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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해주신 작은 청현스님 감사합니다.
우 떼자니아 사야도 140309
수행하는 마음이 법답게 되어야 합니다.
선법의 마음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바와나라는 것은 키워나가는 것, 길러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띠파타나 수행이라는 것은 사띠를 선두로 담마의 힘을 키워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키워나간다는 것은 계속해서 일어나도록, 길러나가는 의미를 말합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오랜 시간 일어나도록 하는 것을
길러나가는 것을,
키워나간다,
수행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마음들이 일어나도록,
좋은 마음들이 일어날 기회를 허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수행해야 합니다.
매 순간순간 마음 속에 사띠, 사마디, 지혜가 생겨날 기회를 허용하는 것,
일어나도록 매 순간순간 노력하는 것을 수행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대상의 일이 아니고 마음의 일, 신구의 삼업 중에서 마음의 일입니다.
몸이 하는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는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 쪽과 대상 쪽 두 가지 측면에 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대상 쪽이라는 것은 경험되어지는 쪽, 체험되어지는 쪽을 말합니다.
대상이 수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의 이치에 따라서 이미 저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 육문을 통해서 여섯 가지 대상은 항상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한다는 것은 이 대상들을 이용해서 마음 쪽에 사띠, 사마디,
지혜를 키워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지 다 같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이 대상은 법이고 저 대상이 법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대상이 더 좋다. 저 대상이 더 좋다라고 고정관념 지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지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생각할 뿐인 것입니다.
사실은 그 어떤 대상이든지 더 좋은 대상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전부 다 같습니다.
대상이라는 것은 오직 알아차려지는 성질, 그 한가지 의미뿐입니다.
대상은 좋고 싫음이 없습니다.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대상은 대상일 뿐입니다.
그 대상을 이용해서 마음 속에 사띠, 사마디, 지혜가 생겨나도록 하느냐,
아니면 그 대상을 이용해서 번뇌가 생겨나도록 하느냐 그 두 가지 뿐입니다.
수행을 하고 있다면,
수행을 한다면,
그 대상을 이용해서 사띠, 사마디, 지혜가 생겨나도록 할 것이고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 대상을 이용해서 번뇌가 생겨나도록 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원인으로 번뇌가 생겨나고
들리는 것을 원인으로 번뇌가 생겨난다면
그것은 법다운 수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겨나는 번뇌들을 키워나가는 것도 번뇌를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일으키도록 하는 것,
반복해서 길러나는 것,
그것은 다 뭔가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대상을 원인으로 해서
마음 속에 사띠, 사마디, 지혜를 키워나갈 때 그 때 수행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보이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같은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해서 수행하는 분들은 사띠, 사마디, 지혜가 생겨납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해서 번뇌가 생겨납니다.
그 두 가지 차이점이 무엇이냐면 바로 요니소 마나시카라,
올바른 마음가짐, 또는 지혜로운 고찰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마음가짐, 견해를 바로 하는 것도
보고들은 정보가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부처님께서 문혜,사혜,수혜 세가지 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세가지 지혜 중에서 문혜, 보고 들은 정보에서부터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보고 들은 것이 없다면 바르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바르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르게 수행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 보고들은 정보 역시 바른 정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른 정보를 들어두었을 때 바르게 생각할 줄 알고 바르게 할 줄 알게 됩니다.
사람은 이 들은 것, 그리고 자기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자기가 들은 대로 자기가 아는 대로 하게 됩니다.
그냥 이 정도로만 알게 되면 이 정도로 밖에는 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더 많이 알게 되면 더 많이 할 줄 알게 됩니다.
그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 바른 생각을 팔정도의 첫머리에 두셨습니다.
견해가 바를 때 생각하는 것이 바릅니다.
생각하는 것이 바르게 되었을 때 바르게 노력하게 되고 바른 알아차림을 하게 됩니다.
그 외 나머지 것들도 바르게 됩니다.
