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문]
[20대 국회 가정폭력처벌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
‘가정 보호’에서 ‘피해자 안전과 인권’ 중심으로!
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가정폭력처벌법,
조속한 개정을 촉구한다
작년 한 해 남성배우자에 의한 살인범죄 피해자, 최소 64명.
이는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을 분석한 최소치에 불과하다. 지난 10월 22일 강서구에서 또 한 명의 여성이 가정폭력으로 이혼한 전 남편에 의해 살해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가정폭력으로 인해 수많은 삶이,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이들의 죽음은 결코 우발적인, 예기치 못한 사고가 아니다. 혼인 관계 내 지속·반복적인 폭력의 연장선에 있으며, 지극히 상습적이고, 선별적이며, 계획적인 범행의 결과이다. 수년 또는 수십 년에 걸쳐 폭력이 수차례 발생하는 동안 국가와 사회는 분명히 폭력을 목격했고, 피해 여성들로부터 구조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폭력을 저지르고도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고, 폭력은 중단되지 않고 피해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유독 가정폭력에 대해 무관심하고, 안일하고, 무능한 국가의 형사사법시스템, 이 참담한 현실은 다름 아닌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가정폭력처벌법)에 근거한다.
‘가정 유지’를 최우선의 목표로 두고, 가정폭력 가해자는 다른 범죄자와 달리 형사처벌을 면제해주는 것. 이것이 20여 년 동안 수차례의 개정에도 공고히 유지되어 온 가정폭력처벌법의 기본값이다.
가정폭력은 ‘부부싸움’, ‘가정불화’가 아닌 사회적 범죄이다. 이토록 당연한 명제를 지난 수십 년간 끝없이 외쳐왔다. 가정폭력 근절을 향한 수많은 외침이 가정폭력의 문제를 한국사회에 가시화시키며, 국가가 가정폭력범죄를 규율하기 위한 별도의 법제를 마련토록 만든 이유는 ‘가정’이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폭력이 정당화되거나 축소, 은폐되며 지속되기 쉽고, 생활상 미치는 영향이 광범위해 개인과 전 사회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정폭력처벌법의 목적과 효과는 가정폭력이 개인의 존엄과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임을 분명하게 확립하는 것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은 제1조(목적) 조항에 분명히 드러나듯, 가정폭력범죄를 가해자 개인의 “성행의 문제”로 규정하고, 다른 범죄와 다르게 “형사처벌이 아닌 보호처분”을 통해 “가정의 평화와 기능을 회복”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어떤 관계보다 생활상 밀접하고, 안전과 신뢰, 책임이 요구되는 관계의 사람에게 폭력범죄를 저지른 자를, 고작 몇 시간의 상담이나 교육, 치료만으로 성행을 교정하여, 폭력으로 점철된 관계를 유지·회복시키겠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는 가정폭력범죄의 현실과 철저히 괴리된 것일뿐더러, 가정폭력을 사적이고 경미한 문제로 바라보는 잘못된 인식과 가정 유지에 대한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신념에 입각한 것이다. 가정폭력을 강화하는 핵심적 요소이자 타개해야 할 대상이 가정폭력처벌법의 핵심이념으로 작동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 결과 1%대에 머무르는 경찰 신고의 높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신고된 가정폭력 사건의 기소율은 10%에도 못 미친다. 가정보호사건으로 송치된 경우에도 45%가량은 보호처분조차 받지 않는다. 보호처분을 받은 경우에도 상담이나 치료위탁, 사회봉사와 수강명령이 대부분이고 이에 대한 관리·감독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가정폭력사건에 대한 사법 집행의 결과는 국가가 가정폭력에 개입할 의지가 없고 피해자의 안전과 인권 보장에 관한 국가의 책무를 방기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우선이니 가정폭력범죄를 처벌할 수 없고, 처벌하지 않는 것이 피해자와 가정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의 실체는 피해자의 심리적이고 경제적으로 취약한 위치를 이용해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피해자가 이혼의 의사가 없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 “처벌은 오히려 보복의 위험성을 높인다”, “가해자가 처벌받으면 피해자와 가정구성원의 생계나 양육에 문제가 생긴다” 등은 가정폭력사건을 형사처벌의 예외대상으로 처리하는 주된 논리이다. 