 이란의 접경을 이루는 아라라트 산이 놓여 있다. 터키는 지리적 특색에 따라 흑해, 마르마라 해, 에게 해, 지중해, 중앙 아나톨리아, 동부 아나톨리아, 동남부 아나톨리아의 7개 지역으로 나뉜다. ① 흑해 지역의 북부 해안 지대는 구릉 지대가, 동부 지역은 비교적 고도가 높은 산맥이 많이 있고, 중앙부에는 흑해로 유입되는 강인 예실으르막과 크즐으르막이 흐르고 있다. ② 마르마라 해 지역은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 마르마라 해 인접 지역과 트라키아 반도의 터키 영토를 말하는데 소아시아 지역에는 아다파자르, 파묵오바, 이네굘 저지대 등 비옥한 평원이 동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어 있다. 트라키아 지방도 터키의 곡창 지대로 많은 양의 밀이 생산된다. ③ 에게 해 연안으로부터 서부 아나톨리아까지를 포괄하는 에게 해 지역은 해안 지대와 내륙 지방 사이에 지리적 특성과 사회적·경제적 구조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④ 지중해 지역은 터키의 남부를 말하는데 토로스 산맥 바로 밑에는 넓은 평야 지대가 있다. ⑤ 중부 아나톨리아는 북부와 남부의 산악 지대로 둘러싸인 완만한 구릉 지대로 스텝 기후의 특색을 나타내 토질과 식물 분포에 균일한 특성이 나타난다. ⑥ 동부 아나톨리아는 면적이 가장 넓은 곳으로 평균 해발 고도가 1500~2000m에 이르는 험한 산악 지대여서 인구 밀도가 매우 낮으며, 개발 계획의 적용이 어려워 생활 환경도 열악한 편이다. ⑦ 동남부 아나톨리아는 면적이 가장 작은 지역이나 비교적 해발 고도가 낮은 서부 지역과 이라크와의 접경 지대를 포함하고 높은 고원인 동부 지역으로 구분된다. 3. 기후 터키는 다양한 지형적 특성, 특히 해안과 평행으로 뻗은 산맥의 영향으로 지역마다 심한 기후의 차이를 보인다. 지중해 지역의 기후는 일반적인 지중해성 기후와 비슷하지만 여름에는 무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온난 다습하고 비가 많이 내린다.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 남부 역시 지중해와 비슷하나 마르마라 해 북쪽으로 갈수록 기온이 약간 떨어지고 흑해 기후의 특성이 나타난다. 흑해 연안은 온화한 해양성 기후가 뚜렷하며, 기온의 월교차가 매우 작다. 아나톨리아 내륙 지방은 여름에는 고온 건조하고 거의 비가 내리지 않으나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한랭 다습한 전형적인 고원 지대의 기후이다. 터키는 북위 36도와 42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 나라처럼 4계절이 구분되어 있다. 여름에는 아조레즈 제도에서 발생하는 건조한 기류의 영향으로 아열대성 기온 지대에 속하고 겨울에는 시베리아의 한랭한 고기압의 영향을 받는다. 해안의 온화한 기류와 대륙의 한랭한 기류가 충돌하여 내륙 지방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연간 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는데 내륙 지방은 해안 지방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강수량이 가장 많은 계절은 겨울이며, 중부 아나톨리아는 봄에, 지중해·에게 해·마르마라 해 지역에서는 가을에 우기가 시작하여 봄까지 계속되며 흑해 지역에서는 연중 비가 내린다. II. 역사 1. 흉노 제국 터키의 역사는 B.C. 3세기께 중국의 북방에서 건국되어 한나라에 위협적 존재로 여겨졌던 흉노 제국에서부터 시작된다. 흉노는 기마와 궁술에 능해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스텝의 서쪽 지역에서 활동하던 스키타이인들과 대결하는 한편 한나라를 공략하였다. 그러자 비단길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성을 절감한 한무제는 강력한 흉노 토벌 정책을 시작하였 다. 이러한 한무제의 흉노 정벌로 인하여 흉노의 중국 변방에 대한 침공이 중단되고, 국가의 수입이 감소하여 흉노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권력 투쟁과 귀족, 관료, 왕자들 간의 알력과 갈등도 심화되어 흉노 제국은 급속히 약화되어 48년에 남흉노와 북흉노로 분리되었다. 남흉노는 중국과 북흉노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다가 216년에 중국에 복속되었고, 북흉노는 독립 국가 형태를 유지하며 후한과 대립하였으나 선비족과 연합한 한나라에 패한 후 흩어졌다. 2. 돌궐 제국 흉노 제국에 이어 스텝 지역을 통일하고 투르크계 종족들을 통합한 것이 6세기의 돌궐 제국이다. 돌궐 제국은 처음으로 `투르크'라는 정식 명칭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돌궐 제국의 창건자인 부민은 연연 치하에서도 연연의 공주와의 혼인을 요구하는 등 완전한 예속 상태가 아닌 독자성을 유지하며 서위와 연합하여 552년 연연을 멸망시켰다. 부민이 사망하자 스텝의 관습대로 형제, 자식에게 분배된 제국은 서부는 동생 이스테미가 통치하였고, 동부는 아들 무칸이 통치하였다. 서부 지역을 다스리던 이스테미의 정복 사업으로 당시의 세계 제국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과도 대등한 입장에서 정치적·경제적으로 관계를 수립하였고 실크로드상의 요충지들이 돌궐 제국에 편입됨으로써 내륙 아시아 실크로드 중개 무역을 투르크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칸과 이스테미 사후 돌궐은 카간위를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동·서로 완전히 분리되었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에 의해 스텝의 패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수나라 조정은 동·서 돌궐의 분열과 내분을 획책하고 최대한 이용하며 동돌궐에 비해 군사적·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서돌궐을 막기 위해 동돌궐을 적당히 지원하여 예속시키는 정책을 구사하였다. 수에 예속되어 그 존재를 유지하던 동돌궐은 수나라가 고구려 원정에 전력을 기울이는 틈을 타 도전을 감행할 수 있었으며, 당조를 건설한 이연과 서돌궐은 동돌궐과 완전히 결별한 상황이었으나 동돌궐의 중국 복속에 분개하여 여러 차례 도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서돌궐 역시 내분으로 인하여 658년께 중국에 완전히 복속되었다. 630~680년에 이르는 50년 동안의 암흑기를 거쳐 680년께 다시 당에 대항해 후돌궐 시대를 열게 되었다. 쿠틀룩에 의해 재건된 후돌궐은 외튀켄을 중심으로 강성해졌으며 그의 동생 카프간이 통치권을 이어 받으면서 중국 공략을 더욱 강화하였고 서부 군대로 하여 트란스옥시아나 주변에 대한 정벌을 계속하여 실크로드 교역을 위해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더욱 확고히 하려 하였다. 그러나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아랍과 티벳의 도전을 받고 돌궐 국가 부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731년 이후 돌궐족의 통합은 와해되었다. 그후 751년에 티벳, 아바시야조 연합국과의 탈라스 전쟁에서 당나라가 패하게 되자 탈라스 이서 지역과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 때부터 서돌궐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게 되고, 동돌궐은 스텝 전통을 유지하며 불교를 믿다가 후에 몽골과 합류하였다. 3. 위구르 제국 돌궐 제국의 멸망으로 스텝에서 새롭게 투르크의 종족적·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나라가 위구르 제국이다. 