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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성령 충만의 7대 조건
Conditions for the Endowment of the Spirit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
우리 아들 크리스토퍼가 갓 십 대가 되었을 무렵, 아들과 함께 전도회를 몇 차례 인도하기 위해 가나로 갔다. 우리 학교는 '쉐어 힘' Share Him 운동에 동참한 첫 번째 학교였고, 서던 삼육대학교에서 가장 홀륭하고 뛰어난 학생 12명을 이끌고 쿠마시 Kumasi 지역의 도시와 인근에 말씀을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그 집회에 축복하셨고, 900명 이상의 영혼이 굴복하여 침례를 받고 남은 무리 교회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마지막 안식일 오후에는 보솜트위 Bosomtwi 호수에서 대규모 침례식이 마련되었다. 방방곡곡에서 자동차, 버스, 자전거, 도보로 수백수천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25명의 목사가 6시간 동안 계속해서 침례식을 집행하였고 3,188명의 영혼이 침례를 받았다. 마치 오순절과 같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벌어진 선악간의 투쟁은 정말 생생했다. 한 젊은 여성이 침례를 받을 차례가 되었을 때 악한 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뻣뻣하게 경직되어 말을 하거나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분명히 거기 있던 목사들은 이런 장면을 전에 본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는 동안, 그중 여섯 명이 그녀를 물속에 잠그고자 하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성공했다. 주 안에서 기쁨에 가득 차고 자유를 되찾은 여인이 물 밖으로 올라왔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흔히 길거리의 아이들이 재미삼아 혹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흑마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이 어려운 일에 닥쳤을 때 죽은 자들과 소통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에는 주물 숭배를 하던 여사제였으나 지금은 주의 종이 된 사람을 만났는데, 낮에 그녀를 찾던 손님의 대부분은 신유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었고, 밤에 찾아오는 대부분의 손님은 능력을 갈구하는 개신교 목사들이었다는 것이었다. 그 목사들은 그녀의 능력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를 찾아왔다고 했다.
서아프리카는 오랫동안 강신술의 그늘에 가려 있었으나 지금은 놀랍게도 서구의 그리스도인들과 유사하다. 오늘날 가나 인구의 거의80퍼센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은 그리스도가 아닌 그분의 원수를 따르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주인이자 주님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거의 없다. 에디깁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참고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된 신을 정하라고 한다면 오락, 레저, 일 혹은 돈 중에 하나라고 말할 것이다. 세속주의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심지어 재림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도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주어진 하루 동안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물보다 예수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부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그들의 애정의 중심에 계시는가? 그들은 아침, 점심, 저녁 매 순간 주님께 이끌리고 있는가? 기독교는 수도 생활이 아니다. 세상과 고립되어서도 안 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관점에서 볼 때, 빛과 소금이지, 재미와 놀이가 아니다. 마 5:13~16
나는 이 장의 틀을 이루기 위하여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님의 채움과 주권에 비추어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는 시작점이 바로 여기이다. 이것이 참된 인생이다. 성경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는 조건과 방해물을 지적하고 있으며, 만일 우리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언제나 원하셨던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언제나 의심했던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자, 시작해 보자. 더 많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일곱 개의 주요 조건으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회개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7~38
회개가 첫 번째 조건이며, 다른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더라도 회개가 없으면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회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성경에서 사용된 이 단어는 “한 사람이 죄에서 하나님께로 근본적이고 도덕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마운스 신구약 단어 사전, 580~581 이것은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하여 우리의 생각을 단순히 바꾸는 것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일반적으로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회개란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행동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떠나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는 8살짜리 아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엄마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그 말의 실제 의미도 모른 채 “모든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베드로 설교의 배경은 분명하다. 그들은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로부터 돌아서는 회개가 필요했다. 행 2:22~23 이것은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믿지 못하는 데서 돌이키는 회개이다. 이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 라고 선포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내가 제1장에서 잠시 언급한 회개의 형태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안목에서 우리는 누구인지 바라보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오래 참으심과 우리의 큰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크신 사랑이 어떠한지 완전한 기초를 놓는 것이다.
