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증인입니다[행2:22-36]
22.3.16 수요예배
성령께서 제일 잘하시는 것은 우릴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성화(聖化)는 성령의 역사라고 표현합니다.
베드로는 겁쟁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겁이 나서 멀찌감치 따라가다가 결국 가야바의 궁전에 가서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한번 부인했고, 두 번 부인했고, 세 번째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과 자기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는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변화되었습니다. 왜 변화되었을까요? 성령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고 성령의 권능을 받았고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십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두려움에 떨지만 성령님은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힘 있게 살도록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의 전공은 사람을 바꾸시는 일입니다. 무지했던 자의 눈을 뜨게 하여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해주십니다. 그런 다음 우리를 생각과 언어, 태도와 행동, 습관과 인격이 변화된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첫째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셔서 우리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만들어주십니다. 본문에 보면 성령께서는 겁에 질려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에게 용기를 주셔서 그를 예수님의 강력한 증인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용기가 없을 때 성령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령님이여 제게 용기를 주시옵소서.”
인내가 부족할 때 “성령의 열매인 인내를 주시옵소서.” 성격 때문에 자기를 잘 관리하지 못할 때 “성령님이여 임하셔서 제게 절제력을 주소서.”
믿음이 흔들릴 때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사랑이 모자랄 때는 “사랑도 주시옵소서.”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는 “기쁨을 주시옵소서.”
여러분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신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변화된 삶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에게 용기가 생겼습니다. 22절에 보니 베드로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외치고 있습니다. 그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니까 용기가 솟아올라서 자기가 겁내던 백성들 앞에서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가 성령에 충만하여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들어야 할 메시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는 사람이면 누구나 듣고 깨닫고 믿어야 될 영원한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베드로가 외칩니다.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성령님이 누구십니까?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는 ‘돕는 자’(the Helper) 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을 왜 우리 마음속에 보내주셨습니까?
나를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내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고, 내게 유익이 되고, 힘과 용기와 지혜와 인내와 자신감을 주셔서 전에 내가 할 수 없던 일들을 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를 담대히 증거할 용기를 주셔서 예수님의 기적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오신 것을 반드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한대로 구하십시오. 인내가 필요하면 인내를 구하십시오.
용기가 필요하면 용기를 구하십시오.
용서가 필요하면 용서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마음이 우울할 때는 기쁨을 구하시고, 실망할 때는 희망을 구하셔서 늘 성령 충만한 가운데 변화 받으며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둘째로,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본문 2장 25절 이하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했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26절). 하나님의 임재를 마음속에 느끼니까 육체를 갖고 사는데도 희망이 생겼습니다.
27-28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여기에서 ‘내 영혼’은 다윗의 영혼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혼을 말합니다.
다윗은 선지자로서 벌써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들었기에 이것을 메시아 예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말은 그를 무덤 속에 팽개쳐놓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또한 ‘주의 거룩한 자’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으로 썩음을 당치않게 하신다’는 말은 예수님을 보통 사람처럼 무덤 속에서 썩어 없어지게 하시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다는 말일까요?
28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라는 부분에서 ‘주’는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다시금 살아나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여기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죽은 예수를 썩지 않게 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쓴 것입니다.
30절에도 나옵니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30절). 여기서 ‘그’는 다윗을 가리키는데 그를 선지자 곧 예언자라 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맹세하신 말씀을 다윗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그 왕위를 영원히 이을 것이며, 그가 어깨에 정사를 메고 이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시고 영원히 우리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받아 그대로 증거한 것이 바로 시편 16편입니다.
다윗은 그 메시아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도 미리 알았습니다. 33절에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즉, 다윗은 이미 무덤 속에 들어갔고 아직도 그 가운데 있지만 예수님은 죽었다가 그대로 썩지 않고 사흘 만에 부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34절에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의 최고 학부출신이지만, 베드로는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시편 16편과 110편의 다윗의 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은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주여,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119:18)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도 성경을 읽기 전에 기도하세요. 지식으로 아는 것과 성령으로 아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머리에만 남을 뿐이지만, 성령으로 아는 것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영적인 눈이 떠집니다. 그러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시편 16편, 110편 읽을 때, 말씀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영안이 열려서 마음속에 영적 확신을 갖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은 베드로에게 용기를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말씀을 증거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32절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가장 능하신 사역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예수 증거하는 사역에 힘쓰게 됩니다. 예수님을 보고 체험하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용기를 얻어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전에는 용기가 없었더라도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 담대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전에는 우둔했더라도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분명히 보면 반드시 그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깨달은 예수님이 과연 누구십니까? 3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보여야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저녁에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화시키셔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나의 구주되심을 분명히 믿고 압니다.” 이런 간증이 여러분의 입술에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까지 깨닫고 받아들이지 못한 분들은 이 시간, 성령께서 그 마음 문을 열어주시고 눈을 뜨게 하셔서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꼭 보게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