과거 돌궐 제국의 중심지인 북아시아 지역에 제국을 건설한 위구르는 13세기 몽골족이 이 곳의 지배자로 등장할 때까지 중국 문화권과 마지막으로 대결한 투르크 민족 국가였다. 위구르인은 전통적 유목 생활에서 정착 농경 생활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종교와 사상을 수용하였고, 유목과 농경, 동서 문화를 두루 수용하고 융합한 수준 높은 위구르 문화를 이룩하였다. 위구르는 중국과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으나 돌궐과는 적대적이고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위구르족이 주도한 부족 연합은 혼란한 상태에서 돌궐을 멸하고 745년에 외튀켄에 위구르 국가를 세웠다. 위구르는 농경 정착 생활로 변모해 가면서 중국 문화의 수입과 교역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중국으로서도 위구르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만큼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으므로 이 두 나라는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안사의 난 이후 티벳의 흥기로 당에서는 위구르의 원정을 요청했고, 이 결과 위구르는 마니교를 공식적인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위구르는 급격한 문화적·사상적 변화의 부작용과 예니세이 강변에서 새롭게 부상한 키르기즈의 침공에 의해서 종말을 고했다. 패망한 위구르인 가운데 일부는 중국으로 잠입하기도 하고 또는 내륙 아시아로 이주해 생존하며 위구르 제국의 재건을 준비하였다. 847년께 칸수 지방에 정착한 위구르 씨족 연맹의 일부는 독립 국가를 이룩하기도 하였으며 현재까지 중국에서 주요한 투르크 민족의 후예로 잔존해 있다. 한편 내륙 아시아로 이주해 갔던 위구르인들도 독립 국가를 형성해 살면서 중국에 이슬람교를 전파하였다. 4. 대셀주크 제국 위구르의 등장으로 돌궐 제국이라는 체제 속에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투르크족의 연합이 와해되었다. 그러나 11~14세기 투르키스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에 형성된 대제국인 대셀주크 제국에 의해 투르크족은 이슬람 세계로 재통일되었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투르크족들은 무슬림 아랍 국가들을 침입하기보다는 성전 원리에 따라 이교도인 비잔틴 제국을 공략하여 1071년에는 대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아슬란이 비잔틴 제국의 접경까지 진출하였고, 말라즈기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의 디오게네스를 격퇴하여 비잔틴 지역의 핵심 지역을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게 하고 아나톨리아에 새로운 터키 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란 지역에서 형성된 셀주크 왕조는 일반적으로 대셀주크 제국으로,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의 셀주크 왕조는 소아시아 셀주크 국가라 구분하여 지칭되고 있다. 비잔틴 제국 영토의 일부를 기점으로 하여 서부 아나톨리아까지 확대한 소아시아 셀주크 국가는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 원정으로 군사력을 소모하는 등 심각한 위협을 받았으나 12세기 후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의 등장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1176년의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승리는 말라즈기르트 전투에 이어 아나톨리아에 투르크족의 근거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이후 비잔틴과 투르크의 대결에서 투르크에 유리한 입장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셀주크족은 스스로 성자임을 자칭하며 추종자를 모으는 바바 일리야스라는 사람과 바바 이샤크의 반란으로 인해 혼란해졌고 이 틈을 타 침략해 온 몽골군과의 쾨세다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소아시아 셀주크 국가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1308). 5. 오스만 제국 셀주크 국가의 패망 이후 몽골의 종주권이 확립되어 가자 몽골 치하에 점령되지 않은 아나톨리아 일부에서 여러 독립된 투르크멘 공국들이 등장하였다. 이 공국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스만 베이가 통치하던 1299년에 수립된 오스만 공국이다. 오스만 공국은 비잔틴 제국과 소아시아 셀주크 제국의 접경 지대에 위치하여 다른 투르크 부족 국가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면서 보스포러스와 마르마라 해변으로 이주하여 비잔틴 영토를 잠식해 갔다. 오스만을 계승한 오르한은 부르사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고 공국에서 국가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오르한은 비잔틴 군대 제도를 도입하여 기독교 용병을 모집하여 비잔틴의 공략에 전술적·심리적 상승 효과를 가져와 아나톨리아의 주요 도시들이 오스만의 영토가 되었다. 또한 겔리볼루를 통한 지속적인 트라키아 물자 약탈로 국가의 부강을 가져왔으며, 오스만의 유럽 진출을 위한 주요한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였다. 오르한의 뒤를 이은 무라트는 수도를 에디르네로 옮기고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지를 점령하였고 보스니아, 알바니아, 그리스,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성채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무라트 사후 술탄위를 승계한 바예지트 1세는 그의 부왕이 유럽 공략에 치중한 반면 아나톨리아에서 고조되고 있는 투르크멘 공국들의 봉기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바예지트는 헝가리와 비잔틴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킨 소국들을 다시 지배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동쪽에서 침입해 오는 티무르와의 대격전에서 참패하고 생포되어 사망하였다. 그러나 티무르는 인도 정벌에 착수해서 오스만 공국은 메흐메트 1세와 무라트 2세에 의해 다시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무라트 2세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된 메흐메트 2세의 정치적 과제는 비잔틴을 점령하여 세계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먼저 지중해와 유럽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로 마음먹은 메흐메트 2세는 보스포러스의 아시아쪽에 건설한 아나돌루 성에 이어 유럽 대안에 루멜리의 성채 축조를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으로 이슬람 세계에서 오스만국의 술탄이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그 통치권이 유럽, 중동 및 아프리카 등의 세 대륙까지 미치게 되었다. 