성경은 너무 늦게 회개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언제라도 회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못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세상 근심은 무엇인가? 이 근심이란 자신의 삶이 철저하게 망가졌다는 명백한 증거를 가진 사람들이 그 끔직한 결과들, 이를테면 감옥에 간다든가 가족을 잃었다든가 하는 근심이다. 이러한 "회개"는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그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하게 만든다. 에서와 사울은 이런 종류의 회개를 경험했으나, 화평과 용서가 그들에게 이르러 오지 않았다. 히 12:16~17 그들은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성령님을 거절했던 것이다.
성경은 회개할 때 우리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신 품성에 노출되는 것이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롬 2:4
이것이 왜 매일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 그야말로 명령이 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묵상해야 한다. 오직 이것만이 참된 회개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런 사랑과 선하심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이라도 내려놓게 만든다.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팔에 자신을 맡기게 만든다. 자신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을 받을 어떠한 가치도 없다는 것을 온전히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한 사랑 앞에서 그들은 참된 회개를 하고자 하는 강력한 마음이 들고 전적으로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20년 전에 나는 성경책의 안표지에 이 인용문을 끼워 놓았다.
"구주의 다함이 없는 사랑을 바라보는 자는 사상이 향상되고, 마음이 순결하게 되고, 품성이 변화될 것이다. 그는 나아가 세상의 빛이 될 것이며 이 오묘한 사랑을 어느 정도 반사할 것이다." 소망, 661
그 아래에는 이러한 놀라운 경험에 참여하기 원하는 나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기도문이 적혀 있었다.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에 대해 회개한 적이 있는가?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죄를 짓고자 했던 순간마다 구주를 거기에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적이 있는가? 더 이상 자아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행복을 갈망하는 그런 지점에 이르렀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 그리 멀지 않았다.
둘째, 절대적인 신뢰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14
적어도 미국에서는 '믿음' belief 과 '신뢰' trust 가 종종 다르게 쓰인다. 신뢰는 어떤 특정한 확신을 바탕으로 앞으로 움직여 나아가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반면, 믿음은 종종 단순한 지적 동의로 여겨진다. 한밤중에 대형 마트에 가야 한다면, 그 시간에 문이 열려 있다고 믿어야한다. 그러나 그 믿음에 대한 확신은 차를 타고 그곳으로 운전해 가야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운전해서 가는 것이 신뢰하고 있다는 증명이 된다. 즉 신뢰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믿음'은 언제나 신뢰이지 결코 지적 동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 딸이 세 살 적에, 함께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나는 딸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내 어깨 높이쯤 되는 나무둥치에 올려놓았다. 나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나는 손을 앞으로 뻗으며 딸에게 말했다.
"스테파니, 너도 팔을 뻗어 볼래? 뒤를 돌아보지 말고, 무릎을 굽히지 말고 뒤로 누워 보렴. 아빠가 널 잡아 줄께!" 아이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했다. 그 아이는 그것을 너무 좋아해 계속해서 나무로 올라가 다시 뒤로 눕는 놀이를 반복했다. 이것이 신뢰이다.
신뢰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조건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표적이나 기적을 바라본다. 그도 그럴 것이 무엇인가 강력하고 초자연적인 것이 드디어 성령님이 오셨다는 증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을 느낄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신뢰해야 한다. 이 주제에 대해 내가 읽어 본 가장 중요한 구절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천천히 주의 깊게 읽어 보라 읽으면서 "축복은 19세기 감리교인들의 통상적인 표현으로써 신자의 삶에 부어 주시는 성령과 유사하게 쓰인 단어였음을 기억하라. 엘렌 화잇은 이것을 자신의 감리교적 뿌리가 여전히 그녀의 글 속에 보여지던 시기인 삶의 초창기에 기록했다.
