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가 긴 화살은 급박한 상황에서는 움직임에 제약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자 고구려 군사들은 길이가 짧은 활을 사용하였고 이는 개마무사와 함께 고구려 최고 전략 무기였다. 훗날 거란족은 고구려의 활을 제작하고 사용법을 터득 함으로써, 요나라를 세웠고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칭기스칸의 무사들 역시 고구려인들이 쓰던 맥궁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세계를 평정하게 되었다.
그만큼 고대 전투에서 활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았는데 고구려 역사 자신들만의 차별화된 활을 이용하여 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고구려에서 사용한 맥궁은 물소 뿔로 만드는데 조금씩 불에 달궈 재료를 유연하게 만든 후
180° 완전히 뒤집어 소 침률로 만든 활시위를 건다. 이렇게 만든 활은 엄청난 탄성을 지니게 되며
무려 100m 밖에서도 과녁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위력이 대단 했다고 한다.
어떤 장수는 화살하나로 사람과 안장 말의 몸통까지 뚫었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로 KBS 역사스페셜 팀에서 재현한 실험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만든 방식으로
화살촉을 제작하고 맥궁을 이용하여 화살을 쏜 결과 가야의 판갑을 뚫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활은 직궁 直弓과 만궁彎弓의 두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고구려에서 쓰던 맥궁은 만궁이었다 직궁은 탄력이 뛰어난 나무를 약간 튀게 하여 활시위를 걸어쓰는 일반적인 활로
활을 쏘면 화살이 일직선으로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화살이 직선으로 날아가다보니 목표물을 맞추기는 쉽지만 사거리가 그리 길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비해 만궁은 활이 포물선을 그리며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데 시거리가 긴 반면 목표물을 맞추기가 용이하지 않다. 만국을 이용해 목표물에 정확히 명중시키기 위해서는 사거리에 따라 발사각도, 문력, 장력 등 많은 요인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비록 논리적으로 수식화하거나 과학적으로 증명 하지는 못해도 물리학적으로 그 원리를 파악하고 있어야만 활을 자유자재로 활용 할수 있었는데 고구려는 그러한 원리를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맥궁에는 고구려의 실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고구려는 다른 나라에서 쓰는 활보다 더
먼거리를 날아가면서 보다 강력한 위력을 가진 활을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활을 만들수 있을까 다양한 연구를 하다가 나무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무이상의 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대체 재료를 찾기 위해 고구려인들은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수 없다 실험을 반복하였고 시행착오를 거쳐 무소뿔을 찾아내게 되었다. 하지만 무소뿔이 있다고 해서 당장 활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단계의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만들어 질수 있었는데 고구려인들은 끈질긴 연구와 개발을 통해 최적의 공정을 찾아 낸 것이다.
● 산과 바다, 하늘을 아우른 고구려의 과학기술●
'성 城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수의 성을 쌓은 고구려지만 성을 쌓을 때도
그들의 과학 기술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고대 전투에서는 침략군들이 방어군들의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양한 무기를 동원하였다
투석기와 동차(큰 궤에 바퀴를 달고 그 속에 들어가서 쇠뭉치 같은 것으로 성벽의 하단부를 공격하여 성을 무너 뜨리는 장치) 같이 공성전 攻城 戰'을 위한 무기 들이 개발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6개월 동안 요동성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당나라 역시 1차 침략에서는 안시성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남북조를 통일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공성전 무기들을 가지게 되었고 전투 경험도 풍부했을 수나라 당나라가 고구려의 성을 무너뜨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만큼 고구려의 성 축조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성을 자신들이 가진 천혜의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여 축조되었는데 계곡의 능선이나 골자기의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면서도 방어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지어졌다. 하나의 높은 봉우리를 둘러싼 고로 봉형이 가장 많았고 두 개의 봉오리를 연결하여 만든 말안장형, 정상의 8부 능선을 따라 둘러가며 쌓은 테뫼식 등 여러 형태의 성이 있었다. 이러한 성들은 높이가 9-10m 정도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산성은 지반이 튼튼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 인공지반을 구축하여 성벽이 튼튼하게 견딜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