셀림은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하여 처음으로 칼리프의 칭호를 사용하고 그 세습권을 취득하여 이슬람권의 종주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셀림에 이어 등극한 슐레이만 시대는 오스만 제국의 최대의 번성기라고 말할 수 있다. 슐레이만은 헝가리와 지중해를 진출의 주무대로 삼았다. 헝가리를 정복하고 오스트리아의 빈을 공격했으며 동유럽 일부, 크리미아, 이라크를 정복하고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을 통합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관료, 군대 및 성직자 체제에 부패와 질적 저하 현상이 나타났고 영토 확대에 따르는 방위 부담의 증가, 다민족 다종교 국가로서의 다양한 민족과 종교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 출신 성분에 따른 관료들의 권력 투쟁 등이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장의 결과 유럽에서는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으며 지리상의 발견이라 불리는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고 세계사가 중세에서 근대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변화이다. 슐레이만 1세의 재위기 후반에 계승권을 둘러싼 궁중 내부의 암투, 무능한 왕의 왕위 계승으로 셀림의 재위기에는 더 이상 세력 확장을 이루지 못하였다. 17세기 초 합스부르크가와의 전쟁에서 맺었던 협정으로 술탄과 합스부르크가 황제의 대등한 관계를 공식화하였고, 1639년에는 카스르쉬린 조약으로 이란에게 아제르바이잔과 에리반 지역을 넘겨 주었다. 이러한 점진적인 오스만 제국의 허약화는 1683년 두 차례에 걸친 빈 공격의 실패로 극에 달했으며 17세기 말에는 러시아, 합스부르크가, 폴란드, 베니스 등의 연합국에 오스만 제국 영토의 일부를 할양해 주었다. 17세기 말까지 러시아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팽창 정책에 동조하던 유럽 국가들이 19세기부터는 제동을 걸고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며 유럽 열강은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는 동시에 오스만 제국을 협공하였으며 영토를 분할하려는 계획이 최대 관심사였다. 프랑스의 이집트 침략에 대항할 수 없었던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 군대를 축출하기 위해 러시아와 영국의 지원을 받았으나 이는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러시아는 그리스 남부를, 영국은 이집트를 각각 군사 기지로 사용하려 하자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약화되자 피지배 소수 민족은 분리주의 운동을 전개하고 유럽은 내정에 간섭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도움으로 그리스가 독립하고 이집트는 자치화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연이어 동유럽에서 격렬한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연이은 군사적 패배와 유럽의 개입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개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군의 개혁이 급선무라고 인정한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는 군사 교육 기관의 서구화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수파와 개혁파의 대립, 종교인들의 반대, 언어 장벽이 근대화의 큰 장애 요소로 다가왔다. 그래서 민간인 교육 기관의 설립으로 서구의 문화를 이해하고 서구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신흥 지식층이 나타났다. 1839년 오스만 제국은 개혁 칙령인 탄지마트를 발표하여 종교와 인종을 불문하고 정치적 평등권을 부여하였다. 이 결과 청년 터키인으로 지칭되는 신흥 지식층이 등장하여 국권 회복의 방법으로 이슬람주의, 오스만주의, 아랍주의, 터키주의 등을 내걸고 반정부 투쟁에 나섰다. 오스만 정부 당국은 이들을 탄압하고 정치적 제재를 가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 등의 지원으로 1908년에는 입헌 혁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발칸과 아랍 지역에서 독립화 요구가 계속되고 서구 열강의 분리주의 운동 지지로 청년 터키인으로 활동했던 집권 세력이 강한 탄압 정치를 감행하였다.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견제책으로 독일과 제휴하고, 이탈리아와 벌인 트리폴리 전쟁, 그리고 발칸 전쟁으로 신진 정치 세력의 입지는 불안정해졌다. 6. 1차 세계 대전과 터키 공화국의 성립 1914년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오스만 제국은 독일과 동맹을 맺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스 연합군에 패해 분할, 점령되게 되었다. 이에 맞서 무스타파 케말을 선두로 군사령관과 부하, 지방의 유지,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독립 투쟁이 시작되었다. 1922년 9월 9일, 그리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즈미르를 탈환하고 1923년 7월에는 연합국측과 로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923년 10월 29일에 케말을 대통령으로 한 터키 공화국을 선포할 수 있었다. 1924년 4월에 제정된 공화정 헌법에 처음에는 이슬람교가 국교로 채택되었으나, 1928년에 이 조항을 삭제하여 터키는 순수한 세속 공화국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III. 정치 터키의 정치 체제는 대통령제를 가미한 내각 책임제로서 입헌 민주 공화국이다. 국가 원수인 대통령은 의회에서 선출되며 임기 7년에 단임제이다. 의회는 과거 상·하 양원제였으나 여러 가지 비효율적인 문제가 발생하여 지금은 일원제로 바뀌었으며 정족수 450명에 5년마다 국민들의 직접 선거로 선출한다. 지난 1993년 총선에서 정도당(DYP)이 제1당으로 부상했으며, 이 밖에 주요 정당으로는 조국당(ANAP), 공화당(CHP:1995년 3월 사회 민주 인민당을 흡수 통합) 및 이슬람 복지당(RP) 등을 들 수 있고, 1995년 총선에서 바로 이 복지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30년 동안의 군부 정권을 종식시키고 문민 정권을 출범시켰던 외잘( al) 대통령이 지난 1993년 4월에 심부전증으로 서거함에 따라 실시된 의회의 대통령 선출 선거에서 당시 수상이자 정도당의 당수인 데미렐(Demirel)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따라 데미렐 정권은 6월 정도당 당수였던 칠레르( ller)를 수상으로 하여(터키 최초의 여성 수상)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후 집권 여당인 정도당은 여소 야대의 정국을 돌파하는 데 실패, 결국 사회 민주 인민당(SHP)과 제휴하여 연립 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칠레르 수상은 터키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하여 의욕적으로 국정을 쇄신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연정 내 알력 심화 등으로 인한 정치 기반의 약화로 강력한 국정은 운영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계속되는 경제 사정의 악화와 해결 전망이 불투명한 쿠르드족 문제로 인해 칠레르 수상 정부의 정치적 입지가 매우 흔들렸다. 