"느낌은 믿음이 아니다. 둘은 명확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활용하는 것이나, 유쾌한 느낌과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약속된 축복이 실현되고 느껴지기 전에 그것을 붙잡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간구를 둘째 휘장 안으로 올려 보내고 우리의 믿음이 약속된 축복을 붙잡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주장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 축복을 받는다고 믿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의 믿음이 그것을 이미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믿음이 있다.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믿음, 우리가 그 축복을 실감하기 전이라 할지라도 그 축복을 받는다고 믿는 믿음이 있다. 약속된 축복을 받고 이를 즐기게 될 때에 믿음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성령이 많이 부어질 때에 큰 믿음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능력을 느끼지 못하면 아무런 믿음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믿음을 활용해야 할 때는 바로 이같이 성령의 결핍을 느낄 때이다." 초기, 72
성경에서 다양한 조건을 찾을 때면 나의 삶 속에서 성취될 성령의 약속을 주장하라 예수님께 그분의 성령을 주심에 감사하라. 또한 그분의 사랑, 그분의 능력, 그분의 은혜를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하늘의 배려에 감사하라. 그런 후에 무릎을 펴고 일어나 오늘 하루 예수님의 성령님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신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라. 그런 느낌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셋째, 순종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행 5:32
성경에서 믿음과 순종은 나란히 나온다. 만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분의 계명에 순종할 것이다. 당연히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해 예수님께 순종한다면, 그것은 그분을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알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5~6)
이 순종은 구원받고 축복받을 권리를 얻기 위한 바리새인적인 율법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참된 갈망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수많은 고통과 죄와 슬픔과 실망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마크 핀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주님의 얼굴에 미소를 가져다줄 사람은 누굴까?
무디 Dwight L. Moody 는 10대 후반에 시카고에서 회심하여 수년 동안 미국에서 가장 큰 주일 학교를 이끌었다. 그는 탁월한 사업가였고 수년에 걸쳐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고민은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느냐 마느냐였다. 아일랜드로 가는 여행길에서 그는 영국의 전도자 헨리 바알리 Henry Varley의 말을 들었다. “이 세상은 아직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그를 위해, 그를 통해, 그 안에서, 그에 의해 일하게 될 사람, 곧 그분께 온전히 드린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다." 무디는 잠시 동안 생각한 후 이렇게 서약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그 사람이 될 것이다." 무디는 19세기 후반 동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전도자가 되었다.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님이 주어질 것이다.
넷째, 나눔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누가복음 11장의 이 구절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성령을 받기 위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조건을 포함하고 있다. 제자들은 어느 날 아침 예수님이 "큰 소리로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실물, 140 인간의 귀로 아버지 하나님께 그렇게 강력한 탄원을 아뢰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비록 그들은 때때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의 기도는 결코 어떻게 하는지 배운 적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쳐 주소서" 눅 11:1 라고 요청했다. 그리스도는 주기도문의 한 부분을 반복하셨고, 그 후 한 이야기를 통해 기도 사역의 중요성과 효력에 대해 알려 주셨다. 한 사람이 밤중에 그의 친구 집에 도착했다. 집주인은 손님에게 줄 떡이 없어 이웃에게 떡 세 덩이를 빌려 달라고 한다. 그 이웃은 그가 요청한 대로 그에게 주었을까? 아니면 그의 요청을 묵살했을까? 그 이웃은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7절 아침에 다시 오라고 말했다.
그 당시 "그 땅의 사람들의 집은 방 하나가 2층으로 된 단순한 구조의 주택이었다. 출입문이 하나, 창문이 하나 있었고, 밤에는 강도나 포식동물이 들어올 수 없을 만큼 좁았다. 아래층에는 요리하는 곳이 있었는데, 밤에는 작은 짐승들이 그곳을 차지했다. 위층은 아래층보다 그리 크지 않았으며, 온 가족이 큰 자리 하나를 깔고 모여서 잤다. 문을 잠그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는데 문을 가로지르는 고리에 무거운 막대기를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밤에 일어난다는 것은 집안 전체를 다 깨우는 일이며, 가족들이 누워 있는 위로 걸어가서, 가축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문화에서 친절한 접대는 거의 종교적 의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이웃에게 부탁하기에는 너무 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칠 수 없는 요점은 그 떡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주인이 담대하게 부탁한 것은 여행 온 친구의 배고픔을 채워 주고자 하는 그의 바람에서 기인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자 생명의 떡을 구하는 모든 자에게 내려오실 것이다." 6 증언, 90
이것은 성령 충만을 바라는 우리의 갈망을 평가할 수 있는 훌륭한 척도가 될 수 있다. 왜 우리의 삶에서 성령님을 원하는가? 어떤 사람은 그들의 삶에서 놀랍고 초자연적인 무엇인가를 느끼고자 성령을 원한다. 어떤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 영적인 거인이 되고자 성령의 은사를 소망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위한 부담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 성령님이 충만하기를 간구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비로소 반응하실 수 있는 내적 동기가 최종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의 구원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 만일 내가 그들에게 나의구세주와 그분 안에서 자라남에 관해 알려 주고자 하는 부담이 전혀없다면, 나의 삶 속에 성령님이 오시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성령님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분이시다. 내가 다른 사람의 가장 큰 필요를 무시하면서 어떻게 성령이 내게 주어지겠는가?
