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영신!......
어렸을 때 내게 그런 소리가 들려오면 가슴이 아팠습니다. 가슴 안쪽
깊숙한 곳으로 찬바람이 한 바퀴 휘돌아나가고, 그 뒤로는 아리아리
하게 저려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도 잘 모르던 때
도 그랬습니다.
병신(病身). 그 말이 곰배팔이라거나 육손이인 사람에게도 붙여지고
팔다리 중 하나가 없는 사람에게도 쓰이는가 하면, 아주 어리숙해서
손해만 보는 사람에게도 붙여진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내가 그런
병신축에 끼지 않는다는 걸 알고 행복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말이 내 주변에서 들려올 때마다 은근히 내 팔다리를 만져보며
달려 있을 곳에 붙어있는 내 사지를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병신이
란 어쨌거나 그 불완전한 갖춤이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순간 더욱더
창피스러워지는 그런 것으로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난 다음입니다. 아마 스무 살 전후의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돈이 생기면 청계천으로 나가 눈에 띄는 대로 헌책을 사들이면서,
시멘트 포대 종이 같은 것으로 모든 책에 별도의 표지를 입히던 당시의
관행대로 책을 싸고 나면 거기에 책제목을 적어야 하는데, 그때 내가
몇 군데에 적어놓은 제목이 병신론(病身論)이었습니다. 아마 철학 분야
의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뒤로도 비슷한 부류의 책들에는 병신론I, 병신론II, ... 하는 식으
로 다른 사람이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표기가 꽤 오랜 동안 계속되었
습니다.
어째서 그랬는지 지금 그 정확한 까닭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학 입학을 전후한 그 당시의 상황으로 추측해보자면 내 자신이 대외용
으로 끌고 다니던 육신에 허점투성이임을 자각한 이후였을 것입니다. 동
무들보다 대학 입학을 앞당기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고 독학에 매달려 있
던 때였는지, 입학에 성공한 연후의 일인지 그 정확한 연대기의 칸막이가
흐릿합니다. 그 만치 내 안팎이 복잡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목표와 실행 사이에 자주 보이는 빈틈, 타인들을 의식한 언행의 허술한
사전 단속, 세속적인 꿈밭 가꾸기에 대한 잦은 후회,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총체적인 반성, 빼곡이 채워지는 일기장을 바라보면 거기서 짙게 피어오르
는 자괴감의 연무(煙霧)......
그러한 심사들을 자학하면서 내게서 보이는 빈틈들을 잊지 말자고 자성
삼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자꾸만 비슷한 실수를 되풀이하는 내 자신이 영
락없는 병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자경문
(自警文) 삼아 적어놓았던 건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즈음부터는 나 또한 병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때문에 병신이라는 말이 반드시 육체적인
결핍상태를 비하하면서 정상인들이 신체적인 장애자들을 짓밟기 위해 사용
하는 언어만은 아니라는 걸 체득하기 시작했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게 되거나 뱉게 될 때, 가슴속이 젖어오면서 아려오는
것은 그때도 여전했습니다. 가슴속에 매어진 줄 하나가 가늘게 떨리곤 했습
니다. 그것은 여전히 아릿한 아픔이었습니다.
*
엊저녁 패럴림픽 (장애자올림픽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군요) 소식을 전
하는 티비 화면은 여러 사람들을 비춰주었습니다.
휠체어를 두 팔로 밀어서 달리는 육상 경기에서 여러 해째 메달을 딴 호주
의 젊은 여인이 그 나라에서 찬사를 받고 있다면서 보여주는 얼굴은 참으로
곱고 맑았습니다. 수영에서 지금까지 혼자서 51개의 메달을 땄다는 미국 여
인은 시각장애자였고, 남자 400미터에 출전한 우리나라 선수는 남은 팔 하나
로 이를 악문 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면들 위로 서른 네 살의 나이로 사격 분야에서 두 개의 금메
달을 딴 고운 얼굴의 김모 선수 모습이 얹혀졌습니다. 어렸을 때 앓은 소아
마비의 장애를 딛고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사람이라는 신문기사를 읽었던 기
억과 함께였습니다.
눈시울이 시큰해진 채 아내와 함께 계속 화면을 지켜보고 있자니, 가슴속
에서 줄 하나가 기어이 티잉 소리를 냈습니다. 그리고는 제법 오랜 떨림으로
이어졌습니다. 내 눈길을 받은 아내는 시선을 돌려 딴 데를 바라보는 척했습
니다.
진행자의 설명은 장애를 극복한 아름다운 모습들이라는 말로 이어지고 있
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요즘 미국 대통령 후보들 같이 언어선택에 몹시 신
경을 써야 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장애자라는 표현으로 써왔던 Handicapped
라는 말 대신 Physically (또는 Mentally) Challenged라고 한다는 게 생각이
났습니다.
육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에 도전하여 극복한 사람들이라는 말이라더군요.
조심하기 위해서 고심해서 써야 할 말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제대로 표
현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화면에서 얼굴을 떼고 나자 조금 전 내 가슴속에서 울리던 줄, 심금(心琴)
의 의미가 또렷해졌습니다.
병신이라는 말로 하자(瑕疵) 있는 타인의 육신을 폭력적으로 학대하는 것이
나, 좁디좁은 곳에 자신을 가둬놓고 영달을 위해 습관적으로 자신을 옥죄고
자학하는 것이나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였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타인과 자신의 불비(不備)를 향해 병신이라는 말을 사용하
면 할수록 바로 그 사람이 못 갖춘 꼴의 삶, 불완전한 삶, 한쪽이 멍들거나
망가진 삶을 엮어가게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드러나지
않거나 감추고만 싶은 그 불완전함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위태롭고
불안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지탱해 나가기에 급급해지니까요.
진짜 병신은 그토록 마음의 눈에 장애가 와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걸,
조금 전의 내 안의 떨림이 일러주고 있었습니다.
못 가진 사람들, 육신의 어느 한 군데가 완벽하지 못한 사람들이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그 속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 그것이 패럴림픽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소리였습니다. 우리들 가슴속
으로 파고들며 철썩이는 감동의 이어달리기였습니다.
온갖 욕심으로 등이 꿰인 채 무엇을 보더라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우리 같
은 청맹과니들에게 그 가슴을 조용히 흔들며 들려주는 무언의 속삭임. 그것은
마음에 병이 든 병신들에게 마음이 온전한 그들이 건네주는 심금의 선물이기
도 했습니다. 오금 저리는 감동이자 채찍이었습니다.
첫댓글 온갖 욕심으로 등이 꿰인 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