터키 정부의 최대 정치 현안이 되고 있는 쿠르드족 분리 운동은 터키와 이라크 및 이란 등 3개국의 국경 지대를 거점으로 쿠르드인들이 PKK (쿠르드 노동자당)를 결성하여 터키 남동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등 독립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터키 정부는 군병력을 투입하여 터키 영내뿐만 아니라 이라크 및 이란 영내의 PKK 거점에까지 폭격을 가해 두 나라의 항의를 받았으며 미국, EU(유럽 연합) 및 주변 국가들은 민간인 피해 방지 및 쿠르드 문제의 정치적 해결 등을 요구하며 외교적 압력을 가해 왔다. 한편 터키 의회는 이 쿠르드 문제 보고서에서 지난 10년 동안 양측 합쳐 모두 3만 5000명이 사망하였으며, 연간 70억 달러 상당의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터키 정부는 국내적으로 인권 탄압 소지가 있는 테러 관련 법안의 개정 문제와 지속적인 인플레로 인한 노동자들의 시위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다. 이러한 정치 불안의 근본 요인은 군소 정당의 난립에 따른 여당의 정치력 부재에 있는데, 1995년 2월 18일 사회 민주 인민당과 제4야당인 공화 인민당(CHP)이 새로운 CHP로 합당함에 따라 연정의 존립 근거가 문제시되었으나 3월 23일 칠레르 수상과 체틴 당수가 새 연정 구성에 합의함으로써 3월 27일 새 연정이 출발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은 지속되었고, 결국 1995년 12월 24일 실시된 터키 총선에서 이슬람 정당인 복지당이 근소한 표 차로 승리하였다. 그러나 현 집권당 등 친서방계 보수주의 정당들이 연합할 경우 복지당의 집권이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복지당은 이번 선거에서 의석 550석 가운데 헌법 개정에 필요한 의석수 3분의 2는 물론 과반수도 확보하지 못해 현재 터키의 정교 분리 체제를 위협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번 총선 결과 이슬람 국가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복지당이 제1당으로 부상함으로써 향후 터키의 진로가 주목되고 있다. 터키 당국은 금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폐허 속에서 출범한 이래 서구화를 주창하며 정교 분리의 원칙을 어렵게 지켜 왔으나 최근 이슬람 세계에서 이슬람 운동이 고조되면서 터키에서도 종교적 부활이 이루어졌는데 터키의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종교적 위상 변화는 상당한 의미를 가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고, 다수의 국민과 서방 국가들은 많은 우려를 가지고 또다시 시대적 퇴행을 걸으려는 조짐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대내적인 혼란과 변혁의 길을 걷고 있는 터키의 대외 관계 또한 그다지 순탄치만은 않다. 아타튀르크(Atat k:터키의 국부) 이후 터키의 외교 노선은 민족주의와 서방화 정책으로 대미·대서방 관계 강화를 중심으로 한 자주 실리 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터키는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이며 오랫동안 대륙붕 및 영해 문제, 사이프러스(키프로스)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어 오던 그리스와의 관계 개선으로 EU의 관세 동맹에 가입하였고 준회원국이다. 그뿐만 아니라 1991년 구소련이 붕괴함에 따라 독립한 5개국 투르크 공화국(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들과 정치적·경제적인 면에서 공통된 혈연, 종교, 언어를 바탕으로 폭넓게 교류를 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들간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질 것으로 전망되며 다시 한 번 투르크족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케말 파샤)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아버지란 뜻으로 의회가 그의 국가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붙여 준 이름으로 터키 어디를 가든 그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이 인물이 아니었다면 오스만 제국의 잿더미에서 오늘날의 터키가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1881년, 오스만 제국 통치하의 살로니카에서 태어났다. 1905년 육군 대학을 졸업하고 참모 대위가 된 그는 오스만 제국 세력하의 다마스커스, 살로니카, 트리폴리 등을 전전하며 군 경력을 쌓았다. 발칸 전쟁 후 소피아 주재 무관이 되어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에도 잠시 그 직책에 머물렀다. 1916년 갈리폴리에서 병사들을 독전하여 열세한 화력으로 영국과 안자크(영연방 국가인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을 격퇴시켜 이스탄불을 방어함으로써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923년 연합국과 로잔 조약을 맺은 후, 터키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집권하자 국가로부터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여 국가의 세속화 추진 정책을 펼쳐 코란의 율법을 스위스법 체계에 근거한 현대적 민법 조항으로 교체하였다. 이 법안은 터키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극적으로 향상시켰다. 예전에는 여성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남편의 기침하나로도 이혼당할 수 있었다. 이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고 많은 유럽 국가들보다 빠른 1934년에 투표권과 의회 피선거권을 획득하였다. 아타튀르크는 터키식 모자와 터번을 폐지하고 서양식 모자를 쓰게 했다. 1928년에는 문자 개혁을 단행하였고 미터법을 도입하고 이슬람력 대신에 태양력을 채택하였으며 이슬람교의 안식일인 금요일 대신 일요일을 공식 휴일로 정하였다. 1934년에는 성씨법을 제정하여 모든 터키인에게 성을 갖도록 의무화하였다. 그는 또 산업 진흥에도 힘을 쏟아 오늘날 터키 공화국의 기초를 닦았다. IV. 경제 공화국 출범 이후 케말 파샤(Atat k) 대통령의 영도 아래 국가 자본주의적 형태로 경제 발전을 꾀했으나 2차 세계 대전 후 민간 기업이 속속 출현하면서 혼합 경제 체제를 유지하였다. 터키 경제의 공업화는 1963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경제 개발의 결과가 미미했기 때문에 1970년대 말까지도 1차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이에 터키 정부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폭적인 시장 개방과 제조업 활성화를 통한 수출 진흥에 총력을 기울여 오늘날에는 국민 총생산 중 제조업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 제조업 가운데에서도 식·음료업, 섬유, 피혁 가공업 등 경공업 분야가 발달되어 있고, 이미 1960년대부터 국가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해 온 철강, 시멘트, 화학 산업 등이 공기업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나 경쟁력은 그리 높지 못하다. 