사람들이 말로는 항상 팔정도를 키워간다고 말들은 합니다.
팔정도를 실천한다고 말로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하는 것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올 때부터 잘못된 견해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일 때마다 보이는 것을 통해서 번뇌를 일으키게 됩니다.
선법이 되는 원인은 요니소 마나시카라, 올바른 마음가짐, 지혜로운 고찰에서 시작합니다.
불선법이 되는 원인은 아요니소 마나시카라, 바르지 못한 마음가짐, 지혜롭지 못한 고찰에서 시작합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알지 못하게 됩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에 바르게 알 줄 모르기 때문에 번뇌가 생겨나게 됩니다.
견해가 바를 때 마음가짐이 바르게 됩니다.
마음가짐이 바를 때 선법이 됩니다.
대상이 주요점이 아닙니다.
대상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바깥에서는 대상을 문제삼습니다.
대상을 통해서 번뇌를 일으키곤 합니다.
대상이 너무 많아서 내지는 저 대상 때문에 이 대상 때문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대상 탓을 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마음의 질이 나빠지는 것이 정말 대상 때문입니까?
스스로 바르게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견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번뇌의 마음은 빤?띠, 즉 개념을 대상으로 합니다.
위빠사나의 지혜는 근본이치, 실재하는 법 즉 빠라맛타를 대상으로 합니다.
자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까?
덥고, 서늘하고, 딱딱하고, 부드럽고, 이러한 것들을 지금 알 수 있습니다.
근데 어떤 사람들은 더운 것을 알게 되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늘한 것, 추운 것을 느끼게 되면 싫어합니다.
그렇다면 그 때 그 사람은 덥고 서늘한 걸 알 때 덥고 서늘한 것을 아는 것이 과연 법입니까?
어떤 사람은 아픈 것을 알게 되면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려운 것을 싫어합니다.
덥고 서늘한 것, 덥고 추운 것을 아는 것이 빠라맛타, 즉 실재하는 법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더우면 짜증이 납니다.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견해와 바르지 못한 마음가짐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통해서 번뇌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기억해두십시오.
잘못된 견해는 항상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잘못된 견해가 자연적인 성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고자 한다면 먼저 바른 견해에 대해서 생각해줘야 합니다.
바른 견해를 먼저 적용해줘야 합니다.
마음가짐을 먼저 바꾸어 줘야 합니다.
그렇게 바른 쪽으로 바꿔줘야지 만이 바른 수행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게 됩니다.
법다운 앎이 있어야 합니다.
대상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앎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어떤 젊은 친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덥고 서늘한 것을 알면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코.
덥고 추움 서늘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덥고 서늘한 것에 대해서 견해가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바른 앎, 바른 견해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덥고 서늘한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자 지금 누군가가 지나갈 때 사람이 지나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안다고 해서 법다운 앎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까요?
근본이치, 실재하는 법, 빠라맛타에 대해서 알았을 때 법다운 앎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보이는 것을 앎으로써 들리는 것을 앎으로써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줄 아는 것을 통해서 들리는 줄 아는 것을 통해서 사람이 지나간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것이 바로 수행자의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념을 통해서 빤?띠만을 보면서 아는 것은 그것은 수행자의 앎, 법다운 앎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처음 수행하는 분들도 덥고 서늘한 것, 딱딱하고 부드러운 것에 대해서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을 아는 것으로 근본이치, 빠라맛타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해주셔야 합니다.
덥고 서늘한 것은 그냥 자연적인 이치다.
법의 이치다라고 생각해주셔야 합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이치지 사람이나 중생이 아닙니다.
원인이 있어서 생겨날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주고 나서 관찰하여야 합니다.
다리에 통증이 생기게 되면 사람들은 아 나의 다리가 아프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통증이 사라지고 났을 때 다리까지 사라집니까?
