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을 물고 간 뱁새
윤사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경수봉 아래 토담집 할배가 겨우내 눈 속에 갇혀 있다가 문 밖으로 나오니,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고 산새들이 지줄대는 봄날이었습니다.
맑고 텅 빈 하늘을 봅니다.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저 하늘마음 허공을 꿰뚫어봅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언젠가는 이 고깃덩어리인 육신도 없고, 이 몸뚱이가 없으므로 육감(눈․귀․코․혀․몸․의식)으로 느끼는 형상도 없고, 그러므로 청적백흑황(靑赤白黑黃) 5색도 없게 될 거라고…….
이 몸은 땅․물․불․바람으로 각각 흩어져 저 갈 데로 간다 해도 크게는 이 우주 안에 있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할배는 먹을 갈아 닥나무가 재료인 하얀 백지에 반야심경을 사경합니다. 쓰고 또 씁니다.
다 쓰고 세어 보니 260자인데 없을 무(無) 자가 스물한 자입니다. 그러면 없다는 말이 스물한 번이나 반복되는 이 반야심경마저 없는 것일까? 없는 것마저 없다고 하니 결국은 없는 것입니다.
하얀 백지, 그것마저 없는 것입니다.
검은 색은 검은 글자를 나타내고 흰색은 흰 종이를 나타내는데, 그 희고 검은 색깔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 마음 마음……, 마음은?
할배는 반야심경을 사경하다 말고 초록빛 텃밭을 한 바퀴 빙 둘러 허공까지 꿰뚫어보고 오니, 그 사경했던 심경마저 바람에 날아가고 없었습니다. 없다고 하는 그 깊고 오묘한 내용의 우주의식인 반야심경이 잠시 동안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흔적마저 없어진 것입니다.
독거노인 할배는 저녁 땔감나무 대신 빈 하늘만 등에 지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시누대밭 길가에서 그 반야심경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을 뱁새가 물고 가서 발기발기 찢겨진 채 시누대 사이에 둥지를 짓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 경문이 바람에 날아가 없어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 작은 뱁새가 새로이 살아갈 집 짓는 데 반야심경이 재료가 되다니? 할배는 신기하게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며칠 후에 와 보니 뱁새 둥지가 완성되었고, 그 뱁새는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뱁새야, 넌 반야심경으로 집을 지었으니 우주법계로 집을 삼고 있는 게 아니더냐?
네, 맞습니다. 할배요, 저는 새 중에 작은 뱁새지만 지금 여섯 하늘을 품고 있어요.
무슨 소리냐?
제가 낳은 파란 하늘색의 새알 여섯 개를 품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여섯 하늘, 즉 욕계 6천을 품고 있는 셈이지요.
욕계 6천이라, 무슨 말이냐?
할배는 인생 칠십이나 살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살아왔습니까요?
모른다. 나는 이 세상을 벌(空)로 살아왔으니 말이다!
저는 지금 이 사바세계에 살고 있지만, 다음 생은 도리천을 지나 도솔천에 가서 살 겁니다.
점점 모르는 소리만 하는구나.
할배요, 할배가 쓴 반야심경 3분의 1인, 날짜 70일 후에 오시면 우리는 이곳에 없어요.
없다니, 왜?
그땐 우리 애들도 다 커서 반야심경을 물고 날아가 버리니까요.
어데로?
도솔천으로요.
도솔천?
그리고 반야심경의 전 글자 수대로 260일 후에 오시면 이 반야심경으로 지은 집마저 없어져 버리구요.
없어지다니, 왜?
반야심경 그 무(無) 자 마음으로 둥지를 지었으니까요.
……?
한 달 후 등산길에 시누대밭 오솔길로 둥지를 찾아가 보니 뱁새는 새끼쳐 나가고 빈 집만 보였습니다. 할배는 그 동그란 빈 집만 보고 다시 반야심경을 외워 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할배는 대숲 사잇길 초록색 빈 하늘을 봅니다. 하늘색인 뱁새 알 6개가 그 하늘에 박힙니다.
욕계 6천, 다음 생은 도솔천에 가 산다고? 그 작은 뱁새가?
할배는 돌아와 반야심경을 다시 사경하다 말고 대낮에 창문도 없는 거실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듯 봄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무슨 소리가 있어 귀를 세웠습니다.
할배요, 여기는 도솔천입니다.
음, 그래. 언제부터 그 높은 하늘로 올라갔느냐?
저는 다음 생을 살고 있어요. 사바세계에서처럼 뱁새의 삶은 아니에요.
그렇다면은?
할배가 흰 종이에 먹글씨로 쓴 반야심경으로 집을 짓고 여섯 알을 품고 살았을 때 6바라밀을 닦아 생사해탈을 한 것이지요.
뭐 해탈? 축생인 뱁새가 6도로 윤회하는 윤회고를 벗어났단 말이지? 아니, 이 할애비도 못해 낸 그 생사해탈을 뱁새 네가 이루어 냈단 말이냐?
저는 보여요.
무엇이 보인단 말이냐?
도솔천 내원궁 안에 보살도를 닦는 미륵보살님이요.
뭐 미륵보살님을? 허, 거 참! 신통방통한 일이구나.
얼마 안 있으면 사바세계로 하강하시어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 설하시고 만백성을 거느리시며 온갖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는 새 나라를 건설하실 준비가 다 되었다구요.
거 참, 신통방통한 일이구나.
그리구요!
응, 그리고?
그리고 오랜 공겁(空劫) 끝에 겁화(劫火)가 지나가면 이 우주법계가 다 타 버리고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무(無)……?
없다니?
만법귀일(萬法歸一)이니 모두 하나가 되어 버리니까요. 빌 공(空)……, 공.
만법귀일? 그러면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느냐?
본디 우주법계 천지순환 법칙으로 지수화풍 근본 요소만 남게 되거든요. 할배도 머지않아 죽으면 그 육신은 땅․물․불․바람으로 각기 흩어져 가니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이글거리는 저 햇덩어리도 언젠가는 타 버리고 3아승지겁이 지나간 다음 또 다른 하늘세계가 열린다구요. 그러나 자기 마음은 생멸이 없으므로 겁 전에도 겁 후에도 멸하지 않거든요. 그 마음 본 성품을 깨달아 부처가 되면 걸림이 없이 자재하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의열반에 들어 참 나의 무량수, 무량광명 그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구요.
거 참, 새 중에도 작은 새가 아는 것도 많구나. 그러면 땅․물․불․바람은 또 무엇이냐?
그 자체가 우주 본질인 늘지도 줄지도 않고(不增不滅)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은(不垢不淨) 진공묘유(眞空妙有) 비로자나불 법신불이지요.
뭐, 법신불?
할배도 부처, 이 작은 뱁새도 부처가 된다는 말이에요.
부처라, 너도 부처, 나도 부처, 온 천지가 부처뿐이라고? 거 참, 신통방통한 말만 하는구나.
만법귀일, 우주는 마음의 본체이니 이 모두가 할배의 마음에서 나온 거라구요.
마음?
그래요. 마음이 부처라니까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어느 것이나 마음 아닌 것은 없지요. 종내에는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지요. 그러니 중생은 잠자는 부처이고, 부처는 깬 중생이지요. 호호호, 깨어라, 깨어나라…….
반야심경을 사경하다 말고 춘곤에 졸다가 언뜻 꿈에서 깬 할배는 조용히 정좌하고 심호흡을 한 다음, 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하늘에는 한 점 흰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을 뿐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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