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동산
“젊어서는 꿈을 먹고살고 늙어서는 추억을 먹고산다”는데 꿈을 갖고 낭만을 즐길때가 그리 멀지않은 것 같은데 벌써 추억을 말하는 60대중반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게.....
고향 경주에는 꿈의 동산이 있다.
2013년 10월26일 고향 경주를 향했다. 최장암말기로 시한부진단을 받았다는 중 입학 때 수석 입학한 착한 신앙인 수의사 친구 상호의 딸 결혼식에 갔다가 오랜만에 중, 고교 때 자주 찾던 꿈의 동산 반월성언덕을 찾았다(착한 친구 상호는 2015년 구정 다음날 하늘나라 천국으로 먼저 돌아갔다).
감회가 새로웠다.
육이오사변으로 어른들을 여의고(부친이 총살을 당하시는 등) 할머니, 삼촌, 고모들과 생활하다가 중학입학시험은 합격했지만 형편이 어려워서 취업을 할래? 중학교를 보내준다는 새로운 복지시설에 갈래?
중학교를 진학할 욕심으로 복지시설을 택했고, 많은 형제들과의 색다른 생활이 시작되었다.
새벽에 예배를 드리고 중 입학시기를 지났기에 이웃 황남초등학교 6학년에 또 다니였고, 중,고교 6년을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며 학교에 다녔다.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하는 복지시설의 생활은 자아(自我)에 대한 관찰을 하게 되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면 누구보다 쾌활하고 장난꾸러기였지만, 혼자가될때면 늘 외로운 감상에 젖어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특히, 나는 왜? 부모가 없는가? 엄마, 아빠의 존재와 행방에 대하여 찿게되었고 그리워하게 되었다.
중1년때 시집간 작은고모의 앨범을 뒤적이다가 모자선 아기와 여인과의 찍은 사진을 보고 직감적으로 (엄마와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진을 품에 안고 중1년 때부터 이불속에서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 서러움 등으로 눈물로 벼개를 적시곤 했다.일기장에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눈물의 글로 적곤했다.
흘러가는 서천냇가를 바라보며 인생의 의미를 찿곤했다.
복지시설에서의 중, 고교생활! 어찌 추억거리들이 없지 않겠나?, 추억거리가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그때는 어려움이었으나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될 뿐이다.
특히 고교 3년 동안은 홀로 남천냇물이 흐르는 반월성언덕을 자주 찿았다, 그리고 늘 내일의 아름다운 꿈을 그렸다.
“착하게 살자” 그리고 “성공하자”는게 늘 모토였고, 언젠가는 보고 싶은 엄마를 찿아서 그리운 엄마를 만나보자는 것이 제일 큰 꿈이였고,
그리고 3가지의 소박한 꿈을 소망했다. 첫째가 <대학졸업>, 둘째가 <내집갖기>, 셋째가 <행복한 가정>을 갖는게 꿈이였고 소망이였다.
68년 고교3년때는 10년후에 이 꿈의 동산에 왔을 때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하였다.
고교3년 여름방학때 서울의 고모 댁을 갔다가 정릉의 미아극장에서 6.25때 해어진 엄마(김지미)와 딸(윤정희)이 16년만에 만나서 무대에서 눈물로 함께 노래하는 내용의 <그리움은 가슴마다>라는 영화를 눈물로 보고는 고교교복에 보리짚모자를 서고 (엄마찿아 3만리)를 하여 외조부모님, 이모들3분과 외삼촌을 만났고, 얼싸안고 눈물바다가 되었다. 갖고 있던 사진으로 찿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엄마는 내가 1살 돐때 같이 사진 찍고 1달 후에 간호사로 근무하던 부산의 모병원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셨단다.
그 후, 고교졸업 후 10년 후인 1978년에 꿈의 동산 반월성 언덕을 찿았다.
군청사가 대구시내에있는 달성군청에 7급공무원으로 있으면서 통신대학을 거쳐 대학편입검정고시를 거쳐서 영남대법대에 3년편입 졸업하고 동대학원(법과)에 진학 중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키워주신 고모할머니와 생활하며 가정도, 내집도 갖지 못한 형편이였다.
그후 81년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하고 82년에 장가들고 수성구청과 대구시청을 거쳐 영남신학3학년 편입하여 신학공부와 영남대학 법학박사과정입학 수업과 대학강의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었다.
그리고 대구신일전문대학 전임교수(당시 경영학과장)로 있던 1990년에 8월25일에 영남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고, 9월6일에 목사안수(장로회 신대원-M.Div과정,81기-3년 수업을 거쳐) 를 받게되었고(당시 신진수 이사장님이 파크호텔에서은혜입은 분 100여명을 초청하여 박사학위 취득 및 목사안수축하연을 배풀어주심) 아들과 딸을 얻었으니 소박한 작은 꿈이 어렵게 이루어진 셈이였다.
이제 고교 졸업 후 47년째의 내 모습은?..........................
내세울게, 자랑할께, 어쩌면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다, 세상적으로 육적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찌도?...........
그러나 진리 안에서 자유하며 저 하늘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며 마음과 목숨과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외롭고, 가난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이제는 하나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어려운 이웃을 볼 때마다 진정한 궁휼의 눈시울을 붉힌다,
주님께 “어딜가나 남에게 빛이되고 저에겐 생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최선의 성실과 섬김과 나눔의 삶으로 .......
이젠 남은 삶은 “죽으면 죽으리라” 주님의 선한일 많이 하다가 주님 부르실 때 주님 품에 안기는게 꿈이요, 소원이다.
인생에 후회란 아내와 아들, 딸에게 남편으로 아비로서의 할 바를 못함에 너무 미안하고,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남은 삶 동안이라도 처, 자식을 위해서 사랑하고, 헌신하며, 할 일을 하리라 다짐해본다.
끝으로 지나온 인생여정에서 가족이상으로 보살펴주신, 월성초교때의 강성수선생님,
7여년의 중,고교시절 복지생활중의 故김용성장로님과 유금순원장님, 故채봉희보모선생님.
울릉군에부터 출발한 달성, 안동, 수성구, 대구시의 13여년의공직생활때의 최종련前대구시국장님, 15여년의 영남대법대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을때까지 지도해주신 조정호교수님,
대학교수로 인도하시여 15여년을 교수케하신 신진수이사장님,
주일학교 교사로서 영남신학대학4년졸업반때 결혼주례도하시고 사랑과 지도를 해주신
前영남신학교 교장이셨던 故이상근목사님(대구제일교회)과 존경받는 인품과 신앙과 박식하신
故김치영목사님(한밀알교회)과 사모님의 가족같은 특별하신 사랑,등등.......
그리고 수많은 지인들의 사랑과 배려와 후원을 감사드립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2015. 3. 5. 오산시 내삼미동 자택에서. 호세아(석홍) 글올림
※ 꿈의 동산
![](https://t1.daumcdn.net/cfile/cafe/27786F4154F7ECB50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