그렇다면 다리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나의 다리가 아프다고 생각하게 되면 나라는 것도 개념이고 다리라는 것도 개념입니다.
아픔 그 통증만이 이치가 됩니다.
실재하는 이치입니다.
그 통증이라는 것은 원인이 갖추어 졌을 때 생겨났다가 원인이 사라지게 되면 통증도 같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 것을 바로 이치라고, 근본이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모양도 없고 만질 수 있는 형체도 없습니다.
사람이나 중생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 주었을 때 근본이치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생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선 생각으로 이해해야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이해했을 때 정말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많이 많이 살펴봐야 합니다.
수행을 좀 하셔야 합니다.
그냥 보고 들어서 아는 것과 실제 수행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많이 다릅니다.
보고 들은 것을 자신의 수행 속에 적용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수행체험을 통해서 이해했을 때 그 때 비로서 이해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자연적인 이치일 뿐이다라고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려고도 않고 없애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랬을 때 사마디가 생깁니다.
위빳사나 사마디는 지혜로 인해서 생깁니다.
그것은 카니카 사마디, 순간 사마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집중을 통해서 생기는 사마디가 아닙니다.
집중해서 생기는 사마디는 눈을 뜨게 되면 깨지게 됩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깨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집중해서 생기는 사마디는 하나의 대상을 취해서 그 대상에게만 집중해야 사마디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두가지, 세가지 대상을 취하게 되면 사마디가 깨지게 됩니다.
그것은 사마타 사마디입니다.
위빠사나 사마디는 많은 대상과 관계하게 됩니다.
위빠사나 사마디는 지혜 때문에, 견해가 바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집중하기 때문에 사마디가 생긴다고 여깁니다.
사마디라는 것은 선법의 마음입니다.
요니소 마나시카라, 즉 고찰하는 것이 바르게 되었을 때 사마디가 생기게 됩니다.
그 사마디에는 로바도 들어가 있지 않고 도사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고요합니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서 생기게 되는 사마디는 원하는 것이 있고
되게 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상만 취하고 나머지 대상은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위빠사나 사마디는 여러 가지 많은 대상과 관계합니다.
모든 대상을 다 알아야 하고 다 이해해야 합니다.
알 수 있는 만큼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가지만 안다면 앎이 충분해지지 않습니다.
시야가 넓을 때 앎의 지혜가 충분해집니다.
시야가 넓을 때 바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너무 집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집중하지 말고 억제하지 말고 통제하지 말고 억누르지 말고 만들어서 보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다 로바가 시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게 하고 싶어하는 것은 많은 힘이 들어갑니다.
만족스럽지 못하게 되면 많은 힘을 씁니다.
제대로 알지 못해도 그냥 무조건 힘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바깥에 삶 속에서는 번뇌도 많은 힘을 쓰게 합니다.
로바의 특징은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에너지, 많은 힘을 쏟게 합니다.
번뇌는 대상을 움켜지고서 그 대상에 대해서 느낍니다. 즐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집중을 한다하면 그 안에는 번뇌가 들어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그 안에 번뇌가 들어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수행하는 마음에 번뇌가 들어있는지 아닌지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하기는 하지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가 스스로 아셔야 합니다.
어떻게 했을 때 어떻게 되어진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수행하는 쪽 마음이 일하는 쪽에 대해서는 흔히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일어나는 쪽 현상이 생겨나는 쪽에만 집중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상 쪽에 몰입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번뇌의 특징은 몰입합니다.
뭔가 특정한 주 대상을 두시고 싶다면 주 대상을 두셔도 됩니다.
그냥 분명하게 느껴지는 어떤 대상을 주 대상으로 두고 시작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고요해 진다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다른 대상을 함께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마음이 자연스럽게 사띠, 사마디, 지혜의 힘이 조금씩 좋아져서 다른 여러 대상을 함께 아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달아났다 마음이 방황한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은 사띠가 더 좋아진 것입니다.