터키는 역사적 유적이 많고 연중 온난한 기후로 비교적 관광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관광 국가로 떠오르고 있다. 실제로 관광 수입이 매년 증가해 무역 수지 적자를 상당 부분 보전해 주고 있다. 연간 관광객 수는 1994년 기준으로 독립 국가 연합 116만 명, 독일 111만 명, 영국 44만 명 등 총 380만 명에 달한다. 또한 최근에는 비록 조립 수준이기는 하지만 자동차 산업과 가전 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미국의 포드 등 세계적인 회사들과의 합작 투자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터키의 산업 구조 속에서 활약하고 있는 기업으로는 터키 최대 재벌인 코치(Ko 그룹과 사반즈(Sabanci) 그룹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그 동안 터키 정부의 경제 정책이 재벌 중심으로 흘러온 데 편승하여 자동차, 가전, 섬유 산업뿐만 아니라 금융 부문도 상당수 장악하고 있다. 한편 지난 1992년과 1993년 6.5% 이상의 실질 성장을 기록했던 터키 경제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 71.1%란 엄청난 수치를 기록한 데다, 1994년 초 터키의 리라화가 폭락하고 외환 부족으로 인한 불황을 겪으면서 3.8%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해 일부 산업에서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다. 게다가 가뜩이나 어려운 터키 경제는 UN의 대 이라크 경제 제재로 인해 석유 파이프 라인 투자액과 연결 라인 사용료를 받지 못하는 데다, 농산물 수출마저 막혀 1992년부터 3년 동안 약 200억 달러의 경제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따라 1994년 4월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터키 정부는 대외 개방 정책 지속, 물가 상승률 억제, 투자 촉진, 공기업의 민영화 방안 등을 골자로 한 긴급 경제 조치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 후속 조치로 정부 차원에서 국제 통화 기금 등 국제 금융 기관과 협의를 통해 투자 개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과는 무관하게 정부의 재정 적자가 누적되는 가운데 물가 상승률이 마침내 세 자릿수(125.5%)를 돌파하였다. 그러나 1995년에 들어서면서 농업 및 제조업을 중심으로 2/4분기부터 회복 국면에 진입해 연간 3~4%의 경제 성장(정부 목표 4.4%)이 전망되고 있다. 터키 정부는 현재 경제 안정을 경제 정책의 목표로 삼고 공기업의 민영화와 수출 증대에 강력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터키는 재정 수입과 더불어 연간 28억 달러에 달하는 공기업 적자 부담을 덜게 했다. 이 밖에도 EU와의 관세 동맹 체결을 통해 농산물과 섬유 제품 수출을 늘리는 한편, 경제 구조 개선과 재정 적자폭 축소, 세수 증대를 위한 세제 개혁 등을 통해 경제 회복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1963년부터 시작된 5개년 개발 계획은 벌써 7차 개발 계획을 맞고 있으며, 이 시기를 앞으로 21세기의 국제 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기간으로 설정하고 공업화·정보화 사회인 21세기에서 터키가 세계 경제의 중심권으로 진입하기 위해 국가간의 상호 협력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그 외에도 터키 정부는 EU간의 관세 동맹이 1996년 1월부터 발효됨으로 EU로부터의 외자 및 기술 도입, EU 국가들의 교역 확대를 도모하고 있으며, 또한 EU 가입의 준비 단계로 설정, 향후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 등을 포함하는 EU와의 완전 통합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과 더불어 세계 경제에 있어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앙 아시아 국가들과의 연계도 간과할 수 없다. 아직은 도약 단계에 있는 터키에게는 거대한 시장과 풍부한 천연 자원을 가진 중앙 아시아는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이미 터키 정부는 여러 면에서 이들 공화국들에게 지원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러한 교류는 확대될 전망이다. 게다가 지난해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 유전의 송유관 설치가 터키의 제이한으로의 루트로 결정됨에 따라 다방면에 있어 중앙 아시아의 투르크계 국가들과 터키간의 관계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EU와 중앙 아시아 외에도 터키의 대외 거래는 1980년 이후 점차 이란, 이라크, 사우디 등 인근 중동 국가와도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나라와의 경제 교류 우리 나라와 터키의 경제 교역은 1990년대 들어와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는 수출입 총규모가 1억 달러 내외에 불과했으나 1990년에 5억 달러를 돌파하고, 1993년엔 7억 5000달러로까지 상승하였다. 이는 터키 정부의 파격적인 시장 개방 정책과 우리의 동구권 및 중앙 아시아 진출 전략이 맞물리면서 일궈낸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주요 수출 품목으로는 직물류와 전자 부품 및 수송 기계 등이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1995년부터는 자동차 수출이 본 궤도에 올라 현대, 대우 자동차가 현지 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터키 현지에 진출해 있는 우리 나라의 기업으로는 전자 산업 분야에 삼성 전자, 관광 및 무역업의 윤투어리즘과 태극 관광 무역이 현지 법인의 형태로 활동중이다. 그리고 이 밖에 무역 사무소를 개설중인 기업으로는 LG, 대우, 현대, 선경 등 모두 7개 업체이며, 이들은 주로 이스탄불을 근거지로 마케팅 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총인구 6000만 명을 자랑하는 터키는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내수 시장을 가지고 있고 더 나아가서는 지리적으로 동부발칸 유럽권, 북아프리카, EU 및 중앙 아시아 등에 둘러 싸여 있어 안팎으로 엄청난 시장 규모를 자랑한다. 게다가 대외적으로 터키는 구소련 붕괴 후 독립한 중앙 아시아국들과 공통된 언어, 종교, 혈연, 문화를 가짐으로 인해 우리 나라가 중앙 아시아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러시아보다도 더 유리한 교두보이며 그 외에도 중동 국가들을 연결한 ECO(경제 협력 기구)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다. 지난 1990년에는 BESECP(흑해 경제 협력 기구)를 결성, 동구권 및 흑해 연안 국가들을 결집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비록 터키의 경제 상황이 위기 국면이라고 하나 우리 기업들로서는 서방 국가들의 관점에서가 아닌 우리 나라에 입각한 폭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가 터키에 진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메리트는 우선 관세 동맹의 효력이 발생함으로 인해 대 터키 투자는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EU로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터키의 지리적 요건이나 위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터키만큼 중계 무역지로 최적지인 곳이 없다. 