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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차맛어때 원문보기 글쓴이: 통찰
언어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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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여, 이미 언급한 그 조건들 말고도 사회를 평화와 화해로 이끄는 또 다른 조건들이 있다. 이것은 대화하는 태도와 방법에 관한 것이다. 첫째,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서둘러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을 해칠뿐더러 의사전달도 제대로 안된다. 그런 사람은 대화에 서툰 사람이다. 세상에는 적절한 대화의 부족으로 생기는 갈등이 많다. “
“스승이시여, 대화가 어려운 이유 가운데는 수없이 많은 방언도 있습니다.” 한 제자가 말했다.
“방언 자체가 갈등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참으로 대화를 원한다면 그가 대화하고자 하는 사람의 말을 배우면 될 것이다.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방언 자체가 아니라 그 방언을 다루는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스승이시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어떻게 대해야 되겠습니까?”
“제자들이여,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이 바리때, 빳따를 어떤 사람은 빠띠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윗타, 또 다른 곳에서는 사라와, 다로빠, 뽀나, 삐실라라고도 한다. 그런데, 보통 ‘그릇’으로 통용되는 이 ‘빳따’라는 단어가 어떤 언어에서는 특정한 용도의 그릇을 지칭하는 말로 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탁발할 때 쓰는 이 그릇을 ‘빳따’라고 부르지만 , 어떤 사람에게는 빳따가 밥지을때 쓰는 솥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물긷는 그릇이거나 밥먹는 그릇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빳따 라는 단어가 오직 이것만을 뜻하며, 나머지는 모두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스승이시여,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여, 인간 갈등의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를 대하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스승이시여, 어떻게 그런 불화와 갈등을 피할 수 있습니까?”
“현명한 사람은 특정 단어의 어원에 집착하지 않고, 언어의 공통성을 너무 확장시켜 해석하지 않는다. 대신. 이 말이 여기서는 이런 뜻으로 사용된다고 알면 그렇게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이것이 곧, 특정 지역의 어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요, 공통어법을 어기지 않는 것이다.”
출가하기 전에 바라문 사제로 전통적인 언어학을 전공한 나이든 제자가 의문을 제기했다.
“스승이시여, 어원학과 문법은 전통적인 언어학의 두 갈래입니다. 일반적으로 어원분석을 통해서 언어의 근본 요소를 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치 존재의 근본요소를 찾아내듯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문법을 통해서는 언어의 근본요소들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이 관계는 곧 가장 넓은 의미의 보편성의 반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전통적인 철학자들의 언어에 관한 이해다. 그것은 실재에 관한 자기들의 개념, 아트만과 브라흐마, 개체와 전체라는 구도에 모순되지 않고 상호 호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실재를 체험한 적이 없다. 따라서 내가 체험한 사실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의 개념은 바라문 전통에 따른 언어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스승이시여, 그것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실로 희유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언어에 어원학과 문법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부디 세존이시여, 우리에게 언어의 본질을 설명하여 주십시오.”
“신중히 들으라, 제자들이여! 언어속에는 분석으로서의 어원학과 종합으로서의 문법만 있는게 아니다. 첫째, 언어속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합의와 관례가 들어 있다. 이 소리, 혹은 이런 저런 소리의 조합, 그리고 이런저런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는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언어는 이렇게 합의에 기초한 것이며, 이 합의는 집단과 사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각각 환경과 요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언어는 정체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고 변화한다. 아마 우리는 지금 우리 조상들보다 훨씬 많은 어휘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언어는 항상 변화의 흐름속에 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용법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란 대화의 수단이지, 성스러운 것으로 신전에 모셔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언어를 pannatti라고 한다. 체험의 표현이란 뜻이다.”
“하지만 스승이시여.”언어학자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 용어는 아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단어가 이전에 없었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래서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언어는 항상 변화의 흐름속에 떠 있는 것’이라고. 이미 있는 용어가 정형화된 의미로 쓰일때, 한 가지의 좁은 의미로 굳어 버렸을 때, 새로운 체험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적절한 용어를 모색하게 된다.
지혜를 표현할 때 사람들은 누구라도 panna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나 내가 보는 지혜는 근본적 실재에 관한, 혹은 절대적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소멸하는 현상에 관한 지식이다. 그래서 언어는 ‘앎’이나 ‘아는 것’이 아니고, ‘알게 해주는 것, 알게 만들어 주는 것, 지시하는 것, pannatti,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표현’으로서의 언어는 실재, 근본, 혹은 절대의 언어가 아니라, '연기(緣起)의 언어'여야 할 것이다.”
<쌍윳따 니까야를 번역한 -혁명가 붓다 .깔루빠나 저, 숨 출판사 중에서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