들숨날숨도 알고 생각하는 줄도 알고 들리는 것도 안다면 그것은 사띠가 더 좋아진 것입니다.
더 많은 대상을 알아진 것입니다.
아는 힘이 더 좋아진 것입니다.
지금 않아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알기 위해서 노력하십니까?
생겨나는 것이 사라지도록 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겨나도록 할 필요도 없습니다.
생겨나도록, 사라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겨나는 것마다 사라지는 것마다 단지 잊지 않으면 됩니다.
생겨날 때마다 사라질 때마다 생겨나는 줄 사라지는 줄 사실 그대로 알고만 있으면 됩니다.
그냥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십시오.
알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좋게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나쁘게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생겨나는대로 알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좋든지 나쁘든지 상관없습니다.
좋든지 나쁘든지 다 자연의 이치다 라고 생각해줘야 합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다 법의 자연적인 현상이다라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여러분들이 마음에 기억해두었습니다.
이미 이해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선법도 법이고 불선법도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이치를 말합니다.
이치를 이치로만 받아들이십시오.
이치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을 말합니다.
알기 위해 노력하셔야 합니다.
한번 생각을 하고 한번 알아차림을 하면 한번 알아차림한 것입니다.
열번 생각하고 열번 생각한 것을 알았다면 열번의 알아차림이 생긴 것입니다.
백번 생각하고 백번을 알았다면 백번동안 알아차림이 이어진 것입니다.
만약에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만약에 생각 속에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모르고 있지만 않는다면 생각할 때마다 알아차린다면 생각을 통해서 점점 더 사띠의 힘이 좋아지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게 되면 생각을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생각할 때마다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생각은 대상일 뿐입니다.
생각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은 마음이라는 법입니다.
마음의 법은 알아차려야 할 것일 뿐입니다.
생각을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란 무엇입니까?
생각이 바로 마음이라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없애야 할 법이 아닙니다.
처음 수행하는 분들은 생각의 내용을 대상으로 관찰하지는 마십시오.
그냥 단지 생각이 일어났구나하는 정도로만 알아차리십시오.
생각이 생겨나는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고 생겨나는 줄 알고 알다보면 생각이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하실 겁니다.
생각을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마음이라고 이해하게 되면 생각 속에 더 이상 빠져들지 않게 됩니다.
생각할 때마다 사띠, 사마디, 지혜가 점점 더 좋아지게 됩니다.
알기 위해 노력하셔야 합니다.
얼마나 나쁜 마음들이 생겨나는지 알고 있다면 기뻐하셔야 합니다.
아는 것이 곧 선법입니다.
선법 중에서 가장 큰 선법은 지혜의 선법입니다.
지혜의 선업입니다.
번뇌를 통해서 선업이 되도록 선법이 생겨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번뇌를 대상으로 알아차림이 있게 되면. 지혜가 있는 사람은 가능합니다.
보고 들은 정보가 있는 사람은 번뇌를 알아차림으로써 선법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로바의 마음이 있으면 로바가 있으면 로바가 있는 줄 알아라라고 하셧습니다.
알라고만 하셨습니다.
알아차리라고만 하셨습니다.
도사가 있으면 도사가 이는 줄 알아라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인지하라고만 하셨습니다.
왜 알아차림하십니까?
왜 알아야 합니까?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알고자 해서 알아차림 하셔야 합니다.
사띠는 두 가지 일을 합니다.
한가지는 상황, 정보, 데이터를 모으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키워나가는 그 일을 이어나가게 하는 그 일을 또 합니다.
사띠가 생겨날 때마다 사띠를 더 키워나가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정보에서 데이터가 충분하게 갖추어지게 되면 앎의 지혜가 생겨나게 됩니다.
로바란 무엇인가 도사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차림하는 것입니다.
알때마다 모른다는 것을 없앱니다.
한번 알때마다 한번 알때마다 모르는 모하를 제거하는 것이 됩니다.
