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를 빕니다.
전 예수님의 요한 수난 복음을 듣고 묵상나눔을 준비하면서 느낀것은 내가 과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관련된 묵상을 하면서 제 입장에서 봤을때 참 쉽지 않은 주제이고 나눔이다라는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묵상을 준비하면서 요한수난복음을 듣고 떠오르게 된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라는 하나의 "기억"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기억"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여러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서 말과 행동이 다르고 성격도 드러나게 됩니다. 어렸을때의 아픈기억과 상처가 있다면 성인이 된 후에도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삶을 살수있을 것이고 좋은 기억과 추억이 있다면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그 사람에 대한 나쁜기억을 갖고 있으면 오래 같이 있어도 갈등을 겪게 될 것이고 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면 마음을 나눌수 있는 친구가 될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의 말씀을 듣고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바로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 앞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던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만찬때에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처럼 변화되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자녀된 도리로써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는것은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것을 알고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들을 사랑할수가 있는것이고 은혜에 보답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억한다는것은 사랑하는 이유의 시작인 동시에 또한 마지막이 될수가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것을 기억만을 한다고 해서 될것일 아니라 그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 "되새김" 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한계가 있고 잊기 쉽기 때문에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와 입술과 가슴에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례안에서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를 봉헌하고 때에 맞춰 대림 성탄시기와 사순 부활시기를 보내고 또 다시 연중시기를 매해년 계속반복하는 이유가 바로 기억하고 되새기기 위한 영적인 훈련이라고 볼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상안에서도 되새긴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가능하다면 말씀을 필사를 한다거나 외울수 있으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느것이 더 낮다라기 보다는 각자에게 더 잘 맞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말씀을 기억하고 되새기게 될때 "바라보는것"이 달라질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어떤것이 있느냐에 따라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돈벌생각만하고 돈벌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은 사람도 그렇고 눈에 보이는 모든것이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보이게 됩니다. 그반면에 자연 환경과 생태에 관심이 많고 늘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모든것들이 또한 그렇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모든 자연과 피조물을 형제 자매로 보았고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세상과 피조물은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닌 그냥 세상과 피조물일 뿐이지만 성프란치스코의 기억과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기에 그렇게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날인 동시에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고 아름다운 세상을 기억하고 살아가기를 기념하는 날이기도 한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라보는것이 달라질때 예전의 모습과 다른 변화가 이루어진 우리자신을 보게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기억을 하고 되새긴다고해도 우리는 쉽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 전부터 우리가 살아왔던 습관과 무의식중의 기억이 자리잡고 있기에 우리는 각자의 나약함을 안고 살아가야하는 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머리로 기억하고 있는것이 마음으로까지 와닿지 않고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신앙도 영성적 지식과 신학적인 이론도 모두 관념적인것이 되고 입으로만 말하는 신앙생활이 되기도 할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기억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이 겪으신 수난도 죽음도 생각과 기억에만 머무는 관념이 될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도 변화시키실 능력이 있으신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약함을 안고 살아가도록 허락하신 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분의 뜻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으신분으로부터 채워지기를 갈망합니다. 우리가 나약하기 때문에 강함자체이신분으로부터 힘을 얻기를 바라고 우리가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무한함 그자체이신분께 더 다가갈려고 합니다. 나약함을 지니신 인간 예수님께서도 수난과 죽음의 두려움앞에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나약함은 나약함이라서 부정하기 보다는 우리가 하느님을 더 잘 기억하게 하고 더 되새기게하고 더 마음에 간직하게 해주는 영적인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변화되고 성화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질려고 하기 보다는 하느님께 내어맡기고 의탁하는 가운데서 살아가야함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오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늘 기억하고 되새기면서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삶을 살아갈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하며 청하는 성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