1904년, 하나님이 웨일즈 대부흥 운동의 촉매로 사용하셨던 에반로버츠는 이 부담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심판대 앞에 엎드려질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가득 찼다. 나는 흐느꼈다. 나는 영혼 구원에 대해 깊이 명심하게 되었다. 나는구세주를 전하기 위해 웨일즈의 동서남북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이 불타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기꺼이 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마음이 있었다" 브라이언 에드워즈, <부흥, 하나님에 취한 백성〉, 152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부담감이다!
다섯째, 끈질긴 중보
다섯째 조건 역시 성령님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설명하는그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이것이 예수님이 전달하고자 하셨던 핵심 요지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8~10, 13
'간청' 혹은 '끈질김'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신약 성경의 원어의 의미보다는 조금 온순한 표현이다. 원래는 '파렴치' 혹은 '뻔뻔함'이라는 뜻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시는 데 주저함이 없으시다. 문제는 우리가 '아니요'라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문이 열릴 때까지 하나님의 존전을 떠나지 않을 간절함으로 주님을 모실 마음이 있느냐이다. 담대함에 짜증이 나서 퉁명스럽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함께하기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네덜란드인 코리 텐 붐 Corrie ten Boom 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나치로부터 피신시키는 일을 도왔던 그리스도인으로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그녀의 이야기는 <주는 나의 피난처> The Hiding Place 라는 책을 통해 불멸의 작품이 되었다. 전쟁 후에 그녀는 다양한 사역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사역 중에는 공산주의 철의 장막을 넘어 성경과 기독교 문서를 나르던 유명한 <하나님의 밀수꾼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인 동료 앤드루 형제를 돕는 일도 포함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부의 제제와 의심의 눈초리, 수많은 내부 고발자 등으로 그 사역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생명은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을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
모든 문이 닫힌 것처럼 보일 때, 앤드루 형제와 코리 텐 붐 그리고다른 지도자들은 "쉬지 말고 기도" 살전 5:17 하기 위해 함께 모였고, 주님께서 그 상황을 타개하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증인들에 의하면 하나님을 향한 코리 여사의 담대함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주여, 이제는 뭔가 꼭 하셔야 합니다!" 억센 네덜란드 억양으로 그녀는 기도했다.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법정에 선 변호사처럼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 앞에 들이대었다. 정확한 구절을 찾고 그분의 말씀을 바탕으로 논쟁하였다. 하나님도 반응할 수밖에 없으셨다. 자신의 성경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며 그녀는 울부짖었다. “주여, 여기 이 말씀을 직접 읽어 보세요!”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 아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신뢰할 때에만 참으로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히 11:6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설교자요 저자였던 마르틴 로이드 존스 Martin Lloyd-Jones 는 하나님이 기독교 부흥 운동에 사용하셨던 많은 이가 가진 기도의 부담에 관해 저술하였는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와 똑같은 거룩한 담대함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을 하.. **나님께 떠넘기며, 그분이 하신 약속을 간청하는 것이다. 오! 그것이 기도의 참된 비밀이라고 나는 이따금 생각한다. 하나님을 혼자 계시게 하지 말라.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가지고 성가시게 하라.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분께 아뢰라 하나님께 성경을 안용하라. 그렇게 하면 그분이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이 직접 약속하신 것을 붙잡고 탄원하는 것과 그분이 하신 말씀을 그분께 인용하며,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안 하실 수 있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즐겨 들으신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은 즐겁게 된다." 마르틴 로이드 존스 <부홍>, 81
엘렌 화잇은 이 주제에 관해 아주 많이 언급했다. 우리는 이것을 다룰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넘치도록 채워 주시기를 참으로 바란다면,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 구하고 또 구하라 마르지 않는 하늘의 부요함을 위해 계속 간구하라 하나님의 은혜는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미 약속하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우리 편에서 그분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계속 기도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우리 삶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깨닫기 위함이다. 우리의 심령은 끊임없이 설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섯째, 몸 된 성전의 관리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역사를 통해 다양한 철학과 개념들로 인해 종교적인 사람들이나 존경받는 사람들이 인간의 몸이란 단지 쾌락을 위한 것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학파들 The Epicureans 은 사도 시대에 잘 알려진 사람들인데 행 17:18 그들은 최고의 선은 쾌락에 향한 진중한 추구이며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믿었다. 비록 이런 사상이 해롭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또한 그들이 과도함을 경계하는 가르침을 베풀었을지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감정이 들도록 만드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철학의 극단은 쾌락주의의 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뻔뻔하게도 몸을 위한 최상의 쾌락 추구가 최상의 선이라고 가르쳤다. 쾌락주의자들은 이런 이유로 그들 자신을 성적 탐닉에 내어주었다.
