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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 사건 / 신 9:11-21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가나안을 주심은 너희에게 어떤 의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받는 축복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거역한 자가 받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만에 빠질 때가 어느 때입니까? 공로가 자기에게 있다고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할 때 사람들은 무서운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동아 출판사에서 나온 국어사전에서 교만이란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것’이라고 풀이 한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인의 속담에 ‘지식과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더하신다는 성경 말씀과 내용을 같이 합니다. 어떤 부자가 시장에서 아주 노래를 잘하는 카나리아 새 한 마리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부자 주인은 카나리아를 무척 사랑했고 온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했고 또 온 동네 사람들은 카나리아 노래를 매우 좋아했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카나리아의 마음속에 교만한 마음이 들어갔습니다. 카나리아는 우쭐해져서 주인이 노래를 부르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밤낮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주인은 카나리아의 노래 소리가 시끄러워졌습니다.
주인은 카나리아를 누구든지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시끄럽게 하는 카나리아를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카나리아를 길가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잠 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도 교만 때문에 망했고, 왕하 20:13에 보면 히스기야 왕도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 자기가 얻은 양 바벨론의 사자에게 자랑하다가 망했고, 다윗도 솔로몬도 하나님의 축복을 교만의 기회로 삼다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모세는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교만해 질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어떤 백성인지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8절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당장 멸망시키시려고 하셨던 일을 다시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 돌 판을 받은 모세에게 산 아래로 빨리 내려가라고 긴급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하시기를 모세는 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고 있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반대로 모세가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을 기다리지 못하고 산 아래에서는 아론과 백성들이 자신들을 위한 우상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여 진노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깨트렸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 하지 않고 네 백성(모세의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바로 왕의 학정에서 오랜 세월동안 강제 노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해방된 것을 직접 체험하고 시내 산까지 왔고, 지금 살아 있게 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기적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도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타락한 행동을 했습니다. 더구나 장차 하나님나라를 이루어야할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것은 너무나 가증스러운 죄요, 그 죄 때문에 책망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은,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명백히 금지하는 그 율법을 어긴 것이며, 모세가 그들에게 기록된 율법을 전해주기 위해 올라간 그 동안에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신앙문제는 아무도 큰 소리를 칠 수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산 위와 아래의 사건을 비교하는 것은 이스라엘백성이 얼마나 악하고 죄가 큰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세 제자들과 산 위에서 기도하시며 변화하시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산 아래에서는 9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이 떠오르게 됩니다. 이런 일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은혜를 받는 시간과 현실생활에서 복잡한 갈등을 보는듯합니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으로서는 전혀 합당하지 못하고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정하게 대하셨다면, 2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는커녕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만의 결과에 대해, 지난 광야 40년 생활에서 겪었던 가슴 깊이 뼈아픈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은 7절에서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하셨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가장 크게 화나게 했던 지난날의 금송아지 사건을 기억하라고 한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9:6)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백성을 보니, 정말 목이 곧은 백성(고집이 센 백성)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또 내가 보았다는 것은 이렇게 고집이 센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자세히 본 것을 말하며, 모세는 산위에 있어서 몰랐지만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시며 모든 것을 보고 아시기 때문에 12절에서 모세에게 빨리 백성들에게 내려가라고 지시하신 것이다. 출애굽 전에는 출 2:25절에 보면 고통을 굽어 살피셨습니다. 14상을 보면 또 하나님은 ‘나를 막지 마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겠다고 하십니다. 출 32:10절을 보면 ‘내가 하는 대로 두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막지 말라.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에 모세의 간절한 청원을 생각하게 하는 말로서 문자적으로는 나로부터 단념하라, 곧 하나님이 하려는 것을 청원이나 간청으로 미리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켜 그들의 이름을 없애버리고 모두 죽이려고까지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산에서 급히 내려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방법으로 단호히 조처하겠다는 뜻이지만, 순전히 멸망만을 목적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는 타락한 이스라엘백성에게 실망하셨으면서도 다시 한 번 기회를 베푸신 은혜를 보게 됩니다. 14하에 보면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심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모세 하나만 남겨 두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백성들을 진멸하고 너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만은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에게 이렇게 인정받은 것을 생각하였더라면 그렇게 하시라고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들은 모세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15상에서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에는 불이 붙었고’라고 합니다.
