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라임열(羅林烈) - 나는 아버지와 함께 울었다
3. 반기는 자 없는 울릉도에서
1 7월 28일 드디어 울릉도 땅에 역사적인 발을 디뎠다. 도동 항구에 몰려와 있는 많은 섬사람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나를 아는 자 없고 반기는 자 없지만 임전무퇴의 비장한 결의를 갖고 그 땅을 밟았다.
2 우선 짐을 맡겨 놓고서 간단하게 기도드리고 거처할 만한 방을 구해 보았지만 주택난이 심한 섬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3일 만에야 육지에 나간 아들이 돌아오면 곧 비워 주어야 한다는 조건 밑에 겨우 작은방 하나를 빌릴 수 있었다.
3 첫날은 어떤 사람의 호의로 그 집에서 유할 수 있었으나 둘째 날은 어느 가게 앞에 놓여 있는 사과 궤짝 두 개를 길이로 잇대어 놓고 하룻밤을 잘 수밖에 없었다.
4 전도를 시작하기에 앞서 원리 선포의 포스터를 붙인 다음 ‘통일의 길’ 전도지와 성경을 갖고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한 집도 빠짐없이 차례대로 호별 방문을 했는데 좁은 울릉도 바닥이라 3, 4일이 지나니 섬 안은 육지에서 어떤 통일교회의 청년이 들어와서 전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고 말았다. 거리를 지나가면 아낙네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얘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5 이 기간에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순보리쌀로만 밥을 짓는 일이었다. 서투른 솜씨에 밥은 밥같이 되지도 않으면서 많은 시간이 아침저녁으로 소비되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그래서 미숫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간단하게 물에 타서 마실까도 생각했으나 쇠약한 몸을 가지고서는 전도하기 어려울 것 같아 시간이 걸리더라도 밥을 지어 먹기로 했다.
6 식사시간 이외엔 말씀을 받을 대상을 찾아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 당시의 울릉도 인구는 1만 7천여 명인데 교회는 33개소나 되고 있으니 인구 밀도로 본 교회 분포율은 단연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할만하였다.
7 찾아가는 집마다 천주교인, 장로교인, 침례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첫마디로 냉대하기도 하고 그 밖의 대부분은 경계하는 태도였다. 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가정 방문 때에 약속한 사람들도 밤에 기다리고 있어도 오지 않았다. 날짜는 끊임없이 지나가니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8 여기에서 인간적인 노력만 갖고는 전도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하늘 앞에 간곡한 기도의 정성을 쌓으면서 활동할 것을 결심하였다. 조식을 간단히 마치고 의복을 단정히 한 다음 ‘통일의 길’ 전도지와 성경을 앞에 놓고서 평균 20분 이상 30분가량 하늘 앞에 간곡한 기도를 드렸다.
9 이 시간은 기도하는 나만 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도 함께 울고 계시는 것을 수없이 체험하였다. 때로는 엄숙한 기도 시간이라기보다 하늘을 붙들고 몸부림치는 처절한 시간이라 해야 적절할 것이었다. 하나님 아버지와 참부모님의 억울하고 원통한 역사를 생각하며 뼈와 살을 파고드는 고통을 느끼면서 손수건과 무릎이 젖도록 아들과 아버지는 함께 울었다.
10 귀한 새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섬사람들의 무지와 불신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떤 때는 가정 방문을 하고서 말씀을 전하려 하다가 눈물이 나고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얼마 동안 돌아서서 마음을 진정한 다음에야 말씀을 전한 적도 있었다.
11 섬에 들어온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난 8월 12일이었다. 이날도 평시와 다름없이 혼자서 가정 방문을 나섰다. 차례대로 방문하던 중 한 양약방에 들어가서 주인을 찾으니 40대 중반을 넘어섰을까 말까 한 정숙한 부인이 웃음 띤 얼굴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12 나는 “통일교회에서 전도를 나온 사람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니까 방 안에 앉아 있던 어떤 할머니가 “이분은 권사님인데 지금은 어떤 교회도 나가지 않습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13 순간 나의 마음속으로 교회를 나가는 권사라 해도 전도를 할 판인데 필시 하늘에서 나에게 인연 지어 주시는 분임을 느끼고 용기 있게 방으로 들어 가서 전후편 원리에서 중요하게 인용되는 몇 개의 성구를 찾아보도록 하면서 “이 뜻을 알고 계십니까” 하고 물어보았을 때 크게 놀라는 표정을 하고 성경을 많이 보았지만 이런 성구는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원리의 일부를 성구에 첨가해서 설명하니까 대단히 호기심을 갖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14 뒤에 가서 안 일이지만 이분은 울릉도에서 10여 년간 부인 회장직을 맡았고 조산원으로서 약방을 경영하면서 장로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울릉도에서는 여성으로서 대표적인 유지의 한 분이었다. 나는 이 권사를 만나 본 후 비로소 사람다운 분을 만난 기쁨과 하늘이 예비해 두신 이를 찾게 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다.
15 이날부터 나는 열흘간을 빠짐없이 권사 댁을 찾아가서 말씀을 들어보도록 얘기하였으나 반갑게 대하면서도 선뜻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무렵 권사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도동의 장로교회가 둘로 갈라진 것을 통합하기 위하여 어느 한 쪽에도 가담치 않고 가정에서 기도만 하고 있는 중이었다.
16 이러한 실정에서 통일교회를 믿는다면 교회 통합은커녕 교회가 하나 더 서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점에서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그 권사를 만난 지도 열이틀이 지난 8월 24일이 되는 아침, 그 집으로 향하기 전에 울릉도의 도동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앞산 중턱의 한 노송나무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17 울릉도의 시가지를 굽어보면서 2천년 전의 예수님의 심정과 선생님의 노정을 생각하였다. 부분적인 진리를 갖고서도 이렇게 많은 교회를 울릉도에 세웠는데 근본적인 원리 말씀을 갖고 들어와서 하늘 앞에 보고드릴 눈에 보이는 실적을 세우지 못한 부족함을 뉘우치고 하늘 앞에 뜨거운 눈물을 삼켜 가면서 통사정의 기도를 하였다.
18 얼마를 울면서 기도를 드렸는지 나중에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니 마치 물속에서 눈을 뜬 것처럼 물체의 윤곽이나 색의 분별이 안 되었다. 나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가누면서 나뭇가지를 잡고 산 아래로 내려와서 무의식중에 권사 댁을 찾아갔다.
19 나는 “권사님, 오늘은 꼭 우리 원리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정성을 다한 애소의 표현이라고 보아야겠다. 간밤의 몽시에는 처음으로 선생님과 옥세현 할머니를 뵈어서 오늘은 한 매듭을 짓고 넘어가는 날이 될 것을 바랐지만 오늘도 확답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통곡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한참만에야 그 권사는 “그러면 말씀을 들어 볼까요”라고 하면서 방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20 나는 그 부인으로 하여금 성구를 찾아보게 하면서 백지에다가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을 강의하였는데 시종 긴장된 자세에서 감탄 속에 말씀을 받는 것이었다.
21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으로 예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으로 초래한 억울한 죽음이었음을 듣고 수십 년 기독교 신앙생활 중에 새로운 깨달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강의한 나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말씀은 고교 3년인 장남과 함께 은혜스럽게 들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아주!!!
댓글 달아 주시니 망극하옵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