오늘날, 인간 개인의 권리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 특히 서양인들은 자신의 몸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동거, 혼외정사, 심지어 인터넷으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악한 표현의 자유에 대해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다. 쾌락이 대세이다. 이런 태도는 신체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이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론을 믿는 신념으로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우리의 몸에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지성과 영성에 깊이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닐 니들리 외 <프루프 포지티브>, 1~9 참고
성경은 우리의 몸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확실하게 가르친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우리 몸에 거하시길 원한다면 우리는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은 또한 세상을 향한 재림교회의 기별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계 14:7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고전 10:31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님은 우리 몸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치신다.
"성령이 신체의 모든 기관에 원기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종들은 가납될 만한 성공적인 봉사를 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감화 아래서 활력은 증가한다." 의료, 12
만일 우리가 성령님을 원한다면, 만일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만들기 원한다면, 간단히 말해 우리의 몸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3 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신체를 마구 사용하면서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때에 먹을 수 없다. 쓰러질 때까지 일함으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에 영향을 끼치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건강하면, 우리의 영혼도 잘될 것이다. 요삼 1:2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성경 구절은 말세에 대해 이렇게 가르친다.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유 1:19 사도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약 4:4~5..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신 6:14~ 15 그렇기에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할 그분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있는 세상에서 자리를 잃게 된다면 하나님은 불쾌히 여기신다. 이것은 영적인 간음을 저지른 것과 같다.
“사람들이 참으로 회심하면 그들의 신체 속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칙을 양심껏 지키며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연약함을 피하고자 할 것이다. 이 법칙들을 순종하는 것은 개인적인 의무로 인식되어야 한다. ・・・우리의 습관과 버릇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추궁에 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세상이 무엇이라 말할까?'가 아니라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몸을 어떻게 관리할까?'가 되어야 한다. ・・・ 모든 사람이 그들에게 실제적인 손해를 끼치는 것에 빠져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살피도록 하라.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건강에 해로운 것을 모두 멀리하도록 하라. 그들의 일상생활이 자연법칙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믿을 뿐 아니라 실천함으로 영혼과 몸을 위하여 생명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가 되는 분위기가 이루어질 것이다." 6 증언, 369~371
일곱째,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려는 갈망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24
이 마지막 요점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다시 살펴봐도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만일 성령의 사역이 "그분의 은혜를 나타내심으로 요 16:14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재현되는 것" 소망, 671 이다. 만일 우리가 몸 된 성전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기를 바라는 열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에 관한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삶 속에 계신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봉사하시는 이유이며 여기 이 땅에서 성령님이 사역하시는 이유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장 그대 안에 계시는 것을 마음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도, 아직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가 전심으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을 늘 알고 계신다. 다시금 시시때때로 무릎 꿇는 시간을 가지라 영원히 그대의 삶에 예수님을 모시고자 하는 갈망을 달라고 단순히 기도하라. 그렇게 될 때가지 기도하라. 마음에서부터 나온 이 진지한 간구를 하나님이 어떻게 들어주시는지 보기 전까지는 어떠한 기적도 일어난 것이 아니다.