게다가 6000만 명이 넘는 인구와 서구화된 그들의 의식은 무한한 잠재적 수요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민족적 뿌리를 동북 아시아에 두고 있는 터키인들은 많은 행동 양식에 있어 우리 나라 사람들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고 현지 사정을 사전에 철저히 조사만 한다면 안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진 나라가 터키이다. 이처럼 터키와 우리 나라는 상호적으로 많은 이익을 줄 수 있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양국간의 교역과 교류의 폭이 넓어지고 있으며 얼마 전 양국간에 체결된 경제 협력 증진 방안의 내용 가운데 중앙 아시아 및 동구권 진출을 위해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대목은 앞으로 우리 나라와 터키의 관계 방향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V. 문화와 생활상 1. 인종 터키족에 대한 인류학적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터키족은 황색 인종인 몽골족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 반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인류학의 발전과 그 연구 결과 터키족은 알타이 산맥의 남동부 스텝 지역에서 발원하였고, 인종학적으로는 몽골로이드가 아닌 백인계 유로피드(Europid) 그룹 튜라니드(Turanid)계 종족에 속하는 단두형(Brachycephalic)의 특징을 띠고 있다는 일설이 제기되었다. 현재 터키족은 중앙 아시아 일대에서부터 발칸 제국 및 동유럽 여러 국가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그 수는 약 1억 60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터키 공화국에 약 58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소련, 중국, 발칸 제국 및 동유럽에 1억 이상의 터키족이 있으며 이 가운데 소련 남부의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에 5000만 명 이상의 터키인이 집중적으로 모여 산다. 2. 언어 터키어는 형태와 음성적 특성상 몽골어, 한국어와 함께 알타이 어군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터키족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뒤에는 아랍 문자를 차용하여 약 10세기 이상 터키어를 아랍 문자로 표기해 왔다. 그러나 19세기 초부터 정치적·문화적 개혁이 시도되면서 언어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었고 민족 의식의 강화와 함께 터키 내의 외래어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아울러 터키어의 아랍어 표기에 대한 터키인의 발음상의 문제점과 터키어와 아랍어 사이의 음성학적인 차이가 지적되었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민족 의식의 강화는 터키어의 단순화와 터키어 문자 개혁의 원동력이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의 선포 이후 문자 개혁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무스타파 케말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정권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문자 개혁안이 신속히 마련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언어 개혁법이 터키어는 우리말과 어순이 같고, 모음 조화가 엄밀하고 정연한 점, 어간에 어미나 접미사가 얼마든지 붙을 수 있고 동사에 다양한 시제를 나타내는 접미사를 붙여 활용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우리말과 유사하다. 어휘의 많은 부분을 외래어인 아랍어가 차지하고 그 밖에 페르시아어, 프랑스에서 들여온 차용어도 많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대신에 투르크 고어가 쓰여지기도 하고 새로운 복합어가 만들어지는 등의 국어 정책이 단기간에 급격히 실시되었다. 대도시나 관광지에서는 영어도 널리 통용되며 동남부의 몇몇 소도시에서는 아랍어가 쓰이기도 한다. 아타튀르크는 문자 혁명을 통해 문맹률을 현저히 감소시켰음은 물론이거니와 터키인들에게 미래 지향적 방향을 제시하려 하였다. 현재 터키 공화국 내에 터키족이 90%를 차지하며 그외 소수 민족으로 쿠르드족(7%),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유태인 등이 존재하며 동남부 지역에서는 쿠르드어가 사용되고 있다. 3. 종교 터키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속 국가이다. 이슬람교는 1924년에 제정된 최초의 공화국 헌법에서 국교로 지정되었으나 1928년에 삽입된 헌법 수정안에 의해서 국교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현재의 헌법에는 “모든 개인은 양심과 종교적 신앙과 의견의 자유를 가지며 모든 종류의 예배나 종교 행사 및 의식은 도덕 및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한 자유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종교 행사와 의식에 참가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터키는 헌법상 국교를 명시하고 있지 않으나 전체 국민의 98% 이상의 절대 다수가 순니파 이슬람 교도이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슬람의 전통과 관행이 매우 중요시되며 특히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서 종교적 율례의 영향을 받기 쉽다. 또한 금식월(Ramazan:라마잔)이 끝나는 날 이후의 3일과 희생절은 종교 축일로서 성대한 행사가 치러진다. 터키에서 종교는 주요 정치적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며 종교와 정치는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터키인들은 주민등록증에 종교를 기재해야 하며 각종 행정 신상 서류에 종교난이 있어서 생활 전체가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비무슬림 소수 민족들은 기독교인과 유태인으로 구별된다. 기독교인은 주로 그리스 정교도와 아르메니아인, 카톨릭 교도로 구성된다. 이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종교를 믿으며 터키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4. 음식 아침은 빵 한두 조각에 수프 또는 따끈한 차를 마시는 정도로 간단하게 먹는다. 일부 사람들은 아예 아침식사를 거르기도 하고 차를 마시고 끝내기도 하지만 이러한 관습은 서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나타난 현상으로 여겨진다. 터키인들이 마시는 차는 터키어로 `차이( y)'라고 하는데 터키의 흑해 연안에서 자체 생산되며, 한 번에 두세 잔 마시는 것이 보통이다. 홍차맛과 비슷하지만 끓이는 시간과 집어 넣는 향료에 따라 다양한 맛이 난다. 