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정사 방문기 - 13
다시 육지로 건너와 차를 몰았다. 우리는 오후 4시에 광주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시간은 넉넉하였다. 광주로 가는 도중에 선암사에 들렀다. 선암사는 나에게 생소한 절 이름은 아니다. 요즘 대학생의 필독도서인⟪태백산맥⟫과 ⟪아리랑⟫의 작가 조정래의 고향이 선암사라고 책표지에 써 있다. 즉 그는 대처승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벌교를 지나 경치 좋은 산길을 따라 꾸불꾸불 운전하다 보니 선암사가 나타났다.
선암사는 승주군 조계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계산의 서쪽에 있는 송광사하고는 등산로로 3시간 거리라고 한다. 선암사는 태고종의 총림으로서 매우 아름다운 절이었다. 대개 절에 가면 단청이 화려한데, 선암사는 단청이 희미하게 퇴색되어 매우 고풍스러웠다. 건물의 배치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었다. 즉 한 눈에 절이 다 보이는 것이 아니고 일주문에서는 대웅전만 보이고 대웅전에 가면 뒤에 있는 건물이 보이는 이러한 건물 배치였다. 송광사를 아름답게 꾸며 주었던 목백일홍은 입구에 단 한 그루만 보였고 선암사에는 대신 상사화가 만발하였다. 상사화는 노란색의 꽃이 길쭉한 줄기에 얹혀 피어나는 예쁜 꽃인데, 잎이 모두 지고 난 후에야 꽃이 핀다. 꽃과 잎이 운명처럼 서로 보지 못하는 꽃이라고 하며 주로 절에서 많이 심는 꽃이란다. 우리는 어슬렁 어슬렁 걸어 다니며 다른 사람 사진도 찍어주고 아이가 지나가면 이름이 무어냐, 몇 살이냐고 말도 걸면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연담 거사는 사찰 의식과 법구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해 주었다. 불교에서 합장하며 손바닥을 모으는 것은 부처님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또 불교에는 사물이 있는데 범종, 목어, 법고, 운판이다. 법종은 지옥 중생을 제도함이며, 목어는 물속 중생, 법고는 축생 중생, 운판은 하늘을 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친다고 한다.
절 구경을 마치고 광주까지는 가는 데는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송광사와 선암사라는 좋은 절을 가진 광주시민은 행복하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들 바쁜지 그저께 광주에서 만났던 두 친구도 아직 선암사 절 구경을 못했다고 한다. 현대인들이 이렇게 바쁘게 사는 것은 결국 욕심 때문이 아닌지? 기업인은 돈을 더 많이 벌 욕심, 학자는 논문을 많이 쓸 욕심, 여인들은 더 예뻐질 욕심에 사로잡혀 이런저런 형태로 바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욕심을 조금만 줄인다면 바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광주역 앞에서 늦은 점심을 간단히 먹고 4시에 광주를 출발하였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연담 거사와 불교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담 거사는 부인이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이미 기독교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인지 그가 설명하는 불교 이야기는 이해하기 쉬었다. 나는 언젠가 국토개발원에 근무하던 이 과장이라는 분과 차를 마시면t서 불교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 역시 불교에 매우 해박하셨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부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일반인의 행동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깨닫는다면 그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에 대해 이 과장님은 이것은 금강경에 나오는 보물 같은 이야기인데 나에게만 말해 준다면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연담거사가 설명하는 무주상보시란 세 가지 상(相)에 얽매이지 않는 보시를 말한다. 즉 보시를 하는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깨닫기 전이나 후나 똑같은데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보시를 하는 사람, 보시의 내용, 보시를 받는 사람에 얽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 가지가 청정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어떤 사람을 금전적으로 도와준다고 가정하자. 무주상보시란 ‘내가 돕는다’라는 생각도 없고, ‘얼마를 돕는다’라는 생각도 없고, ‘누구를 돕는다’는 생각도 없는 그러한 보시를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도와준다고 생색을 내지도 않고, 많이 도와준다고 자랑하지도 않고, 너에게 도와주니 나중에 은혜를 갚으라는 생각도 전혀 없이 도와주었다는 사실도 금방 잊어버리는 그러한 행동을 말한다.
들어 보니 무주상보시는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가끔 ‘내가 전에 너를 이렇게 도와주었는데, 네가 은혜도 모르고 그럴 수가 있니’라는 식의 불만이나 다툼을 본다. 무주상보시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도와주는 그러한 행동이다. 성경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도와주는 일’이 무주상보시가 아닐지? 그렇다면 나는 여기에서도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두 종교의 창시자들은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되, 대가를 바라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도우라는 것을 최고의 실천 덕목으로 가르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의 ‘자비’나 기독교의 ‘사랑’이나 서로 통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자비라는 최종 행동을 이끌어 내고 사랑이라는 최종 행동을 이끌어 내는 과정으로서의 교리나 이론은 다르며, 자비나 사랑을 베푸는 목적은 다를지 모른다. 그러나 일반인의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서는 불교도의 자비 행위나 기독교도의 사랑 행위나 같다고 보면 종교간의 벽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견해일까?
- 계속
첫댓글 선암사는 수원대와 인연이 있습니다. 그전에 KBS 사장을 하시고, 수원대에서 법정대 학장을 하시다가 동명정보대 총장으로 가신 박현태 교수님은 선암사에서 2003년에 지연이라는 법명으로 계를 받아 스님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연스님이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내의 백련사라는 작은 절에 계실 때에 한번 찾아가서 만나 차 한잔을 함께한 추억이 있습니다.
무주상보시라는 말의 설명을 들으니, 총장이 사석에서 모든 교수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당신은 내가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채용했으니, 그 은혜를 결코 잊지 말라.
교협같은 데 얼씬거리면, 그건 배은망덕이다.
이삼십년 전에 채용한 그 은혜를 죽을 때까지 잊지 말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총장은 무주상보시라는 말은 어려워서 모른다고 해도,
"공과 사를 구별하라"는 평범한 말까지 모를까요?
수원대에 10년 이전에 오신 교수님들은 이종욱총장님이 면접을 보시고 채용하였습니다.
인수1은 자기가 뽑아주었다고 아직까지도 은혜니, 배은망덕이니,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하는데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우스운 발상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시다. 교협에 가입하면 어째서 배은망덕이 됩니까?
오히려 교협에 가입하여 침체되어 가는 학교를 개혁하는 일은
고 이종욱 총장님의 건학이념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협에 가입하지 않고서 학교의 명예가 계속해서 추락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이
오히려 고 이종욱 총장님에게 배은망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총장님과 대학원장님은 교수협의회가1987년에 창립되었을 때에 계시던 분들입니다.
그동안 이종욱 총장님의 은혜를 더없이 많이 입은 사람입니다.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요.
지금 현 시점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지 생각해 보십시요.
인수1을 도와서 교협을 분쇄하고 교협대표들을 징계하는 일에 침묵만 하신다면
우리들은 당신들의 침묵을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