산이 불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곳에 오셔서 계시는 거룩한 영광을 사람의 눈으로 보게 하시는 놀라운 불입니다. 이제 모세는 산 위에서 사명을 받고 산 아래로 내려와 사명을 실천했다. 15하에서 모세는 산 아래로 내려올 때 그의 두 손에는 언약 조문이 새겨진 두 돌 판을 들고 있었습니다. 16절에는 그런데 내가 바라보니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놓고 너희의 하나님께 못할 짓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쉽사리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길을 버릴 수 있었느냐?고 합니다. 금송아지 숭배 사건은 특별히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2계명(출 20:4-6)을 어긴 것입니다. 따라서 금송아지 사건(출 32:1-35)은 참으로 이스라엘이 그토록 장엄한 광경(출 19:16-19)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지 불과 40여 일도 지나지 않은 때에 발생된 급속한 타락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만을 청종하고 섬기라는 말씀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하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도를 빨리 떠나 마치 개가 그 토한 것으로 돌아가며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눕는 것과 같이(벧후 2:22) 사십 일을 참지 못한 성급한 사람들로 금송아지의 우상을 만들어 섬김으로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일과는 반대로 자기를 위해 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태평성대를 이룰 때 자기를 위하여 불로초 불사약을 구하는데 애썼으나 49세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며 사는 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해 내 일생을 바치며 살 것인가?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 왔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금송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오래 참지 못함으로 금송아지의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충분히 기다리고 참아야 하는데도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며 하나님을 떠나는 마음,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금송아지의 우상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그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인애하심의 은총을 베풀어주심도 물론이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계2:26). 17절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으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려’ 버리는 것을 너희는 똑똑히 보았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손에 들고 있던 돌 판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버림으로 산산조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모세가 화를 낸 것만이 아니라 당사자 중의 한쪽 이스라엘이 계약내용(출 19:5,6)을 어기고 깨트렸음으로, 자연히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그 효력을 상실하고 깨졌음을 나타낸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깨트렸고, 계약이 주는 모든 특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돌판을 깨뜨림으로써 증명되었습니다. 이혼 증서가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제 이후로는 그들은 마땅히 영원히 버림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은 조금도 그들 자신의 어떤 의로움을 호소할 수 없도록 확실히 봉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들은 너의 백성이라. 그들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들은 나의 백성으로 서지 못하리라’고 했을 때,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들과 인연을 끊으신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모세는 전과 같이 다시 사십 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너희가 저지른 모든 죄 때문이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여 속을 썩여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백성의 지도자로서 격노하신 하나님 앞에서 다시 40일을 금식하며 하나님께 이스라엘백성의 지은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용서를 베풀어주시기만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출 32:31-32에 보면, 이 때 모세는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백성들의 죄만은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후일에 바울은 (롬 9:3)에 보면 복음을 배척하는 동족을 위한 중보기도 역시 이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중보 기도는 죄인을 위한 예수의 간구(요 17:9,12,20)에서 그 정점을 이룹니다. 롬 8:26절에도 보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성도는 바로 이 때문에 끝내 멸망치 않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19상을 보면 ‘여호와께서 심히 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였노라’고 말합니다.. 모세 자신은 하나님의 친구요 또 총애 받는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불경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보고 결국 이 백성을 없애 버리시겠다는 생각에 무서움으로 떨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세 자신을 위해서도 두려웠을 것이다. 시 119:120절을 보면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라고 합니다. 곧 재삼 범죄의 결과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19하를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때에도 다시 한 번 나의 애원을 들어주셨다고 말합니다. 모세의 이러한 자기희생은 급기야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하였고, 용서하심의 자비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쏟아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죄 없이 그의 백성을 위하여 엎드려 사죄하는 모세로 말미암아 그의 뜻을 돌이켜 용서하시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모세가 그의 백성을 위한 기도는 첫째, 진정을 다한 기도였습니다. 둘째, 그의 백성의 생명을 뜨겁게 사랑하는 기도였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기도였습니다.