나는 제2장에서 <실물교훈> 384쪽을 인용하여 성령님이 우리 안에"그리스도의 본성을 심으시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이타적인 사랑을 주시는 것에 관하여 언급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으로 생기지 않고 "마음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생기게 된다.
여러 해 전에 캘리포니아에서 목회를 할 때, 삶이 완전히 산산조각난 한 여인이 우리 교회에 온 적이 있다. 물 위의 기름처럼, 그녀는 즉시 사람들을 멀리했다. 전에 재림교회를 다녔었지만 줄담배를 피웠고, 뱃사람처럼 말이 거칠었다. 레즈비언인데다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원래 나이보다 스무 살은 더 들어 보였고, 친구도 없었으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살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젊었고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것 외에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불쌍한 영혼을 뚫고 들어가는지 보고자 했다. 결국 나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그 당시, 주님은 나와 아내의 마음속에 매우 중요한 영적 사역을 행하고 계셨으며,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일에 있어 성장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자매가 교회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목사님이나 다른 누구라도 그녀의 집으로 와주기를 요청했다. 급한 일이었다.
도착하고 보니 그 집은 매우 어두웠다. 촛불 한두 개만 희미한 불빛을 내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불을 켜지 말라고 부탁했다. 저음의 저승사자같이 목이 쉰 그녀의 목소리에 내 머리카락은 쭈뼛 서고 말았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이 내가 악한 영을 만난 나의 첫 번째 경험은 아니었지만,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순간이었다. 성경을 주문처럼 읽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요소가 작용한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담배만 피우고 있는 그녀는 말이 거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으나 오히려 나는 그것이 더 감사했다. 구체적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몇 구절을 읽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경멸하며 조롱했다. 나는 질문을 했지만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죄로부터의 용서와 악으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그녀의 마음에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임하시도록 단순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방문은 그렇게 큰 사고 없이 끝나는가 싶었다. 내가 차로 돌아오기전까지는 그랬다. 차에 타자마자, 수문이 활짝 열린 것처럼 울음보가 터졌다. 사탄에게 사로잡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하지만 어찌할바를 모르는 이 가련하고 불쌍한 영혼을 위해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내 생명도 드릴 수 있다고 주님께 말씀드렸다. 30여년 동안 살아오면서 주님을 안 것은 나의 특권이었고 주님은 나에게 그토록 은혜롭고 자비롭고 인내하는 분이셨다. 하지만 이 여인은 죽는 것보다 더 상황이 나빠 보였다. 나는 예수님께 내 생명과 바꾸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기쁨과 그분의 사랑을 그녀에게 홍수처럼 부어주시기를 간구했다.
나는 아들 알렉스의 생명이 위급했던 때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 생명을 기꺼이 바치고자 했던 적이 없었다. 나의 인생의 대부분은 이기심과 자아 중심이 우상이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러므로 그날 내가 그 여인에게 보였던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 롬 5:5 라고 상기시킨다.
그것은 성령님이 함께한 순간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얼마 후, 그녀는 사라졌다. 우리는 다시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아마도 곧 다가올 그날, 우리 모두가 유리 바닷가에 서 있을 때, 우리가 잘 알아보지 못할 한 여인이 다가와 말할 것이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어요. 그리고 나는 오늘 여기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에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 적용과 소그룹 연구를 위한 질문들
1. 정직하게 그대의 삶을 뒤돌아볼 때,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오락, 레저, 일, 돈인가?
2. 이 장을 읽고 회개를 어떻게 정의하겠는가? 회개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3.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 따르면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 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교인들에게도 그것이 가능한가?
4. 느낌과 믿음에 관한 엘렌 화잇의 인용문을 다시 읽어 보라. 그녀의 글은 우리의 삶에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5. 순종은 믿음과 어떻게 다른가? 또한 순종은 믿음과 어떻게 동일한가?
6. 한밤중에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의 비유에서 당신은 무엇을 배웠는가? 그의 경험과 그대의 경험은 어떻게 비슷한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7. 하나님께 간구하는 대신 우리의 유익을 위해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8. 성령님과 관련하여 우리의 몸을 건강하고 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왜중요한가? 이것은 바울의 시대보다 오늘날 더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9.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10. 성령 충만을 위한 일곱 가지 조건 가운데 당신의 삶에서 가장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