어린아이로부터 어른까지 식사 후에는 물론 일과중에 자주 `차이'를 마신다. 심지어 일부 지방에서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했을 경우, 이 차를 마시지 않는 것은 마치 인사를 받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들은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기 때문에 대체로 점심식사를 빨리 하는 편으로 육류에 빵과 샐러드를 곁들여 먹는다. 빵 종류는 크게 `에크멕(Ekmek)'과 `피데(Pide)' 두 가지로 나뉜다. 에크멕은 프랑스의 바게트와 비슷한 형태로 보편적으로 피데에 비하여 더 자주 식탁에 오른다. 식당에서 흔히 제공되는 빵이 바로 에크멕이다. 음식으로서의 피데는 피자와 유사하나 치즈를 사용하지 않으며 담백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편이다. 빵으로서 피데를 의미할 때에는 빈대떡의 형태로 단순히 밀가루만을 사용하여 구운 얇고 둥글넓적한 빵이다. 저녁식사는 가족들이 모두 집에 돌아온 후 식탁에 모여서 하게 된다. 그 때 가족의 남성 최연장자가 “아피에 올순(Afiyet olsun:“맛있게 드세요”라는 뜻으로, 식사 후에 말할 때는 “맛있게 먹었습니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이라고 말하며 음식을 들기 전까지는 아무도 먹지 않는 것이 상식으로 통한다. 이러한 관습은 유목민의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 체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종교성이 강한 집에서는 식사 전에 남성 최연장자가 식사 기도를 하는 것이 상례이다. 음식도 절차에 따라 처음에 수프, 육류 음식, 밥(밥을 할 때 처음부터 버터나 마가린 등을 넣기 때문에 기름으로 볶은 것 같다.), 마카로니, 또는 뵤렉(만두의 일종), 후식으로 과일이나 매우 단 과자, 또는 케이크가 제공된다. 또한 에크멕이 저녁 식탁에 빠질 수 없다. 이 때 야채 샐러드, 투루슈(터키식 짠지), 또는 요구르트 등이 식탁에 놓여진다. 요구르트를 물에 타서 희석시키면 아이란(Ayran)이 만들어진다. 아이란은 물과 요구르트의 비율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아이란을 마시면 갈증이 없어지고 숙면을 할 수 있다고 하여 특히 더운 여름밤에 애용된다. 터키인들이 좋아하는 전통적인 음식 가운데 파스트르마(Pastirma)가 있다. 파스트르마는 소고기나 양고기에 후춧가루와 채맨 등의 향료를 뿌려 소금에 절인 다음, 햇볕에 말린 식품이다. 흔히 우리 음식 가운데 육포와 유사하여 장기간 보관하기 쉽고 운반하기에도 편리하여 터키 민족이 유목 이동 생활을 하던 때 애용했던 식품으로 여겨진다. 터키인은 음식을 불에 구워 먹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유목 생활을 해서 육류가 풍부하고 오히려 물이 귀하기 때문에 개발된 음식으로 여겨진다. 구이 요리의 대표적인 것으로 케밥(Kebap)과 쿄프테(K te)가 있다. 케밥은 고기 산적의 일종이며, 케밥의 양념으로는 주로 소금과 후춧가루가 쓰인다. 터키인은 우리 나라 사람에 비하여 음식을 짜게 먹기 때문에 구운 다음 소금을 많이 뿌리는 것을 보게 된다. 쿄프테는 잘게 다진 고기를 다른 양념과 다양한 음식 재료를 섞어 적당한 형태로 버무린 다음 구워 만든다. 육류를 구워 먹을 뿐 아니라 심지어 고추나 토마토 등의 채소를 구워 반찬으로 먹을 정도로 구워 먹는 음식 문화가 발달해 있다. 터키인과 식사할 때는 다음과 같은 식관습에 유의해야 한다. ① 음식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지 말아야 한다. ② 음식을 식히기 위해 입으로 불지 않는다. ③ 숟가락이나 포크를 빵 위에 놓지 않는다. ④ 상대방 앞에 있는 빵의 조각을 먹지 않는다. ⑤ 식사중에, 사망자나 환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⑥ 음식을 그릇에 남기지 말고 깨끗하게 비운다. ⑦ 음식을 마련한 사람에게 감사의 표시로 “에리니제 사을륵(Elinize Sa匼lik:“당신의 손에 축복이 있기를”이라는 뜻으로 대개 “맛있게 먹었습니다”라는 인사로 생각하면 된다)”이라고 표현하는 일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라마잔은 이슬람력으로 9번째 달에 해당한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무슬림 성년 남녀는 라마잔 기간에는 금식을 할 뿐만 아니라 술, 담배, 성적 관계를 되도록 삼간다. 금식은 일출시부터 일몰시까지 한정되기 때문에 일몰 직후부터는 식사를 시작하게 된다. 하루 종일 물조차 마실 수 없었기에 저녁이 되면 매우 허기를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일몰 시간을 확실히 파악한 뒤 저녁이 되면 시간을 보고 있다가 일몰 시간이 지나자마자 저녁식사를 하기 시작한다. 라마잔 기간중 일몰 후 먹게 되는 저녁식사를 이프타르(Iftar)라고 한다. 이프타르에 친척, 친지, 직장 동료 등을 초대한다. 5. 결혼관과 여성의 지위 터키 전통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결혼 적령기는 여자는 15세, 남자는 18세이다. 결혼은 대개 결혼할 당사자들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뒤뉘르쥐릭(d c ) 즉 결혼을 통한 두 집안이 결속 관계 형성이라는 전통에 따라서 무엇보다도 양쪽 가문이 친척이 되기를 원할 때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에 따른 결혼 양식이 결혼 당사자들의 동의를 전혀 무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농촌 지역에서는――이슬람의 여성들은 얼굴을 가리는 천을 사용하는 전통이 있지만――여자들이 천으로 얼굴을 가려 서로를 모르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 적령기의 젊은이들은 서로를 잘 알게 된다. 신랑측에서 먼저 신부측에 의사를 전달하는데 포도 따기, 포도주 만들기, 연초 재배, 버찌 따기, 양고기 저미기 등 협동으로 행해지는 일터에서나 초여름 축제, 결혼, 모임과 같은 데서 어른들은 결혼 후보자를 충분히 살펴보고 검토할 기회를 갖는다. 그러고 나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한 후에 구체적으로 청혼을 하게 된다. 결혼이 합의되면 약속식을 하고, 이어서 약혼식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절차와 기간들을 통해서 서로를 가까이 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신랑 신부 후보자는 서로 선물도 교환하게 된다. 신부 후보자는 자신이 만든 갖가지 색상의 손수건을 신랑 후보자에게 건네 주며, 신랑 후보자는 거울, 머리핀, 장식품 같은 선물을 신부 후보자에게 보낸다. 여자가 약혼자에게 손수건을 보내지 않는 것은 결혼할 의사가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러한 풍습은 중앙 아시아를 포함한 전체 투르크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만일 딸이 약혼을 했을지라도 상대방과 결혼하기를 거부하면, 그의 부모는 절대로 강요하지 않는다. 또한 터키에는 “말에 탄 신부의 길을 오직 사촌 오빠만이 막을 수 있다.”라는 말에 숨겨진 뜻처럼 친족 결혼이 상당히 많이 행해지고 있다. 전통 사회에서 전체 결혼의 절반에 가까운 44%가 친족간에 이루어지고 나머지도 대개 이웃 친지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딸을 다른 곳으로 시집 보낼 때는 아저씨로부터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한다. 