이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냐는 애원의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방인들의 조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여 달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기도,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하여 용서하여 달라는 모세의 진정을 다한 뜨거운 사랑의 기도는 마침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뜻을 돌이켜 용서하심으로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에게 벌을 내시려고 하실 때 몹시 두려웠었는데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한 모세의 간절한 중보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아드리셨습니다.
모세가 중보 기도한 결과 하나님은 심판을 돌이키셨습니다. 간절한 중보기도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행위를 진멸하시겠다고 하셨지만 그 뜻을 돌이키심으로써 사랑의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또 한 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여 주시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20절은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도 몹시 화를 내시어 그를 없애버리려고 하셨는데, 모세는 그 때 아론을 위해서도 빌어야 했습니다. 또 아론에게 책임이 있다고 벌하시려고 하셨는데 아론을 위해서도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출 32:1-34:35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세가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최근까지 대제사장이란 귀한 직분을 수행했던 아론조차도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벌써 금송아지 사건 때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교훈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그들 스스로의 의로움이나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생히 주지시키고자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진노하셨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인데 단지 위협과 두려움 때문에 그들과 죄를 공모하셨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했습니다.
제사와 예물을 통해서 죄악을 깨끗이 할 수 있다면, 아론은 분명히 그들의 죄를 속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론 그 자신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곧 그들은 아론을 자기들의 일에 끌어들일 때,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거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깨끗한 우물이라도 1년에 여러 차례 청소를 해주어야 맑은 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차갑고 신선한 물을 내는 우물이더라도 그 안에 쌓이는 더러운 오물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물맛이 점점 달려져 결국은 먹지 못할 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안에 더럽고 추한 죄를 항상 회개로써 말끔히 씻어내지 않는다면 청소하지 않은 샘물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도 사라질 것입니다. 21절은 너희의 범죄 행위 곧 너희가 만든 그 송아지를 나는 불에 넣어 녹여서 산산이 부수고 가루를 내어 그 산의 개울에 흘려보냈습니다. 백성들이 지은 죄로 금송아지를 불살라 찧어 가루로 만들어 산에서 흐르는 물에 뿌렸다고 했습니다. 시내 산기슭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송아지는 황소 형상을 한 애굽인들의 우상 아피스'(Apis)를 본떠 만든 것입니다.(출32:1-6) 아마 백성들은 먼저 나무로 그 형태를 조각한 후 그 위에 금으로 만든 판을 덧입혀 만든 것 같습니다, 그 금송아지 우상을 불살라 찧고 티끌 같이 갈아 가루를 그 산의 개울에 흘려보내니 맥없이 흘러 가버렸으니 우상의 헛됨과 무력함을 똑똑히 입증시키고, 아울러 백성들의 어리석은 우상 숭배 행위를 완전히 근절시키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또 그 가루를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느니라’고 했으나 출 32:20에 의하면, 한걸음 더 나아가 백성들로 하여금 그 물을 마시도록 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우상 숭배와 언약을 깨트린 것에 대한 죄 값을 백성들 스스로가 져야 한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교훈하기 위함입니다(겔18:20).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2세들에게 과거의 야야기를 해서 다시 기억하게 한 것은 나는 예외이고 괜찮겠지 라는 자만의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함으로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난 과거의 실패나 잘못을 다시 기억하며 떠오르기를 싫어하지만 그런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