가정폭력범죄에 대한 형사처리 과정에서 피해자나 가정구성원에게 야기될 수 있는 위험은 피해자와 동반가족의 안전과 생활을 보장하는 조치가 강화되어야 하는 이유다. 범죄피해자에 대한 신변안전조치와 주거 및 재정적 지원, 피해자의 민사·가사소송 절차상의 권리 보장 등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범죄를 처벌하지 않을 근거가 될 수 없다. 또한 범죄자의 성행 교정을 위한 처분은 형사처벌과 별도로 또는 병과해서 하면 되는 것이지 처벌을 대신할 문제가 아니며, 철저한 관리·감독과 불이행 시 처벌이 수반되지 않는 한 기대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젠더에 기반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조정이나 화해를 포함한 대안적인 분쟁 해결 절차에 의무적으로 회부되지 않도록 보장하고, 이와 같은 절차의 사용은 엄격하게 규제되어야 하며, 전문적인 팀에 의한 사전 평가를 통해 피해/생존자의 자유롭고 정보에 근거한 동의가 보증된 경우, 그리고 피해/생존자나 그들의 가족들에 대한 추가적인 위험의 지표가 없는 경우에만 허용할 것을 권고한다. 가정폭력 피해자의 의사 확인과 위험성 판단, 범죄에 대한 처분 결정은 과연 이러한 원칙과 절차,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으며, 이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 3월 제8차 심의 최종견해를 통해 가정폭력처벌법을 개정하여, 법률의 목적을 가정폭력 피해자 및 가족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규정할 것, 상담조건부기소유예 폐지와 화해 및 조정 제도의 사용 금지, 가해자에 대한 형사처벌, 접근금지명령 위반 시 체포의무정책 도입 등을 권고했다. 그리고 한국은 이를 이행해야 할 책무가 있다.
‘가정 보호’에서 ‘피해자 안전과 인권’ 중심으로!
가정폭력처벌법은 ‘폭력 가해자와의 가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부터 침해받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법률상 분명히 확립하기 위해 가정폭력처벌법의 목적조항을 비롯해 전면적인 개정이 시급하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가정폭력처벌법 개정법률안은 17개로, 이 중 상당수의 법안이 1)피해자의 안전과 인권 보장을 중심으로 목적조항 수정, 2)가해자 격리 및 체포 의무화 등 사법경찰관리의 현장 조치(응급조치/긴급임시조치/임시조치 등) 강화, 3)상담조건부 기소유예 폐지, 가정보호사건으로의 처리 폐지 또는 제한 등 가정폭력범죄에 대한 형사처벌 원칙 수립, 4)수사·재판절차 상 피해자의 안전과 권리 보장을 위한 제도 강화 등 가정폭력범죄에 대한 분명한 처벌과 피해자의 인권보장을 위한 방안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가정폭력처벌법 개정은 도무지 진척이 없다. 무능력, 무대응, 무책임으로 일관해 온 가정폭력범죄에 대한 국가 형사사법시스템의 전면 쇄신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가정폭력처벌법 개정이 필수적이다. 이에 여기 모인 우리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가정폭력은 ‘부부싸움’, ‘가정불화’ 정도로 치부될 동등한 사인 간의 경미하고 사적인 문제, 개인의 불운이나 우발적인 일탈, 병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존엄과 인권을 침해하는 사회적 범죄다. 우리는 서명운동에 참여한 7천6백여 명의 시민들과 함께 가정폭력처벌법의 조속한 개정을 촉구하며, ‘가정 보호’에서 ‘피해자 안전과 인권’ 중심으로 가정폭력처벌법이 분명하게 개정될 수 있도록 끝까지 싸워나갈 것이다.
2018년 11월 12일
한국여성의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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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실현을위한전국가정폭력상담소연대(준)(16개소),
전국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66개소), 전국이주여성쉼터협의회(32개소),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국회의원 남인순, 권미혁, 박주민, 백혜련, 위성곤, 정춘숙, 표창원
국회 아동·여성·인권정책포럼
첫댓글 피해자의 안전과 인권 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