터키 농가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사촌간의 결혼은 이슬람화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인구의 98%가 이슬람 교도인 터키 사회에서의 결혼식으로는 농촌이나 도시 구별 없이 종교 예식과 공식적인 예식 두 가지가 행해진다. 종교 예식은 반드시 치르는 데 비해, 공식적인 결혼 예식은 교통 문제나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국가에서 종종 특별법을 만들어 공식적인 결혼 예식을 하고 결혼 신고를 소급해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기 때문에 학교에 갈 나이의 자녀가 있는 부모들은 이 때를 이용하여 공식적인 결혼식을 올린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딸을 가진 부모들은 딸을 결혼시킬 때 상대방에게 공식적인 결혼 예식을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우기도 한다. 최근에는 터키에서 공식적인 결혼 예식 없이 결혼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터키의 전통적인 결혼의 `결혼 지참금' 문제는 전통적 경제 체제와 연관되어 피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결혼하게 된 여자는 자신의 경제 활동 단위인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신랑집 경제 단위의 일꾼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분명히 신랑이 신부의 집에 모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치러야 하는 일로써 결혼 지참금 문제가 대두되게 하는 것이다. 터키의 전통 사회에서는 생산 활동을 위해 성별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가족 구성원 모두의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족원의 감소, 즉 이혼이나 분가는 허용되지 않는다. 전통 사회에서 이혼의 가장 큰 요인은 불임이다. 그러나 불임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의 해결은 이혼을 하기보다는 대신에 다산한 경험이 있는 과부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후처로 맞아들이는 편을 택하므로 터키 전통 사회에서 이혼율은 극히 미미하다. 6. 교육 터키에서 7세에 시작하여 12세까지 계속되는 5년 과정 초등 교육은 무료이며 의무 교육이다. 중등 교육은 중학 과정과 고등학교 과정으로 나누어지며 초등 교육을 이수한 자의 희망에 따라 각각 3년 동안 무상으로 받게 된다. 고등학교 과정은 일반 국립 고등학교와 직업 및 기술 국립 고등학교로 분류된다. 대학교를 비롯한 모든 고등 교육 기관은 국가 재정으로 운영되는 국립이며, 학비는 소액의 수수료를 제외하고 전액이 무료이다. 4년제 대학교는 졸업 정원제에 따라 철저하게 학사를 관리하고 있어서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중도에 탈락하게 된다. 앙카라의 중동 공과 대학교(Middle East Technical University)와 빌켄트 대학교(Bil-Kent University), 이스탄불의 보아지치 대학교(Bogazici University)는 모든 강의를 영어로 한다. 이 밖에도 이스탄불 소재 마르마라(Marmara) 대학교의 경제와 행정 대학, 이스탄불 대학교의 국제 관계 학과가 영어로 강의를 하고 있다. 7. 관광지 이스탄불 여행자들에게 세계의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인상 깊은 도시를 들라면 이스탄불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신비스럽다. 콘스탄티노플, 비잔티움이라고도 불렸던 이스탄불은 케말 파샤가 수도를 앙카라로 옮길 때까지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다. 이스탄불의 특징은 돔과 첨탑이다. 이슬람교 국가인 터키에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많고 대부분의 모스크들이 돔과 첨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른 곳의 둥그런 돔과는 달리 펑퍼짐한 돔이 우리의 가마솥을 연상케 해 친근감을 준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에 의해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어지므로 시민들 가운데는 하루에도 두 대륙을 오가며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스탄불의 관광 명소는 대부분 유럽쪽 구시가지에 있고, 특히 술탄 아흐멧 지역에 밀집해 있다. 이스탄불에 머물 때는 숙소를 구시가지에 정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리하다. 1000년 동안 기독교 교회 건축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던 소피아 성당과 이슬람 사원의 정수라는 블루모스크는 이웃해 있다. 블루모스크 앞이 히포드롬 광장으로 이 곳에는 이집트 카르나 신전에서 옮겨 온 데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를 포함한 3개의 고대 기념물이 서 있다. 히포드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거대한 지하 저수장, 콘스탄틴 대제가 건설하고 유스티니안 대제가 확장한 `성컨 펠리스 시스테른(Sunken Palace Cistern)'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건조물이다. 톱카프 궁전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온갖 보물을 구경할 수 있다. 그랜드 바자르는 이슬람교 문화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옥내 시장으로 약 4400여 개의 상점이 있다. 옥내 시장 안에 65개의 거리가 미로를 이루고 있어 외래인들은 종종 길을 잃기도 한다. 그 밖에 이스탄불에는 돌마 바흐체 궁전을 위시하여 수많은 모스크와 박물관, 유서 깊은 명소가 많아 관광하려면 최소한은 3~4일은 잡아야 한다. 파묵칼레 파묵칼레의 본래 뜻은 `솜뭉치 성'이다. 고원 아래 절벽을 온통 하얀 종유석이 뒤덮고 있어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 자연의 경이 위, 뒤쪽으로는 로마 시대 온천 도시 히에라폴리스가 비록 유적이지만 생생하게 남아 있다. 절벽 꼭대기, 거대한 노천 온천탕에는 지진으로 무너진 로마 시대의 열주들이 잠겨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카파도키아 화산으로 생성된 연한 바위 밑을 수백 년 동안 파내려 가 방과 집과 요새를 만들어 여러 개의 완벽한 지하 도시를 이루어 놓은 곳이다. 150여 개 이상의 동굴 교회가 있었음으로 해서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지로서의 의미가 있기도 하다. 트라브존 터키 흑해 연안 도시 가운데서 가장 흥미 있는 곳이다. 기후도 온화하고 인심도 좋아 바자의 상인들도 속이는 법이 없다. 많은 비잔틴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 있다. 관광객 가운데는 14세기에 지은 수멜라 수도원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도 있다. 절벽 전면에 세워진 수도원이 마치 제비집 같기 때문이다. 지중해, 에게 해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결혼 선물로 해안의 일부를 준 지중해 지역과 서구 문명의 요람으로 고대 문명의 유적지와 현대적 휴양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에게 해 지역도 빠뜨려서는 안 될 훌륭한 관광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