안다는 것은 대상을 아는 것도 포함되고
앎의 지혜로써 아는 것도 포함됩니다.
처음에는 대상을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지혜의 앎, 이해하는 앎이 생기게 됩니다.
안다는 것의 의미는 아주 폭이 넓습니다.
처음에는 생겨날 때마다 생겨날 때마다 아셔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점점 조금씩 이해하게 되십니다.
이해하기 위해서 알기 위해서 알아차림 하셔야 합니다.
생겨나고 싶은 것은 생겨 나라하는 마음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다 자신과 상관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과거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입니다.
안 좋은 것을 보게 되는 것도, 결과로써 주어지는 과보일 뿐이고
좋은 것을 보는 것도 결과로써 주어지는 과보일 뿐입니다.
안좋은 것을 듣게 되는 것도 결과로써 주어지는 과보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겨나고 싶은대로 생겨나라
생겨나는 모든 것은 다 자신과 상관이 없다.
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견해를 바르게 하고 사띠가 있도록 하고 이 있는 사띠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 이 세가지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자의 의무이자 수행자가 해야할 일입니다.
수행자의 일은 견해를 바르게 하고 사띠가 있도록 하고 이미 있는 사띠를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노력하는 그것뿐입니다.
사야도 께서 원하는 위리야, 노력은 지속적으로 되도록 하는 것 그것입니다.
너무 힘을 쓰는 너무 지나치게 애를 쓰는 위리야 지나치게 애를 쓰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지속하는 노력에 대해서는 사야도께서 자주 말씀하신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는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했을 때 사람이 하는 수행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담마의 가속도가 붙게되게 때문입니다.
사야도께서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담마의 힘을 원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수행하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담마가 일을 하게 될 때 아나따 즉 무아의 이치가 무아의 힘이 강해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이 애를 써서 수행하게 되면 아 내가 하고 있다 내가 수행하고 있다는 개념이 작용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가속도가 붙게 되면 사람이 의도적으로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힘을 쓰거나 애를 쓸 필요없이 이미 있게됩니다.
그것의 이치대로 그것의 가속도대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것의 가속도에 의해서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때는 더 이상 사람이 하는 수행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성품이 수행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무아의 이치가 작용하게 됩니다.
위빠사나의 힘이 더 좋아지게 됩니다.
지속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매 순간순간 매 순간순간 매 시간시간 지속적으로 노력했을 때 가속도가 붙게 됩니다.
수행하는 시간은 새벽에 잠에서 깨는 시간부터 밤에 자는 순간까지 매 순간순간이 수행해야 하는 시간이라고 이미 말을 해 두었습니다.
그냥 앉아있고 서고 걸어가는 것은 그 상황에 따라서 몸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앉아있더라도 알아야 하고 걷더라도 알아야 합니다.
가고 있더라도 알고 있어야 하고 먹고 있더라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손이 움직이는 것도 알아야 하고 발이 움직이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눈을 깜박이는 그 동작마저도 알아야 합니다.
알고 있다면 좋습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보일 때마다 들릴 때마다 냄새가 맡아질 때마다 맛이 생겨날 때마다 아셔야 합니다.
마다라는 것의 의미를 사야도께서 그냥 사용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루에 몇번을 보십니까?
몇번을 아십니까?
몇번을 보고 있고 몇번을 보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관찰하고 싶은 것만 관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알아야 할 법은 많습니다.
온몸에서 전체적으로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섯까지 대상에 대해서 다 알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온몸의 감촉, 마음이 일하는 것에 대해서 여섯 가지 전체에 대해서 알 수 있다면 좋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은 알 수 있는 만큼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차츰차츰 아는 것이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들을 점점 더 많이 알아지게 될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노력하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하십시오.
관심을 가지고 흥미를 가지고 수행하십시오.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관심이 있고 흥미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하십시오.
첫댓글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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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_()_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사두..사두..사두..